2012. 3. 22. 21:09ㆍ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중국 정치의 풍운아 보시라이(薄熙來·63)는 정치적으로 몰락했지만 충칭(重慶)시 서기로 4년간 보여준 정책은 인상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성장의 그늘을 치유하려 적극 개입한 점은 중국과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농 균형 발전을 추구하고 빈부격차를 줄이려는 그의 집념을 한국의 유력 정치인들도 오래전부터 주목해 왔다.
대중 선동적이고 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초법적 권한을 휘두른 부작용도 교훈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보시라이는 성장론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부친 보이보(薄一波) 전 국무원 부총리는 덩샤오핑(鄧小平)과 가까운 혁명 원로로 장쩌민(江澤民) 체제 수립에 공을 세웠다.
중국 정치에서 상하이방(上海幇)과 태자당(太子黨) 인사들은 중국의 동남해안 지역에서 서기나 성장을 지낸 공통점이 있다.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에 따라 부유해질 수 있는 지역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상하이방 대표주자였던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서기는 “해가 떠오르면 동쪽을 먼저 비출 수밖에 없다.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비추지는 않는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보시라이가 한때 상하이시 서기를 탐낸 것도 향후 정치적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보시라이가 2007년 말 상대적으로 분배를 중시하는 공산주의청년단 세력이 주름잡던 충칭으로 간 것은 이례적이었다.
공청단은 자수성가형이 많고 내륙이나 서부에서 일한 인물들이 많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신좌파의 기수로 떠오름과 동시에 놀랄 만한 경제성적표를 보여줬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난해 충칭의 성장률은 16.4%로 톈진(天津)과 함께 중국의 성·시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해외투자 유치에도 전력을 기울여 휴렛패커드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충칭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을 안다는 점에서 구(舊)좌파와 달랐으며, 그의 이념은 차기 통치 이념으로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문화대혁명 시기 열렬한 홍위병으로 활동한 그의 전력은 아킬레스건이었던 것 같다.
절제되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중국 지도부는 보시라이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을 법하다.
보시라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다.
인터넷에는 “그는 농촌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달걀과 우유를 줬으며 도시와 똑같은 의료보험 혜택을 줬다.
나는 그가 그립다”는 반응이 나온다.
중국의 지니계수는 0.5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될 만큼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보시라이의 여운은 의외로 길게 남을 수도 있다.
랑셴핑(郞咸平) 홍콩 중문대 석좌교수는 충칭시가 보여준 저소득층에 대한 공공임대주택 확대 정책을 중국의 부동산 버블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까지 평가했다.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지 않고 수익을 재정으로 삼아 복지 투자를 늘리고 민간기업의 활력을 북돋운 점도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3대 정치 계파가 성장이나 분배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노선 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보시라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선별적으로 그의 정책을 흡수해 체제 안정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지난해 4월에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7월에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11월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이 각각 충칭을 찾았다.
시진핑 부주석은 손 전 대표에게 “보통 외지인이 오면 상하이를 보겠다고 하는데 서부를 보겠다는 것은 탁견이 높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한국에서 지한파인 보시라이의 낙마를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불어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우려했던 그의 생각도 음미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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