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17:53ㆍ미술/한국화 현대그림
이 책은 한 귀절에 그림 하나씩, 그렇게 50개쯤 실은,
얄팍하지만 폼나게 만든 책입니다.
책이 큰 게 흠인데, 여행갈 때 가져가면 좋갰습니다.
여기 한 장의 묵화(墨畵)가 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진 메기 한 마리. 세상사에 초연한 듯 무표정한 얼굴에서 언뜻 근심이 엿보인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건만 응집된 기(氣)와 강한 생명력이 물씬하다. 붓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 잠시 멈춘 숨을, 그대로 그림에 불어넣은 이는 누구인가. 그림 옆에 짤막하게 적혀있는 ‘작가노트’에서 주인공을 짐작해보자. “장마철에 모든 나무들이 약간씩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빗소리를 듣게 되지요. 사실 행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정하고 갈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노력 여하에 따라 오는 속도만 달라질 뿐.” 비 맞은 나무의 모습을 우울하다 느끼는 ‘감수성’, 세상일에 달관한 ‘도인’처럼 담담한 어조. 몇몇 눈치 빠른 독자는 이쯤에서 답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나로 묶어 내린 긴 머리, 콧수염, 흰색 옷을 고수하며 외양에서부터 도인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작가 이외수가 그림을 그린장본인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필력으로, 세상을 글에 담아내던 그가 그림으로 영역을 옮겨왔다. 선화집 <숨결>(솔과학.2006)을 통해서다. 시인 배문성은 책의 서문에서 “이외수의 작가 정신이 한 점 일갈로 요약된다면 바로 그의 그림을 통해서일 것”이라며 “그는 많은 장편소설로 자신의 세계를 말해 왔지만 기실 그가 그 많은 글에서 하고자 했던 말도 바로 이 한 마리 메기의 짧은 순간에 다 담길지 않을까 싶을 정도”라고 말한다.
무엇이 불만인지 고개를 돌려버린 ‘까칠한’ 표정의 새와 ‘야리야리한’ 줄기가 불면 날아갈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코스모스.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림 속 사물들은 이외수의 소설과 맞닿아 있다. 그의 처녀작 <꿈꾸는 식물>(해냄. 2005)을 떠올려보라. 문학평론가 김현이 “너무나 심하게 나를 고문한다”고 평한 작품은 엉덩이에 난 종기처럼 독자가 감추고 싶은 치부를 까발리고, 낱낱이 파헤쳤다. 있는 그대로를 가감없이 보여주기는 글이나 그림이나 마찬가지인 셈.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림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롭다. 검은 먹칠에 자리를 내주고 남은 하얀 화선지의 ‘여백’이 독자에게 평온함을 안겨주는 것. 이외수의 그림은 그가 써온 소설처럼 아프지만, 그보단 ‘행복한 통증’이다. |
|
배문성 시인은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다. 한 숨의 호흡과 한 번의 붓질이 가해질 때마다 마음과 붓과 먹과 종이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의 형태를 낳는다."라고 이외수님이 보여주는 한 찰나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다.
|
|
|
작가노트 1
그대 가슴에서 지워진 사랑, 지나간 날들은 모두 전생이지요.
작가노트 3
나는 이제 도시의 치열한 생존법을 모두 버리고 빗소리 속에 기억을 해체한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을 해보아도 인생은 결국 본전이다. 누군가 못 견디게 사랑했던 기억도 오늘은 자욱한 빗소리로 흩어지고 있을 뿐.
작가노트 10
방문을 열었다. 널직한 오동나무 이파리에 넉넉한 햇빛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훤히 보인다. 늙으니까 좋구나.
작가노트 13
아무리 이름난 산이라도 맹수가 살면 아직 명당이 아니다. 산은 자신의 몸을 헐어 많은 생명을 키운 다음에야 명당을 만들어 낸다. 설령 그대의 공부가 수미산 높이와 버금간다 하여도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온갖 생명이 어울려 살 수 있는 평지가 되게 하라.
작가노트 15
할미꽃이여 나도 허리굽은 그 나이까지 꽃이 되고 싶구나.
작가노트 16
겨울 새벽까지 깨어 있으면 언제나 빌어먹을 놈의 외로움 때문에 뼈가 시리다, 라고 썼다가 바깥에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묵묵히 겨울을 견디고 있는 나무들을 생각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계바늘은 움직이고 있지만 시간을 흐르지 않는다. 이제 세속을 잊어야겠다. 내가 간직했던 사랑과 증오들도 모두 반납해야겠다.
작가노트 18
외로움은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작가노트 19
그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기억하려고 애쓰지 말자. 늙는다고 생각하면 왠지 쓸쓸하지만 이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 하나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나이가 되었나보다. 건망증.
작가노트 27
모든 언덕은 그리움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거기개망초가 어지럽게 피어 있고 이따금 한 무더기 바람이라도 지나가면 잊혀진 이름들이 떠오르지요.
작가노트 28
갑자기 세상이 텅 비어버린 느낌 속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이 내 의식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누군가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작가노트 32
참으로 거칠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와 옷자락을 스치는 그대여 내 몸은 비록 늙고 병들어 기력 없으되 아직 날밤은 새울 수가 있나니 오늘 같은 날에는 그대와 비포장도로에 같이 퍼대고 앉아 흐르는 달이나 곁눈으로 쳐다보면서 밤 새도록 문학과 인생을 음미하고 싶소이다.
작가노트 33
비는 시간을 적십니다. 비에 젖은 시간은 대부분 미래로 흐르지 않고 과거로 흐릅니다. 추억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당신은 어디부터 젖는지요. 젖어서는 무엇을 추억하게 되는지요.
작가노트 34
장마철에 모든 나무들이 약간씩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빗소리를 듣게 되지요. 사실 행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정하고 갈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노력 여하에 따라 오는 속도만 달라질 뿐. |
작가노트 38
코스모스는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꽃이름으로 피어서 어떤 꽃은 빨간색으로 흔들리고 어떤 꽃은 하얀색으로 흔들리고 어떤 꽃은 분홍색으로 흔들립니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보시라는 뜻이겠지요.
작가노트 41
내가 말이나 글로 전하는 것들은 그렇게 알라고 전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전하는 것들이다. 아는 만큼 보이느 것들은 아직 진정한 내것이 아니다. 하는 만큼 열리는 것들이 진정한 내것이다. |
작가노트 48
내 마음이 꽃이라는 이름과 조화할 수 없을 때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픔이 된다.
|
'미술 > 한국화 현대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화가, 하인두 (0) | 2012.03.15 |
---|---|
천경자 (0) | 2012.03.13 |
김호석 (0) | 2012.01.04 |
천경자 (0) | 2011.08.17 |
북한 그림 (4) - 월북화가 이쾌대 (0) | 2011.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