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3. 09:55ㆍ미술/한국화 현대그림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정중헌이란 분이 쓴『천경자의 환상여행』(2006. 2)이란 책입니다.
천경자에 대해서는 그림만 몇 개 보았을 뿐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엊그제 누가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천경자의 그림은 동양화냐 서양화냐고요.
지금 시대엔 아무런 실익이 없는 논의일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만, 따지고 들자면 그게 참 애매하긴 합니다.
책 표지에는 천경자 평전이라고는 붙여놨는데,
글쓴이의 말 대로 미술사가도 아니고 미술 평론가도 아닌 미술기자로서
‘저널리스트가 엮은 천경자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를 정리한 글모음’이랍니다.
눈에 들어오는 귀절이 있으면 옮겨 적어보려고 합니다.
천경자(千鏡子, Chun Kyung-Ja 1924 - )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 화백은 전남여고를 거쳐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광주여고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수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1965년 5월 문예상, 1971년 서울시 문화상, 1975년 3.1문화상, 1979 예술원상, 1983 은관문화훈장,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화력(畵歷) 50년이 넘어선 천경자 화백의 작품으로는 <정>, <생태>, <꽃무리>, <누가 울어>, <물굿>, <노을이 타는 소리> 등 약 1천여점에 이른다. 저서로는『여인소묘 』『우성이 가는 곳 』『한』『캔맥주 한잔의 유희』『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천경자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영혼 울리는 바람을 위하여』『언덕위 양옥집』『탱고가 흐르는 황혼』『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위하여』, 『천경자화집 』등이 있다.
그는 평생 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孤獨을 멍에처럼 달고 살았지만
그 恨과 孤獨은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탄식이 아니라 아름답고 화려한 감정이기도 했다.
작가는 인생이라는 굴곡 많은 삶 속에서 작가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
恨과 孤獨을 죽도록 사랑하고 매달렸으며, 순수로 걸러진 에센스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 고독이 삶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분명 그런 면이 있어요. 고독한 사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마련입니다.
역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고독을 자청할 수도 있는 거겠지요.
▲ 목화밭에서 (1950년대)
두번째 만났다는 김씨라는 남자와의 관계가 저런 거였군요.
저런 자세를 취한 남자는, 이미 맘에 둔 딴 여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림으로 그린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왜 저런 웬수떵어리의 그림을 찢어버리지 않았을까.
역시 애증인가?
*
*
▲ 길례언니 (1973년)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년)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 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살게 하는 것 같다.
그 속에 뭔가를 담아도 차지 않고 영 허전하기만 하다.”
‘비록 화사한 행복과 꿈을 머금은 꽃과 상상의 나래를 펴는 나비가 등장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짙은 고독과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 과 낭만, 기쁨 과 슬픔, 현실 과 환상,의 두 상반된 세계가 대결하며
생명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표출되는 천경자의 작품세계는
우울함 속에 희망과 환상이, 화려함 쏙에 고독과 슬픔이 언제난 공존한다.
어쩌면 그는 아름다운 원류로서 슬픔을 사랑하고 슬픔 뒤에 오는 淨化에 의해
삶의 의지를 복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광진, 천경자 작가론)
▲ 내 슬픈 전설의 49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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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 (1943년)
1942년 외조부를 그린 <조부>가 제 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 중에 그린 <조부>와 <노부>는 세필 채색으로 그린 인물화로
견고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델로 해서 그렸던 만큼
옷차림이나 표정을 보면 조선 인물화의 전통을 이었다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老婦(1943년)
▲ 생태 (1951년작)
1950년대의 대표작은 <생태>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발표한 이 작품은 파격적인 소재와 생동감 넘치는 묘사력, 꽉 짜인 구도 등으로
천경자라는 화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천경자 선생이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으로, 35마리의 뒤엉킨 뱀을 종이에 채색한 87 x 51.5 cm의 크기로 1951년에 완성했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가세가 기울어서 아버지도 병든데다 여동생까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약조차 살 돈이 없을 정도로 막막했다.
거기에 아이 둘만 껴안은 채 첫 결혼은 깨지고 처자 있는 유뷰남과 사랑에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였다.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한 자극이 필요했는데, 그때 떠오른 것이 광주역 앞의 뱀집이었다.
▲자살의 미(1968년)
1968년에 완성한 <자살의미>는 칼날이 꽂힌 믹서기 속에 수선화가 들어 있는 작품인데
섬뜩한 제목처럼 작가의 당시 복잡한 심경을 이 그림에 쏟아낸 느낌을 준다.
▲이탈리아 기행(73년)
이 작품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감흥을 하나의 화면에 응축시켜 낭만과 화려한 고독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보티첼리의 <프라마베라>에나오는 꽃의 여신의 얼굴을 묘사해 중앙에 배치했다.
상단에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족>을 재현해 넣었고,
베니스 산 마르코 사원의 스케치를 책자 밑에 물려 놓았다.
서로 연관성 없느 대상들을 화면에 조화시킨 구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색체의 파티라고 할 만큼 다양한 색깔들이 파노라마처럼 출렁이며 엘레강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한(恨)
▲ 사월(1974년)
그의 색체 이미지는 기존의 채색화는 물론 서양화에서도 실현하지 못한 독특한 정신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정신성'이란 단청의 오방색에 근거하는 동양적인 미의식의 한 흐름을 뜻한다.
꽃, 나비, 여인 그리고 이국 풍물 등 소재 및 대상은 그자신의 원색적인 성향을 받아내는데 무리가 없다.
그의 채색 기법은 평면적이면서도 여러 겹의 색층을 통해 입체적인 형상에 도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아열대
*
*
1980년대 작품들을보면 세계일주 기행의 스케치들을 밑그림으로 삼아
새롭게구도를 잡아 꽃과 나무, 새와 동물,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사람과 삶의 현장들을
강렬하고도 입체감 있는 색채 감각으로 형상화한 풍물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 리비아 사막(1974년)
▲ 콩고 킨사샤의 여인들 (1974)
▲ 인도 올드 델리(79년)
▲인도 올드 델리(79년)
▲갠지스강(79년)
▲인도 카쥬라호(79년)
▲바라나시(인도)
쿠스코 시장(페루)
쿠스코(페루)
리오의 밤
타히티에서 천 선생은 그들의 노래와 춤에 취한다. 그런데 곡조는 졸립고 가사가 어처구니 없이 싱겁다고 했다.
그러나 춤은 매력이 있고 박력이 있다며 춤 그림을 보내왔다.
“그들은 전쟁도 배고픔도 모르고, 예술이 무엇인지, 인생의 쓰라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일도 하고 사는, 마치 감상용 천연기념 동물 같은 인간들이다.”
코르코바도山의 그리스도
세네갈 고래섬
수녀 테레사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
*
“작업이 잘 될 때는 고독이라는 해방감과 바다 물결 같은 자유가 고맙지만
일이 잘 안될 때는 성황당 古木에 걸린 한 서린 천 조각들이 날아오듯 심란할 때가있다.”
“꽃은 그 자체가 색채의 파티입니다. 회화적 요소로 최고지요.
나는 어린시절 입어 본 색동저고리를 좋아합니다.
세월 바랜 샏동저고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우리의 색입니다.”
▲ 환(1962년)
▲ 청춘의 문 (1968)
▲ 孤(1974년)
▲ 장미와 여인 (1981년)
▲ 황금의 비 / 1982 / 34 x 46
▲두상 (1982년)
화가 천경자의 화단(畵壇 역정 역시 인생 못지 않게 풍상을 겪었다. 특히 동양화 잡단에서 일본 채색화라고
따돌림당했고, 국전에서는 오랫동안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내 화단 호적은 분명히 동양화가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해방 되자 내가 색채를 다룬다고 해서, 또 당시의 친일파 척결이라는 시류에 편승해서 내 작품도 무
조건 일본화라고 몰아 구둣발로 무참히 문질러댔다. 그것을 보고 약삭빠른 색채화가들은 모두 수묵화 대열
에 끼었지만 나는 계속 채색화를 그렸다. 그러면서 때때로는 보다 세계가 넓은 오일컬러로 바꿔볼까 하는
유혹을 견디느라 힘든 적도 있었다. 얼마쯤 지나니까 일본화라는 말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내 작품이 서양화
라고 했다. 도무지 귀찮은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1970년 국전 동양화부를 구상 비구상으로 나누더니 내 작
품을 반추상이라며 걸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전통회화 붐이 일어 내 작품은 전통회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 수난을 받고 있다.
▲ 아라만다의 그늘 / 1985 / 94 x 130
▲ 누가 울어 (1989년)
▲황혼의 통곡
이 그림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던 날, 천경자 화백의 압구정 한양아파트 응접실에 걸려있었던 작품이다.
“한 점씩 건네줄 때마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아끼던 작품이 포장될 때는 눈물을
흘리셨고요.”
뉴욕의 혜선씨는 예감이 좋지 않아 급거 귀국해 어머니를 찾았다. 통장도 여권도 없어진 상태였으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머니가 외톨이 신세가 되고, 작품들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
이 든 혜선씨는 특단의 대책을 내려야 한다는 판단했다. 어머니가 평소에 여러번 밝혔듯이 작품을 기증하는 일
을 서두른 것이다. 어머니 작품을 4남매가 어떻게 하다가는 분란만 커지고 어머니 생각과는 달리 흩어지게 되
므로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증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몇 년이 안되었는데도 작품의 액자에 상처가 나는 등 보관상태가 양호하지 못하고, 디스플레이나 조명
또한 소홀하다는 지적이 있다. 작품 만이 아니라 저작권까지 양도 받은 서울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미인도(1977)
(아래글. 펌)
“8년 전에 이미 내 그림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도대체 진짜냐, 가짜냐?’ 지난 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미인도’에 대해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천경자 화백이 “절대 내 그림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미인도 진위 논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논쟁은 미스테리에 묻힌 채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다 8년이 지난 최근 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천경자의 미인도를 내가 그렸다”고 주장하는 위조범이 나타났기 때문.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미인도’의 진짜와 가짜 여부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화려하고 쓸쓸한’ 천경자의 예술세계.
>>“내 그림 아니다. 자식 못 알아보는 부모가 어디 있나?”
사건 직후 ‘절필’ 선언하고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
돌연 아찔하게, 꽃향기가 풍겨온다.
젊은 여자, 그 여자는 머리에 화사하게 꽃을 얹고 있다.
꿈꾸는 듯한 두 눈은 요기(妖氣)를 가득 머금고,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본다.
화려하고 강렬하다.
하지만 눈망울에는 정체 모를 슬픔이 가득하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초점없이 커다랗게 열린 동공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화려함과 슬픔.
‘내’가 그녀를 보는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가 너무 세서, 차마 감당하기 힘들다.
화력(畵歷) 50년이 넘어선 원로 화가 천경자 화백.
그녀는 젊은 여자를 모델로 여러 폭의 인물화를 그린 바 있다.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을 그린 자화상도 있고, 딸을 모델로 한 작품,
혹은 남태평양의 타이티를 비롯한 이국의 여인들을 모델로 한 그림도 있다.
지난 91년에 문제가 되었던 속칭 ‘미인도’ 역시 그런 작품 중의 하나.
국립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그림은
‘경자 1977’이라고 사인이 된 채색화 미인도(26cm X 26cm, 4호 크기) 한 폭이었다.
천경자 화백은 91년 4월에 “내 작품이 아닌 가짜”라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고,
박물관 측에서 이에 대해 ‘진짜’라고 맞받아치면서 논쟁이 확대되었다.
당시 천경자 화백의 주장 :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리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예요.”
당시 이미 68세의 고령이었던 천경자 화백은 세상과 언론을 향해 울부짖듯이 말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제의'미인도'. "머리꽃과 어깨의 나비가 내 그림과 전혀다르다.
난 작품연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그림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다"고 천 화백은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1차 감정을 실시한 후 “적어도 가짜는 아니다”라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고,
며칠 후 진행된 2차 감정에서도 역시 ‘진품’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감정위원회는 당시 판정의 말미에 “만약 위작 경위가 밝혀질 경우 그 결과를 전면 수용하겠다”라고 덧붙여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증폭시켰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초지일관 ‘진품’임을 주장했다.
미술관 측에서는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웠다.
첫째는 소장 경위가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문제가 된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돼,
재무부 문공부를 거쳐 80년 5월 3일 국립미술관으로 넘어온 작품이라는 것.
두 번째는 전문가가 이미 진품으로 판정했다는 점이었다.
전문위원이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당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이미 진품으로 감정을 끝낸 상태라는 것.
그러나 당사자인 천화백의 항의와 언론의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후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자체적으로 실시한 정밀 검사 결과를 다시 발표했다.
“현미경 분석과 적외선, X선 촬영 등을 통해 종이와 안료에 대한 정밀 감식을 실시한 결과
역시 진품인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화가와 미술관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한판 싸움은 대략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약한 여자 혼자 몸으로 싸우기에 세상의 벽은 너무도 완강했던 걸까?
이미 고령에 이른 천경자 화백은 “나이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까지 들어야 했고,
평생 그림의 외길을 걸어왔던 그녀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천경자 화백은 사건 직후인 91년 4월 7일,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대한민국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리기 위해 요양차 떠난 미국행이었다.
현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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