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화가, 하인두

2012. 3. 15. 10:15미술/한국화 현대그림

 

 

 

 

 

하인두는 감성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이지적인 자기를 구축하려고 무척 애를 쓴 사람이다.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여림과 수줍음이 있는 반면

사천왕처럼 불의와 사악함, 세상의 위선 같은 것은 역겨워 못보는 고지식함을 함께 지닌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1989년 11월, 자신의 예술생애만큼이나 치열했던 투병의 장막을 내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해 8월 13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다.

당시 주치의는 95% 가망이 없는데 5%의 기적을 바라고 수술을 하되, 잘 되어도 2개월 시한부라고 못박는다.

12시간의 수술 후 깨어났으나 그의 몸에는 5개의 호스가 부착되었고, 인공항문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병상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감사할 일 다섯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첫째 날

 

1)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

2) 먹고 마실 수 있는 것

3)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

4) 걸어다닐 수 있는 것

5) 편히 잠잘 수 있는 것

 

둘째 날

 

1) 눈뜨고 볼 수 있는 것

2) 먹고 배설할 수 있는 기쁨

3) 아름다운 꽃을 보고 향기를 맡는 기쁨

4)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

5) 기도를 할 수 있는 기쁨

 

셋째 날

 

1) 움직일 수 있는 고마움

2) 앉아 있을 수 있는 고마움

3)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고마움

4) 좋은 그림을 보거나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고마움

5)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고마움

 

(「혼불, 그 빛의 회오리와 시한부 인생」1990. 1.)

 

 

 

 

 

 
<자화상>

 

 

 

오늘은 그림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인두’라는 화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왔는데,

내일이 대여 마지막날이라고 연락이 왔네요.

미처 못 본 책이 한 권 남아 있습니다.

-『예술혼을 사르다간 사람들』


아무래도 다 읽지 못하고 돌려줄 것 같아서

대충 어떤 책인지나 보려고 중간을 펼쳐봤는데,


이 분, ‘하인두’라는 화가의 투병생활에 대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책과도 텔레파시가 통하는 건지,

근래에 저도 같은 생각을 가끔씩 하던 중이었거든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공기에 대해서 고맙다’는 표현들을 많이 합니다.

궁극으로는 내가 숨쉴 수 있다는 말이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연에 대한 한 생명으로서의 진심어린 감사함과,

그리고 그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일체감이라고해야 할까, 친밀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 땅에서 함께 숨쉬며 살던 동식물들이

모두 인간인 나와 동등한 반려였다는 사실,

쾌청하고 따스한 햇빛 햇볕 아래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무생물(無生物)'이 없다는,

‘범아일여(凡我一如)’ ‘겸애(謙愛)’…… .

 

..........


밑천이 짧아서 글이 안 써지네요.

하인두 화가에 대한 소개나 하겠습니다.

 

 

 

♤ ♤ ♤

 

 

 

 

 

 

우주의 무늬, 하인두

 

                   - 최열 미술평론가

 

 

청화(靑華) 하인두(河麟斗 1930-1989)는 지금 어디있을까. 꿈꾸던 서방정토인가.

큰 스승 원효가 <증성가(證性歌)>에 노래하였다.

‘저 부처의 몸과 마음, 따르기만 해도 반드시 그 나라에 왕생해 있으리라.’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원효는 ‘훌륭한 도반들과 어울려 시방불토에 노니나니 위안받기 어려운 근심은 멀리 떠나보내는 곳’이라 하였다.


하인두의 청춘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1989년 11월 12일 하인두가 우리 곁을 떠났다. 겨우 예순이었다.

이승에서 그의 생애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꾸던 꿈이 아름다워서일게다.

좌우를 겪은 전쟁 직후 스물 여섯 젊은 날 처음 만들었던 단체 이름이 푸른 빛 줄기란 뜻의 청맥(靑脈)이요,

살아가는 동안 내내 ‘광인(狂人)과도 같은 감정의 홍수’를 주체할 줄 모른채

‘내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한 가닥 진심(眞心)’을 찾아 헤메었고,

생애의 끝 무렵 영혼의 불꽃 <혼불>을 그렸으니 자기의 몸뚱아리 하나 태워나갔던 무상(無常)의 예술가였던 것이다.

하인두의 청년시절은 당시 화가의 길을 선택한 누구나 겪었을 그런 삶이었다.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한 뒤 직장을 잡고 또한 당시 유행하던 ‘현대미술’의 물결 위에 몸을 맡기는

그런 세월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 10월은 한 청년의 삶을 바꿔놓았다. 이 때가 설흔 한살이었다.

어느 날 밤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여 대접해 보내드린 뒤였다.

그 손님이 체포 당했고 하인두는 손님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항목 위반죄로 투옥당했다.

4개월 형에 2년의 집행유예 및 자격정지 선고는 한 번 지나치는 불운이 아니었다.

실직하고 이후 15년 동안 공민권 제한이라는 기나긴 동굴 속으로 밀어넣었다.

하인두가 앙포르멜의 열풍을 걷어차 버리고 불교사상을 자기화한 것은 그러므로 필연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격자 방을 벗어나 출옥과 더불어 고향이 자리한 남부지방을 유랑하던 시절

그 가슴 속엔 무엇이 자라나고 있었을까.

부랑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아름다운 시인들의 노랫소리 함께 하며 빈털터리 주정뱅이 짓을 이어갔다.

“밤에는 화실에서 잤다. 인근 창경원 맹수들의 포효는 숲속에 고인 칠흑같은 어둠을 깨고

때론 부엉이의 귀곡성은 괴괴하여 죽음의 사자가 나를 에워싸고 다가오는 것같은 무섬증이 들기도 했다.”
(하인두, <<당신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 아이 때려요>>, 한이름, 1993.)

이렇게 술독에 빠진 하인두를 구원한 힘은 한 여성이었다.

방황을 멈출게 했을만큼 아름다웠나보다.

설흔 여덟의 노총각이 스물 다섯 처녀를 갖은 꾀를 다 하여 꼬시는데 성공한 때가 1967년 10월 18일이다.

하인두는 온전한 일상으로 진입했고 비로소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절창의 화음

1969년의 작품 제목 <회(廻)>, <율(律)>은 윤회(輪廻)와 선율(旋律)의 줄임말이다.

화폭 중앙에 자리한 길고 긴 끈은 돌고 도는 바퀴의 흔적이며 수레가 구르는 가락이요,

그 포개놓은 끈을 감싸고 있는 세 겹의 껍질 또한 돌고 도는 되풀이의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만들던 시절 하인두는 천도교 교인이었다.

동학 교주 최제우의 <<동경대전>>을 두고 동갑내기 시인 신동엽(申東曄)과 토론하였거니와

신동엽은 하인두를 만난 세 해 뒤 1967년 동학을 소재로 한 장시 <금강(錦江)>을 발표했다.

이 때 하인두의 윤회, 그 선율은 다른 작품 <고전(古典)의 율(律)>(1969) 그대로였다.

하지만 선율은 무거웠고 화폭은 어두웠다.

하인두의 1970년대 전반도 여전히 어두웠다.

구원의 여인을 만나 아이도 태어나고 개인전이며 단체전은 물론 상파울로 비엔날레, 인도 트리엔날레와 같은

국제전이며 또한 국전 추천작가에 미협 분과위원장까지 올라 경력만으로는 대한민국 미술계 복판에 군림하였으되

화폭은 여전히 시커먼 색채였고, 형태는 묶여 있는 굵은 밧줄이나 갇힌 격자였다.

자신의 말처럼 전쟁 때 겪은 바 ‘허옇게 갈대가 우거지고 산국화 피는 산등선 길을, 달밤에 총 메고 줄지어 가는

빨치산들’의 백일몽을 잊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상의 금줄에 묶여 공민권을 제약당하고 있는 실존의 망상 탓이었을까.

<인간, 애증>, <발아(發芽)>, <미륵의 얼굴>을 폭포처럼 쏱아내던 1975년부터 <묘환(妙環)>, <만다라(曼茶羅)> 연작을

선보인 1977년까지는 하인두의 노래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 때였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만나 있는 힘을 모두 다 해 함성을 내지를 때처럼.

그랬다. 절창시대였다.

이 때 박탈당했던 공민권의 복권이 이뤄졌고 1976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회복한 이 순간 신기하게도 하인두의 예술은 ‘날개가 돋히고 훨훨 날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해외라면 울릉도라도 다녀와야겠다던 시절이 끝나고서야 구만리 장천을 나르는 새 붕(鵬)처럼.

하인두는 생을 마감하던 1989년 어느 날 다음처럼 썼다.

“나의 그림은 요새 많이 밝아지고 있다.

검은 흙탕 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절망의 늪에서 - 생의 환희의 - 꽃을 피우고 있다.” 

(하인두, <<당신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 아이 때려요>>, 한이름, 1993.)


하지만 이 말은 1976년의 말이어도 좋은 것이었다.

해금과 복권이 이뤄지고 그의 만다라가 꽃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무간지옥을 탈출하여 극락정토에 이르른 환희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만다라는 세속에서 변상으로 나타난 정토의 형상이다.

신혼여행을 함께하여 신부로부터 밉상탈만큼 가까운 벗이었던 시인 박재호는 그 <만다라1>에서

‘일렁이는 수면에 흔들리는 꽃잎 /

그것은 나의 얼굴이다/

방황하는 나의 영혼이다 /

고요하고 맑은 체념을 지켜보는 /

나의 문신이다’   .... 라고 노래했지만

하인두의 만다라는 그 보다 더욱 일렁이고 흔들리며 훨씬 고요하고 맑은 그림이다.

<밀문(密門)>(1978)을 열고 나서면 끝도 가도 없는 우주요

닫고 들어서면 <피안(彼岸)>(1978)이 보이는 이곳 무간지옥이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무애(無碍)의 세상살이 춤과 노래로 살아간 원효의 삶 그대로다.

 

 




<밀문>

 

 

 


<피안>



힘겨웠던 시절을 견디며 和諍의 논리를 펼쳐 원효의 말 ‘妙契環中’을 인용한 하인두는

‘서로 색다름이 다채롭게 고리를 잇대어 중심잡이를 잃지 않음’이라고 풀어 두고서 작품 <묘환> 연작을 풀어냈다.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잡아야 할 중심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인두는 ‘민주화가 별 것인가’라고 하고서

“사상, 이념, 인생관의 다양한 변주가 마치 오케스트라 심포니같이 화음으로 울려 퍼지는 것,

그것이 바른 민주화요, 자유인의 삶, 그 참 모습인 것이다”

(하인두, <<혼불, 그 빛의 회오리>>, 제삼기획, 1989.)

하인두의 만다라, 묘환이 곧 그 다양한 변주로 빚어낸 하나의 화음 곧 화쟁의 형상이며

끝없는 자유의 참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엄한가. 한국미술사에 일찍이 없던 장강만리를 수놓으며 참으로 우주의 무늬를 아로새긴 형상을 창조한

하인두는 그러므로 20세기가 탄생시킨 거장임에 틀림없다.


정토로 가는 길


기독교도는 불교니 천도교, 무당이니 해서 박생광의 위대성을 얕보기도 하지만

1985년 5월 파리에서 마주친 강렬한 원색의 파문으로 박생광의 작품세계를 체험한 하인두는

‘내가 으뜸으로 받들던 한국화단의 별’이라고 하였다.

또 하인두는 직장암 투병생활 두 해 동안 기독교와 만나 침례를 받았으니

속좁은 이들이 내편 네편 가르는 것일뿐 화이부동의 바다를 생각한다면

동서의 종교를 회통시킨 하인두의 무상진심(無常眞心)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것이다.

1999년 10주기 때 나는 그리도 밝은 만호(曼湖) 류민자(柳敏子 1942-) 선생을 만났고

남편 하인두에 대한 책을 쓰시라 하였으며 기념전을 진행하는 인연을 맺었다.

어찌 잊겠는가. 인연이 이어져 혹 서방정토 가는 길 도반이 될지도 모르는데.

 

 

 


<총화>

 

 

 

 


<혼불 - 빛의 회오리>

 

 

 

 



<혼불 - 빛의 회오리>

 

 

 

 



<혼불 - 빛의 회오리>

 

 

 



<역동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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