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3. 11:37ㆍ미술/ 러시아 회화 &
이삭 레비탄(1860-1900) / <봄-물의 범람>(1897). 캔버스, 유화, 64.2X 57.5
러시아의 봄은 눈 속에서 시작된다.
두껍게 쌓였던 눈이 속부터 녹아내리며 풀썩 꺼지는 소리, 그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소리,
아직 남아 있는 눈 사이로 제일 먼저 피어나는 수선화의 일종인 포드스네쉬니키('눈 밑의 꽃'이란 뜻),
언뜻언뜻 반가운 얼굴을 내미는 초록빛 잔디들, 솜털 박힌 연두빛 나무 싹눈들.
수개월 동안 죽은 듯 눈 속에 파 묻혔던 대지는 깨어나고 나무들은 가벼운 숨을 토해낸다.
봄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경이의 순간이고, 기적이다.그런 기적의 순간은 해빙으로부터 온다.
조금씩 눈이 녹으면서 겨울에 대한 조용한 반란이 시작된다.
돌처럼 딱딱했던 눈도 속부터 물러져 결국 주저앉고
남은 얼음들을 따뜻한 봄볕이 어루만져서 원래 모습이었던 물로 되돌린다.
그런 봄 날 강변을 범람한 봄물을 묘사한 그림이 레비탄의 <봄 - 물의 범람>이다.
물은 움직이지 않는 듯 고요하고, 그 위에 연두빛과 은빛으로 싹들이 살아난 나무 가지들과 줄기들이 비추인다.
엷게 흩어지는 가벼운 구름들이 떠있는 높은 하늘도 멀리 강물과 맞닿아 있고,
고즈넉이 배 한척만이 한가로이 봄볕을 즐기며 편안한 물 위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다.
봄볕에 더 환히 빛나는 하얀 자작나무의 흰빛,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창고와 앞 쪽 전나무의 녹색,
가지들과 강변의 황금색, 하늘과 강물의 푸른빛이 어우러져 섬세한 봄의 서정을 들려준다.
수채화처럼 깨끗하고 밝은 빛깔들로 그려져 봄 풍경의 투명함과 맑음을 선사하고
보는 이들에게 봄 속 자연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따뜻한 낙천주의를 전해준다.
그림을 보면 어느새 마음이 조용한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져 말 없는 위로를 받는다.
* 김은희 『러시아 명화 속 그림을 말하다』p 19~
이반 이바노비치 쉬쉬킨(1832-1898)은 <정오. 모스크바 근교에서>(1869)
러시아어에서 여름(leto)의 어원은 ‘lit’(비)에서 온 것으로 ‘비의 시기’란 뜻이지만,
아일랜드어 ‘lith'(축제)란 단어와 연관시켜 ’자연의 축제‘로 해석하기도 하고,
라틴어의 laetus(아름다운)이란 말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밝고 아름다운 여름은 자연에게도 사람에게도 축제를 선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의 여름은 휴가, 일탈, 사랑의 계절이다.
러시아인들은 오랜만에 만났을 때 “skolko let, skolko zim!"(얼마나 많은 여름과 겨울이 지났나!)로 표현하는데
그만큼 가장 중요한 시기를 겨울과 여름으로 본다.
여름은 낮의 계절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6월에 해가 지지 않는 백야 기간이 있고,
모스크바도 한 여름에는 밤 11-12시에 해가 져서 새벽 3-4시면 환해지기 때문이다.
이반 이바노비치 쉬쉬킨은 <정오. 모스크바 근교에서>(1869)란 작품은 그런 여름 한 낮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쉬쉬킨은 이 작품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숲이나 나무 등을 묘사했던 이전의 풍경화들과는 다른, 관조성과 서사성을 드러내준다.
쉬쉬킨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아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화가 F.바실리예프의 누이 엘레나로 1874년에 죽었고,
두 번째 아내는 화가 올가 라고다였는데 1881년 죽었다.
70년대 중반에 그는 두 명의 아들과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는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창작활동 초기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런 아픔을 겪고 한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말년의 20여년은 창작에만 몰두,
결국 자신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다 앉은 채로 죽은 그를 제자가 발견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이 작품은 1866년의 <정오, 모스크바의 근교, 브라드체보>란 스케치를 바탕 삼고 있다.
스케치에 비해 호밀 밭이 더 넓게 확장되었으며 가운데 구부러져 멀어지는 길을, 멀리 있는 수평선의 강물과
마치 연결되는 듯하게 묘사하였다.
그 길을 따라 젊은 남녀가 다정스레 걷는다.
그들의 얼굴과 옷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풍겨준다.
내한성이 강해서 구소련 지역에서 전세계의 1/3을 재배하기 때문에 호밀은 러시아인에게 너무나 친근한 소재이고,
모스크바에서 여름만큼 멋진 하늘을 감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쉬쉬킨이 호밀밭과 하늘을 비중 있게 묘사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둥글고 커다란 구름과 가벼운 새털구름이 떠 있는 드넓은 하늘dl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여름의 가장 큰 축제는 ‘이반 쿠팔라의 날’(7월 7일, 하지와 연관된 축제)이다.
이 날에는 결혼하지 않은 청춘남녀의 육체관계가 허락되기도 했다.
이 기간에 젊은이들은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름은 설렘이기도 하다.
이 날은 물, 불, 풀과 관련된 의식과 풍습으로 가득하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에게 여름은 자연이 준 축제의 기간이며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여유의 시간이다.
그러나 쉬쉬킨은 그런 사랑과 일탈의 여름을 화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묘사하였다.
사람들은 작게, 길과 호밀밭은 넓고 길게, 화폭의 2/3는 하늘로 채웠다.
* 同書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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