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3. 08:09ㆍ미술/ 러시아 회화 &
제게는 이 레핀의 그림이 제 취향에 딱 맞습니다. 레핀의 그림이 다 좋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반 뇌제》《코사크 편지》《무소르그스키 초상》이 특히 좋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림 설명들은 아무리 봐도 미심쩍고 흡족하지가 않더이다.
그래서 직접 저들이 쓴 책을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어제 강요배 화가의 책 『동백꽃 지다』와 함께 받았습니다.
저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좋아하기로는 이 레핀의 그림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명화(名畵)」얘기를 하면서, '내가 사서 걸고 싶은 그림이 진짜 명화'라고 했잖습니까?
제가 복사본 그림을 구해서, 표구까지 해서, 거실에 건다고 가정을 해보니까,
카라바조의 그림은 너무 칙칙해서 안되겠습디다. 사실 가정용으론 좀 거시기 하지요.
레핀의 그림으로 두 점 정도, 크기를 다르게 해서 걸면 딱 좋겠단 생각이 듭디다.
앞으로 레핀 책 읽어가면서(천천히), 틈나는대로 다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여타의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도 연줄 닿는대로 알아볼 생각입니다.
이제부터 소개하는 글은 저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공포에 질린 이반과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2월 16일. 캔버스에 유화. 199.5 × 254 cm.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1881년 봄 레핀은 트레치아코프와 함께 <모스크바 음악의 밤>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새 작품 <복수>를 감상했다.
레핀은 음악을 듣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후에 레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악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음악의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나는 이반 차르를 기억했다.
그 해는 1881년이었다. 사람들은 5월1일 피의 사건에 경악했다. 피의 줄기가 이 해를 관통했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작업했다.
순간 나는 공포에 젖었다. 그림을 덮고 외면했다. 내 친구들도 그림을 보고 똑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나를 그림으로 내몰았다.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시작된 작업에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면서 레핀은 무려 5년이나 <이반 뇌제>의 작업에 임하였다.
그림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레핀의 명성에 힘입어 소문이 퍼졌다.
항상 과묵하고 조심스러우며 상인다운 신중함으로 그림을 평가하고 구입하던 트레치아코프가 레핀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즉시 <이반 뇌제>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곤 자신의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무엇보다 나는 레핀에 대한 만족감에 사로잡혔네. 그림을 보고 레핀의 재능을 학인하게 되었네.
제일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살인의 절망감일세.
아버지가 황홀(皇홀)로 아들의 관자놀이를 때린다...... 순간, 아버지는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아들에게 뛰어간다. 아들을 부둥켜 안고 마루에 주저앉는다.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의 상처를 세계 누른다.
다른 손은 허리를 감싸 안고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리고 아주 세게 자신의 뿔쌍한 특별히 연민이 느껴지는) 아들의 이마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무력한 상황에서 공포에 젖어 소리를 지른다.
자세한 것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같네.
공포에 젖어 포효하는 짐승 같은 아버지와 사랑스럽고 착한 아들이라니.
이 온순한 눈동자, 이 놀랍도록 매력적인 입, 이 요란한 숨소리, 이 가련한 손!
그런데 어떻게 그렸는지 보게! 검은 피를 상상해 보게.......(중략).......
'괜찮아요 아버지, 무서워하지 마세요!'..... 아 신이여 우리를 살펴주소서!"
이 그림을 크람스코이보다 더 잘 읽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그림은 제 13회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매일매일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그림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 그림이 반드시 전시가 금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림은 모스크바의 전시회에도 진열되었고,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도 갔다.
거기서도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다.
톨스토이는 깊은 감명을 받고 레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중략).......
레핀의 그림에 대해서 정부는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종무원장 포베도노스체프는 알렉산더 3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레핀은 이전에도 이런 편향성이 두드러진 아주 혐오스런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화가가 무슨 생각으로 바로 그 순간의 이반 뇌제를 사실적으로 말하려 했는지 말입니다.
그 어떤 이상도 없이, 경향적인 비평과 폭로가 난무하는 공허한 사실주의만 있을 뿐입니다."
이반 뇌제에 대한 레핀의 해석은 심리적 깊이, 놀라운 사실성, 진정한 연극성으로 두드러진다.
그는 다른 화가들보다 현저하게 포괄적으로 자신의 과제에 접근했다.
레핀은 세익스피어의 천재적인 힘과 열정으로 형상들의 생생한 진실을 표현했다.
그림에는 허술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차르 궁전의 황혼은 훌륭하게 표현되었고, 붉은 양탄자, 장미빛 카피탄, 피의 웅덩이는 놀라운 기교로 그렸다.
피의 붉은 색조는 긤에 긴장감을 불어 넣으며 드라마의 내용을 표현했다.
1913년 1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방문한 구교도 이콘 화가 발라쇼프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피는 충분하다! 피는 충분하다!"라고 소리치며 칼로 그림을 찢었다.
많은 화가들의 노력으로 그림은 복구 되었고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 출처는 불명입니다.
넘어진 의자와 나뒹구는 베개 등이,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노인의 품에 안겨 피 흘리는 젊은이는 황태자 이반(1554-1581)이고, 그를 안은 노인은 이반 뇌제(1530-1584)다.
쇠 지팡이로 내리친 아들이 쓰러져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자, 정신이 든 아버지가 아들을 일으켜 안은 것이다.
피가 솟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앙상한 손으로 황급히 막아보지만,
손가락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뜨끈한 피가 멈추질 않는다.
분홍빛이 감도는 자개 색의 아들 옷이 그의 무고함을 드러내 주는 것 같다.
검은 옷의 노인과 음침한 실내 분위기 속에서 오직 피 흘리고 있는 아들만이 환하게 드러난다.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고 포기한 듯 생기를 잃은 눈은 삶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린 것 같다.
아버지마저도 이해한 듯한 그가 마른 노인의 품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마루를 짚고 있다.
깡마른 아버지에게 이미 자신도 가누기 힘든 육체의 무게를 온전히 싣기가 미안한 것일까.
뜨거운 피가 뚝뚝 흐르는 아들의 머리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은 절망으로 공허하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듯 퀭하니 뜬 눈은 백내장이 다 드러나 있고
이성과 광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것 같다.
꿈인지 생시인지… 이것이 차라리 꿈이라면….
이 그림은 러시아 최초의 차르를 그린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2년 11월 16일>(1885년)이다.
I.레핀(1844-1930)은 1882년에 이반 뇌제에 의해 진압된 프스코프 반란 이야기를 소재로 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콘서트를 보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반 뇌제와 황태자 이반의 형상을 어떻게 그려낼지 고심하다가
‘이동파의 양심’이라 불렸던 G.먀소에도프(1834-1911, 러시아 이동 전람파의 대표자)를 모델로 이반 뇌제의 얼굴을,
황태자 이반은 V.가르쉰(1855-1888, 러시아 작가)을 모델로 그렸다.
비운의 황태자처럼 가르쉰의 운명도 비극적이었다.
그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크림 전쟁(1853-56)에 참가한 장교였고, 어머니는 해군 장교의 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860년대 혁명-민주 운동에 참여했었는데. 가르쉰이 5세 때 가정 교사였던 비밀 혁명 단체의 활동가
P.V.자바드스키를 사랑해서 가정을 버렸다.
가르쉰은 1877년 터어키 전쟁 때는 지원군으로 입대하였는데,
옆구리 부상으로 후송되어 병원에서 집필한 전쟁 이야기인 <4일>(1877)을 발표하여 유명해진다.
그는 1인칭 수기 형식으로 뼈아픈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해서 <가르쉰은 피로 쓴다>는 말이 통용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고민했다.
1880년 2월에 혁명가 I.O.믈로데츠키가 최고 공판 위원회 위원장 M.T. 로리스-멜리코프 백작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하자 가르쉰은 백작에게 그의 사면을 부탁한다.
그러나 믈로데츠키는 결국 사형당하고 가르쉰은 우울증이 깊어져 하리코프와 페테르부르크의 정신병 요양소에서
2년 정도 치료받는다.
인민주의자들은 가르쉰의 작품을 인텔리들의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상처를 주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말했다.
1883년 겨울에 N.M. 졸로틸로바라는 의과대학 학생과 결혼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1887년 우울증이 재발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고, 아내와 어머니의 불화가 시작된다.
결국 1888년 4월 5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913년 1월 29일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아브람 발라쇼프라는 성상화가가 "피는 더 이상 그만!)"라고 외치며
작품 속 이반 뇌제의 얼굴을 세 번이나 칼로 그었으나,
레핀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눈은 무사하여 복원된 후 유리로 덮여서 전시되었다.
레핀은 이반 뇌제의 눈을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보는 사람을 바라보도록 그리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섬뜩한 전율이 느껴진다.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과연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레핀은 N.M.카람진(1766-1826)의 러시아 역사에 관한 저서 <<역사>>에 근거한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에는 이반 뇌제가 그 아들 이반을 죽인 내용을 러시아에 왔던 로마 교황의 사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하였다.
1581년 11월 9일 모스크바 근교의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마을)에서 이반 뇌제는 며느리의 처소에 우연히 들렀다가
임신한 며느리 엘레나 쉐레메치예바 (황태자 이반의 세 번째 아내였는데,
이반 뇌제는 아들의 첫 번째 두 번째 부인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버렸다)가 옷을 하나만 걸친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귀족의 예절로 여인들은 보통 3개 이상의 겉옷을 입어야만 했다) 구타하기 시작했다.
황태자 이반은 아내를 보호하려다가 아버지가 쇠 지팡이로 내리쳐 관자놀이를 맞게 된다.
그 결과 다음 날 밤 며느리는 유산 하고, 아들은 열흘 뒤인 1581년 11월 19일 사망(27세)하게 된다.
이반 뇌제는 그 충격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고, 다시는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생활 연구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그 당시 모스크바에 있지도 않았던 로마 교황 사절이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절에 어긋나게 옷을 하나만 입었다고 황제가 분노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아무리 황족이지만 자신의 처소에선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이 없었고,
황제라 하더라도 외간 여인의, 그것도 며느리의 거처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 궁중 예법이라는 반박이다.
그들은 <<연대기>>에 적힌 내용을 근거로 황태자 이반의 죽음을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반 뇌제는 최초로 ‘차르’란 명칭을 쓴 황제다.
‘짜르’는 케사르(시저)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는 3세 때 아버지가 죽었고, 8세 때 어머니마저 사망하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권력을 둘러싼 왕족과 귀족들 간의 살인, 간계, 폭력 등을 보며 자랐다.
그런 환경은 그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모든 사람을 의심하였고,
쉽게 적개심을 품었으며 잔인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로즈느이(groz는 우뢰를 뜻함,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라는 칭호를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귀족들이 맘대로 휘둘렀던 권력을 황실 친위대를 창설해 중앙 집권을 꾀하면서 그 전횡이 너무 심하였고,
노브고로드 대학살을 감행했기 때문인 것 같다.
황실친위대는 수도사처럼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말 안장에는 빗자루(배신자를 쓸어버리기 위해)와
개의 머리(배신하는 놈들을 갉아 먹어 버리기 위해)를 달고 다녔다.
이반 뇌제는 귀족들의 세습영지를 강제로 몰수해서 친위대 소속의 궁중 귀족들에게 넘겨 주었는데,
그에게 반대했던 노브고로드가 리트비아 편으로 넘어가려 한다고 의심을 하고
1570년 1-2월 노브고로드 원정을 직접 지휘했다.
모스크바에서 노브고로드까지 모든 도시들이 강탈당했다.
3만 명 정도가 거주했던 노브고로드에서 희생자가 1만-1만5천명이었다고 전한다.
1570년 노브고로드 학살 때부터 부자간의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반 4세는 첫 부인의 소생이었던 장남 이반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군사교육을 포함한 후계자 교육을 시켰다.
황태자 이반은 13세 때 아버지와 함께 리보니아(현재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 전쟁에 참여하였고
노브고로드 원정도 동행했다.
그러나 황태자 이반은 황실친위대(오프리치나)의 횡포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1581년 8월에 폴란드 왕은 프스코프를 포위하였는데,
이반 뇌제는 리보니아 전체를 폴란드에 양보하면서까지 폴란드와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황태자 이반은 폴란드와의 화친에 반대하여 싸우려고 했고, 군사령관들도 황태자를 지지하였지만
이반 뇌제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안드레이 쿠르프스키(변절한 귀족)공에게 보낸 서한(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깊다)에서
“콘스탄틴 왕은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아들마저도 죽였다”고 썼는데,
이것을 자신의 계획에 대한 합리화로 간주하기도 한다.
1581년 11월 9일 한 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들이 아파서” 알렉산드로프 슬로보다에서 나갈 수가 없다고 썼다.
열병이라고도 하고 간질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치료를 위해 양 젖, 곰 쓸개즙을 먹이기도 했고, 연기를 쐬기도 했고, 고추냉이와 마늘을 갈아서 가슴에 얹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궁중 의사들과 약사들이 있었고,
이반 뇌제에게는 두 명의 외국인(이탈리아인 한 명, 네델란드인 한 명) 주치의가 있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치료했다는 것이다.
결국 10일 후 11월 19일 황태자 이반은 사망하고 동생 표도르가 황태자가 된다.
크레믈린의 아르한겔스크 사원에서 이반 뇌제와 아들들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황태자 이반의 뼈에서 치사량의 수은이 발견되었는데, 뼈에서 발견된 비소의 함량은 허용량의 3,2배나 초과되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독살이나 만성적 음독에 의한 죽음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반 4세 즉 이반 뇌제는 폭군이었지만 교양 있고 학식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고 많은 서신들의 저자였다.
그런 그를 아들을 죽이는 광인으로 내몬 이유가 단정치 못하게 옷을 입은 며느리 때문이었다는 것은
일반인이 봐도 좀 납득이 안 간다.
사람을 자식마저 못 알아보게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권력욕일까? 광기일까?
권력욕으로 천륜을 끊고 아들을 죽인 후회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절규하는 그의 눈빛은 이미 온전치 못할
그의 여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1584년 3월 17일 이반 뇌제는 54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었는데, 측근 귀족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네델란드 상인 이사악 마사가 회고록에서, “벨스키(비밀 업무 외에도 황제의 건강도 책임지는 귀족이었다)가
이오간 에일로프(궁중 네덜란드인 의사)가 처방한 음료에 독을 넣어서 바쳤다”고 썼다.
며칠간 말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 있다가 인사불성이 되어 아들 이반을 부르며 죽었다고 전한다.
그 누구도 차르를 이런 모습으로 그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인민의 의지당’에 대한 피의 보복이 있었던 당시에는
반대자나 찬성자 모두에게 비인간적 전제에 대한 폭로와 저항으로 비쳐졌다.
전시뿐만 아니라 모사도 금지되었지만,
트레티야코프의 노력으로 개인 미술관에 보관되다가 일반에 전시 되었다.
‘나 어떡해’ 하며 보는 이를 응시하는 이반 뇌제의 핏발선 두 눈이 이제는 소용없는 용서를 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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