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4. 08:29ㆍ책 · 펌글 · 자료/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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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와 그의 제자 만공이 길을 갔다.
그들은 이미 빈털털이였다. 몇 푼 준비했던 노잣돈은 벌써 술값으로 탕진하고 없었다.
하지만 경허는 주막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경허는 주막에 들어서자 방 하나를 차지하고 기세 좋게 술을 시켰다.
그리고 만공에게 말했다. "종이와 붓을 꺼내라"
만공은 스승이 시키는대로 종이와 붓을 꺼내고 먹을 갈았다.
'단청불사 권선문(丹靑佛事 勸善文)'
그리고 밑에다가 그럴싸하게 몇 자 적었다.
"만공아, 가서 동네 한바퀴 돌고 오너라."
그리고 한 시간쯤 후에 만공이 돌아왔다. 경허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추운데 고생했다. 어서 와서 한잔 하거라." 경허는 만공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주전자 몇 개를 비우고 술이 이마빡까지 달아오르고서야 주막을 나섰다.
동구밖에 이르렀을 때 만공이 따지는 투로 말했다.
"스님, 단청불사에 쓸 돈을 그렇게 주막에서 다 날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 말에 경허는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가?"
만공이 대답했다. "불그락푸르락합니다."
경허가 다시 말했다. "이보다 잘 된 단청이 또 어디 있단 말인고?"
경허의 말에 만공이 맞장구 쳤다. "예, 단청불사 치고는 최고 걸작입니다."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
만공은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라있는 스승 경허를 보자, "스님, 스님께오서 곡차를 드셨으니
그 옛날 천장사에서 법문은 술기운에나 하는법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십니다.
이 파전도 마찬가집니다. 굳이 파전을 먹으려하지도 않지만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네가 벌써 그런 무애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내가 전혀 몰랐네. 나는 자네와 다르네.
나는 술이 먹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씨를 구해다가 밭을 갈아 씨를 뿌려 김을 매고 추수를 하고,
그걸로 술을 빚어 먹을 것이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다가 심고 가꾸어서
이처럼 파를 밀가루와 버무려서 기름에 부쳐가지고 꼭 먹어야만 하겠네."
이때의 심정을 만공은 훗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때 스승 경허의 말을 듣는 순간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 견해가 너무 얕고 스승의 경지는 하늘과 같아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
김 진사에게는 18세 난 딸이 있었는데 이따금 어머니랑 함께 경허가 있는 절로 찾아와 불공을 드리러
왔던 모양이다.
경허는 한눈에 반했고 곧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런 얼마 후 딸은 안흥이라는 바닷가 유복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경허는 그 여인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어 산을 내려가 수소문한 결과,
마침내 그 여인이 어느 집으로 시집 간 것까지 알게 되었다.
절로 돌아온 경허는 몇날 며칠을 두문불출하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방안에 칩거한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밤, 경허는 누구에게 오고 간단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불목하니 집에 들러 자신이 입고 있던 승복을 벗어버리고 머슴의 옷을 빌려 입고는 그 도갓집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안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 지금껏 남아 전해지는 소문에 의하면 경허는 일 년여 머슴살이를 하면서 남의 눈을 피해
그 새색시와 정분을 나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인호 소설, 『길 없는 길 3』p105~ 요약)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윗 글들은 소설이라기 보다 널리 알려진 일화를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글도 또 있습니다.
아래는 한중광, 《경허, 길 위의 큰스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과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주장자를 꺾어버리고 산을 내려온 이후 경허는 법상에 올라 대사자후하여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바로 드러내는 한편
방방곡곡에 선원을 개설하여 선풍을 떨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긴다.
기행과 무애행에 얽힌 선화(禪話)들이 아직도 선방에서 저자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일화가 후세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오면서 진실과 다르게, 또는 창작된 것도 있어서
진실여부는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100여년을 구전되어 온 어떤 일화를 듣고서 함부로 경허를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처와 조사를 비방한 죄를 어찌 감당하랴.
경허의 무애행은 화엄경의 53선지식과 도인의 81행을 다 담고 있으며,
무애행 낱낱이 확철대오한 대무심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니,
범부 중생의 상견이나 사견으로 시시비비하는 것은 마치 술잔으로 바닷물을 잔질하고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다.
실로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칠백 공안의 격외도리가 살아 숨쉬는『경허집』과
경허의 법제자들인 혜월 침운 만공 한암의 진면목을 바르게 볼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서 경허를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란 매우 어렵다."
경허의 무애행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며, 만약 확철대오해서 불조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하고서 함부로 흉내를 낸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봉선사는 <산방야화>에서 큰 잘못임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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