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과 굴뚝 (최순우)

2010. 5. 22. 13:40책 · 펌글 · 자료/문학

 

 

 

담장

 

 

 

 

‘우리 나라의 담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원시적인 역할 이외에

나와 자연을 경계 지으며 자연 속에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준다.

자연 세계와 나의 세계는 담으로 단절되지 않고 담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감한다.

나의 세계는 자연과 동화되고 그것이 담에 표현되는 것이다.

즉, 밖의 세계와의 차단을 위한 담장이 아니고,

나즈막한 담장을 통해서 담장 너머의 풍광을 안으로 끌어들여

차경의 풍광까지를 담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연 친화적이며

자연과 함께 동화되어 자기의 세계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담장이었다.’ 

 

‘동산이 담을 넘어 들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되고 만다.’

 

담장은 자연 생긴 대로 쉬엄쉬엄 언덕을 넘어가고,

담장 안의 나무들은 담 너머로 먼 산을 바라본다.

한국의 후원이란 모두가 이렇게 자연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테두리 안을 의미할 때가 많다.

궁전의 후원이나 초당의 후원들이 대개는 그러하고

또 동산밑에 자리잡은 촌가의 뒤뜰이 모두 그러하다.

말하자면 이렇게 자연과 후원을 천연스럽게 경계짓는 것이 담장이며

이 담장의 표정에는 한국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소박한 토담의 경우도, 우람한 사고석(四鼓石)담의 경우도

모두 지세 생긴 대로 층단을 지으면서 언덕을 기어넘게 마련이어서

산이나 언덕을 뭉개기 좋아하는 요새 사람들의 생리와는 크게 마음이 다르다.
담장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폐쇄적이라고 섣불리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 정서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다지 높을 것도 없고 그다지 얕지도 않은 한국 궁전이나 민가의 담장들에 들어 있는 마음은

숨막히게 높거나 답답한 공간을 에워싼 중국의 담장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굴뚝    

 

 

 

 

 

'연가(煙家)'라 하면 연기나는 집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상은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굴뚝 위에 얹어 놓은 부재의 일종을 일컫은 고유한 명사이다.

이 연가는 진흙으로 빚어 구워낸 사방 30cm 내외의 조그마한 기와집 모양의 도예품으로

벽돌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네모 굴뚝 위에 한 개 또는 복수로 얹어 놓아서

굴뚝 연기가 그 네 벽에 뚫린 창모양의 구멍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굴뚝에 씌우는 지붕 구실과 연기의 솟음을 고르게 하는 바람받이도 될  뿐더러

그 생김새가 잘생겨서 굴뚝치레로서는 매우 성공적인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굴뚝 쌓기에 남달리 정성을 들이고
또 그 굴뚝이 후원의 조경에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전통은

한국 독자적인 양식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온돌방 구조에서 발생된 한국인의 창의였다.

궁원은 물론이고 적어도 중류 이상의 조선시대 주택에는 반드시 남향받이 밝은 후원이 있게 마련이고

이 후원에는 으레 집 본채에서 썩 물러나서 세워진 벽돌 굴뚝이 훤칠하게 세워지게 마련이다.

이 벽돌은 양풍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이었고 이 벽돌을 맵시있게 쌓기 위하여

벽돌의 면과 네 측면을 모두 매끈하게 갈아서 썼으며

그 네모 굴뚝의 굵기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쾌적해서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나의 정원 조각 같이도 보이게 마련이다.

이 굴뚝은 하나 세워질 때도 있지만 주택 구조와 규모에 따라서 복수로 세워지기도 한다.

때로는 후원이 넓으면 층단으로 된 장대석 돈대 위에 멀찍이 세워져서

저녁 연기에 때 맞추어 석양의 시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에 민족도 많고 나라도 많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굴뚝치레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큰 돈을 들이는 족속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굴뚝 기단은 으레 아백의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받쳤으며

사람의 시선 높이의 알맞은 부위에는 백회와 회색 벽돌, 때로는 주황색 벽돌로

길상문자나 장생류의 도안을 모자이크해서 굴뚝 하나가 그대로 작품으로 보일 때가 많다.

이러한 조선의 굴뚝도 이제 양풍에 밀려서 서울 장안에서 하나하나 그 명작이 자취를 잃어
가고 있다.

어쩌다가 뜯기는 집이 있어서 이전 복원을 꾀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은 거의 성공된 예가 드물다.

말하자면 조선인들은 그만큼 굴뚝 쌓기에 정성을 들였고 구석구석 소홀한 데가 없어서 요즘의 범장(凡匠)으로서는

그것을 복원하기에도 안목과 손재주가 모자라는 까닭이다.

굴뚝뿐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은 화초담 하나에도, �돌 한 토막의 죔새에도
자신의 지체를 가릴 것 없이

그 좋은 안목으로 손수 감역을 했던 것이다.

얼마 전 소전 손재형 씨 댁 후원에 쌓인 굴뚝들과 홍예문·화초담 등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안목으로는 이분을 따를 분이 또 없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언뜻 굴뚝 이야기를 써 둔다.

 

 

-최순우-

 

 

 

 

 

 

 

 

우리의 담장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연동화적인 면도 있지만

'관음증과 노출증'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런 쪽으로 글을 한번 써보고 싶어서였는데, 

예전에 어디선가 (청산도가 아니었나?) 바다를 향한 허룸한 집 한 채에

다 허물어진 토담벽과 닫으나마나한 사립문이 이상하게도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서

이번 기회에 그 사진을 다시 찾아보려고 뒤져봤는데, 통 못찾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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