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2010. 2. 28. 10:47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제사는 큰집에서 모시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옛날에 큰아버지가 아버지한테 그러셨답니다.

"제사는 내가 다 알아서 모실테니 너는 족보만 찾아오니라" 구요. 

아니, 족보는 족보고, 제사는 제사인 것이지,

제사 지내는 대신에 족보를 찾아오라니요? 안그렇습니까? 

어쨌든지간에 그래그런지 제사는 우리 큰집이 제대로 합니다.

초저녁에 적당히 지내지 않고 딱 귀신이 나타나는 시각, 자정에 지내구요,

제물(祭物)도 최소한 기본 나가리 다 올려놓습니다.

 

 

우리가 족보를 잃어버리게 된 싯점은 제 증조부때인가 봅니다.

원래 조상들은 평양에 살았답니다.

고조부니 왕고모니 윗조상들의 묘가 모두 평양 근처에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어떤 연유로 해서 평양에서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와 살 게 되었는지는

아버지도 모르시겠답니다.

오해 마십시요. 임꺽정이가 활약하던 시기까지는 안 올라가니까요. 

 

 

족보를 잃어버린 걸 보면 그만큼 어렵게 살았다는 방증인데요,

('족보책'이 아니라 '족보 등재'가 어디에 되어있는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돈을 안 내서, 아니 못 내서 그렇습니다. 

어느 성씨(姓氏)고 30년마다 족보를 새로 낼 겁니다. 그게 한 세대거든요.

그러니까 30년마다 새로 태어난 후대(後代)들을 신청받아서 족보에 새로 기입한다는 말입니다.

책을 새로 만들고, 배포하고, 등등의 비용이 드니까 당연히 돈을 요구하는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30만원을 내시는 걸 보니까 결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물론 큰집은 큰집대로 따롭니다. 

그 당시엔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도 30만원이면 벅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솔직히 요즘 시대에 족보 뒤져가며 결혼시키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생활에는 아무런 소용도 되지 않는 것이 족보인 셈인데,

그러니 돈을 잘 안 낼 겁니다.

없어서도 안 내고, 몰라서도 안 내고, 필요없다고 안 내고, .... ,

 

 

각설하고, 아무튼 우리도 그 돈을 못 내서 족보를 유실하게 되었단 얘기인즉.

그렇다면 나중에 돈을 내고 찾으면 될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게 또 아닙니다. 이름을 알아야 찾을 것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냐구요?

아녜요, 그러기가 쉽습니다. 저도 할아버지 이름자가 생각이 났다 안났다 합니다.

흉 볼 것 없습니다. 

어려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부모가 챙겨주지 않으면 백발백중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자 그러니 조상님들 이름을 모르고서야 찾을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그래도 똑똑하신 분입니다.

제사때 지방에다 '현 고조비 유인 은진 송씨 신위' '현 증조비 유인 강릉 함씨 신위'라고 썼던 걸

떠올리신 겁니다.

그러니까 고조부 증조부님의 함자는 몰라도 고조모님 증조모님의 성씨는 알았다는 얘기지요.

고조 할머니가 은진 송씨, 증조 할머니가 강릉 함씨, 바로 이것이 유일한 단서가 된 셈입니다.

 

 

우리가 그 유명한 전주 알씨 효령대군 손입니다. 전주 알씨 중에서도 효령대군 손이 세(勢)가 제일 큽니다.

그러니 족보가 얼마나 방대하겠습니까?

서울 동작동인가 방배동에 <청권사>라고 있습니다.

거기가 효령대군 총본부인데, 모든 족보의 원본을 보관 관리 발간하는 곳입니다.

저는 내부에까지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답니다. 

아버지가 거길 찾아가서 사정얘기를 솔직하게 했더니, 알아서 찾으라더랍니다.

3년인가 5년인가를 서울 오르내리며 뒤지셨습니다.

한 달에 한 두번씩 가셨으니까 수 십 번을 가셨습니다.

제가 19대손(孫), 아버진 18대손(孫)이니까,

15대손 중에서 배우자가 송씨인 사람,

거기에 이어서 다시 16대손 중에 배우자가 함씨인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아니 불가능하지요.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입니다. 

찾아낼 턱이 없지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수 년간을 그렇게 딱한 짓을 하고 다니시니까

청권사 직원들까지 나서서 거들어줬다는데, 그들이라고 해서 뭔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중엔 그러더래요,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줄테니까 (자손이 끊어진 집을 말하겠지요.)

돈을 얼마 주고 그 집 가승(家乘)에 이어붙이라고요.

 

 

그 이후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큰아버지도 내막을 듣고는 망연자실하시고 아버지보고 알아서 하라고만 하시더랍니다.

당시에 아버지 혼자서 모든 짐을 지시고 맘고생하시는 걸 제가 다 지켜봤습니다.

하 답답하시니까 제게도 의견을 구하시는데, 저 역시도 이렇다 저렇다 말씀 드리기가 어렵더라구요.

결국엔 뉘 집 가승에 붙이기로 내심 작정을 하시고는,

 (그동안 아버지께서 암암리에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협의를 다 마치셨던가 봅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찾아보자 하면서 서울을 올라가셨는데,

정말로 기적같이 찾으셨다지 뭡니까.

꿈인가 생신가 싶고, 얼마나 감격하셨겠습니까? 청권사 직원들을 얼싸안고 막 우셨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뒷 얘기가 좀 더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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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아버지가 족보를 베껴오셔서 만든 우리집 가첩(家牒)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직접 쓰시고 손수 만드신 겁니다.

아버지가 저보고 보관하라 하셨습니다.

 

 

 

 

 

   

 

  

 

 

아래에  기영(基英)으로 나와 있는 분이 제 6代祖이시고, 수우(壽宇)로 쓰신 분은 제 고조부님이십니다. 

고조부님까지 내리 5代인가 6代를 독자(獨子)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니 친척이 없지요.

두 분 묘(墓)가 평안도 평원군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평원군은 평양을 아우르는 郡 이름이었답니다.

맞습니다. 고조부님까지 평양에 사셨다는 얘기가 맞네요.

 

 

 

 

 

 

 

 

 

 

아래에 '청의(淸儀)'자 쓰시는 분은 제 증조부이신데,

강원도 인제에 산소가 있습니다.

- <내 얘기>앞쪽에 '내고향 인제'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조부 때에 강원도로 옮겨온 것이로군요.

제 할아버지 함자가 起자 殷자 쓰시는 분입니다.

저도 이제 외워둬야겠습니다. 증조모님은 청풍 김씨, 할머니는 순흥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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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바로 아버지가 그 고생끝에 손에 넣으신 우리집 족보입니다.

 

 

 

 

 

 

 

 

 

 

 

 

 

 이건 부록입니다.

 

부모님 안방에 걸려있는 사진 액자입니다.

좌로부터 제 네 댓살때 찍은 가족사진,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입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순서로 보아서 증조 할머니인 모양입니다.

청풍김씨라 하셨는데, 근데 어째 좀 이상합니다.

'청풍'이라면 경상도 그 청풍을 가르킬텐데...

... 우리도 다문화 가정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