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석 <인도기행> 등

2008. 12. 10. 10:05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아부산 딜와라 寺院群 

 

막상 들어가니 그곳은 라나크푸르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라나푸르의 사원 내부가 너무 장엄하여 한눈에 그 구조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면,

이곳은 라나크푸르 사원의 그 방대함을 가늠하기에 딱 알맞다.

아마 라나크푸르 사원을 들르지 않았다면, 이 딜와라 사원의 내부 조각과 장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 정승석, 인도기행 -

 

 

 



 

 

 

 반룬 『예술사 이야기』중에서

 

인도를 처음 찾아간 유럽 사람들이 인도 예술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도의 풍물을 보면서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잘 보았다면 인도의 조각이 그리스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도 예술이 피라미드보다 수천 년 앞서서 이루어진

신비로운 예술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서방 세계에서는 호메로스 시대에 이미 문학작품이 많이 만들어진 데 비해 초기 인도 건축은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올라갈 뿐이다.

 

어쨌든 서기 5세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져갈 무렵에 불교 예술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반면에 고대의 힌두신들은 회교도가 침입해온 서기 10세기까지 예술을 지배했다.

그 다음에 회교가 독자적인 예술을 인도에 소개했다.

2백 년 동안 존속했던 무굴 제국은 나름의 독자적인 건축 양식으로 인도 서부를 덮었다.

 

당시 건축가들의 솜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는 타지마할(Tàj Mahal)이다.

타지마할은 17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서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인 뭄타즈 마할,

즉 ‘궁정의 고귀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묘다.

 

이런 사정을 보고 혹시 회교 예술이 인도 토박이 예술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힌두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자기들의 힌두 사원에 충실했다.

 

사원에는 흔히 넓은 안마당과 목욕탕, 꼭대기에서 밑둥까지 무수한 신상을 새긴 금빛 탑과

아무리 보아도 바위 무덤처럼 보이는 어두운 동굴,

신성한 동물, 별로 신성해 보이지 않는 신들, 신통찮은 여신들의 상이 있었다.

이들 광대한 신전은 도시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크며,

그것과 비교해보면 서양의 고딕식 교회는 매우 단순하고 시시해 보일 정도지만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암만해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신전은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면 죽음이 임박한 듯한 기분을 들게 하고

준엄한 자연의 힘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쓸모없는 짓이라고 설교하는 것 같다.

 

빛이 환하게 비치는 목욕탕은 신전 내부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지붕 전체에 입힌 금박이나 신들의 상에 박은 보석으로

이 음침한 무덤에 우글거리는 불구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세우는 것이 훨씬 더 값질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여기저기에 있는 조각상도 좋은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조각들이 뒤틀리고 꼬인 형상을 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게 하려고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기술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조각의 주제인 브라마, 비슈누, 시바를 비롯하여 한없이 많은 그들의 사촌, 아저씨, 형제, 자매 따위는

경내를 오가는 더러운 원숭이나 반쯤 굶주린 소보다 조금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 예술에 접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변해버린다.

믿을 만한 권위자에게 들어보니 (나는 이 방면에 아주 무식하므로)

인도인은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 강변으로 진격해옴으로써 그리스 문명과 접촉했고

그 뒤에 비로소 돌 깎는 예술을 배웠다고 한다.

 

실제로 불교 조각은 붓다가 죽은 뒤 수백년 지나 불심이 깊은 아소카 왕이 펀잡을 지배하면서 비로소 꽃피웠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응달도 없는 공터에서 명상할 때에 일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산 달팽이의 관을 쓰고 명상하는 모습을 새긴 전통적인 조각상이 발달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붓다가 젊은 시절에 달았던 귀고리의 무게를 암시하는 그 긴 귓밥도 그때 형성되었다.

또한 제3의 눈, 즉 심안(心眼)을 상징하기 위해 이마에 점을 찍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까지, 즉 힌두스탄 민족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때 묻어온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을 보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붓다의 모습 자체가 표현된 적은 없었다.

붓다는 새나 코끼리 같은 전생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때로는 영원 불멸사상의 상징으로서 강한 불길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 조각가들이 일단 그리스인들의 예술품을 보자 붓다의 모습뿐 아니라

13세기의 이탈리아 화가들처럼 구세주의 생애에서 뽑은 온갖 장면을 즐겨 묘사했다.

 

그들 작품의 가장 좋은 예는 아시아 최대의 두 유적에서 볼 수 있다(아시아는 특히 유적이 많은 대륙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중부 자바의 보로부두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사원은 둘 다 위에서 아래까지 온갖 조각으로 덮여 있으며

그 표현의 정확함과 관찰의 명료함은 서양의 어느 조각가도 따르지 못한다.

 

앙코르 와트는 인도지나 출신으로서 크메르 왕국을 건설할 민족에 의해 12세기에 세워진 것 같다.

크메르 왕국은 12세기에 번성하여 15세기까지 존속했는데,

나타났을 때처럼 신비롭게 멸망하여 이 광대한 유적을 남겼다.

앙코르 와트는 초기에 불교도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나중에 힌두교도가 지배했다.

힌두교도들은 불교도를 쫓아내고 그곳을 비슈누의 예배를 위해서 바쳤다.

이 사원이 언제 버려졌는지, 또 그 광대한 건물이 인적 없는 캄보디아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던 수백 년 동안

몇몇 독실한 승려들이 거기에 기거하면서 예배를 계속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보로부두르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바에 도착했을때

이 건물 전체가 울창한 수목에 덮여 있어서 훨씬 나중에까지 아무도 그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것은 불과 몇 해 전의 일로서 그 전까지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라고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낸 보로부두르는 벽에 조각을 새긴 복도가 부지기수였고 몇천개의 불상을 갖춘 광대한 불교 사원이었다.

초기 불교 포교자나 신도들의 생애를 그린 이 무수한 조각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회교도가 자바를 정복하기 훨씬 전인 것은 분명하므로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이 먼나라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샤를마뉴 시대의 건축가나 조각가의 서투른 작품과 비교해보면

서양의 예술가들은 매우 빈약한 것밖에 새기지 않았으며, 그 자손도 거의 배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불교의 아크로폴리스라고도 할 이 건물과 거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멘두트의 어둑어둑한 사원 속에

천 년 넘게 꼼작 않고 묵묵히 앉아 있던 불상 사이 한가운데에

지저분하고 째째한 기독교 예배당 같은 것을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남경태 『역사』중에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물론 두 문명이 동질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 정치체제, 경제와 무역에서 두 문명은 사실 크게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두 문명의 발생이 독자적이었던 데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탄생기와 초기 성장기가 지난 뒤 두 문명은 한데 묶여 오리엔트 문명을 이루었다.

훗날 이 오리엔트 문명은 바로 서양 문명의 씨앗이 된다.

 

나머지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들은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과 중국의 황허 유역이다.

인도의 경우는 비교적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문명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은 우리에게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화려한 사원과 목욕탕 유적만을 보여줄 뿐

상세한 내용은 남기지 않았다.

 

그럼 인더스 문명은 어떻게 된 걸까?

수천 년을 꺼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던 문명의 빛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게 과연 가능할까?

인더스 문명의 요람인 펀자브에서 메소포타미아가지의 거리는

메소포타미아 중심부에서 이집트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두 지역이 서로 존재조차 몰랐다는게 가능할까?

비록 육로에는 광활하고 험준한 이란 고원이 사이에 있지만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해로라면 더 쉽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양을 헤치며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갔던 갈대배가

동쪽으로 그만큼 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안영배 『인도건축기행』중에서

 

자이푸르에서 우다이푸르까지 밤기차를 탔다.

3시간 정도 갔는데 민가는 거의 보이지않고 겹겹으로 둘러싸인 산악지대만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홀연히 크고 화려한 사원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고,

마치 동화 속의 궁전을 보는 듯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오래전 서인도 지역은 서방의 침략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자이나교도들은 戰禍를 피해 주로 깊은 산 속에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자이나교 사원 중에서 특히 '라나크푸르'사원은  내부공간의 변화가 다양하고

대리석 조각이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이나교의 祖師인 '아디나타'에게 봉헌된 사원이다.

 

천장은 크고 작은 돔으로 이뤄져 높낮이가 바뀌고,

中庭 바닥에 반사된 빛이 내부로 들어와 기둥이나 천정의 화려한 조각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또한 돔 하부의 高窓으로도 햇빛이 들어와

고대건축치고는 내부공간이 유달리 밝고 화려했다.

이처럼 밝고 다채로운 내부공간은 다른 힌두교 사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건물 주변의 회랑 사이로 회유하다보면

공간의 변화가 너무나 다양해서 그 구성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라나푸르 사원의 지붕층에 올라가 보면 다양한 형태의 지붕들이 만들어 낸 특이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옥상에는 지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외부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라나푸르 사원의 공간구성은 자이나교 사원의 四面堂 형식을 중심으로 하면서

힌두교 사원의 공간구성, 만다라 개념 등을 집대성했다.

형태에 있어서도 외형상 비중이 가장 큰 지붕을 보면 힌두교 사원의 첨탑형 사카라와

피라미드형 지붕, 이슬람 건축의 돔, 등이 두루 활용되었다.

또환 토라나의 아치 장식 등에도 각각의 전통양식들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도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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