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6. 14:21ㆍ책 · 펌글 · 자료/역사
광해군과 대동법
더 큰 문제는 국난을 겪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지배층 사대부들이다.
이들과 달리 전란의 잔해를 딛고 즉위한 광해군은 처음부터 기민하게 움직였다.
만주의 정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 그는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지는 해(明)에도,
뜨는 해(後金)에도 치우치지 않는 교묘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더욱 눈부신 활동은 내치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놓아야 농업 생산이 가능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 필요한 재정은 토지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
또한 과전법이 유명무실해졌으니 관리들의 녹봉 체계도 재정비해야만 국가의 기틀이 설 수 있다.
전면적인 국가 재건이 필요한 상황에서 광해군은 대동법이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대동법의 기본 정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그 이름처럼 간단하다.
생산자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모든 조세를 한 가지 품목, 즉 쌀로 통일하는 것이다(이 쌀은 당연히 대동미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대동법은 明제국에서 시행되었던 일조편법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은 조선보다 화폐경제가 발달했으므로 은납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만 다르다).
이전까지 농민이 국가에 내는 것은 편의상 조세라고 통칭했으나
기본적인 田稅를 비롯해 공물, 進上(특산물), 잡세 등등 다양했다.
생활양식이 다양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세금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인다면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고, 무엇보다 부패한 관리가 임의로 착복하기에 유리해진다
(원래 근대 국가로 진화할수록 조세의 납부 방식은 단일해진다).
그런 문제점은 이미 16세기에도 표면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제 개혁의 필요성만 팽배했을 뿐 만연한 당쟁 때문에 뒤로 밀렸고 전란 때문에 또 미뤄졌다.
여야의 정쟁이 민생을 위한 입법 활동을 가로막는 현대 정치와 비슷한 양상이다.
또한 공물과 진상은 국왕에 대한 예우라는 의미가 있었으므로 쉽게 단일화될 수 없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전란으로 모든 게 망가진 마당에 예우 따위를 따질 여유가 없는 데다 유통망이 발달한 탓에
지방의 특산물 정도는 왕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세제를 통일할 조건은 충분하다.
과연 대동법이 실시되자 과세의 표준이 확립되었고, 지방관들의 농간도 줄어들었다.
탈세의 여지도 적어졌고, 면세지가 줄어 국가재정이 강화되는 당장의 효과도 있었다.
아울러 조세품목이 쌀로 단일화됨으로써 장차 화페경제의 도입을 가능케하는 장기적인 효과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려면 무엇보다 토지 측량, 즉 量田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국 초기에 실시된 토지조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오래전에 유명무실해졌다.
그렇잖아도 임진왜란으로 경지의 지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광해군 시대에는 중부 지방부터 양전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대동법도 점차 단계적으로 실시되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대동법은 이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세제로 기능하게 된다.
이런 광해군의 대내외적 개혁은 부도가 난 국가를 회생시키려 한 것이었으나 사대부들의 걱정거리는 달랐다.
광해군의 눈부신 활약을 목격한 사대부들은 오로지 조선이 왕정으로 복귀할지 모른다는 것만 걱정했다.
광해군은 왕당파를 형성해 대항했으나 아직 조선은 '사대부 국가'였다.
결국 그들은 광해군을 제거하고 허수아비 군주로 인조를 옹립했다.
명칭은 반정反正이지만 무엇이 '정正'인지 판단하는 것은 사대부들이다.
잠깐 동안의 왕정복고를 뒤로 하고 다시 집권한 사대부들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렸다.
특히 광해군이 이룩한 대내적 개혁의 성과는 그대로 가져갔으나 대외적 노선은 정반대 방향으로 유턴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지는 해라도 明제국은 영원한 事大의 대상, 중화세계의 본산이다.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뜨는 해라도 후금은 배척해야 할 영원한 오랑캐일 뿐이다.
문제는 그 오랑캐가 동아시아 세계의 새로운 주역, 뉴스타로 떴다는 데 있다.
- 남경태 『역사』 P 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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