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8. 18:05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글 사진. 김남희
서울에 돌아와 책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자주 까뮈의 말을 떠올렸다.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쓰지 않는다는 작가가 있다면 칭찬하자.
그러나 그 말을 믿지는 말자."
여행기를 써서 여행하는 처지가 된 지금,
나를 위한 글과 남을 위한 글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고 위험하다.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이 책을 읽어줄 이들에게 떠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망 또한 강렬했다.
무엇보다 여행이 가진 긍정의 힘을 전하고 싶었다.
여행을 통해서야 겨우 배워온,
나를 긍정하고 타인을 긍정하고 현재를 긍정하는 법을.
차 한 모금 마시고 산 한 번 바라보고, 또 차 한 모금 머금고 산에 눈길 한 번 주고…….
차 맛이 그윽해진다. 밤도 깊어간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이대로 완벽한 하루가 저물고 있다.
걸을 때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아진다.
걷는 동안 나는 세계의 관찰자가 아니라 세상의 일부가 된다.
풍경 속으로 들어가 풍경이 된다.
걸을 때 내몸은 진화한다.
걷다 보면 발이 절로 나아가는 순간이 온다.
내 의지로 몸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든 동작에 어떤 무리도 따르지 않는다.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다.
흐르는 물과 같다.
길은 계곡을 향해 가파른 내리막으로 뻗어 있다. 외줄기 먼 길이다.
첩첩한 산들에 가로막혀 길 너머를 가늠할 수 없는.
어디로 가는지도,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계속 갈 뿐이다.
산다는 일도 이와 다름없으리라.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내가 섣불리 환호하거나 깊이 좌절하는 일 없이, 그저 묵묵히 걸어갈 수 있을까.
그 시절 나는 철없이 어리기만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바닥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다.
몸과 마음을 더불어 나누는 사이에도 저마다의 강물이 흐르고,
때로는 건널 수 없는 강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오래도록 함께 늙고 싶었던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밝아지다니.
인생은 때때로 잔인하고,
깨달음은 늘 뒤늦게 찾아온다.
여행자가 바라보는 일상은 언제나 아름답다.
지나가는 이가 들여다보는 일상은 정겹고 훈훈하기만 할 뿐,
거기에 생활의 고단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곳 이탈리아에서도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예쁘게 꾸며진 시골집들을 들여다볼 때
어떤 어두운 면도 보이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이런저런 갈등도, 불안정한 직장도, 불안한 노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꽃이 활짝 핀 정원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져가고,
생활의 습기를 걷어낸 보송보송한 평화만이 보일 뿐.
집을 짓지 않고 유목하는 자에게 세상은 조금 더 가벼운 걸까.
꿈으로 현실을 견뎌가는 일은 슬픈 걸까, 위안인 걸까.
저녁 빛이 앞산에 가득하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정말이지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은 세계 최고! 경쟁자가 없다.
가게마다 저마다의 오랜 비법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때문에 같은 맛이 하나도 없고,
어느 집이나 맛이 빼어나다.
15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샤모니는 여전히 예쁘다.
이제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아닌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에는>이 꽂히는 나이가 되어, 다시 샤모니로 돌아왔다.
그 시절에 비해 몇 가지 변한 게 있다.
나는 이제 산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곳이 산악인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을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감성의 더듬이는 조금 무디어진 대신 세상을 향한 시선은 더 따뜻해진 나이가 되었다.
또 한때 사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의 위험성도 알게 되어 기대를 품지 않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사실 스코틀랜드 날씨는 딱 두 가지야.
비가 내리고 있든가,
곧 비가 내릴 예정이든가."
오늘은 세 시간 걷고 짐을 푼다.
호수 옆 외따로 선 작은 호텔 인베러런을 본 순간, 그만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어여쁜 풍경 속에서 쉬지 않으면 어디서 쉬리.
호수 뒤로 펼쳐진 숲과 나지막한 산들,
외줄기 길 위의 하얀 집 한 채가 몽환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만 울고 싶어질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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