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출세작》

2021. 7. 31. 17:14미술/미술 이야기 (책)

 

2019. 12. / 저자 이유리 (경향신문기자)

 

 

목차

프롤로그



1부  압도적 신세계


월드 스타가 사랑한 ‘르 스틸 뮈샤’ | 알폰스 무하 (1860-19390

 

 

출세작 : 연극 <지스몬다> 포스터 (1894년) 채색 석판화 74.2 X 216CM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들에게 계몽하기 좋은 수단이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것이다.

 


나는 사회의 한계점에 살고 있어요 | 타마라 드 렘피카 (1898-1980)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 1927년. 80.8 X 130cm / 1927년 보르도 국제미술전 1등 수상

 


아웃사이더의 기묘한 왕국 | 헨리 다거

 

스크랩 아웃사이더아트 헨리 다거(1892-1972

rose 장혜숙 추천 0 조회 65 09.01.21 16:35 댓글 0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s://cafe.daum.net/exhibitionclub/6MQ6/3386?svc=cafeapiURL복사

 

죽은 뒤에야 놀라운 화가이자 괴이한 소설가임이 밝혀진 헨리 다거(1892-1972)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 다거는 아웃사이더 아트(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말한다)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지만, 생전의 그는 81세의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아무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살짝 정신나간 노인네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거의 단칸방에서 발견된 수백 여장의 아름다운 수채화 연작과 15,000여장에 달하는 길고 긴 이야기의 타자원고는 예술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초-장편 서사였고, 이후 다거와 그의 노작은 소수의 예술애호가들에 의해 때늦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다거가 평생에 걸쳐 구축한 복잡다단한 전쟁의 세계는 지구보다 수천 배 큰 가공의 혹성에서 시작된다. 신을 섬기지 않는 글렌딜레니아의 군인들은 고귀한 소녀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는데, 이들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연상케 한다. 반면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우는 7명의 비비언 소녀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임에도 종종 옷을 걸치지 않은 채 등장하곤 하는데, 묘하게도 모두 조그마한 자지를 달고 있다. 길고 긴 종교전쟁의 주역들은 모두 허매프로다이트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동양적 색채의 용을 비롯한 여러 괴물들은 낯설게 아름다운만큼 행동과 기질 또한 기이하며, 폭풍을 몰고 오는 구름과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소녀들의 낙원은 (종종 소녀살육의 처참한 지옥으로 변화하긴 하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카데미 수상자인 제시카 유 감독의 다큐멘터리 [비현실의 제국에서: 헨리 다거의 수수께끼]는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적잖은 공과 돈을 들여 만든 보기 드물게 아리따운 노작이다. 그러나 공을 들인 만큼 결과가 성공적이지는 않다. 감독은 헨리 다거의 판타지 세계를 영화적으로 재현하고자 과욕을 부린 나머지 작가의 거의 모든 그림을 애니메이션화한 그림들로 치환해버렸으며, 전문가들을 불신한 나머지 연구자들은 배제하고 이웃들의 증언만을 다뤘다. 다코타 패닝을 동원한 비비언 소녀의 나레이션과 목소리로 연기한 다거, 이웃들의 엇갈리는 증언은 7명의 애니메이터의 손을 통해 동영상이 되어버린 다거의 그림들과 한데 어울려 결국 "감독이 이해한 다거의 세계"만을 재현해낼 뿐이다. 특히, 작위적으로 비밀스런 소녀들의 분위기를 연출하려드는 제프 빌의 음악은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고로 눈밝은 관객들은, 아쉬움을 마음에 품은 채,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이 제작중인 다거에 관한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출처: 갤러리하늘명SkyMyung 원문보기 글쓴이: 이명숙

 

헨리 다거 (Henry Darger)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언급된 세 사람의 화가 중 가장 어린 나이인 8살에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헨리 다거. 하지만 그는 16살에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대모의 도움으로 카톨릭 병원에 일자리를 얻고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한다. 그는 작은 쪽방에서 죽을 때까지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으며 집주인에게 죽고 나면 작품을 모두 없애라고 유언하였으나, 주인이 다행히 버리지 않고 남겨두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얻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Unreal )" 라는 15,145페이지에 달하는 글과 삽화로 된 작품집을 남겼는데, ‘비비안 걸즈(Vivian Girls)’라는 소녀들의 활약을 그린 내용으로, 전쟁에서 어른들로 구성된 적의 손에서 어린이 노예들을 구하는 용감한 군인 소녀들 이야기이다.

그의 그림들은 언뜻 아름다운 색채에 소녀들이 자연에서 뛰노는 모습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끔찍한 폭력과 학살, 고문 등으로 얼룩져 있다.


출처 – ‘Hyper Allergic’

출처 – ‘Vincent Borrelli’

출처 – ‘Kids of Dada’

출처 – ‘Art Space’

출처 – ‘SF Gate’

출처 – ‘Phaidon’

출처 – ‘Chicago Reader’

출처 – ‘Tarnmoor’

헨리 다거의 방, 출처 – ‘Di Today’

 

 

 


튈 수만 있다면, 남달리 보일 수만 있다면! |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음산한 유희> 1929. 판지에 유화와 콜라주

 

1929년. 25살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에스파냐에서 꽤 촉망받는 예술가였다. 바르셀로나 달마우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프랑스 파리 화상인 카미유 괴망스의 눈에 띄었고, 그 결과 곧 파리 예술계에 진출할 터였다. 달리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 <나는 세상의 배꼽이다>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그럴 즈음 나는 갓 전속계약을 맺었던 화상 카미유 괴망스의 전보를 받았다. 계약조건은 3천프랑에 나의 여름 작업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1929년) 9월이 되면 그의 화랑에서 내 작품들을 전시하고 나는 판매가의 일정 비율을 받기로 했다. 하여간에 그는 3천프랑으로 내 작품 석 점을 골라서 소유할 수 있었다. (…) 아무튼 온다는 전보를 보냈던 괴망스가 피게라스(달리의 고향)에 도착했다. 그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내 그림 <음산한 유희>를 보고 열광했다.”달리는 괴망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예술에 더욱 확신을 얻었다. 자신감 넘치게 붓을 휘둘러 완성한 이 그림은, 이후 거대한 스캔들을 몰고 오게 된다. 그리고 달리는 순식간에 파리 화단의 주목과 악평을 얻게 됐다. 도대체 <음산한 유희>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까.

 

그림 중앙에는 여성의 신체가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낱낱이 해부돼 그 파편들이 허공에 어지럽게 분출한 상태다. 희한하게도 여성의 몸은 메뚜기·자갈·달팽이·음부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그녀의 신체를 가리키는 커다란 손이 왼쪽에 보인다. 이 손의 주인은 그림 왼쪽에 서 있는 동상. 동상은 다른 쪽 손으론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동상 기단에 걸터앉은 벌거벗은 남성이 동상의 성기를 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가 보인다. 바지는 어디로 내버려 두고 속옷만 입고 있는 남자는 괴상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그의 더러워진 속옷이 이상하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이 남자는 감상자들에게 아주 대놓고 자신의 ‘배설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당시 달리는 이미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 객관과 주관을 구분 짓지 않는 ‘초현실주의’의 촉망받는 기린아였다. 초현실주의 특징은 일체의 선입견과 논리, 도덕을 초월해 예술을 표현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배설물이 묻은 속옷을 입은 남자를 묘사한 부분은 동료 초현실주의자마저도 동요시켰다. 사람들은 달리가 배설물을 통해 성적 욕망을 충족하고 심지어 배변을 먹는 변태성욕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식분증(食分證)은 초현실주의자들조차도 참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달리는 이 같은 논란을 이미 예상하고, 단지 유명해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변을 그림 속에 등장시켰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가 배변을 먹는 사람인지 아닌지 해명을 하지 않을수록 더욱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 테니까.이 모든 소동에도 1929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달리의 첫 번째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 모두 11점의 작품이 개인전에 걸렸는데 거의 전부가 6천프랑에서 1만2천프랑 사이 가격에 팔렸다. 스캔들을 일으켰던 <음산한 유희>마저도 노아유(Noailles) 자작에게 팔렸다. 이렇게 달리는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동시에 초현실주의그룹으로부터 정식회원으로 인정받게 됐다. 달리는 훗날 <어느 천재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적었다.“내 작품을 처음 본 브르통(Breton, 초현실주의 주창자)은 분변학적인 요소에 두려움을 느꼈다. 놀라웠다. 나는 똥으로 데뷔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말해, 이것은 내게 황금을 가져다줄 행운의 전조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분변적인 요소가 이 운동에 부(富)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초현실주의자들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아량 있게 권한 똥을 마다한다면 그 보물을 나 혼자서 갖는 수밖에.”똥이어도 좋았다. 그 똥이 황금을 부를 수만 있다면! 달리는 스캔들과 논란을 불러일으켜 자신을 팔아먹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달리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도덕과 상식을 벗어난 그의 행동은 모두 예술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라는 사상이 달리의 행동을 모두 감싸 줬다. 초현실주의는 그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위선과 타락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왔던 사상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정이 가득했던 부르주아 도덕률이 휘둘렀던 사회의 속박과 검열·억압이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쪼그라들게 했는지 거세게 비판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이 세계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달리의 예술은 ‘초현실주의의 재현’과 다름없었다. 달리에 대한 손가락질이 심해질수록 그의 명성이 높아져 간 것은 물론이다.달리에겐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기회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본능도 있었다. 외모가 튀지 않으면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한 달리는 왁스로 고정한, 하늘로 올라간 모양의 독특한 콧수염을 만들었다. 중력을 거스른 모양의 이 콧수염은 달리를 나타내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그리고 달리는 겸손이 미덕이었던 시대에 “바로 천재인 척 행동하면 천재가 된다”며 “나는 천재다!”라고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속물이라 욕할까 봐 차마 돈 좋아한다는 얘기를 못 하던 시대에 그는 ‘아비다 달러스(Avida Dollars)’로 살았다. 아비다 달러스는 ‘달러에 욕심내는’이라는 뜻을 지닌 달리의 별명으로, 달리 이름의 철자를 바꿔 만든 것이다.대중은 남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솔직하게 돈을 밝히고, 기발한 생활을 즐기는 ‘스캔들 제조기’ 달리에게 열광했다. 달리의 모국 에스파냐엔 이런 속담이 있다.“각자는 자신이 만든 작품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는 속담 속의 말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다. 달리는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영역에서 논란을 즐겨 가며 거침없이 활동했다. 타이밍도 잘 맞춰 마침 문화가 비이성을 향해 문을 여는 것이 긍정적이던 시대에 태어났고, 덕분에 그는 단번에 출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사진작가 게오르그 브라사이(George Brassai)의 다음과 같은 말이 달리의 진면목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항상 생각을 한 발 앞지르는 달리의 재치 있는 유머를 좋아하고, 그의 콤플렉스와 진지함, 거침없는 상상력을 좋아하며, 달리의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을 좋아하고…. 가끔은 그의 그림도 좋아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처음으로 빛을 불러낸 사람 | 조르주 피에르 쇠라 (1859-1891)

─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  308 X 207cm

 

 


우리는 잠재적인 시체다 |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의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 (1944년)’.  각 74 x 94cm

속기사· 요리사· 텍스타일 디자이너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오랜 방황의 끝에 베이컨을 미술계의 혜성 같은 존재로 만들어준 작품.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소장.

 

'나는 도살장과 고깃덩어리를 그린 그림에 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축이 도축되기 전에 찍은 기이한 사진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사진들이죠. 물론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그 사진들을 보면 사진 속 동물들은 자신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동물들은 갖은 노력을 다해 도망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 그림들이 이와 같은 것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온전한 십자가 책형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책형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단지 인간의 행동,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행동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고깃덩어리고, 잠재적인 시체다. 정육점에 갔을 때 내가 그 자리에 고깃덩어리 대신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 난 늘 의아했다."

 

 



2부  기나긴 터널의 끝


물랭 루주를 사로잡은 남자 | 앙리 드 툴루즈-로드레크 (1864-1901)

<물랭루즈에서 라 굴뤼> 포스터 (1891)

 

 


언젠가는 모두가 그를 알게 되리라 |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년)  91 x 73cm 러시아 푸시킨 미술관

고흐 생전에 팔린 유일한 그림. (7만 원) 

 

 


불온한 농민과 위대한 혁명가 사이에서 | 장 프랑수아 밀레 (1814-1875)

 

<씨뿌리는 사람> 1850년  82,6x101.6cm  보스턴 미술관

<키질하는 사람> 1848년  71x100.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괭이를 든 사람> 1861년  103 x82cm  미국 게티센터

 

 


노르웨이에서 온 태풍 | 에드바르 뭉크 (1863-1944)

 

<병든 아이> 1885  118.5x119cm   오슬로국립미술관

 

 


근대를 가져다준 횃불 | 오귀스트 로댕 (1840-1917)

 

<청동시대> (정복당한 자) 1876년 (36세)

 

 


혹독한 길을 온몸으로 통과한 | 이쾌대 (1913-1965)

 

<운명> 1938년(25세)  128x156cm 캔버스 유채  개인소장

제25회 도켜에서 열린 '니카텐 二科展' 입선

 

 


3부  아무도 가지 않은 섬

 


아름답고 싶다, 그녀처럼 |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1755-1842)

<궁정예복을 입은 마리앙투와네트 왕비> 1778년  193.5 X 273cm

 

 


녹아내리고 용솟음치고 뚝뚝 떨어지는 | 조지아 오키프 (1887-1975)

<소묘> 목탄  1915년 (28세)

 

 


동양에서 온 도련님의 반자본주의 퍼포먼스 | 백남준 (1932-2006)

<tv부처>

 

 


예순다섯의 활화산 | 전혁림 (1915-2010)

<통영항> 2006년  602x255.6cm  청와대 인왕실 (노무현대통령 구입)

 

 


독일을 재현하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774-1840)

<산속의 십자가> (테첸 제단화) 1807년 110x115cm

 

 


이국땅을 뒤흔든 야심찬 실험 | 엘 그레코 (1541-1614)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78년  173 X 285cm 톨레도 대성당

 

 

 

 

 

 

 

 

 

 

 

 

 

 

 

 

 

체코 예술가

알폰스 무하 vs 드보르작

 

 

 

 

오, 달님이여,
잠시 제 곁에 머물며
제 사랑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부디 그에게 전해 주세요……
여기서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의 영혼이 제 꿈을 꾼다면
어쩌면 깨어서도 저를 기억할 수 있겠지요.
(오페라 '루살카' 중 '달에게 부치는 노래' 가사의 일부 )

인간과 사랑에 빠진 물의 요정 루살카. 영원한 삶이 약속된 자신의 세계를 떠나, 사랑을 위해 유한한 인간의 삶으로 뛰어들어간 그녀의 이야기는 슬라브 신화를 모티브로 한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가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 -1904)의 '루살카'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오페라는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보헤미안의 숲 속 물안개 가득한 호수에 사는 루살카는 가끔 수영을 하러 오는 왕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가 호수에 몸을 담글 때면 물의 모습을 한 루살카가 그를 안아주곤 했지만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왕자 때문에 그녀는 서운하기만 하다. 마침내 인간이 되어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루살카. 하지만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사랑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그녀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아름답다.

'달에게 부치는 노래'는 루살카가 달을 보며 부르는 아리아로 인간이 되기 전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서정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곡은 기억하기 쉽고 친근한 멜로디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도 삽입됐고, 크로스오버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불러 대중에게 더욱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 물 안개 속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물의요정 루살카는 드보르작과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 1860-1939)는 꽃이나 식물 덩굴과 같은 자연의 곡선을 이용한 장식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어릴적부터 천재적 소질을 보였다. 그가 그린 '십자가'를 보면 8살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성인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그는 189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새로운 연극 '지스몬다'를 위한 포스터 제작을 위해 인쇄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인쇄소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황.

때마침 베르나르의 매니저가 알폰스 무하가 일하던 인쇄소를 찾았고, 무하는 인쇄소의 작가를 대신해 포스터를 제작해주게 된다. 그리고 이 포스터가 사라에게 채택되면서 무하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이다. 포스터는 당시 파리인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거리에 붙여지는 족족 소장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뜯겨질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무하가 만든 포스터는 그 동안의 포스터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가로로 만들어졌던 기존의 개념을 뒤엎고 사라의 실물사이즈인 세로로 제작되었다. 거기에 더해진 아라베스크 양식이 조합된 장식은 사라 베르나르를 신화 속 여신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독특한 작풍은 이후 현대 일러스트와 일본 애니메이션, 심지어 타로 카드에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로 인해 더욱 대중적인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인식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무하의 영향을 받은 수 많은 그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세일러문'도 그 중 하나다.

무하가 포스터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것처럼 드보르작 역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육점의 아들로 태어난 드보르작은 음악을 공부했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이루지 못했고 가업을 이어받으려 정육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1874년, 33세에 한 공모전에 참가를 하게 되는데 이때 인생을 바꿀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다름아닌 독일의 작곡가 브람스였다.

당시 공모전의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곡에 매력을 느끼고 독일의 한 출판사에 그의 음악을 소개시켜주게 된다. 그리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에서 영향을 받은 드보르작은 슬라브 지방의 민속곡들을 모아 '슬라브 무곡'을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은 드보르작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다.

민족주의적 예술은 드보르작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 야나체크와 함께 민족주의 음악가로 불린다. '슬라브 무곡' 이후로도 드보르작은 계속해서 그의 곡에 보헤미안의 정서를 담아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미국적인 요소를 체코의 민족적 요소들과 결합시키며 민족음악을 더욱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어냈다. 제 4악장의 도입부가 흡사해 죠스의 사운드트랙을 떠올리게 하는 '신세계로부터' 역시 미국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작곡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라브적 요소를 담아낸 곡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알폰스 무하도 말년에 가서는 민족주의 회화를 그리게 된다. 무려 18년 동안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러시아의 농노해방령' 등 총 20작품으로 이루어진 '슬라브 서사시'라는 거대한 연작을 그려낸 것이다. 기존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이 연작에서 무하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무하는 체코의 지폐와 우표에도 슬라브 민족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민족적 전통 예술에 뿌리를 두면서도 쉽고 편안한 그림과 음악으로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무하와 드보르작. 지금도 그들의 영향이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를 튼다. 책장에 놓인 타로 카드를 꺼낸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감동을 주는 예술가들을 떠올린다. 카드를 한 장 뽑는다. 지난 2주간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드보르작과 무하를 떠나 보내기 싫은 마음이 반영된 걸까? 미련을 상징하는 '파이브 오브 컵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