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 - 자료 짜깁기

2021. 8. 1. 18:06미술/미술 이야기 (책)

야망 없는 지성은 날개 없는 새와 같다

─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년∼1989년)

 

 

 

 

 

세상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만은 확실하다.

The world will admire me. Perhaps I'll be despised and misunderstood,

but I'll be a great genius, I'm certain of it.

 

 

1904년.  그는 스페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Salvador Dalí i Cusí, 1872∼1950)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탈루냐계 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다.

달리의 형은 그의 탄생 이전에 위장염으로 사망했고,

달리의 부모는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외로 3살 어린 여동생 안나 마리아는 달리에 대한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

 

달리의 아버지는 달리가 공립학교의 교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가 6살이 되던 해에 그를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그는 가족의 여름 별장이 있는 카탈루냐 지로나 주의 카다케스(Cadaqués)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달리의 부모는 그에게 첫 전시 스튜디오를 카다케스에 제공해주었다.

 

1916년 달리는 가족과 함께한 여름 휴가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다음해 달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 자신이 그린 목탄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21년 달리가 갓 17살이 되었을 때 달리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달리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다.

달리는 이에 대해서 '이모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평소에 아버지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창시절 마드리드의 대학을 다니며 그는 멋쟁이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한다.

172cm의 키에 길게 기른 구레나룻, 코트, 스타킹 등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유미주의와 일치했다.

학창 초반 그는 입체파의 성향을 띄었지만

다다이즘을 실험적으로 접한 후 입체파보다 다다이즘이 그의 작품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그는 반정부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잠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다.

달리는 분명 천재였지만 범생이는 아니었던 셈이다.

1926년 그는 기말고사의 부정행위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학교에서 퇴학 당한 1926년, (23세)

달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파블로 피카소를 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후안 미로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에게 달리를 소개했고

그 영향으로 향후 몇년간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달리의 작품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달빛 아래의 정물화, (1927년作) 이 시기에 달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였고

이는 달리가 꿈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은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시초라고 알려진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언행은 브르통이 평생을 걸쳐 지키려고 했던 초현실주의의 순수함과 엄격함에 자꾸 균열을 냈고,

특히 달리는 자주 정치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는데

초현실주의가 그렇게 싸우고자 했던 자본주의, 파시즘의 망령을 찬양하는 발언을 자주 하여

브르통을 비롯한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달리의 발언은 도통 진지한 것인지 찬양을 빙자한 빈정거림인지 종잡을 수 없는 빈정거림이 많았으니,

역설적인 것은 초현실주의 추구의 끝은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뛰어넘게 되는 것이니

달리의 수많은 빈정거림과 악성 조크들은 한편으론 초현실주의와 통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 확실한 것은 달리와 그의 평생의 반려자 갈라는 물질적 풍요를 매우 즐겼으며

자신을 달러에 게걸들린 ‘Avida Dollars’ , -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놀기도 하였다.

 

전술한 보스케와의 대담에서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지칭한것과는 반대로

스페인의 독재자이자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종래에는 피카소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피카소는 게르니카와 한국전쟁에서의 미군을 비난한 것으로도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

 

1949년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잉태한 성모,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등 종교적 색채를 드러낸 작품들을 제작한다.

 

“내 어머니보다, 내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도...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 갈라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치유했다.”

 

1929년 (25세), 카다케스의 집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가운데 달리는 운명적인 뮤즈, 갈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는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하여 홀연히 잠적했으며,

이후 갈라는 1934년 폴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월 30일 달리와 결혼하게 된다.

이때 갈라가 40세, 달리는 30세 였다.

 

이후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 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다.

때때로 그녀는 달리의 그림에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달리는 갈라를 매우 사랑했다.

주변인들은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그는 오직 갈라만을 위해 발레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갈라는 젊음에 대해 매우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의 아버지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되었던 갈라와 달리의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다.

달리가 프랑스 전시에서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라고 인터뷰하자,

달리의 아버지는 달리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달리는 거절했다.

결국 달리는 1929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또한 카다케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다음해 여름, 달리와 갈라는 포르트리가트(Port-lligat) 해변에 작은 오두막을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주변의 땅과 오두막들을 매입해 빌라를 건축했다.

이후 아버지는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내 시계가 어디있지?"

 

─달리의 유언.

 

찬란했던 전성기가 무색할 만큼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달리는 갈라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였다.

자신의 오랜 뮤즈가 멀어지자 달리는 신경쇠약과 우울, 그리고 건강악화를 겪는다.

이 와중에 갈라는 젊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70년대 달리는 사생활과 달리 작품활동은 아직 활발했다.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무대연출과 프로그램 컨셉 아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을 창설했으며 미술관의 천장화 제작에 참가하였다.

또한 뉴욕에서 최초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된다.

갈라의 불륜이 지속되면서 달리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그녀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개를 부러트리고,

갈라는 흥분한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리움을 투여했는데 적정량을 넘어선 투약으로 혼수상태가 되어버리고,

또 이것을 처치하기 위해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를 투여하게 된다.

이러한 약물 칵테일이 달리의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지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 무렵 갈라는 노인성 치매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후작 작위(Marqués de Dalí de Púbol)를 받게 되었지만

갈라가 같은 해 6월 10일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이후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달리는 화상을 입었으며,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기도라고 보기도 한다.

달리는 심부전으로 1988년 11월 입원했고,

1989년 1월 23일 아침 그는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은 자신이 태어난 집과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그의 장례는 Sant Pere 교회에서 치루어졌으며 카를로스 국왕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자식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난데없이 61세인 빌라 아벨 마르티네즈라는 여성이 딸이라고 주장하며

3700억이 넘는 달리 재산(사회단체에 속해져있다고)의 상당수 상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논란 끝에 28년만에 묘지가 파헤쳐졌고 피부와 손톱, 뼈에서 DNA 샘플이 채취됐다.

스페인 국립 독성학 법의학 연구소에서 이 샘플을 통해 DNA 조사를 하게 되었으나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여성은 묘지 발굴 비용을 물어내야할 처지에 놓였다.

반대로 달리 재단은 고인을 모독한 사기극이 끝났다라고 자평.

 

 

 

 

 

 

 

 

 

살바도르 달리 作, 《십자가 책형》

 

살바도르 달리, <십자가 책형> 1954. 194.5 x 124 뉴욕 메트로폴리탄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유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유다를 비굴하고 사악한 인간으로

혹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 비참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달리는 ‘십자가 책형’에서

죄인이 아니라 제자로서 예수와 당당히 독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유다를 재해석하고 있다.

‘십자가 책형’을 주제로 한 회화에서

유다가 등장하는 경우는 달리의 작품이 유일한 것이라 믿어진다.

성경에 의하면 유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발밑에 있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 사도 요한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달리의 ‘십자가 책형’에는 적막하고 공허한 공간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고 ‘유다’ 두 사람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깊은 인연(악연?)도 우주의 움직임도 멈추게 할 것 같은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이곳은 예수와 유다만이 존재하는 운명적인 공간이다.

십자가 책형 사건의 주인공은 예수와 유다다.

배반한 유다와 그 배반으로 죽은 예수, 이것이 성서의 맥락이다.

유다가 없었더라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는 유다와 예수의 미묘한 갈등이나 대립을 묘사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예수와 독대하고 있는 자가 과연 유다인지 혹시 베드로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유다는 스승을 경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유다임을 가리키는 열쇠는 노란 사도복이다.

전통적으로 노란색은 배반을 상징하는 색채이다. 배반은 유다와 동의어이다.

달리는 ‘십자가 책형’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에서도 유다에게 노란 사도복을 입히고 있다.

‘노란 사도복’은 유다에게 씌워진 ‘운명적 굴레’처럼 느껴진다.

베드로와 유다, 둘 다 예수를 배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유다의 죄가 더 크긴 하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후회했고 깊이 참회했으며, 박해와 맞서 싸우며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순교로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도 베드로만큼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와 달리 절망했고, 결국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결함으로써

영원히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다.

 

 

달리는 1974년에는 달리 연극-미술관을 헌정하며, 대중을 ‘달리의 세계’로 이끄는 발판도 열어두었다.

1920~30년대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부르주아적 전통에 따라 신앙을 거부하는 세태에 어우러져,

달리 또한 가톨릭신앙을 거부하고 온갖 종류의 신앙을 접한 바 있다.

그는 한때 예술만이 무의식에 자유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내면과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몰두해왔지만,

가톨릭신앙을 떨쳐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교회와 얽힌 파란만장한 관계를 펼쳐 보인다.

특히 1940년대 들어 초현실주의운동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이후

종교에 대한 깊은 탐구와 작품제작에 들어갔다.

우주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하나의 원자로 그려내는 꿈의 형상 등이 대표적인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