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도미에 (펌)

2019. 11. 18. 19:20미술/서양화







파리의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 이야기






풍자화와 시사만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19세기 프랑스의 다양한 정치 사회적 상황을 석판화로 제작한 오노레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1808~1879)를 풍자만화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도미에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미에는 그의 전 생애를 19세기에 살았는데 그 시기는 부르봉 왕조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舊制度)을 무너뜨린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19세기 전반기 프랑스 산업혁명으로 사회 전 분야에서 격변기에 있었던 기간입니다.

 

도미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814년에는 나폴레옹 정권이 실각하여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프랑스 혁명으로 쫓겨난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었고, 이들에 의해 추방된 귀족과 로마가톨릭이 복권되는 등 정치적인 반동의 시기였습니다. 도미에는 복고 왕정의 반동이 극에 달한 샤를 10세 시절인 1829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인 1830년에는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샤를 10세의 7. 26 칙령에 반대하는 7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항의 시위와 시가전까지 벌인 끝에 샤를 10세가 물러났고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가 왕이 되는 7월 왕정이 성립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사회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7월 왕정은 부르봉 왕정에 비해 선거권이 확장되긴 하였지만 여전히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프랑스 국민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연령제한에다 납세액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하여 의회가 자본가에 점령되는 불평등한 금권정치구조였기 때문입니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민과 노동자들의 요구로 선거법 개정이 시도되었지만 부결되자, 시민과 노동자ㆍ사회주의자들이 1848년 2월 혁명을 일으키고 왕정을 타도하였습니다. 2월 혁명 주도 세력은 내분을 일으켰고 그 결과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 2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나폴레옹 3세가 되어 프랑스 제 2제정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2제정도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의 항복으로 붕괴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파리 코뮌이 성립되었다가 진압되었고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이 시기 프랑스는 많은 변화를 하였습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근대자본주의가 확립되었고 필연적으로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라는 계급구분이 뚜렷해지고 이들이 대립으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도시의 형성은 봉건시대와는 다른 도시문제가 발생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문명의 발전에 의해 교통이 활발해져 여행의 범위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고, 물감과 사진기술의 발달을 예술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주었던 시기였습니다.

 

도미에의 삶과 작품들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도미에는 1808년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유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도미에의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면서도 시를 쓰는 사람으로 시와 문학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도미에의 아버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문학에서 성공을 거두어 가족을 편히 살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814년에 파리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도미에와 두 여동생을 데리고 있던 도미에의 어머니는 극심한 생활고를 견딜 수 없어 1816년에 자녀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도미에의 아버지는 책도 출간하고 작품이 연극무대에도 오르기도 했지만 가난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도미에의 아버지는 작품을 쓰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리 직공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도미에 가족이 1830년까지 15년 동안 열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린 도미에는 아버지의 시와 대본을 듣고 또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고 합니다. 도미에는 이때까지 학교는 가보지 못했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전부라고 할 정도입니다. 열 살 때는 아버지의 작품에 배우로 직접 출연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어린 도미에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여전히 어렵게 살았고 어린 도미에도 생계전선에 나서야 했습니다. 도미에는 열두 살 때부터 법원 집달리의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도미에의 이 시기 경험은 후에 그의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당시 사회에서 법조계 인사들이 상류층의 일부였기도 했지만 특히 도미에는 법원에서 일하면서 본 판사들이나 변호사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Un acteur mineur dans un petit théâtre qui joue bien de riches monarques réellement affamés(A minor actor in small theater who plays wealthy monarchs though actually starving)

 

1842년의 이 작품은 무병배우의 아픔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작은 극단의 무명배우는 부유한 군주를 연기하지만 실상은 굶주리고 있다."



 

Les Comediens de Société(A curtain call after an amateur performance) Lithograph published in Le Charivari newspaper, 1858. 

아마추어 공연 후의 커튼콜



 

Apprenti au cabinet d'avocats(Apprentice to law firm) 1835. 9. 23 

법률사무소의 견습생.



 

My dear Sir, it is impossible for me to plead your case. The most important pieces are missing: money. 1840

 



도미에는 공증사무실의 일을 그만두고 서점의 점원으로 일을 하다가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아들을 후원할 수 없었던 도미에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결국 14살이 된 1822년부터 친분이 있는 알렉상드르 르느아르(Alexandre Lenoir)에 미술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르느아르는 간단한 석고상을 그리게 시키는 정도였지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하지 않았고, 1823년부터 샤를 쉬스 미술학교(Académie Suisse)에서 데생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1825년에는 벨리아르(Zephiren Béliard)의 공방에 들어가 견습생 생활을 하며 석판화(lithography) 기법을 배우면서 루브르 박물관이나 미술품 복제상을 돌아다니며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화가로의 자질을 키워갔습니다.

 

도미에도 처음에는 화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습니다. 도미에의 아버지는 한 달 정도는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만나는 등 잘나갔지만 그 이후로는 실패를 거듭하며 정신이상까지 나타나 요양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요양소의 아버지,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 되어버린 도미에는 스무 살이 갓 넘은 1829년부터 라 실루에트(La Silhouette)라는 주간지에서 석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미에는 이렇게 시작한 석판화 작업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실린 매체가 정치 주간지인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와 일간지인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입니다.

 

‘라 카리카튀르'와 ’르 샤리바리‘는 샤를 필리퐁이란 사람이 1930년과 1931년에 창간하였습니다. 샤를 필리퐁은 그 자신도 풍자만화가·석판화가로 유명한 사람으로 예술적 재능과 사업수완이 있는 사람으로 석판인쇄를 미술과 상업의 매체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고 프랑스의 풍자만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공화파로 정치적으로 매우 진취적이고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일간지인 ’르 샤리바리‘에도 날마다 새로운 풍자만화를 실었고, 그로 인해 필화사건으로 여러 차례 소송을 당했고 결국 1935년에 폐간되었습니다. 이들 매체를 통해 유명해진 화가가 가장 유명한 미술가가 오노레 도미에와 구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é, 1832-1883) 등입니다.

 


도미에의 정치적 카툰(cartoon)을 몇 점 보도록 하겠습니다.


 

MASQUES DE 1831(MASKS OF 1831)

 

Un héros de juillet, Mai 1831(A July Hero) June 1, 1831 Lithograph

 


‘7월의 영웅’이란 작품입니다.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를 몰아냔 7월 혁명의 영웅인데 그 모습이 이상합니다. 도미에가 7월 혁명이 성공하고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된지 1년도 되기 직전에 이 작품에서 ‘영웅’은 외다리를 한 채 전당포 선전지로 만든 옷을 입고 '최후의 수단'이라고 쓰인 돌을 몸에 매달고, 다리 난간에 위태롭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을 보면 의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에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루이 필리프는 시민왕, 평등왕이라고 포장하며 국민을 현혹하여 왕이 되었지만, 혁명의 주역인 시민과 노동자, 농민은 철저히 배신당해 참정권도 없는 2등 국민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변화와 변혁이 요구되는 시기에 지도자를 세울 때 나라를 위한 철학을 보지 않고 당장의 실리와 인기에 영합하여 선택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도미에도 스물두 살의 나이로 7월 혁명에 참가에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1831년 혁명 1주년을 앞두고 당시 상황을 보면서 배신당한 혁명과 시민들의 절망적인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미에 또한 공화파로써 루이 필리프를 샤를 10세와 같거나 그보다 더한 전제군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Gargantua. 1831. Lithography. 30.5 × 21.4cm State 2.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Paris, France.

Gargantua est le titre d'une lithographie d'Honoré Daumier, parue le 15 décembre 1831, dans le journal La Caricature.(라 카리카튀르, 1831. 12.15.)

 



라블레(Rabelais)의 소설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and Pantagruel)”에 나오는 ‘거인 가르강튀아’를 대식가로 묘사하여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를 풍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필리프 왕은 변기 같은 의자에 앉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은 국가재산을 먹어 치우며 훈장과 서류 배설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는 아첨꾼들이 배설물을 받아 챙기기에 바쁩니다. 필리프 왕은 7월 혁명을 통하여 집권하였지만 민중을 억압하고 부르주아 위주의 금권 정치를 펼쳤으며 훈장, 작위 등을 남발했습니다. 도미에는 그런 필리프를 대식가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 특이합니다.



 

Les Poires, transformation caricaturale du roi Louis Philippe parue dans le journal La Caricature en 1831.

 


‘Poire’는 프랑스어로 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양 배(pear)는 우리 배와는 달리 표주박 모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어 'poire'는 ‘잘 속는,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이란 의미의 형용사로도 쓰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국왕의 머리를 배 모양으로 바꾸고 그림의 제목을 ‘Les Poires’이라고 했으니 대단한 풍자입니다. 루이 필리프의 머리를 배 모양으로 바꾸는 풍자는 샤를 필리퐁이 먼저 시작한 것으로 당시 같이 일하던 도미에가 그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가르강튀아’가 발표되지 인쇄소에는 경찰들이 쳐들어왔고 도미에는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형집행 대신 500프랑의 벌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다른 작품으로 1832년 8월부터 1833년 2월까지 생트-펠라지 교도소와 정신병원에 각각 2개월과 4개월 동안 수감되어야 했습니다.



 

Le passé, le present, l'avenir(The Past, the Present, the Future) Plate 349, La Caricature, no. 166, 9 January 1834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first state of two, 21.4 x 19.6 cm Musee d'Art et d'Histoire, Saint-Denis

 


루이 필리프에게 배신당한 시민들은 끊임없이 항거하였고 정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이들을 탄압하였습니다.



 

Rue Transnonain, 15 April 1834 L'Association mensuelle, plate 24, July 1834 Lithograph, 28 x 44 cm Association des amis de Honoré Daumier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

 


이 그림의 배경은 1834년 루이 필리프가 제시한 법률과 노동자 정책에 반대해 리옹의 견직 노동자들이 시위에 나선 후의 사건입니다. 리옹 노동자들의 투쟁에 호응하여 파리의 공화파들과 노동자들이 시위에 나서자 정부가 군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바리케이드가 있던 트랑스노냉가의 시민의 집에 군인들이 난입하여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미에는 당시 현장에는 없었지만 이 사건을 듣고 그림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초기 도미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그림에 등장하는 요소는 몇 가지되지 않지만 그림의 의도는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쓰러진 남자, 여성의 발, 노인의 머리, 아이의 머리, 엎어진 의자와 침대로 이 사건의 내용을 모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미에의 특징은 이후 많은 화가들의 포스터와 캐리커처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습니다.



 

Voyage à travers les populations empressées(Louis-Philippe Visits the French Provinces. 1834



 

Principal acteur d'un Imbroglio-tragi-comique. 1835. 5. 29

 


가면을 쓴 절대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면을 벗기면 악랄한 얼굴이 드러나고 발로 법을 짓밟고 있습니다. 

도미에의 캐리커처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외형뿐만 아니라 성격, 그리고 그들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시기에 도미에의 또 다른 걸작은 캐리커처 조각입니다. 도미에는 친구인 조각가 프레오(Préault)의 권유로 1830년부터 국회의원이나 사회적 인물들의 작은 흉상을 제작하여 을 조각하여 출판업자 오베르(Aubert)의 판화 가게에서 전시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높이가 20cm 정도이지만 인물의 외형적인 특징과 성격은 물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풍자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Charles Philipon c. 1833 Unbaked clay, tinted, 16,4 x 13 x 10,6 cm Musée d'Orsay, Paris

 

Laurent Cunin, Politician (The Angry Man) 1832-35 Oil-glazed clay, height 15 cm

Musée d'Orsay, Paris

 

Jean-Auguste Chevandier de Valdrome, Parliamentarian (The Fool) 1832-35 Oil-glazed clay, height 19 cm Musée d'Orsay, Paris

 

Guizot or the Bore 1832-33 Painted clay, height 22 cm Musée d'Orsay, Paris

 

André-Marie-Jean-Jacques Dupin (Dupin the Elder) 1832, Colored unfired clay, 15.2 x 15.2 x 9.2 cm Musée d'Orsay, Paris

 

정부 도미에가 기고했던 주간지와 일간지는 정부와 관료를 비판하는 글과 그림으로 수없이 소송을 당했고 벌금을 물어야했습니다. 편집자인 샤를 필리퐁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석판화 작품만들을 모아 월간 작품집 “L’Association Mensuelle”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고, 석판화를 한 점씩 판매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도미에의 작품이 이런 경로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고 그의 명성 또한 높아졌습니다. 한편으로 정부와 루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35년 중반에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도미에의 정치적 풍자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 도판도 많고 글이 길어져 다음호에 계속합니다.








 

Honore Daumier,오노레 도미에

(French, 1808-1879)


시사만화와 드로잉으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3등 열차]와 [이주민들] 유리공의 아들로 태어나 책방 점원으로 일하면서 사회와 인간을 관찰했고 발자크와 교류했다. 본격적으로 예술가가 되기로 한 후, 초기에는 석판화와 풍자만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는 인상파 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정치와 사회를 풍자한 시사만화와 드로잉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근대미술에 인상주의 기법을 도입하는 데 이바지했다. [백과사전]



Guizot or the Bore
1832-33, Painted clay, height 22 cm



Charles Philipon, c. 1833,

Unbaked clay, tinted, 16,4 x 13 x 10,6 cm








Satirical bust of Guizot



Ratapoil,  c. 1850,

Beonze, height 38 cm



André-Marie-Jean-Jacques Dupin (Dupin the Elder)
1832, Colored unfired clay, 15.2 x 15.2 x 9.2 cm



 Three Lawyers Conversing, c. 1862-65
Oil on panel  40.6 x 33 cm


The Print Collectors,  c. 1860-63
Oil on panel  31.8 x 40.6 cm


 Clown Playing a Drum,  c. 1865-67
Black chalk, pen and ink, wash, watercolor, gouache, and Conte crayon on paper
33.5 x 25.5 cm

Childrens



 A Man Reading in a Garden,  c. 1866-68
Watercolor over black chalk, with pen and ink, wash, and Conte crayon on wove paper
33.8 x 27 cm



Wandering Saltimbanques
1847-50, Oil on panel, 33 x 25 cm



 At the Theater (The Melodrama), c. 1860-64
Oil on canvas  97.5 x 90.4 cm


The Painter at His Easel, c. 1870-75
Oil on panel 33.5 x 27 cm



 Mr Daumier, your series...is...charming
Plate 78 of the Caricaturana series
1838,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The Past, the Present, the Future
Plate 349, La Caricature, no. 166, 9 January 1834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first state of two, 21.4 x 19.6 cm



 Laundress on the Quai d'Anjou (Laveuse au Quai d'Anjou)
c. 1860, Oil on wood panel, cradled, 11 1/4 x 7 3/4 in. (28.5 x 19.7 cm)



 Don Quixote and Sancho Panza, c. 1866-68
Oil on canvas 40.2 x 33 cm



 The Fugitives,  c. 1849-50,

Oil on panel, 16.2 x 28.7 cm



The Uprising,  c. 1860,

Oil on canvas, 88 x 113 cm



 The Two Lawyers,  c. 1862-64
Oil on panel  20.5 x 26.5 cm



 Don Quixote and Sancho Panza,  c. 1850,

Black crayon and wash, 16 x 22 cm



 Crispin and Scapin,  c. 1863-65
Oil on canvas  60.5 x 82 cm



 Rue Transnonain, 15 April 1834
L'Association mensuelle, plate 24, July 1834
Lithograph, 28 x 44 cm


 The Chess Players  c. 1863-67
Oil on panel24.8 x 32 cm



The Emigrants,  c. 1850, Plaster
 


The Third-class Carriage,  1860-63,

Oil on canvas, 65 x 90 cm 







혁명의 시대, 위대한 비판과 풍자 - 도미에   

 

19세기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였고 연애의 나라였고 콜레라의 나라였지만, 무엇보다 신문 잡지의 나라였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시골 소읍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 들었고, 그 밀도높고 혼란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그들은 길 모퉁이에서 신문을 읽었고 허름한 카페에서 잡지를 읽었다. 그곳에 새로운 소식과 세상이 있었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프랑스 시민 혁명은 그러한 근대적 생활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문 잡지의 대중화는 정보의 대중적 확산과 대중 그 자신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궁정의 역사와 귀족의 무훈을 노래하던 작가의 후예들은 소설가가 되어 신문과 잡지의 지면에서 연재 소설을 썼다. 빅토르 위고, 오노레 드 발자크, 스탕달 같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생애와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그리는 장편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화산업의 변화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디킨즈가,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미국에서는 마크 트웨인이 이같은 '근대문학'의 환경 위에서 글을 썼다.


 

그들의 글은, 곧 그 신문과 잡지를 열렬히 구독하는 신흥 부르주아와 일반 대중의 기호, 관심사, 성향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작가들은 왕후장상이 아니라 시민과 대중의 정치적 목소리와 문화적 감성을 그렸고, 그 때문에 원고료를 받아가며 계속 연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증언과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적과 흙>의 줄리앙 솔렐 같은 주인공은 프랑스 파리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소설가들 뿐만 아니라 미술가들에게도 신문과 잡지는 새로운 발언과 생계의 수단이 되었다. 석판화 기술의 발전 및 보급과 신문 잡지의 발달로 미술가들은 대형 화폭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즐겨보는 지면을 통하여 한 시대를 풍자하고 증언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비판과 풍자의 정신이나 가난한 삶에 지극한 연민을 가진 미술가들에 한해서 말이다.

1808년의 오늘 2월 26일에 태어나 1879년 2월 10일에 사망한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1802년의 오늘 2월 26일에는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태어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은 당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었던 혁명의 도시 파리에서 활동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문화는 특권층의 취미생활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일상적인 문화로 변모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시민계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이 계급에 기반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19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예술은 이 같은 현실의 적극적인 반영이었다.

오노레 도미에는 1808년의 오늘 2월 26일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장식 유리업을 해온 직공 집안이었다. 도미에는 7살 때,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몇 년 후 정신이상 질환에 시달렸고 도미에는 평범한 초등 과정을 겨우 마치고는 13살 때부터 법원 집행관의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훗날 도미에가 법정과 법관들, 변호사와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수많은 작업을 하게 된 정신적 원형이 되었다.

또한 도미에는 당시 루브르 궁전 북쪽에 인접한 팔레 루아얄의 어느 책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혁신적으로 변해가는 문화의 한복판에서 시골 소년 도미에는 대도시 파리의 목격자가 되었다. 책방의 진열창 너머로 펼쳐지는 파리 핵심 지역 팔레 루아얄의 사람들 모습을 그는 '인간 희극'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또 한 명의 오노레, 즉 19세기 유럽의 기록자이자 친구인 소설가 발자크에게 들려줬다. 발자크는 이를 모티브 삼아 무려 2천여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수많은 장편과 단편으로 구성된 <인간희극> 총서를 썼다.


 

 

도미에는 20대 성년에 이를 즈음, 오직 미술가의 생애를 살리라 작정하고 유화, 석판화, 풍자화, 조각에 몰두하였다. 그의 미술가적 생애는 사회적 비판 의식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던 1830년에서 47년 사이의 작업과 마흔 살 이후에서 사망할 때까지 탐구하던 기법의 혁신, 즉 초기 인상파의 시절로 나뉠 수 있다.

도미에는 1830년에 잡지 <가르강튀아>(La Gargantua) 창간에 관여하였고 그 지면에 풍자 만화를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832년에는 국왕을 비판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였다가 투옥된 적도 있다. 그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 받았고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나머지 4개월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당국은 1835년에 이 잡지를 폐간시켜 버렸다. 모든 신문 잡지에 정치풍자 캐리커처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도미에는 잡지 <샤리바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신흥 지배층의 위선을 풍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그렸다.

 

 

그중에서도 1830년 시가전 장면을 다룬 석판화 '반란에 가담한 식료품상이 총을 쏘다'와 '저항'은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그의 참여적인 태도를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시대에 존재해야 한다(Il faut tre de son temps)”는 신념을 가진 도미에의 사회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또한 '삼등열차'는 당대의 가난한 삶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도미에는 여행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가끔 열차를 타고 다녔다. 1849년 부인과 함께 영불해협의 자그마한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고 바르비종에 있는 루소와 밀레를 만나러 갈 때도 열차를 탔다. 그래서 1855년경부터 그는 철도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어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미에는 고된 노동이나 장기여행에 지친 삼등열차의 승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삼등열차'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초기의 현실에 대한 예리한 풍자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는 가난한 삶 속에서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관심이나 동정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세상의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다는 존경심까지 나타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점에서 자본주의 초기의 ‘착한’ 예술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진 경향이기도 했다. 중산층 예술가로서의 도덕적 회의와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섞인 작품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덕목이 사회 현실에 대한 예리한 시선인데, 도미에는 사회학적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적인 직관, 사람과 사물에 대한 냉철한 관심과 분석에 의하여 가난한 사람을 그저 동정하거나 부자들을 형편없이 조롱이나 하는 수준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도미에보다 조금 뒤의 화가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예컨대 밀레는 '만종' 등의 작품에서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신의 은총을 바라는 소박한 농민을 그렸다. 이러한 작품은 단순한 시골 풍경화가 아니라 험악한 세태에 짓눌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기를 바라는 진지한 예술가들의 간절한 기도에 다름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네덜란드의 반 고흐도 처음에는 탄광 지역으로 가서 직접 광부 일을 하면서 힘겨운 광부의 삶을 거칠게 그려냈다.


 

 


도미에가 사회적 현실을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또 이를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화나 수채화처럼 한정된 제작 조건에서 일했던 것이 아니라 대량 복제가 가능한 석판화를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19세기 중엽에 그 효용성이 널리 알려진 석판화는 대도시 곳곳에 석판화 가게가 문을 열 정도로 대중적인 예술 기법이 되었다. 저렴한 가격에 풍경화나 사회적 정보를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도 이를 사용하였는데 도미에는 바로 이 대중적인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고야가 이 기법으로 한 시대를 기록했다.

도미에 풍자화의 백미는 그가 1845년에서 1848년 사이에 연속 작업으로 제작한 법조계 풍자화이다. 그는 법조인들을 경멸하였다. 그 자신이 성장기에 법률 집행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그 비정하고 폐쇄된 세계를 일찍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판사, 변호사, 검찰관 등이 거만한 자세로 세상 형편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몸소 겪기도 했다. 진지하게 세상의 낮은 자리를 살핀 도미에는 자신의 석판화 작업을 통하여 법률가를 비롯한 지배층의 오만함을 맘껏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그 대표작이 '밀담을 나누는 세 명의 변호사'이다. 그림 속의 변호사들은 뭔가 자신들만의 흉계에 스스로 취한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 도미에의 이러한 비판적 작업은 그 자신이 1830년과 1848년의 도도한 혁명의 열기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혁명 시대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848년, 마침내 공화국 시대가 열린 후, 도미에는 프랑스 전역의 공공 기관에 걸려 있는 왕의 초상화를 대체할 공화국 상징물 그림에 몰두하였다. 대규모 공모전에도 참가하여 당선도 되었다. 그러나 도미에는 상징화 완성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작업 과정에서 미묘한 기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자연광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미려한 표현으로 윤곽선이 희미해지면서, 그 대상과 주위 공간이 모호해지면서 오히려 미학적인 일체감을 갖는 기법을 그는 발견했다. 미술사가들이 인상주의의 시작을 도미에로 설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격렬한 정치화를 그렸던 도미에는 파리 외곽의 일상 풍경을 미려하게 그려내는 화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도미에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신문 잡지는 '뽀샤시'하게 변한 도미 그림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으나, 이 미묘한 색채 속에서 근대를 발견한 시인 보들레르는 도미에를 격찬하고 지지하였다.

시인 보들레르는 “우리 시대 파리에서 들라크루아에 비할 수 있는 작가는 두 명뿐, 앵그르와 도미에다.”라고 말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미에는 근대 시민사회의 직업윤리인 근검, 절약, 저축 같은 것을 경멸하였다. 보들레르가 지지할 만한 삶의 '태도'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렸고 구빈원을 들락거렸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수도 많았다. 그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돈이 생기면 누구에게나 빌려주었었다.

물놀이 하는 아이들, 강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선술집 취객들, 공사장의 석공들 같은 일상 그림으로 모네의 따스한 인상과 고흐의 격렬한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 도미에는 1877년에 백내장을 앓기 시작하여 생의 만년을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화가로 쓸쓸하게 죽어갔다.

 

 

 삼등열차

 

 

봉기

 

두명의 법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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