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 外

2019. 9. 17. 08:35내 그림/작업중인 그림들...





1 외투



이걸 그리면 모두가 즐거움은 커녕 분노의 심정으로 바라볼 것이다만,

예술이란 원래가 그런 것이지. 




 




 



 

  



 

 
《‘못 들어가요!!’》, (1892년),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1846-1920),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박물관(상트페테르부르크).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 1846 ~ 1920]

 


현대의 수많은 마르멜라도프에게

술을 마셔 좋은 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술이 지나쳐 생기는 나쁜 결과가 너무 많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는 술로 인해 인생을 망친 전형적인 인물 마르멜라도프가 나온다.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첫 만남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도 한 때는 공무원이었죠. 집에는 아픈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나는 아내의 양말마저 내다 팔아 술만 마시고,

이제는 부인이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술 마시기 벌써 닷새째.....
나에게 하나뿐인 딸은 황색 감찰(매춘부) 일을 하러 나가고,

그 애가 그렇게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다 써버렸지요.

난 돼지 같은 인간이에요"

(중략)

라스콜리니코프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자,

그의 부인이 울부짖는다.
"몰래 갖고 나간 11루블 다 어쨌나요?

옷마저 달라졌어?! 입고 나간 옷은 도대체 어디 벗어놓고 온 거죠?!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굶주리고 있는데~!!!!!!!

아아, 저주받는 게 낫다~!!!!!!!

그러고서도 부끄럽지 않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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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는 맑고 깨끗하지만, 코를 빨갛게 만들고 평판을 검게 한다고 안톤 체호프는 말했다.

러시아만큼 술이란 주제가 문학에 자주 등장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를 뒤흔든 나라도 드물다.

심지어 대통령이 금주령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나친 음주는 자신만 병들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 주변 모두를 음울하게 만든다.




∠∠




마코프스키의 그림에서도 알코올 중독 말기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집을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온몸에서 알코올에 찌든 술 냄새가 막 풍기는 듯하다.

가족의 행색이 남루하다.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아서는 아내의 절망적이고 힘든 몸짓.

엄마에게 딱 붙어 아빠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딸아이.

남자의 손엔 술값으로 맡겨버릴 가족 중 누군가의 외투가 쥐어져 있다.

고골의 <외투>에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한 날씨의 러시아에선 외투가 곧 생명이다.

러시아에서 외투 없이 겨울을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온몸으로 남편을 막아서는 아내의 눈빛이 슬프다 못해 공허하다.

이 가족이 엮어내는 슬픈 아우라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

...............



알코올 중독으로 주위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건 인간이 만드는 가장 슬픈 범죄 중의 하나다.

마시는 당사자의 몸 또한 병들지만 그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의 가슴엔 피멍이 든다.
이게 1800년대 러시아에서만의 현실일까?
마코프스키(1846-1920)는 러시아 이동파 화가로 활동한 19세기 대표 풍속화가다.

콘스탄틴 마코프스키의 동생이다.

일반 민중의 삶을 따뜻한 눈길로 그린 <가로수 길에서> (1886) 외에 <혁명가의 신문> (1904),

<밤의 집회> (1875)등 사회 정치적인 테마를 주제로 그린 작품도 많이 남겼다




김희은
-갤러리 카르찌나 대표
-<소곤 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써네스트) 저자
-아트딜러 및 컨설턴트
-전시 기획 큐레이터
-러시아 국립 트레챠코프 미술관 러시아 국립 푸쉬킨 박물관 도슨트

출처 : 소셜타임스(http://www.esocialtimes.com)







블라드미르 마코프스키(1839-1915)
 
모스크바에서 화가의 집안에서 출생.그의 아버지 이고르 마코프스키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화가로서 활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의 공동 설립자이다.
장남으로 태어난 마코프스키 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나중에 모두들 다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하는데, 대부분의 상을 휩쓸 정도로 최우수 학생이었다. 그는 낭만주의 화풍을 익혔고 훗날 장식적인 것에 치중하게 된다.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모태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로 진학한다. 입학하고 난 2년 뒤부터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아카데미 대상에 참여할 동료 13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아카데미가 그림의 주제로 내건 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신화였는데 아무래도 전통적인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제였지만 젊은 화가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폐쇄적인 아카데미의 규범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




마코프스키 자화상



학교를 떠난 마코프스키와 동료들은 크람스코이가 주도하던 예술가 조합의 멤버가 된다.
이 조합이 훗날 러시아 미술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이동파가 된다.
이제까지 그렸던 주제들을 버리고 전형적인 러시아의 일상과 풍경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두고 러시아적인 주제에 관한 한 챔피언이라는 평가가 있다.
마코프스키는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평생 이동파로 활동할 것 같았던 마코프스키는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동파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아카데미에도 출품을 한다.
작품의 주제만 확실하다면 어디에다 출품하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이동파의 창립 멤버가 되기 1년 전인 1869년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
아카데미의 폐쇄성이 싫어 아카데미를 떠났던 그가 교수로 돌아온 것이다.




주인없는 방에



결국 1883, 마코프스키는 이동파와 결별한다.
이 일로 많은 민주적인 비평가들은 이동파의 이상을 변절시킨 사람으로 그를 폄하하기도.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그를 러시아 인상파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 사람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평가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1891년 살롱을 지향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협회의 멤버가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고집이 보인다.




DOn't Go! 1892년


1880년대 초상화와 역사화의 선두주자가 된 마코프스키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결과는 대상이었다. 당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이자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된 것이다.




시골에 방문한 여교사 1897년


1915917,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전차가 마차를 들이받았는데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마코프스키였다.




가로수길에서 1873년










외투 (1843) - 니콜라이 고골   

                                  

외투(Шинель)

1890년대에 발행된 표지

ⓒ Kmorozov/wikipedia | Public Domain

작품 소개

고골은 네진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828년부터 1836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다. 페테르부르크가 풍기는 도시의 무미건조함과 몰개성에 적응하지 못했던 고골은 도시의 부정적인 특성을 표상하는 작품들을 쓰게 되었다. 〈외투〉는 고골의 작품 중 특히 인기가 있었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중 하나로, 이는 영웅적 주인공이 아닌 ‘작은 인간들’, 즉 하급 관료, 군인, 학생 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들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9등 문관, 즉 하급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삶은 도시의 각박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서라는 하찮은 업무를 몹시도 사랑했던 아카키는 외투 장만에 집착하는데, 이 외투는 소유의 욕구를 상징한다. 외투 때문에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급기야는 목숨까지 잃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임으로써 애잔한 인간성의 한 단면을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평할 만큼 〈외투〉는 사실주의 기법이 도드라진 고골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줄거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공문서를 정서하는 9등 문관으로, 승진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쉰 살이 넘도록 정서 업무에만 만족하며 살아왔다. 어느 초겨울, 오랫동안 입은 낡은 외투를 수선하러 간 아카키에게 재봉사 페트로비치는 더 이상 수선이 불가능하니 새 외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카키는 먹고 입는 것을 아끼고 또 아껴 새 외투를 장만한다.

새 외투를 입고 온 아카키를 관청의 동료들은 떠들썩하게 축하하며 파티까지 열어주지만,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카키는 강도에게 새 외투를 빼앗긴다. 경찰에 신고를 해놓고도 외투를 찾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던 아카키는 ‘중요한 인사’를 찾아가 청탁해 보라는 주변의 충고에 따라 고급 관료를 찾아간다. 고급 관료에게 되려 질책을 듣고 너무도 상심한 아카키는 집에서 앓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얼마 후 페테르부르크 시내에 외투를 빼앗아가는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떠돈다. 아카키를 질책했던 ‘중요한 인사’는 이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다가 어느 날 저녁 외투를 내놓으라는 유령의 위협에 자신의 고급 외투를 벗어놓고 혼비백산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 뒤부터 유령이 외투를 빼앗아간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다.

작품 속 명문장

그는 늘 같은 자리와 같은 처지, 그리고 같은 직급에서 변함없이 정서하는 관리로 일했으며, 훗날 사람들은 그가 분명 대머리에 문관 제복을 입고서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었다. 관청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런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
〈광인일기〉,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코리아
이날은 온종일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실로 가장 성대한 축일이었다. 그는 최고로 행복한 정신 상태로 퇴근하여, 외투를 벗어서 애지중지하며 벽에 걸어놓은 후 겉감과 안감을 실컷 감상한 후에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버린 예전 ‘덮개’를 일부러 다시 끌어내 비교해 보았다.
〈광인일기〉,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코리아
“으! 드디어 너로구나! 드디어 네놈을 잡았어! 네 외투가 내게 필요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책망하다니, 네 것을 당장 내놔!”
〈광인일기〉,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코리아

작가 소개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 3. 20.~1852. 2. 21.)

 

                     

                

18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폴란드-우크라이나계 소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828년 네진 김나지움를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831년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첫 소설집 《디칸카 근교의 야화》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들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유명인사가 된 고골은 푸시킨 등의 문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역사, 드라마, 에세이, 픽션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실험하며 1930년대를 보냈다.

1835년에는 《아라베스크》와 《미르고로드》가 출간되었다. 《아라베스크》에는 고골의 사실주의 기법이 확립된 단편 〈광인일기〉, 〈초상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미르고로드》는 환상성과 풍자성이 돋보이는 작품 네 편을 담았다. 1836년 〈코〉와 〈마차〉가 문학 잡지에 발표되었고, 같은 해에 《감찰관》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호황을 누렸다. 《감찰관》은 고골이 자신의 창작 경향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새롭게 전향한 첫 번째 작품이다.

1836년 이후로는 로마 등 주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죽은 혼》 1부를 집필했다. 고골의 문학적 역량이 집결된 대작 《죽은 혼》 1부는 1842년 출판되어 문단에서 절대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전집에 포함되어 발표된 〈외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걸작 단편소설이다. 1840년대를 거치며 작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느낀 고골은 악에 대해 풍자한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다른, 도덕적 완성과 악에서의 부활을 그린 《죽은 혼》 2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이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고골은 식사를 거부하다 1852년 세상을 떠났다.







2 기네스 맥주




 

부부간일까? 동네 주민 간일까?

뭔가로 말다툼을 하는 모양인데,, 남자의 주먹쥠을 보면 흥분을 가라앉히려 무진 애를 쓰는듯.

아일랜드 기네스 흑맥주공장 견학을 마치고 나오는 참인데,, 이런 광경이.....

차창을 통해 찍은 실제장면임.







3 스톤헨지



 

 


 






맨 아랫 사진을 기본으로 잡고, 스톤헨지를 원경으로 해서.......

이런 구름을 그려본 적이 없는데, 농담을 표현하기가...... 오늘 일단 초벌칠은 했다만......

크게 자신이 없네.









2019. 10. 17일 현재 상황



 

이제 약간만 손 보면 .......




 

대략 감이 오네, 어찌 그릴 것인지 .....





 


여태 이걸 완성을 못하고 있네 그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