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2019. 6. 15. 13:54미술/서양화







Jean-François Millet 의 "이삭줍기(The Gleaners)"




































































































































































바르비종파의 주도적 인물로 소박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농민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밀레는 농사를 지으면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19세쯤 되어서는 셰르부르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837년에 그는 파리로 와서 폴 들라로슈의 문하생으로 등록했는데, 이 화실에는 1839년까지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낙선된 뒤,

그는 셰르부르로 돌아가 1841년말까지 그곳에서 지내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1844년에 〈우유 짜는 여인〉과 파스텔화 〈승마 교습〉으로 처음 성공을 거두었는데,

〈승마 교습〉은 그가 1840년대에 그린 작품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관능적 성격을 갖고 있다.


농부에 관한 주제는 1850년대초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만,

이 주제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중요한 작품은 184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이었다.

 (이 그림은 나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농촌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씨뿌리는 사람〉·〈저녁기도〉·〈소치는 여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파스텔화 및 소묘들을 많이 남겼다.


한동안 심한 고생을 겪은 밀레는 1849년에 파리를 떠나 퐁텐블로 숲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그는 농부를 그린 그림을 계속 발표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밀레의 입장을 옹호하던 그 당시의 편지들은 그림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860년대 중엽에 이르자 밀레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67년의 전시회에 9점의 주요작품을 출품한 뒤인 1868년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이삭줍기 The Gleanes〉(1857, 루브르 박물관) ·

<만종 THE ANGELUS>(1855~57, 루브르 박물관) 등 밀레의 중요한 그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The Angelus,1857–1859, Oil on canvas,53,3 × 66 cm,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부유한 미국인이었던 토머스 G. 애플턴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에 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밀레는 1865년부터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게 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년 뒤 밀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경쟁이 계속되었으며

몇 년 후, 프랑스 측에서 80만 프랑을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림의 가치는 비싼 가격으로 매겨졌지만

정작 생존해 있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화가의 작품을 되팔게 될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




 

The Gleaners,1857,84 × 111 cm, color on canvas, 오르세 미술관

 


밀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인 이 작품은 1857년에 그려졌으며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하여 그린 작품이다.

또한 1855년에서 56년까지의 에칭 기법의 영향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예시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곤궁에 처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그러니까 근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이자 기념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그려졌던 첫 번째 버전에서는 옆에 시중드는 종까지 그려넣어져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중들을 마치 귀족이나 과 같은 존귀한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작품에서는 그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빛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 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빵을 굽는 여인, 1854년. Kröller-Müller 박물관, 오텔로: Frau beim Brotbacken,1854, Oil on vanvas,, 55 × 46 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한 각양 각색의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명성과 성공은 1860년대까지 계속해서 자라났다. 이 시기에 그는 달마다 봉급을 받는 것으로 3년간 25여 점의 작품을 작업할 것을 계약하게 된다.

1865년 또다른 고객, 에밀 가베는 훗날 9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는 그의 수집품 목록에 추가하기 위해 밀레에게 파스텔 작품을 의뢰했다. 1867년에는 World's Fair에서 밀레의 작품들 중 '이삭줍는 여인들,' '만종,' 그리고 '감자를 심는 사람들' 등을 전시회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프레데리크 아르만은 2만 5천 프랑에 '사계'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게 되며 밀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아 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870년 밀레는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가족과 함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Cherbourg와 Gréville로 이사를 가게 되며 1871년 때까지 바르비종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노년기는 상업적인 큰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의 정점으로 평가되었으나, 밀레는 건강이 악화되어 정부에서 의뢰했던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1875년 1월 3일, 그는 카트린과 결혼하였으며 1875년 1월 20일에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숨을 거두었다.

 

훗날의 영향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밀레의 작품들의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밀레는 마크 트웨인의 연극 Is He Dead? (1898년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극에서 그는 명예와 부를 위해 그의 죽음을 가장하는 젊은 화가로 등장한다. 극에서 묘사되는 밀레는 대다수가 허구이다.

밀레의 작품 L'homme a la houe는 에드윈 마컴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시 "The Man With the Hoe" (1898년)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만종"은 19세기와 20세기에 자주 화가들에게 각색되어 그려지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작품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작품을 분석하여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정신적인 평화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이 작품이 어떠한 메시지와 억압되어 성적 호전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다. 달리는 또한 작품 속의 두 명의 인물들이 삼종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의 끈덕진 주장 덕분에 이 작품은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엑스 레이 분석을 거쳐야 했다. 엑스 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이 작품은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형태는 굉장히 불확실하여 정말로 관의 모양인지, 그리고 밀레가 마음을 바꾸어 만종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르비종파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이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크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이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인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The Sower, Jean-François Millet,  1850 ,  101.6 cm  X 82.6 cm ,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 Boston (United States)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 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건초를 묶는 사람들>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러나고 있다.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사람들', '만종'과 함께 걸작이라 평가되는 3개의 작품들 중에

가장 초기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를 전시하게 된다.     

 1850년에서 53년까지 밀레는 그가 가장 중요시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작업하게 된 작품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을

그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나 푸생과 같은 그의 개인적인 영웅 화가들에게 필적하기 위하여 그려진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 인생에 있어 농부들의 일상만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인 상황 자체를 상징적인 기법으로 나타내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날짜를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파리 살롱에서 1853년 2위에 해당하는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공식적인 명예를 쌓도록 도와준 작품이었다.  




 




 




 



 

 

The Hay Trussers,  jean-François Millet, 1850-1851 ,Oil on canvas, 56 x 65 cm ,

Musee du Louvre -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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