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조선학교』- 3.11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의 우리학교 이야기

2019. 2. 12. 08:58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일본의 조선학교(반양장) 2013. 8

일본의 조선학교(반양장)

김지연 사진집 『일본의 조선학교』. 이 책은 3ㆍ11대지진 이후 도후쿠ㆍ후쿠시마의 '조선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집이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즐거운 학교 생활을 고스란히 엿 볼 수 있는 흑백 사진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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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포함한 조선반도를 가르키는 '조선 표시'를 계속 견지한다는 것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가진다는 가것을 의미한다. 또한 분단을 악용하여 군사적 긴장을 극대화시키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반대하고 분단을 극복하기를 원하는 의사표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법적 차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은 이들을 바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단순히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과 한국에 의해서도 차별당하고 있으며, 또한 어느 경우에는 북한도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다. 지금도 한국이나 미국에 쉽게 갈 수 없으며, 북한의 해외공민이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해서도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일을 원한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오히려 양국에서 거부당한다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이대로 '조선 표시'를 견지해 보고자 한다. 자유가 속박당한다 해도 그런 처지에 있음으로 해서 '민주주의'의 배후에 숨어 있는 차별적 구조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차별적 대우를 받고 그에 대한 분노를 힘의 원천으로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불편함을 즐기면서 살아 보자는 생각이다.
─- 재일조선인 여성학자 김영,「조선적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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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동포사회에서도 총련이냐 민단이냐에 따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조선학교 내 학부모들이나 활동가들 모두 국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일본 국적으로만 바꾸지 않길 바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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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전체에 조선학교는 대학교 1개, 고급학교 10개, 중급학교 38개, 초그학교 62개, 유치원(반) 45개가 있다. 조선학교의 가장 번성기는 1948년 534개교에 57204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때였다.
학생들이 하나 둘 일본학교로 옮길 때마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아이들이 우리학교를 더 다니도록 하기 위해 학부모들을 설득하느라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
현재 조선학교에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학생이 과반에 달한다. 그리고 조선籍을 가진 학생들과 일부 일본 국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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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이 南이고 조국은 北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들은 고향과 조국이 분열된 삶을 살고 있다.

조선학ㄱ교는 해방 전부터 일본의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의 민족성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을 원했던 동포들이 만든 학교로, 작은 공부방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규모로 출발하였다. 1952년 후 민족학교는 설립의 자유를 얻고 1944년-65년의 10년 동안 130여 개의 민족학교가 들불처럼 생겨났다. 재일조산인들의 교육 에너지는 일본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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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정체성을 잃지 말라고 우리학교에 보냈습니다."  "조선사람임이 부끄럽지 않고, 자부심을 심어준 곳이 우리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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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敎無償化法은 일본의 모든 외국인학교, 국제학교까지 일본 공립학교에 준하는 수업료를 보조해주기로 한 법으로, 국적에 상관없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2010년부터 시행한 법이다. 하지만 일부 우익 정치인들의 반대로 조선학교에 대한 법 적용 문제가 약 2년간 별도로 심사되었다.

조선학교는 각종학교로 분리되어 유럽계나 미국계의 외국학교들처럼 일본의 학교교욱법 제1조에 준하는 대우조차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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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등록에는 국적란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반도에는 아직 국가가 없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은 1948년이었으므로, 재일조선인들은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표기했다. 이 '조선'은 국적이 아닌 조선반도 출신이라거나 혹은 조선인이라는 민족을 나타내는 기호를 뜻했던 것이다. 일본땅에 남았던 200만 동포들은 1965년 한일협정 전까지는 다 朝鮮籍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도 '조선적'을 유지하는 이유는 일본의 차별적 제도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한이나 북측이 아닌 일본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 식민상태에 저항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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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를 건립하고 일본의 탄압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시절 1957년 1억2천만 엔이라는 막대한 교육자금이 북측에서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재일조선인들의 민족학교 건립에 대한 열정은 고조되었고, 학교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게다가 북측은 1959년부터 대대적인 귀국사업을 벌였다. 일본정부도 인도적인 차원이라고 했지만 재일조선인을 떠넘기려는 의도로 이를 적극 지원했다. 1967년 귀한사업을 종료시킨 시점까지 귀국자의 수는 일본인 가족 6500명을 포함 약 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반면 당시 남한은 '이승만라인'이라는 독도를 포함한 수역을 설정하여 수산물 등의 천연자원 이용 권리를 주장하며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등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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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 대지진으로 붕괴됐던 엣 교사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정부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재건축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빠르게 복구된 일본 학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1971년 4월 개교 당시 초급부 33명, 중급부 16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42년이 흐른 후 지금 8명의 학생만 남았다. 어쩌면 일본의 끈질긴 동화정책이 초래한 결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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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tbc

[우리는 조호쿠 1학년생입니다. 김복동 할머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대로 일본 땅에서 꿋꿋이 살겠습니다.

우리는 김복동 할머니를 잊지 않겠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추모 영상을 만든 곳은 일본 오사카 조호쿠의 조선학교.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한국의 초등학생과 다를바 없습니다.

[(오이랑 토마토 뭐가 더 좋아요?) 오이. (뭐가 제일 좋아요?) 딸기.]
[치즈 닭갈비, 치즈가 있어서 옆에 야채하고 고기 채소…]
국어시간에 시를 낭독하고,

[(이름이 뭐예요?) 지윤아, 윤채명. (언제 졸업이에요?) 3월 17일이요.]
학예회를 위해 강당에서 소고와 태권도도 연습합니다.

조선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끌려갔던 동포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국어 강습소'가 그 시작입니다.

[김보녕 : 역시 조선 사람이니까 조선 사람답게 우리말도 배우고 해야하니까]

현재 일본 내 조선학교는 61개.
대부분 재일조선인총연합회, 북한 측 지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국적은 한국과 북한, 모두 있습니다.

[고기련/곽신주 학생 어머니 : 루트(뿌리)는 한국 남조선에 있어요.

우리 학교를 북조선 학교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북조선 학교가 아니라,

우리가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땅에서도 떳떳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학교…]

실제 대부분 학생들은 한국을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경상남도입니다. (경상남도요?) 전 제주도요.]
[강태선 학생 : 아버지가 알려줬어요. 고향이 어디인가 하면 경상북도라고]

아이들은 집에서도 우리말을 배웁니다.
[곽신주 : 모어가 일본 말이어서 일본 말이 편한 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역시 우리말을, 말은 쓰지 않으면 점점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익히고…

[곽신주 : 이 구절에 무엇이 담겨 어떤 것이 담겨 있는가를 많이 공부해서]
식민지 역사와 위안부 문제까지,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공부합니다.

[곽신주 : 나에게 있어서는 우리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진짜 역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김복동 할머니가 조선학교에 5000만원의 성금을 보낸 것은 2014년입니다.
조선학교가 일본 정부의 무상 교육 대상에 제외된 이후입니다.

[고창우/오사카 조선초교 교장 : 김복동 할머니는 우선 자기가 청춘시절에 고생하셨는데

설마 오늘에도 일본 정부한테 조선 사람이 차별받고 있는 줄 생각지 못한다, 가슴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9월 태풍 제비로 오사카 조선학교 교실들이 무너지자 1000만 원을 보냈고,

숨지기 전인 지난해 11월 마지막으로 50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학교 곳곳에는 이처럼 아직도 지난해 태풍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실 안쪽으로 들어와 보시면요,
이것은 지난해 태풍 당시에 찍어놓은 사진인데, 천장이 뚫려서 교실에 물이 샜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말끔히 수리가 된 상태입니다.

[고창우/오사카 조선초교 교장 : 내가 비보를 들은 건 화요 행동에 나가기 직전이었어요.

그야말로 김복동 할머니가 섭섭히 할 시간 있으면 싸워라 아이들 위해서 싸워라 이렇게 말하시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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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이 일본에서 취재를 하는데 유일하게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들입니다. 저희 취재진이 어렵게 일본의 조선학교 내부를 취재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김복동 할머니가 별세 직전, 전재산을 기부한 오사카 조선학교입니다.



[기자]

"한 사람이라도 훌륭한 조선사람을 키우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남긴 말입니다.
실제 김 할머니는 별세 직전 전재산을 오사카 조선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한참 들어오면 학교가 나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크기도 크지 않고 그렇다할 교문도 없지만, 조선학교라는 명패가 붙어있습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오면 입구에 바로 존경하는 김복동 할머님이라는 문구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은 어디예요?) 오사카입니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위안부의 역사도 배웁니다.

[곽신주/오사카 조선고교 2학년 : 일본군 성노예도 일본 학교에서는 안 배우고,

우리도 사실 일본 학교에 다녔더라면 그런 역사도 몰랐을 거고.]

집에서는 한국 문화도 자연스럽게 접합니다.
[곽신주/오사카 조선고교 2학년 : 가수는 아이콘 좋아해요. 나는 한국 드라마 좋아해요.]

[고기련/오사카 조선고교 학생 어머니 : 기미가요 부르고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일본 사람들이 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많이 하냐면 역사를 정말 몰라서…]

[앵커]

조선학교. 저희들이 말씀드린 대로 조선학교를 취재하려면 통일부의 허가를 맡아야 됩니다.

그만큼 이제 취재하기가 어려운 대상이기도 한데…

이선화 기자가 어려운 취재를 해서 여러분들께 그 내용을 좀 전해드렸습니다.

한국에 조선학교를 돕는 비영리 시민단체가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름도 좀 특이합니다. '몽당연필'이라는곳인데, 모두가 알고 계신 분이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배우 권해효 씨를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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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안녕하세요.

[앵커] : 워낙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하고 계셔서 그 활동이라는 것이 또 쉬운 활동이 아니기에,

그래서 언젠가 그런 일을 만나뵙겠지 했는데 오늘 이 문제로 만나뵙게 되는군요.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고맙습니다. 

[앵커] : 조선학교는 사실 뭐랄까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금단의 지역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저 역시 그렇게 느꼈었고요.

[앵커] : 사실은 저도 한 10년 전에 조선학교 취재한 바는 있었는데요. 그것도 오사카에서.

그런데 그때도 굉장히 어려웠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연결이 되셨습니까, 조선학교하고는?
 

  • 일본 내 조선학교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연결됐다기보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2004년도 경에 겨울연가의 열풍이 일본에 불면서. 저 역시 거기 출연자로서 자주 일본에 방문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재일동포 사회를 만나게 되고

그 재일동포 사회 중심에 조선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러니까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앵커] : 잘 모르고 지금도 모르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을 것 같고요.

그 실상에 대해서. 그때도 제가 취재할 때 알았던 것이,

일본 정부가 이 학교에 대해서 전혀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그래서 굉장히 교육환경이 좀 어려워지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여전히 지금도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그런 상황입니다. 방금 리포트에서 보셨지만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도 일본 내에 있는 모든 외국인학교는 다 지원을 받고 있지만

조선학교만이 무상화 정책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그것에 대해서 UN인권아동권리위원회에서 또 권고를 얼마 전에 했습니다.
 

  • 왜 단체명이 몽당연필인가


[앵커] : 그런데 이 단체 이름이 왜 몽당연필입니까?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사실 몽당연필이 만들어진 시기는 멀지 않습니다.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엄청난 피해가 있었죠.

그 피해 속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재일동포 사회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요.

그 피해의 중심에는 또 이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부터 재일조선학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학교에 매료돼왔던 많은 문화예술인들 또 시민사회단체분들이 긴급히 모여서

뭔가 구호활동을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급히 만들었던 게 몽당연필이었고

그 제목 자체는 이름은 우리 어린 시절에 학구열 혹은 하지만 버리기에 아까운 것 하지만 소중한 것,

그런 의미로써 몽당연필이라는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 조선학교에 대한 김 할머니의 애정 남달랐는데…


[앵커] :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저도.

지금 권해효 씨와 저의 사이에는 김복동 할머님이 계십니다.

김복동 할머님께서는 어떻게 이 학교에 그렇게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하시게 됐을까요.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정신대 대책협의회 문제로써

오랜 시간 동안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중에서 가장 많이 갔던 공간이 바로 일본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김복동 할머니하고 함께 연대해서 해 줬던 분들은 일본 시민사회단체도 있었지만 동포 사회도 있었습니다.

그 동포 사회의 중심에 또 역시 학교가 있었고요.

그리고 그 학교를 할머니께서 만나셨을 때 할머니와 일종의 동질감.

그러니까 이 학교의 학생들이나 할머니나 일본의 침략전쟁과 분단의 피해자들로서 할머니가 인식하셨고

그로부터 굉장히 꾸준하게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계셨고

얼마 전 병상에서 떠나시기 전까지도 맨 마지막 유언이 "조선학교를 지켜라"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 조선학교 학생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앵커] : 그렇습니까? 마지막 유언이 조선학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켜라라는 유언은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예를 들면

이 학교 학생들이 뭘 가장 원하나요?

어떻길래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을 하셨을까요?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일단은 불려진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앵커] : 불려지는 일이요?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그러니까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잊혀진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선학교라는 존재를 알아주는 일.

그리고 그들이 70년 넘게 일본 땅에서 말과 글을 지켜왔던 그 역사에 대해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역시 북일 간의 관계라든지 다양한 동북아 평화의 그런 정세 속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남측 사회는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백안시했던,

혹은 우리가 스스로가 공포감을 갖고 일본 조총련계 학교에 대한 공포감들을 좀 버리고,

있는 그대로 학생의 모습을 봐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앵커] : 그렇군요. 인식을 새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지금 매우 중요한.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네, 정말 좋은 말씀이십니다.

[앵커] : 그런데 왜냐하면 사실은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고

많은 사회활동을 하셨습니다.

뭐 흔히들 이런 경우에 '저 양반은 블랙리스트였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블랙리스트에 계셨고.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그런 통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앵커] : 통보도 해 줍니까?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그게 아니고 ,지난 적폐 수사 과정에서

검찰 쪽으로부터 연락은 받은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권해효/몽당연필 대표] :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조선학교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쨌든 한때 일본에서 체제와 이념의 대결을 벌이면서

조선학교에 대해서 우리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냥 유령 같은 존재였지만

이 조선학교의 출발 자체가 모든 재일동포의 꿈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죠.

사실 1945년도 해방됐을 때 일본 땅에는 무려 200만 명 이상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70여만 명이 남아서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조선학교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일본 땅에 지금 정주하고 있는 이 학생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앵커] ; 알겠습니다. 저희 인터뷰를 다시 본질로 돌아가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래 책을 보면 왜 재일한국인의 딜레마가 생겼는지 어림할 수가 있을 겁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저자 우쓰미 아이코  | 2007.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