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인사이트』

2019. 1. 23. 19:20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인도 인사이트 2018. 6. 25



인도의 복잡다기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모자이크처럼 구성된 ‘인도’라는 존재 자체가 일관적인 설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리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서 인도를 구성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도 인사이트》는 어느 외교관이 인도에서 직접 듣고 보고 배운 것을 기록한 책으로 인도의 미스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 대한 이해는 인도의 종교와 역사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저자는 인도의 과거와 오늘, 인도인의 심성과 신앙을 쉽게 그러나 핵심을 짚어가며 설명하고 분석하였다. 게다가 외교관의 안목이 더해져 인도의 정치, 경제를 다루면서 인도의 장래를 예측하였다.




저자 손창호
18년 차 외교관으로 사회, 문화 분야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미국 로스쿨 로펌에 도전하라》, 《한식, 세계를 요리하라》, 《글로벌 키즈, 아빠가 키운다》 등 다수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외교부에서는 경제통상, 북핵 등 분야에서 근무했으며, 북경과 뉴델리에서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현재는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실 정세분석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법학박사)을 졸업하였고, 31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였다. 통상법 분야 관련 《Journal of World Trade》 등 학술저널에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림 : 이윤희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법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인도 체류 중 네덜란드계 아트디렉터를 만나 운명처럼 그림을 시작하여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도생활 등 작가의 경험을 소재로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행위’로서 작품을 한다.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탄탄하며, 색감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예술의 전당 지원으로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8년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단체전, 12월 COEX 서울아트쇼에 참가했다.




인도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결국 구심점에 있는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다.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인도를 무력이 아닌, 오로지 인덕과 리더십으로 결집해 낸 간디의 업적은 세계사적으로 눈길을 돌려 봐도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 간디는 현대 인도를 일궈 낸 건국의 아버지이자, 이념적 설계자이기도 하다. 독립을 이룬 1947년 당시 인도는 8억 명에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거대 국가였지만, 자국인이 통치하던 단일 국가로서의 경험은 없었다. 수십여 개의 언어와 제후국, 제각각 상이한 문화와 종교가 난립하던 지역에 하나의 통합된 인도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중략) 통일인도의 형성은 마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런 업적을 이뤄 낸 것이 바로 간디다.
―14쪽, 제1장 인도 정치와 사회를 규정하는 요소들

인도 결혼 문화는 카스트종교적 배타성, 지역별 특수성 등 세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카스트는 인도 결혼 문화의 기본인데, 동일 카스트를 배우자로 삼도록 규율한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알려진 4대 카스트가 가장 기본적인 구분이지만, 실제로는 지역별로 수많은 세부 카스트로 나뉘기 때문에 다양한 양상으로 구현된다.
―82쪽, 제2장 새롭게 조명한 인도인의 삶

한국 기업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여타 국가의 다국적기업들과는 차별되는 독특한 지위를 누린다. 식민 통치라는 불행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가 인도 시장에서 선전하는 것은 현대차의 가격경쟁력과 우수한 품질 덕분이기도 하지만, 여타 다국적 자동차 기업이 인도 시장을 석권할 경우 이들 기업이 갖춘 기술경쟁력 이상의 정치·경제적 함의도 있다.
―112쪽, 제3장 거대 신흥 경제권인 인도의 도약과 도전

그러나 일반 인도인에게 아잔타 석굴은 인도의 중소도시 중 하나인 아우랑가바드 근처에 있는 ‘불교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동굴’ 정도로 인식될 뿐 유명 관광지는 아니다. 실제 이곳을 찾는 관광객 상당수는 외국의 불교 신자 또는 일반 관광객들이다.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아젠타 석굴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붓다가 조각되어 있고, 천 년 전에 그려진 아름다운 채색화를 감상할 수 있는 로컬 관광지 정도에 불과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종교로서 생명력을 잃어버렸음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적으로나 불교예술 차원에서도 의미가 깊은 명소를 외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200쪽, 제5장 인도 유적지에 숨겨진 사실들

 

출판사서평

“인도라는 코끼리는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그 족적은 클 것이다”

위의 글은 만모한 싱 전 총리가 한 말이다. 느리게 움직이는 인도라는 나라, 이 나라에 관심이 있거나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지리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 인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영국 식민지 역사까지 더해져 있다. 이렇게 다면적인 인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인도라는 나라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 있어 많은 사람이 인도라는 나라에 고개를 돌리며 “느려터진 코끼리”로만 치부한다.
하지만 인도는 달라지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가 주총리로 취임한 2001년 이후 구자라트 주는 10여 년간 매년 10% 내외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게다가 델리대학, 네루대학, 인도공과대학 등 우수한 명문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제 “느려터진”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코끼리의 거대한 몸집과 영향력”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인도 인사이트》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간디, 타지마할 등의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부터 우리나라 기업의 인도 진출, 인도 시장에 얽인 이야기를 담았다. 이 밖에도 인도의 종교나 역사 등 인도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담았다.
인도의 찬란했던 과거, 변하고 있는 현재의 인도, 그리고 무섭게 성장할 미래의 인도까지……. 인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도라는 나라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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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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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프롤로그

제1장  인도 정치와 사회를 규정하는 요소들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
한 나라, 다른 나라
인도의 불교
인도 사회의 갈등과 공존
모디의 특별함
인디라 간디와 민주주의
21세기 외교의 다크호스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 반목의 역사
식민지 시대의 기억
인도의 공용어와 영어
인도의 소
뉴델리의 의미

제2장  새롭게 조명한 인도인의 삶


발리우드와 농촌 문화
인도의 대학교
인도의 세대 차이
결혼을 위한 카스트 메커니즘
커리에서 보이는 인도 문화
재외거주 인도인의 힘과 희망
한국인과 인도인
뉴델리 난개발과 경제발전
인도의 식문화
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인도인

제3장 거대 신흥 경제권인 인도의 도약과 도전

 
한국인이 인도에서 강한 이유
인도 시장 진출의 이면
인프라의 한계와 극복
중소기업 진출의 어려움
인도 특색의 자본주의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과거, 현재, 미래
인도인의 채용
인도와 에이전트
엔트리(entry)와 엑시트(exit)
인도의 로펌
CSR의 법제화

제4장 역사를 통한 현대 인도의 재해석


불교와 힌두교의 진화적 관계
인도 역사에서 무굴제국의 의미
영국의 땅따먹기식 인도 진출
간디와 타고르
1947년, 운명과의 밀애
영국 통치의 유산
인도와 파키스탄
혜초의 인도 여행 경로

제5장 인도 유적지에 숨겨진 사실들


인도에서 찾는 불교 유산
쿠트브 미나르와 델리 술탄조
아잔타와 엘로라
델리의 찬드니 초크
라자스탄, 남쪽과 북쪽의 흥망
타지마할의 의미
알라우딘과 몽골 남진의 저지



참고문헌









1

인도 역사 전문가인 존 키(John Keay)가 저술한『India : a History』의 글귀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인도인이 남겨 놓은 역사책이 없다'는 부분이었다. 유서 깊은 인도문명이 배출한 史書가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실제 인도인들과의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들을 때에도 역사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역사는 그들의 가치관, 생활관, 종교관 등에 깊숙히 체화되어 있다.




2

이제 인도에서는 불교의 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慈悲의 정신은 개개인이 겪는 어려움이 '前生의 業'이라는 논리에 희석되었고, 平等의 정신은 힌두교가 내세우는 카스트에 의해 약화되었다. 깨달음 역시 '구루'(guru: 힌두교 시크교도 등의 종교에서 스승 또는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수동적인 형태로 변질되면서, 佛敎 敎理가 정립한 개인의 깨달음을 향한 능동적인 정진과 평등정신은 결국 자취를 감추었다.




3

印度 정치사에서 하층민 출신의 정치인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독립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모디 총리처럼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낸 경우는 없었다. 근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엘리트 상류층, 즉 상위 카스트에 의한 정치 지배구조에 근본적인 변혁이 가해짐과 동시에 서구식 평등주의와 대중 중심의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는 모디 본인의 정치적 역량이 탁월한 점도 있지만, 인도 사회가 대중적인 지도자를 갈구하기 시작했고 모디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첫 全國區 정치인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SNS를 통해 수백만 명의 팔로워들과 소통하는 모습과 민생 중심의 경제정책 표방은 지금까지 구태의연했던 인도 정치에서는 획기적인 공약으로 비쳤고 수억 명에 달하는 20-30대 젊은 유권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2014년 5월, 모디 총리의 당선에 많은 인도 국민들이 열광한 것은 민주주의 기제를 통해 일반 국민이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신분의 지도자가 선출되었다는 데 있다. 이전 위정자들이 '아랫것들에게 베푼다'는 선심성 정책이 아닌,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실질적인 혜택을 베풀어주는 리더쉽을 바라는 것이다.





4

무굴인이나 영국인이 지배를 강화해도, 인도인들은 이들을 또 하나의 카스트로 간주하여 최상위층으로 삼았다. 지배 왕조들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도인의 카스트를 구태여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상위 카스트로 인도를 다스렸다.

 

식민지 시대가 종결되고 독립을 쟁취했어도 일반 농민사회에서 보면 지배계층이 영국인에서 상위 카스트의 인도인으로 바뀌는 것뿐이지 일상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렇듯 카스트와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온 사회체제의 존속으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도인들의 반감은 우리가 일본에 가지는 감정과는 다르다. 인도인에게 있어 200년도 채 안되는 영국의 지배 기간은 자신들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우여곡절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

힌디어는 인도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사용할 뿐이고, 지역적으로도 델리, 인도 북부 그리고 인도 중부지역에서 사용될 뿐이고 여타 지역에는 그 지역 고유 언어가 따로 있다. 벵골어, 타밀어, 구자라티어 등 인도 헌법에 명시된 공용어만 22개에 이른다. 지역별로 타 지역 언어에 대한 배타성이 높아서 각 지역의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차선책의 중개언어로써 영어가 사용된다.


그리고 지역과 상관 없이 병원, 행정관청, 연구소 등 곳곳에서 폭넓게 영어가 쓰이고 있다. 이렇듯 사회 정치 경제 철학 문학 등 인문 사회과학 영역에서 영어가 주도권을 쥐다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과 지역, 고유어를 사용하는 계층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또한 언어의 사회적 유리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인도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모든 문학적 ·철학적 유산도 자연스럽게 소멸할 가능성도 있다. 타고르로 대변되는 벵골어, 불경의 산스크리스트어 등도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인도에서 영어는 성공의 지름길로 통한다. 유아기때부터 가정에서 영어를 학습시키고 영어로 예의범절, 품위 있는 대화법을 가르친다. 힌디어나 그밖의 지역 언어는 소위 아랫것들이나 구사하는 저급한 언어로 취급한다.




6

인도의 발리우드(Bollywood)는 봄베이로 부리던 뭄바이를 중심으로 제작되는 영화 산업체를 통칭하는 단어다. 발리우드에서 탄생하는 영화들은 인도를 넘어 중동 및 아프리카까지 블록버스터급의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매해 3천여 편의 영화가 지작되고 흥행작은 1억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다.

대부분의 영화는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의 천편일률적인 플롯과 기승전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며, 영화의 소재 또한 수십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분명 주인공은 21세기에 걸맞는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노래와 춤은 여전히 1950~60년대에 유행했음직한 음악과 막춤을 고집하는데 이는 다수 관객층이 보수적 성향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7

인도의 13억 인구 중에 8억 명, 즉 3분의 2가 25세 미만의 젊은층이다. 인도의 신세대는 1990년대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 ^`&%의 공성장한 이도 경제와 인터넷 문화를 접한 첫 세대로 글로벌 문화와 규범을 터득하고 인도의 사회 관습과 규범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세대이다. 카스트를 부정하고 평등주의적 가치관 아래 자유뷴방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물질만능주의를 포용한다.




8

인도의 음식문화는 여타 무명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도인들이 식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인은 식사할 때보다는 식전에 음료와 각종 에피타이저를 즐기면서 교류하는것이 일반적이고

식사 자체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낸다.

'커리'라는 말이 정작 인도에서는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식민통치 시절 영국인들이 인도사람들이 밥에 비비거나 빵네 찍어먹는 소스를 통칭하여 커리라고 불렀는데, '커리'는 일도인들에게는 여러 종류로 분류되는 음식이고 각각 고유명칭이 따로 있다.




9

NRI(Non-Resident Indian), 즉 '재외거주 인도인'이라고 통칭하는데 전세계적으로 2천만 명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외국유학은 인도를 빠져나올 수 있는 최상의 해방구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3만 여 명의 학생들이 매년 미국행 항공편에 탑승한다. 그러나 학업을 마친 인도인에게 인도는 돌아가서 봉사하고 발전시키고픈 고국이 아니다. 이들은 미국에 정착한다.




10

불교는 점차 금욕주의,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 심오한 교리에 입각한 교조주의로 흐르면서 일반 신도들과 거리가 멀어진다. 인도인들은 천성적으로 춤과 음악을 좋아하고 개방적인 性 풍조와 낙천주의 경향을 갖고 있는데, 불교가 추구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참선과 교리에 대한 연구, 엄숙한 의식과 출가의 강요 등은 일반인들이 아닌 귀족 중신의 종교적 면모에 가깝다.


팔리어 경전에는 이와 간련한 붓다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깨달은 이 가르침은 깊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온하고, 숭고하고, 생각의 울타리를 초월하고, 미묘하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알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다. 내가 만일 이 진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 몸만 피로하고 괴로운 일이다."


따라서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해탈의 성취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차라리 다음 생에서 높은 카스트로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인식도 힌두교 성장에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또힌두교는 불교의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로 性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일반인들에게 크게 환영 받았다. 性에 대한 숭상과 남녀간의 적나라한 성행위 표현을 통해 당시 신흥 힌두교가 교세확장을 위해 성 개방논리를 적극 활용했다.


현대 인도에서 불교는 사실상 소멸한 종교이나 힌두교의 교리 속에 스며 들어 있다고 본다.




11

힌두교가 다시 융성하면서 불교예술과 건축물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점차 변형되기에 이른다. 아잔타 석굴 인근에 위치한 엘로라 석굴도 카주라 사원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性器를 숭상하는 '팔루스' 중심의 석조물과 농염한 자세의 여체를 조각했다. 이러한 추세는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한 1100년경에는 힌두교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전락한다.


이슬람교에 있어서 우상숭배 금지는 가장 기본적인 율법의 하나이다. 또한 이슬람교도 불교 못지 않게 금욕과 경건함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이슬람교의 청빈하고 경건한 교리가 인도에서 성행하던 현세적 쾌락주의와 맞닥뜨렸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군사적 우세를 앞세워 인도 점령을 시작한 이슬람교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괴하고 적나라한 여체 조각행위와 성행위 묘사 조형물, 10만이 넘는 신을 숭배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다신교 교리, 일상생활에서의 남녀간의 자유분방한 교리는 도저히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인도 북서부를 통해 진출해 갠지즈 강을 따라 동진란 이슬람군은 점령하는 지역마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찰을 파괴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불상과 힌두교 신상들도 참수를 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힌두교와 불교 유적지 골자재를 이용하여 모스크를 건립한다. 참수된 불상의 머리는 방치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골동품 수집상에 의해 대거 유럽으로 반출되어 뉴욕 같은 대도시의 고급 레스토랑에 장식품으로 전락하여 佛者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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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스탄

1) 자이푸르 지역 바르말 카치와하 영주의 항복

2) 치토르가르 요새의 메와르의 결사항전 . . . . . '치토르가르에 남아있던 잔영병력은 옥쇄를 각오하고 라자스탄이 자랑하는 '자우하르'를 준비한다. 성 한복판에 큰 불을 피워놓고 城안의 모든 여성들이 불 안에 띄어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의 축제인 '자우하르'를 펼치면서 2만여명의 메와르 병력은 술과 마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성문을 열고 죽음의 돌격을 감행한다.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가 전멸하고 치토르가르는 끝내 함락된다.'





13

타지마할의 디자인은 페르시아인 우스타드 이사, 이탈리아인 제로니모 베르네오, 프랑스인 오스탱 보르도가 공동으로 맡았다. 전체적인 건물 양식은 후마윤 황제 묘에 적용한 페르시아식 돔형 모스크를 기본으로 삼고, 당시 유럽 절대왕정 건물 디자인들을 많이 차용했다. 이런 세밀한 조각을 담당했던 석공이나 장인들도 인도인들이 아닌 바그다드나 콘스탄티노플 또는 유럽에서 거액을 받고 초빙해온 장인들이 도맡았다는 접에서 토착 인도인과 유리된 부분을 느낄 수 있다.


타고르는 타지마할을 '시간의 보조개 위에 놓인 눈물방울'이라고 표현했다. 타지마할이 갖는 아름다움의 절정은 고요한 밤에 안개가 드리워질 때  살포시 드러나는 자태'라고 한다.

국인들은 타지마할과 견줄 수 있는 건축물로 콜카타에 빅토리아 기념관을 건립한다. 현대 인도에 들어서 힌두교도들이 성금을 모아 타지마할과 경쟁할 수 있는 악사르담 사원을 델리 근교에 건립한다.

타지마할 건설이 무굴제국의 재정파탄을 초래했다는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1643년) 의 무굴제국은 엄청난 재정 흑자를 누리고 있었다. 타지마할 외에도 아그라 요새와 델리의 붉은 요새까지 짓는 등의 엄청난 토목공사를 벌였어도 재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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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로 가는 길목 후마윤묘



 (후마윤묘 주차장에서 본 외부 성곽과 키오스크)


다음으로 가는 곳은 후마윤묘다.

악바르대제의 아버지인 후마윤이 묻혀있는 곳이다.

페르시아 정원양식인 쩌르버그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어 후에 타지마할을 짓는데 많은 참조가 되었다는 곳이다.

후마윤 묘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하는데 외문에서 중문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짓기 위해 동원된 페르시아 기술자들이 묵었다는 건물의 구역과 그 곳에 있는 묘가 눈길을 끈다.


 

 (중문)


먼저 후마윤 묘를 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쳐서 중문으로 간다.

중문에는 서점이 있어 인도 고건축학괴에서 발행한 인도유적지 도록을 팔고 있다.

지나온 곳 중 아그라포트 말고는 이런 곳을 본 적이 없어, 지나온 유적지에 관한 도록을 몇 권 산다.



 

 

 


중문이 있는 건물 안에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투각된 창으로 보이는 후마윤묘도 다른 느낌이라 사진을 몇 장 찍는다.



 


중문 안의 구역은 정확히 4분할 된 구역의 정 중앙에 후마윤묘가 자리하고 있다.

후마윤묘역까지 5분할된 쩌르버그 양식의 장식정원은 지금까지 본 유적 중 가장 크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보아도 똑같은 건물은 흐트러짐 없는 완벽성을 추구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경배와 그 경배에 대한 무차별성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디에서 보아도 변함없듯이 그 안에서 나오는 신의 사랑이나 왕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생각에서 만든 것 같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중앙돔 밑에 정중앙 밑에 후마윤의 관이 놓여 있다.

돔 천장의 울림을 시험하는지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 옆에 서 있으니 소리의 반향이 좋다.

여기도 무덤이라 돔 천장이 높아도 빛이 들어오는 창은 낮은 곳에 있고 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바

닥에 반사되어 실내를 밝히고 있다.



 


어느 방향이든 다 똑같은 건물인 묘당의 뒤로 돌아가니 관광객이 하나도 없고 정원 잔디에 물을 주는 관리인만 있다.

마당 쪽으로 내려오는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뛰어온다.

우리가 못 들어 올 때를 들어왔나 생각하며 걸어가니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건다.

“지하에 후마윤 엄마의 묘가 있는데 구경해보지 않겠느냐”

“그래 그거 좋다”

앞서 가더니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전깃불을 치켜든다.

지하 특유의 냄새와 석회석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불빛에 비친 통로는 마감이 되지 않은 토굴 같다.


 

 


10여 미터 내려가니 방 하나가 나오고 중앙에 단을 쌓고 그 위에 관 하나를 놓았다.

지하임에도  천장은 돔으로 되어있다. 빛을 비추니 온 천장과 벽에는 빈틈없이 까맣게 박쥐 떼가 덮여있다.

어딘가에 이들이 드나드는 구멍이 있나 보다.

내 생전 이렇게 많은 박쥐 떼는 처음 본다.

아까 동굴 입구에서 맡았던 냄새가 이들의 것이었나 보다.

영생을 꿈꾸며 잠들고 있는 방이 박쥐 떼의 서식처가 되었으니 삶과 죽음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는가 보다.



 


이방인에 갑작스런 침입에 놀란 박쥐와 관 안에 계신 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빌고 돌아 나온다. 

관리인의 특별한 행동에 뭐 별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이 분이 특별히 친절하여 저 멀리서 우릴 보자마자

‘아 저분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순간 일어나 한달음에 달려왔을 리는 만무한 일이고,

특별대접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것은 방문객의 예의니

주머니에 있는 20루피를 꺼내서 건넨다.

물론 관리인은 '에게 이게 뭐야' 이런 표정으로 투덜거리지만 일단 건넸으면 뒤 돌아 보지 않는 것

이 시간 없는 여행자의 상책이니 얼른 그 자리를 뜬다.



 


후마윤묘에서 나가는 길은 들어온 중문이 아닌 페르시아 기술자들의 숙소 쪽으로 난 길로 잡는다.



 


이곳으로 가는 곳에 장식정원의 수로와 연못에 물을 대는 샘이 하나 보인다.

아그라포트에서 본 양식과 같다. 무슬림의 상징인 꺽쇠무늬가 비스듬히 경사져있는 곳으로 흘러내린다.

무슬림의 신성한 율법과 진리의 말씀이 하늘에서 땅으로 흘러내리듯.



 


페르시아 기술자들의 집과 그들의 모스크는 후마윤묘와 달리 많이 허물어져 있다.

묘당이 완성된 후 기술자들이 떠나 그들이 머물고 생활하든 숙소였던 이곳이 더 이상 필요 없었겠지.

죽음의 집이야 주검이 있는 한 필요하겠지만 삶의 집이야 사람이 떠나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니

버려지고 훼손되고 결국 무너져 버린다.

저 집처럼 저 곳에 살았던 사람들도 사라졌겠지만 그들이 남긴 후마윤묘는 남아 지금도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린다.

역사를 받쳐주고 완성해간 수많은 민초의 삶과 이들 앞에 서서 혹은 이들 위에 군림하던 영웅과 군주들의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부처님이 그 밑에서 해탈했다는 보리수 두 그루만이 모두를 알고 있다는 듯 입구에 서있다.





마지막으로 이샤칸의 묘를 본다.

독립된 공간에 페르시아 양식의 장식 정원 안에 있는 이샤 칸의 팔각형 묘는 규모는 작지만 팔각

건물을 감싸고도는 회랑의 기둥이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코발트블루의 타일이 영원한 하늘을 꿈꾸었던 이들의 심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후마윤묘 앞 잔디밭에서 점심으로 김밥을 먹는다.

사르나트에서 먹는 김밥보다는 맛이 좋았지만 양이 너무 적다.

델리 물가가 바라나시 물가보다 비싸서 그런 것인지 인도쉼터에서 만든 김밥은 어제 저녁의 그 푸짐함은 어디로 가고

우리 아들 어린이집 소풍 때 싸주던 애기 김밥이다.

오늘 떠나는 것을 알았음인가 뜨내기 상대하는 역 앞 식당이 생각난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아님 호기심에 그런지 일부는 음식을 싸가지고 놀러온 인도 가족의 도시락을 얻어먹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주전부리 파는 행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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