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8. 19:23ㆍ미술/사진·조각·건축
2017. 2. 1
20세기 초, 경성에서 펼쳐진 부동산 개발의 역사!
서울의 명수이자 서울 여행의 핵심인 북촌은 한국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1920년대 이후 근대적 부동산 개발을 통해서 만들어 진 곳이다.『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기억이자 레트로한 골목 여행, 걷기 여행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북촌, 익선동 한옥마을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식민지 경성에서 펄쳐진 부동산 개발의 현장을 담았다.
정세권은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스케일을 바꾸었다. 그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적정한 수준의 주택을 대량 공급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가치를 끌어올리며 도시 발전을 이끌고 삶의 질을 높였다. 따라서 시대를 읽는 사업가의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이 책은 식민지 경성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개척하며 근대 서울의 역사에 자취를 남긴 건축왕 정세권을 기억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정세권을 현대적 디벨로퍼,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하며 정세권의 경성 부동산 개발의 의의를 정리했다. 이는 북촌과 익선동뿐만 아니라 서울 곳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1980년대 도시 개발이 한 세대를 지나 새롭게 재생되거나 재개발되는 시점에 돌아보는 정세권의 도시한옥 대단지와 부동산 개발은 도시 개발과 도시 재생의 차원에서 보존과 개발, 과거와 미래의 대립 구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 저서(총 3권)
- 하버드대학교에서 도시계획ㆍ부동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도시계획 전공 교수를 맡고 있다. 부실하게 기획된 많은 거대개발 프로젝트들을 비판하고 용산국제업무지구의 파산을 예견한 『도시개발, 길을 잃다』(2011)를 출간했고, 『리씽킹 서울』(2013)에서는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으로서 지역 커뮤니티의 문화 역사적 자산 보존과 개발의 접목 가능성을 탐색하며, 가장 오래된 한옥집단지구인 익선동과 동대문 패션 제조 배후지역인 창신동, 조선족 밀집지역인 가리봉동의 역사성과 장소성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했다. 지역 커뮤니티 친화적 개발 가능성을 현실에 접목하고자, 2013년 소셜벤처 ‘Urban Hybrid’를 공동 설립해 커뮤니티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상업용 부동산 금융 및 개발(글로벌 금융도시 비교 분석, 상권 분석, 개발 스트럭처 등), 공유경제와 공유도시, 동대문 패션산업의 가치체계, 20세기 초반 서울 도시사 등이다.
저자 정세권
- 저서(총 2권)
- 북촌,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하며 경성을 뒤바꾼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은 조선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였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하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서울의 강남 개발이나 신도시, 뉴타운 개발에 비견될 만큼 근대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했다. 정세권은 전통한옥에 근대적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개량한옥을 대량 공급하며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일대 개선한 혁신가였다. 또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의 민족자본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의 재정을 담당하며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
프롤로그
1. 경성의 토지 전쟁
경성이냐 게이조냐
1920년대 경성의 인구 폭발
북촌으로 북진하는 일본인들
북촌의 토지 전쟁
2.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계 근대적 디벨로퍼의 출현
북촌 한옥마을의 탄생
경성의 건축왕
기회의 땅 북촌에 터를 잡다
전방위적 부동산 거대 기업을 일구다
건축왕의 불황 타개 전략
80년 전의 대규모 기업형 주택임대사업
개량 한옥의 브랜드 건양주택
건양사 경성 개발의 역사와 의미 : 규모의 경제, 표준화, 규격화
왕십리 토지 전쟁 : 일제의 뉴타운 개발에 맞서다
3. 민족운동에 투신한 건축왕
신흥 민족 자본가와 민족 언론인의 연대 : 평생의 동지 민세 안재홍
조선물산장려회를 재건하다
“백난중분투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분열과 위기
낙원동 300번지 붉은 벽돌집의 추억
건축왕 조선어학회에 참여하다 : 고루 이극로와의 인연
고난에 처한 건축왕 : 일제의 탄압과 재산 강탈
감격의 큰 사전
건축왕의 최후
에필로그 : 기농 정세권을 기리며
주
그림 목록 및 출처
1
많은 사람들이 북촌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단 북촌 만이 아니라 인근의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그리고 종로3가 뒤편의 익선동, 종묘 옆의 봉익동 등 2000년대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 아담한 동네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20세기 초 한 명의 선각자와 그가 설립한 회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접이다.
그는 경성 전역(주로 종로 이북 조선인 거주지역)에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1920년대 일제가 계획적으로 북촌 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공간을 위협할 때, 그의 대규모 한옥집단지구 개발은 조선인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조선인들의 주거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택 부문의 물산장려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북촌이 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성공한 디벨로퍼이자 대자본가에 그치지 않았다.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조선어학회도 후원하며 조선어사전 발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는 그의 민족운동을 빌미삼아 고문을 가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그의 富는 시간과 함께 소멸되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 머리말 중에서
2
(1920년) 당시 경성부 토지면적은 대략 1,000만 평 정도였는데, 이 중 국굥유지를 제외한 사유지는 대략 440만 평으로, 이 중의 조선인 소유 토지는 약 159만 평, 일본인 소유 토지는 164만 평이 넘었다. 기타 외국인 토지가 113만 평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소유 토지 비중은 16%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국공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를 합하면 일제와 일본인이 확보한 토지는 72%에 이르렀다.
토지 가격을 보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선인 보유 토지 가격은 879만 원 정도인데 반해,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 가격은 78% 이상 높은 1566만 원에 이르렀다. 즉 요지의 토지들은 모두 일본인 소유였던 것이다.
또 당시 조선인의 인구수가 일본인 인구수보다 3배나 많았다. 통계상으로 경제력을 갖춘 조선인은 일본인의 1/4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계와 경쟁하여 토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에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게이조(京城)'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3
1910년 한일합방 결과, 조선의 한성부는 경성부로 이름이 바뀌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의 범위가 크게 축소하여 식민도시로 전락하며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식민지화 되면서 정치 행정 업무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은 생활 근거를 잃고 이들 다수는 경성을 떠났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인들이 메워 대략 25만 명의 인구수는 변함이 없었다. (1910년부터 1920년 사이 일본인 수는 55,000명에서 65,000명으로 10%이상 늘었다.)
※ 이후 경성의 인구는 산업화하는 과정에 1930년에 39만 명, 1935년에는 44만 명으로 폭증한다.
4
조선계 건설업체들은 관급공사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민간주택건설 및 개발 시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의 주택은 세 유형이 있었다. 일본식 주택과 서양식 주택, 그리고 조선식 주택(한옥)이 있었다. 한옥은 건축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었고 건설기술자의 노임도 낮았다. 따라서 조선계 디벨로퍼드이 활동 가능한 영역이 되었으며 실제로 1920년대 이후 등장한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공급한 한옥은 기존의 한옥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대단지로 개발되어 여러 채의 작은 가옥으로 개발되었다. 좁은 면적에 맞춰 효율적인 주택배치와 내부 구조변경에 집중해 전통한옥의 독립적인 안채, 사랑채, 행랑채들이 트인 'ㅁ자'형에 모두 압축되었다. 화장실이 내부로 들어오고 부엌이 입식구조로 바뀌었다. 대청마루는 외부 덧문으로 거실로 만들었으며 바깟 처마까지 방의 벽면을 확장하여 추가 공간을 마련하였다.
5
일제는 1940년 11월 20일 <택지건물등 가격통제령>을 발포했다. 모든 택지와 건물가격을 1939년 9월18일 기준으로 동결시키는 것이었다. 주택개발업자는 주택건설 채산성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1940년대 초반 일제에 의해 건축면허를 빼앗기고, 두 번에 걸쳐 옥고를 치룬 뒤 뚝섬 일대(성동구 자양동 3만5천평)의 대규모 토지를 강탈당한 후 건양사의 사세는 빠르게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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