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可染(1907--1989),

2015. 11. 21. 19:48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李可染(1907--1989),中国现代中国画家。江苏徐州人,自幼喜欢绘画,13岁时,拜当地画家钱食为师,学画山水。后考入西湖艺术院研究班,学习油画并得到林风眠的指点与赏识,同年加入一八艺社,后任国立艺术专科学校中国画讲师,后又受徐悲鸿邀请到北平艺术专科学校任教,李可染的山水画,重视意象的凝聚。他强调山水画要从无到有,从有到无,即从单纯到丰富,再由丰富归之于单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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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미술의 거장 리커란(李可染·1907~1989)의 만산홍편(사진)이 1억8400만위안(약 336억원)에 팔렸다. 16일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5800만위안으로 시작한 만산홍편은 수십 차례 가격 경쟁 끝에 수수료를 포함해 최종 1억8400만위안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마오쩌둥의 시 심원춘 장사(沁園春 長沙)의 한 구절인 ‘바라보니 모든 산이 붉게 물들었네, 숲도 층층이 물들고(看萬山紅遍, 層林盡染)’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7점 시리즈 중 한 점으로, 리커란의 대표작이다. 40여년 전 리커란은 이 작품을 80위안에 베이징의 유명한 서화 골동품 가게인 룽바오자이에 넘겼으며 2001년 501만위안으로 치솟은 작품 가격은 해가 갈수록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고 중국 언론은 전했다.

 

  '청산기다중(青山几多重)

 

 

 

 

 

  

 

 

 리커란, 수향소흥성(水鄕紹興城), 1962년.

 

  

 

 

 

 

 

 

 

 

 

 

  李可染《清漓胜境图>>

 

 

 

 

 

 

 

 

 

 

 

 

 

  

  

 

 

 

  

 

 

 

 

 

 

 

 

 

 

 

 

 

 

 

 

 

 

 

 

  

 

 

 

 

 

 

 

 

  

 

 

 

 


李可染 树杪百重泉 110.9×79.2cm 1982年

 

 

 

 

 

 

 

 

 

 

 

 

 

 

 

 

 

 

 

 

 

 

 

 

 

 

 

 

 

 

중국 현대산수화의 거장 이가염 李可染 리커란

 

▶중국 현대미술의 대가 ‘이가염(李可染)’ (중국명: 리커란)

 

이가염(1907-1989)은 강소성 서주 출신으로 상해미술학교에서 중국화를, 항주 서호국립예술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46년(39세) 북경국립예전(현 중앙미술학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제백석(齊白石), 황빈홍(黃貧虹)에게 전통 필묵법을 사사받고

적묵(積墨)과 경단(硬斷)이 있는 독특한 필묵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가염의 산수화는 웅장한 기상과 음악적인 리듬감, 단순한 구도와 강렬한 필묵이 특징이다.

그의 그림은 단지 화면 속에 존재하는 관조적인 수묵산수가 아니라 생생한 현장감을 담은 생활속의 산수로,

현대산수화의 새로운 장(場)을 펼쳐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3년 동독예술과학원은 그에게 제백석(齊白石)에 이어 두 번째로 원사(院士)칭호를 부여하였고

중국현대평단은 그의 산수화를 ‘이가산수(李家山水)’라 명명하여 중국현대화단에 유래없는 새로운 유파로 인정하였다.

 

수묵으로 연주한 산수의 세계 ‘이강산수(離江山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근대화단의 중/서미술융합론은 평가절하되었고 보다 중국적인 미술과 인민에게 봉사하는 미술이 강요되었다.  

이가염의 산수는 혁명정신이 담긴 삶의 현장으로서의 조국을 그리는 것이었고

전통산수화가 지닌 필묵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시대적 현장성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화면을 창출하게 된다.

 

이가염의 산수화는 크게 대산수(大山水)와 이강산수(離江山水)로 구분 할 수 있다. 

대산수 대담한 화법과 구도 등 북송산수를 본으로 삼아 이가염화 한 것으로

이성(李成), 이당(李唐) 등의 전통화가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강산수중국 최고의 절경이라 불리는 계림의 이강을 30년간 꾸준히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조국의 현장(산수)에 이가염만의 정서인 산수의 음을 결합시킨 독창적인 화법으로 음악적 화경을 성취하였다.

 

1957년 이가염은 동독으로 그림 여행을 가게 되고 이후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가염는 이 시기에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可貴者膽 所要者魂 귀한 것은 담대함이요, 필요한 것은 혼이다 라는 두 개의 인장까지 새긴다.

 

 

 

 

 

 

 

 

 

 

이가염은 이때 수묵을 통한 표현 가능성의 극대화를 시도한다.

실경산수화 또는 풍경화의 대상들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필묵법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이가염은 산수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여러 가지 준법들을 시도한다.

 

산이나 바위 등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준법인 부벽준(斧劈준,도끼로 찍어낸 듯한 느낌을 주는 준법)이나 절대준도 보이고

점을 사용하는 미점준도 엿보인다.

 

그리고 묵법으로는 옅은 선염의 바탕에 중묵을 가하는 적묵법도 보이고 파묵도 나타난다.

이가염은 또한 그림에서 입체감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점과 선 그리고 면의 조합을 통하여

자연의 사실적 대상들이 지니고 있는 삼차원의 입체감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에 도전한다.

 

 

 

 

 

1957년 이가염이 동독을 여행하였을 때 그린 The Meisner Church Germany라는 그림이다.

 

 

 

 

 

 

 

 

    

1959년 전통화법으로만 그린 화산측영(畵山側影)이라는 작품이다

그림에서 이가염은 과거의 준법과 필법만을 사용하여

웅장한 산세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가염의 그 동안의 여러 가지 시도를 마감하는 듯한 그림이다.

이제부터 이가산수(李家山水)의 본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1년에 그린 만송이 매화안에 사람이 있네(人在萬点梅花中)라는 그림이다

수많은 붉은 점으로 매화를 표현하여 봄의 화려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62년도에 그린 노신고향소흥성(魯迅故鄕紹興城)이다

노신의 고향인 소흥 시가지를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62년도 작품 만사이강연우(漫寫離江烟雨) 

                  

 

 

 

 

 

 

62년에 그린 황해연하(黃海烟霞)이다 

 

 

 

 

 

 

 

63년 작품, 황산연하(黃山烟霞)이다.

드디어 이가염이 새로운 산수화의 창조에 성공하였음을 알려주는 그림이다.

그가 그동안 갈고 닦은 모든 화법이 무르익어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내고 있다.  

 

 

 

 

 

 

 

 

64년도 작품인 만산홍편(萬山紅遍)이다

웅대한 구도에 미세한 붓길이 생생한 작품이다.

 

북경 근방의 만산을 모택동의 사의(詞意)에 부응하여 그린 것이라 한다.

붉게 타오르는 낙엽이 그림을 뒤덮고 있다.

가을철의 자연색인 붉은 색과 갈색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다.

 

심산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집의 모습들은 이 그림이 꿈의 풍경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그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65년도 작품 강성조시(江城晁市)이다                       

 한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던 이가염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생긴다

바로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가염은 문화혁명 당시‘반동학술권위’라는 죄목으로 비판을 받게되며

그의 그림도 흑화(黑畵)라 하여 비난을 받는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시골로 하방(下放)되어 노동을 했다고 한다..

 

힘든  광풍의 시기가 지나간 뒤엔 이가염은 이미 일흔 살의 노인이었지만,

병이 난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감행하고 산에 올라가 사생을 계속한다.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활발한 작품 제작으로 커다란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고,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이가염은 1989년 12월, 명을 달리한다.

 

 

 

 

 

 

 

1972년의 작품인 양삭승경도(陽朔勝景圖)

- 이 작품은 옆으로 긴 작품 중 맨 왼쪽 부분임. 

                           

 

   

 

 

 

 

77년 작품 이강승경(離江勝境)이다  

 

 

 

   

 

 

 

80년도 작품 적묵산수(積墨山水)  

 

 

 

 

 

 

 

81년에 그린 수묵승처색무공(水墨勝處色無功)이라는 작품이다 

                                      

 

 

 

 

 

 

 

 

 

 

 

 

 

중국현대산수화의 대가 이가염 

 

김은주 기자 =

이가염(李可染 리커란 1907-1989)은 수묵의 전통과 현대적 미학을 결합시켜 새로운 양식을 개척해 낸 중국 현대화단의 혁명적 인물이다.

미술평론가 장정란씨가 펴낸 「중국현대산수화의 대가 이가염」은 정치사회적격동과 혼란속에 중국화 전통의 예술적 가치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창조하여 중국 화단에 주체적 방향을 제시한 이가염의 일생과 작품세계, 중국 현대화단의 형성 과정을 짚어나간다.

이가염은 강소성 서주 출신으로 상하이미술학교에서 중국화를, 항주 서호국립예술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39세 되던 1946년 베이징국립예전(현 중앙미술학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제백석(齊白石), 황빈홍(黃貧虹)에게 전통 필묵법을 사사받고 독특한 필묵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가염의 산수화는 웅장한 기상과 음악적인 리듬감, 단순한 구도와 강렬한 필묵이 특징이다. 단지 화면 속에 존재하는 관조적인 수묵산수가 아니라 생생한 현장감을 담은 생활 속의 산수로, 중국현대평단은 그의 산수화를 "이가산수(李家山水)"로명명하여 새로운 유파로 인정했다.

이 책은 이가염이 항주에서 서양의 사실적 소묘의 기초를 다지던 시절에서부터전통과 근현대미술과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중국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자세히 담아낸다.

또한 제맥석, 황빈홍, 임풍면(林風眠), 서비홍(徐悲鴻)등 중국 근대화단을 주도했던 전통파, 개혁파 화가들의 개별적인 활동에서부터 그들이 지향했던 이념, 대표작과 함께 화법과 필묵의 이론들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미술문화刊. 225쪽. 2만원. kej@yna.co.kr(끝).

 

장정란 지음 / 출판사 미술문화 | 2004.03.05

 

 

 

 

 

 


 치바이스와 한국화 체계 세운 위대한 화가, 김영기

 

홍콩 등 국제경매시장에서 가장 고가(高價)로 잘 팔리는 세계 5대 화가 가운데 3명(제백석, 이가염, 장대천·齊白石, 李可染, 張大千)이 중국출신 작가이다. 미술 쪽에 깊이 발을 딛지 않은 사람도 세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을 것. 물론 지금의 중국이 G2에 이르는 막강한 부를 업은 신 부호들의 영향이 크기도 하지만 이들 3명이 동양미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반론이 없다.

후난성 상담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는 소목장(小木匠)을 만들어 입에 풀칠이나 했다. 가구에 간단하게 입힌 초충(草蟲)류 그림솜씨가 시장 일대에 화제를 뿌렸던 시기, 제백석의 그림에 놀란 북경대학 백발의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는 치바이스에게 체계 있는 화업(畵業) 공부를 제안한다.
거듭된 간청에 굴복한 치바이스는 나이 마흔이 넘어 북경대학에서 문인화 공부에 몰두, 중국 근세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으며 이가염, 장대천을 걸출한 화가로 키웠다. 그가 버린 화선지는 누각을 덮었다.

거리의 화가를 서울대에 입학시켰다면 나라가 들썩일 데모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시킨 중국의 문화적 융숭함은 배울만하다. 문화 대국이란 말이 실감나는 치바이스의 성장 일화이다.

간결하고 도끼로 나무를 내려찍듯이 힘차게 붓을 휘둘러 초화(草花), 새우, 벌레 등을 삶의 정취, 유머가 넘치는 화풍으로 숱한 작품을 남긴 그의 미술세계는 명·청 시대를 살았던 팔대산인(八大山人), 오창석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선이 굵은 전통적 수묵 바탕에서 청신한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었다.
치바이스는 북경 미술학원 교수로, 혁명이후 말년엔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에 올랐다.

 

치바이스 밑에서 먹을 갈고 화업을 전수받은 인재가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1911~2003)이다.

한말의 저명한 서화가 이신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맏이로 태어난 청강은 1932년, 당시로서는 일본을 택했던 조선의 젊은이와는 달리 북경 유학길에 올랐다. 보인대학에 입학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제백석의 문하에 들어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과 정신을 익혔다. 청강은 당시 우리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당(以堂)이나 청전(靑田) 등 6대가의 화풍에 물들지 않고 문인화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 독창적인 한국화를 완성시켰다.

청강 김영기는 중국 일본 화풍이 섞여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에 한국화라는 예술체계를 완성시킨 위대한 화가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귀국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에서 그림이 팔릴 수도 없었지만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시대여서 치바이스의 작품처럼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청강은 한국전쟁 때 피난지였던 경주에서 3년간 교편(경주고등학교)을 잡았다.

 

그 시절 `남산과 월성`, `계림의 가을`과 같은 경주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으며 포항에도 자주 들러 겸제가 그렸던 `내연산 폭포`, `동빈 내항(개인소장)`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1980년대 말에도 흥해 출신 정치지망생이었던 권동수(權東守·74)씨를 따라 산장에서 묵으면서 내연산 하경을 주로 그렸다. 1957년 뉴욕에서 열린 `현대 한국회화전`때 작품 선정을 위해 서울에 온 큐레이터 프사티(Psaty)는 “당신의 새우는 스승만은 못하지만 스승 치바이스가 그리지 못한 달을 그렸다. 특히 달빛을 품고 새우가 유영하는 물결은 매혹적이었다”고 평론, 국내외 미술계에 화제를 뿌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건국 이래 미국인 평론가로부터의 극찬은 청강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빠진 `월출산 하경`, `남해 비경`, `추당유정(秋塘有情)`과 같은 군청색 그림이나 중년의 `자화미술(字畵美術)`, `수세미(국립박물관 소장)`는 백미 중에 백미다.

청강의 그림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세 명의 작가가 된 제백석, 이가염, 장대천의 그림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나라의 경제력만큼 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문화적 텃밭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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