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전쟁과 중국》- 李世基

2015. 11. 12. 12:36책 · 펌글 · 자료/역사

 

 

 

6.25 전쟁과 중국

 

  

제1부 기존 연구, 한국전쟁 발발 기원론 검토


제1장 전통주의와 수정주의21
제2장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주도설33
1. 소련과 중국의 공모설33
2. 소련의 주도설ㆍ음모설37


제2부 35년 전 나의 추론의 요지


제3장 중ㆍ소 양국의 갈등ㆍ대립 구조43
제4장 스탈린의 전쟁 의도와 중국의 참전 동기47


제3부 나의 추론이 타당한 이유와 그 근거


제5장 한국전쟁 발발 이전의 논거55
1.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55
2. 신중국 건설 후 중ㆍ소, 미ㆍ소 간의 갈등ㆍ대립78
제6장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논거111
1. 1950년 6월 27일을 전후한 미스터리111
2. 전쟁 과정에서 중ㆍ소 간의 갈등ㆍ협력128
제7장 스탈린의 전쟁 의도로 본 전쟁의 결과와 영향191
1. 스탈린의 책략이 가능했던 주요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치명성191
2. 미국과 중국의 참전 득실194
제8장 중국의 참전 동기와 전략 목표201
1. 중국의 참전 동기와 역할201
2. 중국의 대미ㆍ대소 전략203


제4부 결론


참고문헌219
부록 1. 30여 년 전 논문의 이 적중하다223
부록 2. 이세기 회장이 밝힌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
대한민국 최고 중국통이 말하다243
저자 약력262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는 이 책에서 6ㆍ25전쟁은 스탈린의 기획에 따라 김일성을 부추겨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탈린의 6ㆍ25전쟁 전략은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촉발해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미중 대결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스탈린이 미국과 중국을 끌어들이게 된 이유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스탈린에게 신장위구르 지역, 만주와 북한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해 두 국가 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 그래서 중국의 힘을 뺄 궁리를 했고, 미국과 중국이 새롭게 동맹을 맺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에 미중 동맹을 깨기 위해 한반도에서 두 국가가 싸우도록 부추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중에 대한 스탈린의 ‘이이제이’() 전략이 세워졌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북한군의 남한 점령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면 곤란했기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무기지원을 조절하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고, 미중이 진흙탕 싸움을 하도록 유도했다. 결국 전쟁은 스탈린의 의도대로 아무런 결론 없는 전쟁으로 귀결되었고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6ㆍ25전쟁은 스탈린이 중국의 힘을 빼 마오쩌둥을 제압하기 위한 책략으로 김일성이 전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 공산화 통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던 것이다.

 

 

 

 

 

1

 

한국전쟁을 도대체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일으켰는가? 지난 60여 년 동안 전쟁의 발발 및 그 기원과 관련해 국내외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설과 이론, 주의 주장이 난무했다. 국내에서는 전쟁의 발발 주체 문제(누가 총을 쏘았나?)가 강조되는 가운데 북한의 남침설과 남한의 북침설, 미국의 남침 유도설 등이 제기되었다.

전쟁 발발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한국전쟁이 일제의 식민· 해방 공간에서 발생한 좌우대립이 주요인이라는 '내적 기원론'과 외세에 의한 분단과 소련의 역할을 강조하는 '외적 기원론'이 대립하며 논쟁을 지속해 왔다.

 

 

 

2

 

전통주의 연구들은 전쟁의 원인을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의 공동협력에서 찾으려고 했다. 1990년대 이후 신전통주의 입장 역시 북한의 남침설과 소련책임론, 외적 기원론의 입장을 유지하며 새로운 사실들을 수용, 변화하고 있다.

 

반면, 1970년대 들어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부르스 커밍스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연구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과 미국의 잘못에서 찾으려 했다. '남침유도설'에 입각하여 미국이 남한의 반공정권을 강화하고, 전후 자국의 세계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즉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과 행동은 전쟁의 발발을 막으려 하기보다 일단 방치했다가 수습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은 당시 남한 정부의 입지가 매우 불안하고, 북한은 남한을 전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승만정부의 동맹 체결요구를 거부했다. 1949년 6월에는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둔 채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1950년 1월에는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공산측의 오판을 유도하고 소련을 자극했다. 4월 중순에는 대소련 봉쇄전략을 담은 '국가안보를 위한 미국의 목표와 계획(NSC-68)을 승인했다.

나아가 전쟁 직전부터 계속된 한국군의 비정상적인 움직임(많은 병력 휴가 외박과 병기 수리, 비상경계태세 해제, 6월24일 저녁 채병덕을 비롯한 한국군 지휘부의 만취 등)으로 북한의 남침에 한국군은 어떠한 대비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38선은 비어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은 것도 미스터리이다.

 

 

 

3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획 준비 주도되었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면 왜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의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제시되었다.

 

첫째, 미국의 압력분산설

둘째, 미 ·일 조약 견제설 또는 극동전략설

셋째, 미국의 허점공격설

넷째, 미국의 결의실험설

다섯째, 미국과 중국 대결 유도설 또는 함정설 (←이세기 주장)

 

책 내용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들어볼만한 추론이네요.

 

 

 

 

4

 

1950년 8월 27일, 스탈린이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체코스롤바키아 클레멘트 코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한 비밀전문이다.

 

 

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로 그에게 아래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하고, 요구한다면 필사해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 전개에 대해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네 가지 이유로 안보리에 불참했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공산당의 신중국을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요, '핸드프리'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맘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의 진면목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어 군사적 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폭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 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미합중국이 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균형에서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겠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정부가 극동에 계속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힐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에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제3차 세계대전은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 지역을 혁명화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균형에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이렇듯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환경에 따라 우리는 또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복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2개월 후 복귀)했는지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복귀한 것은, 미국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해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했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해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950년 8월 27일

필리포프(스탈린)

 

 

 

 

 

아래의 5, 6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추론과 주장입니다.

 

 

5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 책은 크게 3개 부분, 즉 전쟁발발 이전과 발발 이후, 그리고 전쟁의 결과 및

영향 부분에서 추론과 관련된 여러 사건과 현상들을 상세하게 분석, 설명했다.

 

이 책에서는 많은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사건만 잘 살펴보아도 스탈린의 전쟁

의도가 미 중 관계보다는 중 소 관계에서 중국을 제어하거 억압하는 데 우선순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첫째, 스탈린의 한국전쟁은 마오쩌둥과 중· 소 조약 개정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에서 비롯되어

사실상 1950년 1월 말에 결정되었는데, 스탈린은 이 사실을 4월 13일까지 중국에 비밀로 했다는 점이다.

만약 스탈린이 미국을 겨낭한 것이었다면 보다 차분하게 중국과도 긴밀히 협력하며 전쟁을 결정 개시 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그동안의 미스터리로 1950년 6월 2 보장7일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한 안보리 회의에 소련 대표가 불참

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개입 북진시 중국의 참전이 이미 보장(약속)된 상황에서, 소련이 미국의 참전을 보다

용이하게 하여 한국전쟁을 미 중 전쟁으로 만들려는 스탈린의 책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셋째,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후 중국의 참전을 압박하면서도 정작 중국에 약속한 소련 공군의 중국군 공중엄호를, 중국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막판 상황에서 거부, 보다 많은 중국군의 피해를 유발한 것이다.

중국군은 하늘과 바다를 유엔군에게 내주는 등 과거 홍군 시절보다 못한 최악의 조건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이를 스탈린이 모를 리 없었다.

 

넷째, 중국은 종전 이후에도 30년 간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서 소외돼 발전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종전 후에도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지속적으로 감수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의 전쟁 의도가

미국보다는 중국을 겨냥한 '이이제이'의 결과로 볼수있다.

 

다섯째, 스탈린의 한국전쟁 목적에 한반도 통일이 없었다는 사실도 스탈린의 목적이 미국보다는 중국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고 볼수 있다. 결국 한국전쟁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한국을 미국이 구해주었다면,

만주지방에 망명 정권을 세워야 했던 북한을 구해준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북한을 도와 전쟁을 확신시키며,

장기화 국제화 하는 역할을 했다. 

 

 

 

 

6

 

아주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문제, 즉 북한지역 통치주체의 문제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 중이던 1950년 가을, 북한이 붕괴위기에 몰렸을때 해방된 북한에 대한 주권을

누가, 어떻게 행사할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한·미 간의 미해결 쟁점으로 남

아있다.

 

그동안 한국이 강조해 온 북한지역에 대한 남한의 통치권은 유엔이나 미국이 인정한 적이 없다. 따라서 유사시 남북 통일 과정에서 전시작전권과 북한지역 관할권은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북진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대미관계에서의 자주성 , 즉 균형과 주도성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통일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다.

 

한반도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한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 협력의 방향에서 주변국과 함께 한반도 동북아 평화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는 북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을 해소하는 일과 함께 구조적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달려 있다. 당면한 북한 및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평화와 함께 관련국 간의 평화 협력 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다. 한반도 통일도 냉철하게 보면 내외의 평화협력 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양반, 막판에 가서 생뚱맞게도 아래와 같이 원점으로 되돌리는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 합니다.

 

 

7

 

끝으로 필자가 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미쳐 풀지 못한 두 개의 문제를 향후 연구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스탈린은 시종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전쟁결정 시에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필자의 주장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스탈린은 시종 미국의 개입을 확신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이 과연 북한군이나 중국군의 승정(조기 승리)을 원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스탈린은 시종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전쟁 결정 시에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필자의 주장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스탈린은 시종 미국의 개입을 확신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이 과연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승전(조기 승전)을 원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하면서 전쟁의 조기 승리가 관건임을 지적,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개시되자 전쟁의 조기 승리는 물로 전쟁의 조기 종료조차 반대하며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계속 싸우기를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 일관성의 문제인데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소련은 시종일관 조기 승리를 바라지 않았어야 한다.

 

물론 상황이 급변하는 전쟁과정에서 전략방침이나 언행,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문제가 필자의 추론과 주장에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사실 탐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