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2015. 11. 3. 10:18책 · 펌글 · 자료/역사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1. 자유로운 유럽 중세도시의 신화
  
  1) 유럽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
  
  아름다운 유럽의 도시들
  
  한국 사람들이 유럽에 가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들일 것이다. 세월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붉은 기와지붕의 오랜 건물들, 좁은 골목길, 대로변의 웅장한 석조 공공건물, 거대한 고딕
성당, 기념물들이 즐비한 드넓은 광장과 노천 까페, 기하학적인 모양의 아름다운 정원들, 게다가 여유 있어 보이는 유럽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음악과 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면 한번 지나쳐 온 유럽 도시를 돌이켜 보노라면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감돌 수밖에 없다.
  
  이런 유럽의 도시들을 온통
콘크리트 범벅에다가 아름답지도, 또 역사와 문화향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우리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저도 모르게 탄식과 함께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 번 유럽도시들을 구경하고 그 숨결을 느끼고 온 사람들은 유럽의 많은 도시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 유럽의 도시

 

 


  그러나 유럽도시의 매력은 이런 외면적인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그 나름의 독특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것이 외면적인 것보다 아마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자유와 자본주의의 고향
  
  우선 도시는 유럽인의 자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미 중세 시대에 유럽의 도시민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왕이나 봉건
영주와 싸워 자유를 확보했다. 그래서 도시는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에는 그 전통을 이은 파리 시민들이 절대왕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고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그러니까 유럽 도시들은 이런 역사 발전의 생생한 현장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세도시는 자본주의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시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어 상공업이 번성함으로써 봉건제가 지배하는 주변의 농촌 지역과 전연 다른 곳이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그것이 주위의 농촌으로 퍼져 나가며 근대 초에 와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유럽의 도시들은 인류의 문화적 자산 가운데에서도 보석과 같은 존재로 소중하게 간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반면
중동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이와 전연 다르게 생각된다. 우중충하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거리들, 그 위에 사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들, 자유라고는 냄새도 맡아 보지 못한 억압과 착취의 고장, 종교적 광신과 문맹이 지배하는 낯선 땅이다. 이 정도가 되면 이런 도시들을 거니는 것조차 역겹게 느껴질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의 도시들은 비유럽의 이런 도시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시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문명의
기초로서 오늘날의 우월한 서양문명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인권, 시민적 자유와 같은 서양의 정치적, 시민적 가치가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면은 사실 서양인들이 계속 주장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계속 그렇게 배워 온 것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과연 어느 정도나 사실과 부합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실일까.
신화일까.


  
  2)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는가?
  
  11세기부터 발전한 중세도시

  
  그러면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중세도시는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로마는 '도시의 국가'라고 부를 정도로 로마시대에는 도시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점차 그 활력을 잃게 된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며 경제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유럽 경제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슬람 세력이 동부 중해와 아프리카 북부 해안뿐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하며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던 유럽의 경제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9세기에는 많은 도시들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거나 살아남는다 해도 그 규모가 크게 작아진다.
  
  유럽에서 도시가 다시 발전하게 된 것은 11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오랜 정체 끝에 11세기에 와서 인구가 늘고 농업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에 상업도 다시 활기를 띠며 도시도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약화되며 지중해 무역이 되살아난 것도 유럽 안에서 장거리 교역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축소되었던 과거의 도시들이 다시 확대되고, 왕이나 영주들이 사는 성의 부근, 또는 중요한 교역 중심지에 도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종 상인들이 모여들고 여기에
신발, 옷가지, 그릇, 가구 등 각종 생활용품이나 무기 등을 만드는 수공업자들, 또 양조업자, 제빵공 등 다른 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합쳐지며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시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으나 한 편에서는 왕이나 영주들에 의해 새로 건설된 도시들도 많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각종
세금이나 점포세, 거래세 등 여러 가지 수입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도시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을까.
  

 

▲ 중세 프랑스의 한 상점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가져 온다'
  
  일반적인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많은 도시들에서는 도시민들이 힘을 합쳐 왕이나 봉건영주와 싸우거나, 또는 돈을 주고 자유를 얻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이들의 힘이 커지며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도시는 나름의 행정기구를 갖고 재판소도 운영하며 자치를 하게 된다.
  
  도시에서는 보통 1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도시 안의 여러 업무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들이 대표로 선출하는 시장이 최고의 책임을 진다. 또 살인 같은 중범죄는 다룰 수 없으나 사기나 절도 같은 사소한 범죄들은 도시 재판소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도시가 이렇게 자율성을 가지므로 그것은 주변의 농촌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곳이 된다.
  
  농촌 지역에는 봉건적 예속과 착취가 있지만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촌에서 도망쳐 온 농노라 할지라도 도시로 들어와 일정기간이 지나면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독일 속담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중세도시에서 발전한 시민들의 자유가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가 발전하는 기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나 사실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중세도시를 그럴듯하게
미화하려 한 근대 서양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식의 해석을 했을까.
  
  앙리 피렌느의 <중세도시>
  
  유럽의 중세도시를 '도시의 자유' 라는 면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
기부터이다. 프랑스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의 기원을 중세도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789년에 파리 시민들이 도시 자치체인 코뮌을 만들어 루이 16세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한 시도를 바로 중세도시의 전통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잘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초에 널리 활동한 벨기에의 중세사학자 앙리 피렌느이다. 그가 1925년에 쓴 <중세도시>라는 책은 그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중세도시의 상업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상업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와, 농업적이고 봉건적인 틀에 묶여 부자유스런 주변의 농촌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도시와 농촌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도시가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앙리 피렌느 (Henri Pirenne, 1862~1935, 벨기에의 역사학자)


  

피렌느는 도시의 발전에서 중요한 사실은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도시민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주아지(Bourgeoise)란 불어로서 말 그대로 도시(불어의 bourg, 독일어의 burg, 영어의 borough: 이것의 어원은 군사적 요새이다)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나 피렌느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신분적으로 농민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3세기말의 도시민들(부르주아지), 파리국립박물관

 

 

 

중세의 농노들
  


  중세 시대의 유럽 농민들 가운데에는 자유농이나, 노예, 품팔이꾼도 있으나 일반적인 형태는 영주가 다스리는 장원에서 사는 농노들이다. 농노는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으나 다른 농노들과 공평하게 분배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것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이를 소유가 아닌 '보유(保有)'라 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영주에게 묶여 살았다. 영주가 직접 관할하는 직영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심지어는 엿새를 꼬박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주의 허락 없이는 장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없었다. 영주에게는 농사 지을 노동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농노의 딸이 다른 장원으로 시집가는 경우 영주에게 허락 받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영주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몸을 구속했을 뿐 아니라(이것을 인신적(人身的) 지배라고 한다) 재판권이나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여러 가지 세금도 내야 했고 성을 쌓는 등 필요할 때에는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농노들은 신분이 높은 귀족인 영주에게 예속되어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피렌느는 농노들의 이런 상황에 비추어 영주에게 묶여 있지 않은 도시민들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봉건적 관할권에서 벗어나게 해줄 자신만의 도시법과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집이나
토지를 소유할 수도 있고 그것을 마음대로 매매하고 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도시는 봉건적 질서에 얽매인 주변의 농촌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란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인 공동체인 셈이다.
  
  막스 베버의 <도시>
  
  피렌느의 이런 생각을 받아 들여 그것을 더 정교한 이론으로 꾸민 인물이 막스 베버이다. 그도 피렌느와 마찬가지로 도시는 정치나 행정적인 기능만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업적인 성격이 주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유럽 중세도시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다섯 가지이다. 우선 도시에는 성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농촌과 분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시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업적인 성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도시만의 법과 그것을 가지고 재판을 할 도시 재판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왕이나 영주의 법적 관할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도시의 행정을 담당할 조직이 있어야 한다. 도시의 자율성을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는 도시 대표를 선출할 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성벽에 둘러싸인 중세 남프랑스 한 도시의 모습  

 

  그러니까 베버는 상업적인 성격을 가져야 하고 자치를 함으로써 자율성을 가져야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베버도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의 도시들이 유럽의 도시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도시들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짜가 아닌 '가짜' 도시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거대 도시들은 경제발전에 따른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행정이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왕이나 지배계급의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이 허용될 수 없었으므로 크기는 하되 도시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20세기 후반의 서양 역사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은 1995년에 쓴 <문명의 역사>라는 책에서 '13-14세기에 지어진 서양 도시의 석조성벽은 독립과 자유를 향한 의식적 노력의 외적인 상징'이며 '도시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엔진이었다. 그것이 유럽의 첫 진보를 이끌었고 자유로
보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1990년대에조차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피렌느와 베버가 만든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가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럽 중세도시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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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 중세도시의 실상

 

1) 유럽의 중세도시들  

 

 

 

중세 유럽의 도시들

 


  2) 도시의 형성과 규모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함께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지역과 벨기에가 포함되는 플랑드르 지역이다. 이 지역이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신성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으나 황제가 독일 지역에 거주했으므로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도시들은 거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편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교황령에 자리 잡고 있던 로마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도시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11세기에 100여개였던 도시들은 14세기가 되면 점차 병합되어 30여개로 줄며 주변의 넓은
농촌지역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국가들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봉건영주들에 의한 봉건체제가 유지된 반면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귀족이 그 중심이 되는 도시국가 체제가 만들어졌다. 도시들이 거의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피렌체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같은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을 빼고도 인구가 10만 명 수준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큰 도시들이다. 그 외에도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많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도시는 다른 지역의 도시와는 크게 다르다.

 

 

 

 

 

중세 시대의 베네치아 모습


   
  플랑드르 지방의 헨트의 인구수는 13세기 중반에 8만, 브뤼헤는 4만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시기에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또, 상업도시로서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도 다른 곳에 비하면 특이한 예에 속한다.

 

 

 

 

 

중세시대 브뤼헤의 지도

 

 

 

  알프스 이북에 있는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의 규모는 비교적 작다. 프랑스의 경우, 가장 큰 도시인 파리가 14세기에 10만 정도였다. 그 외에 큰 도시로는 1300년에 몽펠리에의 인구가 4만, 리용이 3만, 나르본,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오를레앙이 각각 2만 5천 정도로 추산된다.

 

 

 

 

 

중세시대 브뤼헤의 지도

 

  영국의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큰 런던의 인구가 4만5천-5만 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인구 8천-1.5만 명이 4개, 5천-8천 명이 8개, 2천-5천 명이 27개이고 5백 명-2천 명 정도의 도시가 500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 1천5백 명 이하의 작은 도시들이다. 특히 이렇게 작은 도시들은 시장이 열리는 시골 마을들로서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 1086년에 만들어진 둠즈데이북은 오늘날의 국세조사대장으로 잉글랜드 중세사연구의 기본 사료로 당시의 도시모습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중세 영국의 시장이 열리던 시골 마을의 유적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쾰른, 프라하였으나 이들 도시의 인구도 14세기에 4만 정도에 불과했다. 15세기 초에 인구 2만 5천 이상이 되는 도시는 네 개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 인구가 4백 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을 보면 중세 시대에 유럽 도시들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십만에 이르는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 지역의 대도시들과는 크게 비교된다.


  
 3)  도시의 구조와 상업적 성격


  
  그러면 이 도시들은 서양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상업적인 것인가. 상공업이 특히 발전한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그 외에 상업이나 금융업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행정도시, 주교도시, 군사도시로서 발전한 곳도 많으며 상업이나 수공업이 발전한 곳도 도시내부와 주변 지역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북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정기시(定期市) 도시들이다. 트루아, 프로뱅, 바르-쉬르-오브, 라니의 네 도시인데 이 도시들은 11세기부터 시작하여 12-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도시들에서는 매년 두 달씩 돌아가며 한, 두 차례 정기시장이 열렸고 여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상인뿐 아니라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이베리아 반도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국제적인 중개
무역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는 가장 큰 트루아의 인구가 1만5천 정도로 크지 않다. 상파뉴 정기시들은 13세기말에 가면 쇠퇴하는데 그것은 상파뉴 백작이 다스리던 이 지역이 프랑스국왕의 왕령지에 병합되며 독립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운명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정세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도시 내의 상업이나 수공업은 길드 제도의 의해 묶여 있었다. 런던 시의 경우를 보면 금세공인, 재봉사, 비단상인, 포목상,
생선장수, 모피상, 소금상인, 잡화상인, 채소상인, 가구업 등 70개의 길드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경우에는 길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하튼 길드는 도시 내에서 어느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중세도시를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에 길드 제도가 점차 해체되며 발전할 수 있었다.

 

 

 

 

금세공인, Petrus Christus, 1449,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중세 상점

 

 


  4) 법적 관할권과 도시의 자유
  
  또 도시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도시민들은 주변 영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농노와 같지는 않으나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져야 했던 것이다. 왕이나 영 주들에 대한 예속은 법적 관할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법적 관할권은 법을 통해 도시민을 직접 지배할 수 있고 또 재산의 몰수나 벌금, 수수료를 통해 많은 수입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었으므로 왕이나 주요 봉건영주들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 영국 노위치(Norwich) 지도

 

 


  그러나 한 도시가 한 사람의 왕이나 봉건영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시 안에 여러 봉건적 관할권들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노위치(Norwich)시는 그 좋은 예이다. 이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고 여섯 번째의 부자 도시였다.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성은 형식적으로는 왕의 소유물이었으나 실제로는 베네딕트수도원의 소유로 도시 안에서 가장 큰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캐로우 수도원, 웬스링 수도원, 성 베네딕트 히름 수도원도 상당한 관할권을 갖고 있었다.
  
  노위치 대성당과 캐로우 수도원은 정기시장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통행세와
점포세를 통해 상당한 수입이 들어왔다. 또 도시 안에 있는 두 시장에 대한 권리는 다른 작은 수도원들이 갖고 있었다. 그 외 여러 세속영주들도 여러 관할권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 특허장을 받는 중세 플랑드르 한 도시의 시민들

 

 


  도시민들은 1158년에 왕으로부터 시민권 특허장을 받았고 1194년에는 도시 내에서 왕을 대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율적인 행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주교, 수도원장 등의
교회영주나 세속영주와 끊임없이 갈등을 벌였다. 왕은 교회와 도시민과의 다툼에서는 도시민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편을 들었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은 매우 좁은 한계 안에 있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상태에 있었다.
  
  프랑스의 리용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도시의 영주는 대주교였으나 도시의 관할권은 대주교좌
성당 참사회와 나누어 가졌다. 14세기 초에 도시 안팎에는 다른 수도원 아홉 개와 여러 개의 기독교법 학교들이 있었다. 그 밖에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외에 5개의 탁발승 교단, 또 여러 개의 작은 교단들이 있었다. 이 기구들이 모두 나름의 법적인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지대, 벌금, 시장으로부터 얻는 이익, 주조권, 십일조를 받는 권리 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 중세 리용 (Lyons) 시의 모습

 

 


  시민들의 저항이 커지며 대주교는 제한된 것이나 도시민들에게 특허장을 수여했다. 이에 의해 도시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행정을 보장받았다. 그래도 재판권은 제외되었다. 14, 15세기에 오면 대주교의 힘이 약화되어 15세기 중반에는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도시들과 같이 왕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고 그 행정은 관리들에게 인수되었다.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해 리용의 도시민들은 부유했고 또 교회가 지배하는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전체 도시를 지배한 적은 없다. 리용에서는 노위치보다 봉건적-교회적 성격이 훨씬 강했고 이는 왕에게 병합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도시가 여러
영주권에 의해 분할되는 것은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5) 도시민의 자격과 계급적 구분
  
  서양 학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중세도시들이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어떤 외부 사람이 도시로 들어온 지 1년 1일이 지나면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것은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수는 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을 때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예이지 일반적인 예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도시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 엑시터(Exeter)시의 모습

 

 


  우선 아무나 도시에 들어오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잉글랜드의 엑시터(Exeter)시에는 중세말의 자료가 남아 있는데 14세기 말의 인구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은 1377년의 경우 전체 가장(家長)의 19%로서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했다. 가장의 1/5 정도만이 자유로운 신분을 가졌던 셈이다.
  
  이것은 다른 도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14세기 초 런던의 자유인은 4만 인구 가운데 2천명에 불과했다. 5% 정도인 것이다. 피렌체 시의 경우 1494년에 인구 9만 명 가운데 자유인은 3%가 조금 넘는 정도인 3천명에 불과했다.
  
  베네
치아도 2천-2천5백 명 정도만이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중세도시에서 시민권을 갖는 자유인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고작 2-3%에 불과했다. 그러니 도시를 자유로운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소수의 귀족적인 지배층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또 자유인들은 대개 그 신분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새로 시민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도시에 들어와 상당히 오랜 기간을 경과해야 했다. 그것이 몇 대를 지날 수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모아야 했고 도시 내 유력자들의
후원을 얻어야 했다. 아무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멋대로 도시로 들어 온 사람은 처벌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러니 농노라도 도시로 도망쳐 오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도시는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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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럽의 도시는 특수하다고?

1) 다른 대륙의 도시들

이슬람권의 도시들

서양학자들은 이슬람권의 도시들을 전통적으로 매우 경시해 왔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로 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목민들은 표류하는 종족들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도시들에는 경제활동이 있다 해도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적인 것이라고 본다. 주변의 농촌을 뜯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상업 활동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 사회는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상업 활동에 제약이 되지는 않았다.


 

 

▲ 마호메트(Muhammad, 570~632)

 

 


이미 10세기에 후옴미아드 왕조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최대의 도시였다.

또 14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카이로가 크게 번성했다. 이 도시도 중국의 항주(杭州)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 인구도 약 50만에 달했다. 이집트에는 이 외에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개의 대도시가 나일강을 따라 발전했다.

카이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세계
무역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가 유럽과 인도, 중국을 잇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와 인근 지역에는 상업,
국제무역 외에 수공업도 매우 발전했다. 면직이나 린넨 같은 직조업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밖에 설탕산업이나 야금업, 무기제조, 유리, 도자기, 가죽제품 등 많은 산업이 발전했다.

또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정권은 각종 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경제에 약간의 통제를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집트인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이슬람권에서는 계약,
동업, 중개제도, 장부기장, 신용제도 같은 상관습이 잘 발달했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을 반자본주의적으로, 이슬람도시를 정치적, 종교적 도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 16세기 이슬람 상인들의 모습

 

 


중국의 도시들

서양 사람들은 중국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정치적, 행정적 성격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중국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9-10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발전과 무역의 증가 때문이다. 특히 13세기인 남송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 산업기술,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도 발전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의 항주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전국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무역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이븐 바투타.

 

 


송대에도 상공업이 발전했으나 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곡물이나 면, 견 같은 상업 작물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들도 상품 생산과 분배의 거점으로서 주변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에도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고 따라서 인구증가, 도시화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남경의 인구는 100만, 북경도 60만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명, 청대에는 행정과 전연 관계없는 상업, 산업도시도 많다. 경덕진(景德鎭) 같은 도시는 유럽에 자기를 수출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산업도시이다. 또 양자강 하류지역과 태호(太湖) 지역에는 면직물,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수십 개의 산업도시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양자강 하류의 큰 도시인 한구(漢口)에 대한
연구를 보면 베버와 같은 식으로 중국 도시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행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킨 상업도시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 윗부분의 도시가 한구(漢口)이고, 시계 방향으로 호광총독의 관청이 있 던 행정도시 무창(武昌), 작은 도시가 한양(漢陽).

 

 


 

▲ 15세기 초에 건설된 북경(北京)시의 모습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

일본의 도시도 경제발전에 따라 16세기 이래 크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1825년에 이르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82개에 이르고 도시인구는 모두 367만 명으로 추산 된다. 이런 도시화율은 18세기의 서유럽과 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오사카와 교토의 인구는 40만-50만이고 지금도쿄인 에도(江戶)의 인구는 근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도시화도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도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봉건
영주가 자리 잡은 성곽도시이기는 하나 그것을 반드시 행정도시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 1680년경,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시. 나가사키시는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 는 창구역할을 한 도시이다.

 

 


인도도 인도양 지역의 중심 국가로 일찍부터 경제가 발전하며 도시도 발달했다. 17세기에 아그라, 델리, 라홀 같은 무굴제국의 주요도시들의 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고 인구 20만명을 넘는 무역항들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프리카가 원래 미개하여 지금 보이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마도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건설되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많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1200년경에 인구 2만 이상의 도시가 31개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것이 1400년에는 35개로 늘었고 1600년에 30개로 약간 줄었다가 1800년이 되면 21개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200-1400년 시기의 이런 도시 숫자는 아프리카가 도시화라는 점에서 유럽에 크게 뒤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600년에 신성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있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는 16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아프리카인의 자생적인 정치, 경제할동이 위축되고 그리하여 도시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2) 유럽의 중세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빈약한 유럽 도시들


지금까지 유럽의 중세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지역의 도시들이 어땠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유럽 도시들의 특징은 우선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만이 10만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알프스 북쪽에서는 파리만이 10만 정도였다.

 

 

▲ 프랑스 리용

 

 


그러면 이렇게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들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급격하게 성장했는지 런던을 예로 들어보자. 런던은 17세기에 들어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4만 정도였다. 조선 초의 14세기 말 한양이 10만 이상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작은 도시이다.

1563년에도 9만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1580년에 12만 3천, 1593-95년 사이에 15만 2천, 1632년에는 31만7천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1700년에는 70만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엘리자베스 I세 (Elizabeth I, 1533 ~ 1603)

 

 


 

▲ 15세기 말 헨리 7세 시대의 런던

 

 


 

▲ 스페인의 무적함대

 

 


잉글랜드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므로 런던시의 급성장은 잉글랜드인의 해외진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며 노예무역 등을 통해 잉글랜드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런던시가 대표적이지만 많은 유럽도시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유럽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전 유럽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 아니다. 아시아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규모도 작고 인구도 훨씬 적다.

이렇게 도시가 빈약했다는 것은 중세시기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규모도 작고 숫자도 많지 않은 유럽도시들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규모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도시의 자유니 뭐니 하며 성격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유럽도시의 특수성은 잘못된 주장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들이 봉건적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가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약간의 자율성을 얻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 수백 개의 특허장을 확보한 도시라 해도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특허장을 도시민이 왕이나 영주와 싸워 얻은 결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영주들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허장과 도시의 자유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도시들은 왕이나 영주들의 소유권, 법적 관할권에 의해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니 도시가 누리는 자율이라는 것이 그 가운데 남겨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에서 왕권이 강해지며 도시의 행정권, 사법권이 점차 왕의 관리들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그나마의 자율성마저 잃게 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또 유럽도시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 받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중세도시의 전통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도시의 성격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치적 성격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 경제가 18세기까지도 유럽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활력 있었다는 주장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럽도시와 아시아 도시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무 지나치게 유럽 도시의 특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출처]  :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 프레시안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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