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 14:02ㆍ산행기 & 국내여행
성주사지 [聖住寺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 사적 제307호.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801~888)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塑造佛頭)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聖住寺址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가 센터인데, 이 돌 위에 철불이 있었다고 합디다.
낭혜화상탑비 [保寧聖住寺址郎慧和尙塔碑]
성주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현재 귀부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나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지 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 탑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것으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이며 글씨는 해서체로 최인곤(崔仁滾)이 썼다. 이수는 앙련이 받치고 있으며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앞면 중앙에 있는 제액(題額)은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기 어렵다.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가장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신라사회제도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성주사지 西 3층석탑 [保寧聖住寺址西三層石塔]
성주사지에 동서 일렬로 건립된 3기의 석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보물 제47호. 높이 400cm.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3층석탑으로 세부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준다.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三世佛)인 정광불(定光佛)·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고, 갑석의 윗면은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호형과 각형으로 된 2단 굄이 있다. 상대석도 마찬가지로 각 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조각했으며 비스듬히 경사진 갑석 밑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그 윗면에는 2단의 굄이 있으나 탑신과 갑석 사이에 별석(別石)의 받침대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는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1층 옥신의 앞면과 뒷면에는 자물쇠 장식이 있는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비교적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상륜부는 파손이 심하여 현재 방형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1971년 이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 윗면에 있었던 사각형의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해 없어진 상태였다.
성주사지 5층석탑 [保寧聖住寺址五層石塔]
성주사지의 동서로 건립된 3기의 석탑과 조금 떨어진 남쪽에 따로 건립된 통일신라시대의 5층석탑. 보물 제19호. 높이 660cm.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만 다를 뿐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하대갑석의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가운데에 3단 굄이 있다. 상대석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었으며, 갑석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3단 굄 위에 별석을 끼워넣었다. 이와 같이 탑신과 기단 갑석 사이에 별개의 굄을 삽입하는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석탑 형식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표현되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1층 탑신 밑의 별석받침이나 4단의 옥개받침,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1년 해체 수리공사 때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없고 사리공의 석재 뚜껑만 있었다. 李淑姬 글
비구 · 비구니 젊은 스님들이 답사 왔습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은 부여 박물관장인가 본데, 박식하고 설명을 잘해줍디다.
설마 여기다 또 복원을 하겠다고 다시 절을 짓거나 하진 않겠지요.
제발 유서 깊은 폐사지는 그대로 둡시다.
도저히 몸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걸랑‥ 황룡사 9층탑이나 복원해 보시던지.
무창포
대하축제를 한다고는 써붙여놨는데, 휑합디다.
대하가 많이 잡힌다더니, 웬걸,, 수협 직판장이라고 하는데도 자연산 1kg 45,000원 달랩디다.
2층 식당에 가져가면 상차림값으로 1만원 따로 받습디다.
친구랑 둘이 0.5키로 먹었는데, 굵다곤 해도 열대여섯 마리 밖에 안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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