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화약고라고 말하는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발칸반도의 원시시대 민족들과 또 현대의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충돌은 어떤 것인가? 발칸반도에 속해 있는 나라들의 역사는 슬라브족이 뿌리를 내린 역사이다. 본래 고대 슬라브족은 중앙아시아의 카르파티아 산맥 북방에서 발원하여 3세기까지 살고 있었으나 그 후부터 동서남의 3방향으로 분산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6세기경에 슬라브족이 도나후 강에 이르렀으며 8세기까지는 발칸반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라브족의 전반적 이동은 인도유럽어에서 분리해 널리 퍼져나갔는데 동방에서는 유럽, 러시아 전역까지 진출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슬라브족은 3대 민족군으로 형성하여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정치와 문화종교에 있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슬라브족의 역사와 분포에 대하여 지역별로 분류해 살펴본다.
1) 동슬라브족: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루시아, 플레슈크 2) 서슬라브족: 폴란드, 포메라니아, 폴라브, 실레지아, 체코, 슬로바키아, 밀찬, 루시티아, 소르부 3) 남슬라브족: (발칸반도에 포함된 국가들의 명단)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코소보, 그리스, 루마니아, 터키유럽지역
발칸반도의 지명은 터키어로 '산맥'이라는 뜻이며 면적은 50만 5000㎢이다. 2000년 현재 통계로 인구는 5690만으로 추산한다. 이 글에서는 발칸반도에 속한 슬라브족 중에서 8개 국가를 중심하여 살펴 보는데 이들 8개 국가들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코소보 등 국가들이다. 위의 슬라브 8개 국가들 중에서 발칸반도의 동쪽에 처음 정착한 세르비아는 매우 강력하고 우세한 민족으로서 히랍정교회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발칸반도의 서쪽과 서북쪽 방향에 정착한 민족들은 유럽의 카톨릭교문화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정착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인들이 3개의 분파로 분리되어 서편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카톨릭 진영이고, 동편에는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여 강력한 그리스 정교회 진영이 형성됐다. 그리고 중앙동부에 위치한 보스니아는 카톨릭도 아니고 그리스 정교회도 아닌 무슬림 이슬람교인의 나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 발칸반도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 및 원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연합하여 발칸반도에서 침략세력을 이루었으며 이에 맞대항하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세 나라가 한때 동조하여 발칸반도에서 세력다툼을 일으켰다. 유럽의 강대국 양대진영의 세력다툼의 내용은 경제적 이권이 물론 중요한 조건이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발칸반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칸반도의 분쟁의 비극의 근원은 <서로마 카톨릭 세력권>과 <동로마 히랍정교의 세력권>, 그리고 <무슬림의 세력>이란 종교적 분열이 발칸반도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고 복잡해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발칸 반도는 오랜 세월 동안 터키 투루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에 서유럽 문화권과 동방문화권이 충돌하는 경계선이 바로 발칸반도였는데 슬라브족들이 발칸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다문화권과 다종교권과의 혼존혼돈이 되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때 발칸반도는 터키 투루크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고 있었는데 러시아가 점차적으로 발칸반도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역시 발칸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침략하여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격하고 침략한 이유는 보스니아가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국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웃 나라이며 같은 슬라브족이며 또 그리스 정교회의 제일 강력한 나라인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는 터키 투루크의 지배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발칸반도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생사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시를 방문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세르비아의 특공대를 동원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1914년 7월 30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여 러시아 총동원령을 내렸다. 또 독일은 1914년 8월 1일에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영국은 8월 2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유럽의 열강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다 참전했으며 대전 후반기에는 이탈리아와 미국도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를 침공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세르비아와 전쟁이 시작됐는데 전쟁의 후반전에서는 국제적으로 참전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5세기 이래 17세기까지 200년 동안 발칸반도를 지배해오던 오스만 투르쿠 제국이 점차 쇠퇴해짐으로 이를 기회로 삼아 유럽의 열강들이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낸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을 함으로서 1917년 11월 11일에 종전이 됐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인 제1차 세계대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인명피해가 막대했다. 전쟁에 동원된 총수는 6,500만명이며 사망자만 570만 300명으로 기록됐다. 또 부상자의 수도 약 2,00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은 전쟁의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한 국가로 기록이 됐다.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내에서 민족분규에 의하여 발생한 전쟁이 결코 아니라 순전히 지역문제에 대하여 서구의 강대국이 이권을 위하여 서로 개입함으로서 발생한 침략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발칸반도는 세르비아의 주도하에 재건되었는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가 연합하여 <세르비아 연합왕국>을 건설했다. 1929년에 세르비아 연합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었다. 어쨋든 세르비아는 발칸반도를 주도하는 주체적 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또 다시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에 점령을 당했다. 그러나 1944년에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유명한 파르티잔 유격대가 출현하여 강력한 전투를 진행하여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를 발칸반도에서 물리쳤다. (하지만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발칸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든 전쟁이 종식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으로써 서방의 침략으로부터 많은 약소국가들이 해방이 되었으며 발칸반도에서도 역시 해방의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창설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1943년 11월 29일에 티토가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선언했다. 요시프 티토는 누구인가? 그는 1892년 5월 7일 발칸반도에서 크로아티아족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토는 어려서 로마카톨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했으며 1912년에는 고향을 떠나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떠돌이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티토는 오스트리아 군에 배속되어 참전했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돈속에서 빠져 있는 기회를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방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폴카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1920년에 발칸반도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에서 볼세비키들의 영향을 받은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비밀활동을 하다가 1928년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수차례 체포되었으며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요시프 티토는 공산당의 지시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정보원으로 활약을 했다. 1935년에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로비아 대표단원으로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하였다. 1937년에는 유고슬로비아 공산당의 임시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9년에 정식 서기로 취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요시프 티토는 독일에 항전했으며 1941년 4월에 유격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요시프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한편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해방 평의회”를 소집하여 정치문제를 논의했으며 같은 슬라브 종족들간의 분규와 종교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요시프 티토는 영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독일과 싸워야하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쨌든 요시프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는 시점에서 영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의심과 압력속에서 꾸준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독자적 노선의 입장에서 독립국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하나의 무거운 짐은 유고슬로비아 내부에 있는 반공주의적 우파세력과 싸워야하는 문제였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항해 투쟁한 요시프 티토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1943년 11월 29일에 요시프 티토는 드디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하나로 통합된 민족국가들은 다음 6개 국가들이다.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국가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로 통합된 6개 국가들이 종교적으로 3개 종파로 분열되어 있는데 통합된 연방공화국이 성사됐다고 해서 종교문제가 해결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발칸반도에서 3개 종파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있어서 불치의 암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는 <동방 그리스정교회>가 튼튼히 자리잡고 있는 반면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 로마카톨릭교>도 뿌리깊게 버티고 있었다. 또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 이슬람교> 국가이며, 마케도니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마지막 유럽영토로 남아 있던 국가이다. 이와 같은 3개의 정치적 배경이 뒤섞인 발칸반도에서 원초적으로 갈등과 분쟁의 불씨를 품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역시 3파로 분열된 발칸반도에서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에 항상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어쨌든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또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는, 요시프 티토의 독자적인 지도력에 추종하여 시종 <비동맹 운동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의 비동맹 정치노선을 일명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요시프 티토는 “티토주의”를 제창하면서 1945연 3월 7일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국호를 다시 정식으로 채택했다. 요시프 티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외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공산당 일당 체제를 공고히 했다.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 시절에 동지이였던 옛 전우들을 대폭 등용하여 정권의 요직을 채웠다. 요시프 티토는 1948년에 러시아 스탈린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여 반소노선을 주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공산주의 국가노선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 노선을 반대하여 코민포름 회원국의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에서 발생한 자유화 물결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요시프 티토는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것에 전략적 비중을 두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노선의 견고성을 주장하면서 대외와 국내에서 반공주의세력을 탄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의 내부에서 “서방 자유개방파”와 “사회주의 보수파” 사이에 갈등이 점차로 표출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는 반대파들이 모략과 중상으로 티토의 통치력에 도전하는 것에 대하여 비상대책으로 그들을 체포하여 투옥하고 또 정권에서 실각시키는 강경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1974년에 요시프 티토는 헌법을 새로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직을 획득하였다. 6개의 자치공화국들에게는 국방과 외교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분야에서 느슨한 형태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는데, 이 문구가 훗날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킨 계기가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어쨌든 요시프 티토는 1980년 5월 4일에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요시프 티토는 6개의 족 공화국과 3개의 종교 분파, 4개의 언어 집단, 그리고 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상이한 집단들이 연합해 이룬 특이한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40년 동안 통치했다. 요시프 티토는 서구의 침략과 음모에 시달렸으며 슬라브족 내부의 분열과 종교적 분쟁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한계 등 다양한 난관에 직면하여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40년 동안 통치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그의 공산주의 통치이념에 있어서는 한 치의 변함도 없었다는 평가다.
티토의 40년 통치 이후 발칸반도는 어디로? 1980년에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9명의 “대통령선출위원회”가 발족하여 교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대통령선출위원회”의 집단지도체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986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됐다. 밀로세비치는 요시프 티토가 건설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계승할 꿈을 품었다. 밀로세비치는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위대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통민족주의자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10년이 지난 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91년 6월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를 반대하는 로마카톨릭 국가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탈퇴를 주장하면서 독립국의 창설을 선언했다. 벌써 이때 서방의 공작과 압력으로 밀로세비치의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계승에 대하여 반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연방제를 유지할 것을 계획했다. 새로운 국가명칭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주축의 <신유고슬로비아 연방> 을 제정했다. 그리고는 <신유고연방>의 군대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급파하여 독립을 저지하려고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UN은 재빠르게 개입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주장하는 분리독립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UN은 신유고연방의 해체를 뒤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수천명이 죽었다. 1992년 1월. 밀로세비치는 UN의 압력에 굴복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의 분리 독립을 승인했다. 동시에 마케도니아도 전쟁없이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에서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6개 나라의 연방은 3개 나라가 분리되어 독립을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서 발칸반도의 분쟁의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발칸반도에서 이른바 <유고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내부에 살고 있는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이 독립을 반대하는 군대를 조직하고 믈라디치 사령관이 지휘를 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반대하여 내전을 일으켰던 것이다. 믈라디치 사령관은 훗날 보스니아 내전에도 참전하여 보스니아 내란을 총지휘를 했다. 이 크로아티아 내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이른바 '브코바르 대학살' 사건과 '스카브르나 대학살' 사건이 서방 언론을 통하여 전세계에 보도됐다. 서방의 언론들은 <유고내전>의 핵심적 역사적 배경과 맥락은 일절 모른척 하고, 오직 민간인 사망자의 수만 늘여서 보도하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 등 만행을 옹호하는 “패거리 언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전략에 방해가 되는 신유고연방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유고내전의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에게 뒤집어 씌우고 사상자수를 제멋대로 확대시켜 보도하면서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을 악마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의 영도하에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40년간 평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다시 메울 수 없는 골이 깊다. 20만명 숨진 <보스니아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화약고로 알려진 복잡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이슬람국이지만 사실은 인구 450만명 가운데 44%만이 이슬람교도들일 뿐이다. 그외에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인이 31%이나 된다. 그럼으로 총인구의 1/3 되는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이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데 이들의 본심은 세르비아 <신유고슬로비아 연방>편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실정이었다. 이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은 비밀로 세르비아가 제공해 주는 무기를 공급받아왔으며, 보스니아 내에서 보스니아 무슬림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분규상태에 처해 있는 상태였는데, 보스니아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 1992년 2월에 역시 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계기로 보스니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편협한 민족의식과 종교적 배타주의가 보스니아 내전의 도화선이 되어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 3년째인 1995년 7월 11일에 세르비아 총사령관 믈라티치 장군이 이끄는 <신유고연방군>은 보스니아 내부지역의 이슬람인들의 거주지역에 대하여 전면적 공격을 하려고 육박했다. 이러한 위기에 UN 평화유지군은 믈라티치 장군에게 무기반납과 평화회담을 약속하면서 휴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UN 평화유지군이 제안한 휴전은 말뿐이고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세르비아 <신유고 연방>군과 UN 군과의 전투는 제2차대전 종식 후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됐으며 양측의 인종청소로 인하여 5일 동안 전투에서 8천명이 살해됐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12월에 <데이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양측에서 20만명이 숨진 후에 내전의 막을 내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구 45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이 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후 UN은 “유고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UN이 주도하는 유고전범재판은 59명을 기소하고 밀로세비치 대통령 외 9명에 대하여 전범재판을 시작했으나 재판은 말뿐이고 10년 동안 아무 결론 없이 세월만 지나갔다. 양민 대학살의 명목상 총책임을 지고 있는 믈라티치 사령관은 10년 동안 도피 중에 있으면서 UN이 주도하고 있는 전범재판을 무력화하고 있었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신유고연방 대통령은 2006년 3월까지 미결수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원인 모를 의문사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가 살해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UN이 설정한 유고전범재판의 지지부진한 재판 결과에 대하여 세계는 미국의 정치재판의 음모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미국의 전 법무장관 램시 클락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유명한 불가리아 인권변호사 발칸노 그리고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핀터 등이 일제히 비난의 포문을 열어 UN과 미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다음은 코소보의 옛 역사와 오늘의 내전에 대하여 알아본다. 코소보는 1389년까지 세르비아 왕조의 중심지였다. 코소보에는 비잔틴 그리스정교회의 화려한 문화와 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이 가득하여 발칸반도에서 막강한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를 정치와 종교적으로 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에 대하여 공포심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세르비아의 번창하는 위세를 꺾기 위하여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비잔틴의 정교회와 정반대가 되는 소아시아 이교도의 나라 터키의 오토만 세력을 보스니아에 끌어 들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기독교권의 나라로서 이슬람교의 터키와 격돌하는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389년에 티키 이슬람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세르비아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세르비아 왕국의 패망으로 인하여 코소보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500여년 동안 받게 된다. 세르비아는 1881년에 이르러서야 터키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는 국제정세를 틈타 독립국이 된다. 독립국이 된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중요한 땅으로 여기는 것은 극히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옛날의 역사적 유물들과 또 그리스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코소보 땅이기 때문이다.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창설한 후에 코소보를 세르비아에 소속된 영토로서 <자치구역>으로 지정하는 정책을 승인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강력히 주장하기를 <코소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세르비아와 떨어질 수 없는 한 나라이며 한 민족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 UN과 미국은 코소보의 독립을 세르비아에게 강요하고 있다. UN과 미국이 코소보의 독립을 주장하는 구실은 현재 코소보에는 알바니아계가 90%이고 세르비아계는 10%뿐이라는 구실이다. 그러면 오늘 미국에게 중동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스라엘 유대인의 인구수 보다 팔레스타인의 인구수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절대 다수이다. 그런데 미국은 절대 다수인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중동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지 않고 서구 강대국들의 이권문제로 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코소보 내전의 문제도 흑백의 문제로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1999년 3월 UN과 미국은 오직 무력과 군사력 해결 방법으로 코소보에 대해 폭격부터 퍼부었다. 코소보에서 왜 느닷없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으며 그것도 선전포고도 없이 무차별폭격부터 퍼부었으니 너무나 경악스럽다. 터키 오스만 제국이 500년 동안이나 세르비아를 통치하다 떠나갔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 세르비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의 땅인 코소보에 알바니아인들이 떠나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문제였다.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예속되여 있는 무슬림 이슬람교 사람들이다. 그들은 코소보에 그냥 남아 있으면서 오히려 코소보의 주인 행세를 할 뿐만 아니라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알바니아인들은 남의 땅 코소보에서 오히려 민족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미국의 태도는 알바니아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세르비아를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마도 그때 세르비아에서 시작된 말인가 싶다. 현재의 미국은 지난 날에 독일의 히틀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세르비아에서 다른 슬라브족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히틀러의 악행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미국과 서구열강들의 발칸반도에 대한 태도는 일관성이 전혀 없으며 발칸반도에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세르비아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고 있다. 코소보 내전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이 지원하는 나토군이 코소보 원주민들과 알바니아인들 간에 중재를 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니 이것이 미국의 중재 방법인가? 1999년 당시 미국의 클린턴은 코소보 폭격을 승인했다. 승인한지 단 2시간 후에 나토사령관은 일사불란한 명령을 내려 무차별 맹폭이 계속됐다. 이와 같이 무차별로 투하된 폭탄들이 코소보인과 알바니아인들을 분간하겠는가? 미국과 나토군의 코소보 폭격은 어떠한 합리성도 없다. 미국은 코소보인-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은 하는척 하면서 내심으로 그 누구를 위함이 아니라 코소보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고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코소보의 피의 내전은 1999년 3월에 시작하여 3개월 동안 계속됐는데 약 1만명이 학살됐고 86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토의 무차별폭격으로 인하여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서방의 패거리 언론들은 제국주의의 침략행위를 옹호하고 오직 세르비아의 무지막지한 인종청소로 인한 인명피해라고만 왜곡보도를 했다. 미국과 서방 언론들은 아프리카 수단 다르푸르에서 발생하고 있는 4년간의 극악한 인종청소 사건으로 인하여 20만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나토국들이 코소보에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코소보 내전 3개월 동안에 공습 출격이 무려 38,000번이었으며 실제 폭격수는 10,500회였다고 한다. 10,500번의 폭격에 투하된 폭탄의 양은 천문학적인 수치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코소보 내전에서 20만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나토의 무차별 폭격 10,500번으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코소보 내전 3개월 동안 38,000번의 출격과 10,500번의 폭격을 감행 했지만 미군과 나토군의 인명피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코소보 내전은 1999년 3월에 시작하여 1999년 6월 9일 3개월만에 <신유고 연방>과 나토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일단 폭격은 중지됐다. 밀로세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UN 전범재판에 미결수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세르비아에는 5명의 임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UN의 감시하에서 임시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 7월에 미국의 각본에 의하여 이른바 민주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두 명의 후보자 중에서 보리스 타디치가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2008년에 또 다시 재선되어 현재 세르비아를 통치하고 있다.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아버지는 요시프 티토 대통령의 집권시절부터 유명한 반공주의자로서 요시프 티토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체제운동가였다. 그럼으로 오늘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친미적 가정출신으로서 “뱃속까지 친미적이다” 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대통령이다.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의 선거공약이 “우리는 유럽으로 간다”였으니 오늘날 세르비아의 정치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며 서방언론들은 2011년 5월 26일, 세르비아 군부사령관이었던 믈라디치 사령관이 16년만에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UN이 극악한 <인종청소학살자>로 지목한 중범죄자를 도대체 16년 후에야 체포했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서방이 저지른 대량학살사건을 무조건 세르비아의 믈라디치 사령관에게 <인종청소>로 뒤집어 씌워놓고는, 이제 이용가치의 시효가 다 지났기 때문에 체포해서 무슨 말을 토해낸다 한들 아무 염려가 없게 됐다. 그것도 현재 휘청거리고 있는 친미적 성향의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을 도와주기 위한 꼼수라는 생각이 된다.
(2012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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