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2013. 9. 21. 04:29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1. 

 

[서평] 이종헌의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기사 관련 사진

 

 

유행은 패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에도 유행이 있다.

요즘 떠오르는 여행 경향은 '다크 투어리즘'이다.

'다크 투어리즘'이란 비극적 역사 현장이나 재난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삶에 교훈을 얻고,

그 속에서 성찰하고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교훈여행'인 셈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돌아보거나, 풍광 멋진 곳을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비극의 현장을 타산지석으로 삶과 역사에 대해 사유하는 여행도 의미 있지 않을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소울메이트)(이하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바로 그런 여행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그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중동을 '새 발의 피'로 만들어버리는 발칸반도와 동유럽이다.

19세기 이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

저자는 음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과 종교, 인간을 생각하고 또 한반도를 생각한다.

민족주의를 앞세운 채 영토를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요즘,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점점 커져가는 동북아시아의 이 갈등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리고 '평화'와 '공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집단적 증오'를 교육하는 집단적 기억은 안 돼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쭉 뻗은 대로 양편에 나토가 폭격한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절대로 잊지 말자'라는 의미에서란다. 무엇을 잊지 말자는 것일까?

자신들의 악행은 애써 감춘 채,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부각시키고 후세들에게 그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이 흉측한 건물들을 그대로 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흉측한 건물을 보며 자신들이 입은 상처만 생각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면,

그 후세들이 가진 '집단적 기억'은 엄청난 증오를 생산할 것이고,

이 지역에서 분쟁이 재발하는 일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

(본문 136~137쪽)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 중 하나는 '집단적 기억'이다.

저자는 상처에 대한 '기억'이 종교와 민족이라는 기재로 '집단화'되고,

그 '집단적 기억'이 정치적 수요에 의해 '정치적 증오'로 발전하고,

그것이 교육 메커니즘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20세기 최악의 야만이 발칸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자기 종교나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종교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인종청소'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가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발칸반도의 맹주를 자처하던 세르비아는 1990년대 초 연방이 해체되자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무슬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남의 상처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상처만 기억하려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단적 기억이 결코 집단적 증오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겠다고 집단적 기억을 교육한다면

피가 피를 부르는 야만의 악순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발칸의 역사는 보여준다.

자원 없는 나라에는 무관심한 국제사회의 '냉정'

그런데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지에서 수십만 명이 '인종청소'로 학살당할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유는 석유가 나는 이라크와 달리 발칸반도에서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사실 보스니아 전쟁은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엔이 '안전지역'으로 지정한 스레브레니차에서 공식적으로만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인들이 학살당한 것이다.

수십만 명의 집단학살에도 보고만 있던 미국은 미국인 한 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뒤늦게 개입한다.

그런데 이런 뒤늦은 개입마저도 야만적 폭력을 징계하기 위해서나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전략적 계산' 때문이었다.

재선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의 힘을 국민에게 보여줄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고, 

한편으론 러시아가 전통적 강세지역인 발칸반도로 돌아오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이종헌 씀, 소울메이트 펴냄, 2012년 9월, 501쪽, 1만9500원

 

 

 

 

 

 

 

 

 

 

2.

 

 

 

발칸반도 핏빛분쟁과 미,UN의 추악한 개입
로마카톨릭 전통과 그리스정교 문화가 충돌한 비극의 역사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03/02 [02:5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유럽의 화약고라고 말하는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발칸반도는 도대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발칸반도의 원시시대 민족들과 또 현대의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충돌은 어떤 것인가?
 
발칸반도에 속해 있는 나라들의 역사는 슬라브족이 뿌리를 내린 역사이다.

본래 고대 슬라브족은 중앙아시아의 카르파티아 산맥 북방에서 발원하여 3세기까지 살고 있었으나

그 후부터 동서남의 3방향으로 분산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6세기경에 슬라브족이 도나후 강에 이르렀으며 8세기까지는 발칸반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라브족의 전반적 이동은 인도유럽어에서 분리해 널리 퍼져나갔는데

동방에서는 유럽, 러시아 전역까지 진출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슬라브족은 3대 민족군으로 형성하여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정치와 문화종교에 있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슬라브족의 역사와 분포에 대하여 지역별로 분류해 살펴본다.

 
1)  동슬라브족: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루시아, 플레슈크
2)  서슬라브족: 폴란드, 포메라니아, 폴라브, 실레지아, 체코, 슬로바키아,

                      밀찬, 루시티아, 소르부
3)  남슬라브족: (발칸반도에 포함된 국가들의 명단)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코소보,
                      그리스, 루마니아, 터키유럽지역

 
발칸반도의 지명은 터키어로 '산맥'이라는 뜻이며 면적은 50만 5000㎢이다.

2000년 현재 통계로 인구는 5690만으로 추산한다.

이 글에서는 발칸반도에 속한 슬라브족 중에서 8개 국가를 중심하여 살펴 보는데

이들 8개 국가들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코소보 등 국가들이다.
 
위의 슬라브 8개 국가들 중에서 발칸반도의 동쪽에 처음 정착한 세르비아는 매우 강력하고 우세한 민족으로서 히랍정교회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발칸반도의 서쪽과 서북쪽 방향에 정착한 민족들은 유럽의 카톨릭교문화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정착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인들이 3개의 분파로 분리되어

서편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카톨릭 진영이고,

동편에는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여 강력한 그리스 정교회 진영이 형성됐다.

그리고 중앙동부에 위치한 보스니아는 카톨릭도 아니고 그리스 정교회도 아닌 무슬림 이슬람교인의 나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 발칸반도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 및 원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연합하여 발칸반도에서 침략세력을 이루었으며

이에 맞대항하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세 나라가 한때 동조하여 발칸반도에서 세력다툼을 일으켰다. 

유럽의 강대국 양대진영의 세력다툼의 내용은 경제적 이권이 물론 중요한 조건이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발칸반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칸반도의 분쟁의 비극의 근원은 <서로마 카톨릭 세력권>과 <동로마 히랍정교의 세력권>,

그리고 <무슬림의 세력>이란 종교적 분열이 발칸반도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고 복잡해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발칸 반도는 오랜 세월 동안 터키 투루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에 서유럽 문화권과 동방문화권이 충돌하는 경계선이 바로 발칸반도였는데

슬라브족들이 발칸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다문화권과 다종교권과의 혼존혼돈이 되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때 발칸반도는 터키 투루크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고 있었는데

러시아가 점차적으로 발칸반도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역시 발칸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침략하여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격하고 침략한 이유는 보스니아가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국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웃 나라이며 같은 슬라브족이며 또 그리스 정교회의 제일 강력한 나라인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는 터키 투루크의 지배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발칸반도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생사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시를 방문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세르비아의 특공대를 동원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1914년 7월 30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여 러시아 총동원령을 내렸다.

또 독일은 1914년 8월 1일에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영국은 8월 2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유럽의 열강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다 참전했으며

대전 후반기에는 이탈리아와 미국도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를 침공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세르비아와 전쟁이 시작됐는데

전쟁의 후반전에서는 국제적으로 참전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5세기 이래 17세기까지 200년 동안 발칸반도를 지배해오던 오스만 투르쿠 제국이 점차 쇠퇴해짐으로

이를 기회로 삼아 유럽의 열강들이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낸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을 함으로서 1917년 11월 11일에 종전이 됐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인 제1차 세계대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인명피해가 막대했다.

전쟁에 동원된 총수는 6,500만명이며 사망자만 570만 300명으로 기록됐다. 

또 부상자의 수도 약 2,00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은 전쟁의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한 국가로 기록이 됐다.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내에서 민족분규에 의하여 발생한 전쟁이 결코 아니라

순전히 지역문제에 대하여 서구의 강대국이 이권을 위하여 서로 개입함으로서 발생한 침략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발칸반도는 세르비아의 주도하에 재건되었는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가 연합하여 <세르비아 연합왕국>을 건설했다.

1929년에 세르비아 연합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었다.

어쨋든 세르비아는 발칸반도를 주도하는 주체적 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또 다시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에 점령을 당했다.

그러나 1944년에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유명한 파르티잔 유격대가 출현하여 강력한 전투를 진행하여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를 발칸반도에서 물리쳤다.

(하지만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발칸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든 전쟁이 종식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으로써 서방의 침략으로부터 많은 약소국가들이 해방이 되었으며

발칸반도에서도 역시 해방의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창설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1943년 11월 29일에  티토가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선언했다.

요시프 티토는 누구인가?

그는 1892년 5월 7일 발칸반도에서 크로아티아족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토는 어려서 로마카톨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했으며

1912년에는 고향을 떠나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떠돌이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티토는 오스트리아 군에 배속되어 참전했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돈속에서 빠져 있는 기회를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방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폴카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1920년에 발칸반도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에서 볼세비키들의 영향을 받은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비밀활동을 하다가 1928년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수차례 체포되었으며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요시프 티토는 공산당의 지시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정보원으로 활약을 했다.

1935년에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로비아 대표단원으로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하였다. 

1937년에는 유고슬로비아 공산당의 임시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9년에 정식 서기로 취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요시프 티토는 독일에 항전했으며

1941년 4월에 유격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요시프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한편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해방 평의회”를 소집하여 정치문제를 논의했으며

같은 슬라브 종족들간의 분규와 종교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요시프 티토는 영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독일과 싸워야하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쨌든 요시프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는 시점에서

영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의심과 압력속에서 꾸준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독자적 노선의 입장에서

독립국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하나의 무거운 짐은 유고슬로비아 내부에 있는 반공주의적 우파세력과 싸워야하는 문제였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항해 투쟁한 요시프 티토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1943년 11월 29일에 요시프 티토는 드디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하나로 통합된 민족국가들은 다음 6개 국가들이다.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국가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로 통합된 6개 국가들이 종교적으로 3개 종파로 분열되어 있는데

통합된 연방공화국이 성사됐다고 해서 종교문제가 해결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발칸반도에서 3개 종파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있어서 불치의 암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는 <동방 그리스정교회>가 튼튼히 자리잡고 있는 반면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 로마카톨릭교>도 뿌리깊게 버티고 있었다.

또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무슬림 이슬람교> 국가이며,

마케도니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마지막 유럽영토로 남아 있던 국가이다.
 
이와 같은 3개의 정치적 배경이 뒤섞인 발칸반도에서 원초적으로 갈등과 분쟁의 불씨를 품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역시 3파로 분열된 발칸반도에서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에 항상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어쨌든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또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는,

요시프 티토의 독자적인 지도력에 추종하여 시종 <비동맹 운동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의 비동맹 정치노선을 일명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요시프 티토는 “티토주의”를 제창하면서

1945연 3월 7일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국호를 다시 정식으로 채택했다.

요시프 티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외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공산당 일당 체제를 공고히 했다.

티토는 파르티잔 유격대 시절에 동지이였던 옛 전우들을 대폭 등용하여 정권의 요직을 채웠다.

요시프 티토는 1948년에 러시아 스탈린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여 반소노선을 주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공산주의 국가노선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 노선을 반대하여 코민포름 회원국의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에서 발생한 자유화 물결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요시프 티토는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것에 전략적 비중을 두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노선의 견고성을 주장하면서 대외와 국내에서 반공주의세력을 탄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의 내부에서

“서방 자유개방파”와  “사회주의 보수파” 사이에 갈등이 점차로 표출되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는 반대파들이 모략과 중상으로 티토의 통치력에 도전하는 것에 대하여

비상대책으로 그들을 체포하여 투옥하고 또 정권에서 실각시키는 강경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1974년에 요시프 티토는 헌법을 새로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직을 획득하였다.

6개의 자치공화국들에게는 국방과 외교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분야에서 느슨한 형태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는데,

이 문구가 훗날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킨 계기가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어쨌든 요시프 티토는 1980년 5월 4일에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요시프 티토는 6개의 족 공화국과 3개의 종교 분파, 4개의 언어 집단, 그리고 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상이한 집단들이 연합해 이룬 특이한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40년 동안 통치했다.

요시프 티토는 서구의 침략과 음모에 시달렸으며

슬라브족 내부의 분열과 종교적 분쟁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한계 등 다양한 난관에 직면하여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40년 동안 통치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는 그의 공산주의 통치이념에 있어서는 한 치의 변함도 없었다는 평가다.
 

티토의 40년 통치 이후 발칸반도는 어디로?
 
1980년에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9명의 “대통령선출위원회”가 발족하여

교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대통령선출위원회”의 집단지도체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986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됐다.

밀로세비치는 요시프 티토가 건설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계승할 꿈을 품었다. 

밀로세비치는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위대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통민족주의자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10년이 지난 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91년 6월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밀로세비치를 반대하는 로마카톨릭 국가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탈퇴를 주장하면서 독립국의 창설을 선언했다.

벌써 이때 서방의 공작과 압력으로 밀로세비치의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계승에 대하여 반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연방제를 유지할 것을 계획했다.  
새로운 국가명칭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주축의 <신유고슬로비아 연방> 을  제정했다. 

그리고는 <신유고연방>의 군대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급파하여 독립을 저지하려고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UN은 재빠르게 개입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주장하는 분리독립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UN은 신유고연방의 해체를 뒤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수천명이 죽었다.

1992년 1월. 밀로세비치는 UN의 압력에 굴복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의 분리 독립을 승인했다.

동시에 마케도니아도 전쟁없이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에서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요시프 티토가 창건한 6개 나라의 연방은 3개 나라가 분리되어 독립을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서 발칸반도의 분쟁의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발칸반도에서 이른바 <유고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내부에 살고 있는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이 독립을 반대하는 군대를 조직하고

믈라디치 사령관이 지휘를 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반대하여 내전을 일으켰던 것이다.
믈라디치 사령관은 훗날 보스니아 내전에도 참전하여 보스니아 내란을 총지휘를 했다.

 이 크로아티아 내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이른바 '브코바르 대학살' 사건과 '스카브르나 대학살' 사건이 서방 언론을 통하여 전세계에 보도됐다.
 
서방의 언론들은 <유고내전>의 핵심적 역사적 배경과 맥락은 일절 모른척 하고,

오직 민간인 사망자의 수만 늘여서 보도하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 등 만행을 옹호하는 “패거리 언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전략에 방해가 되는 신유고연방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유고내전의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에게 뒤집어 씌우고

사상자수를 제멋대로 확대시켜 보도하면서 세르비아 신유고연방을 악마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요시프 티토의 영도하에서 <유고슬로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40년간 평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다시 메울 수 없는 골이 깊다.
 
 
20만명 숨진 <보스니아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보스니아는 발칸반도에서 화약고로 알려진 복잡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발칸반도에서 유일한 이슬람국이지만 사실은 인구 450만명 가운데 44%만이 이슬람교도들일 뿐이다.

그외에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인이 31%이나 된다. 

그럼으로 총인구의 1/3 되는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이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데

이들의 본심은 세르비아 <신유고슬로비아 연방>편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실정이었다.
 
이 다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은 비밀로 세르비아가 제공해 주는 무기를 공급받아왔으며,  

보스니아 내에서 보스니아 무슬림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분규상태에 처해 있는 상태였는데,

보스니아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

1992년 2월에  역시 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계기로 보스니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편협한 민족의식과 종교적 배타주의가 보스니아 내전의 도화선이 되어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 3년째인 1995년 7월 11일에 세르비아 총사령관 믈라티치 장군이 이끄는 <신유고연방군>은 보스니아 내부지역의 이슬람인들의 거주지역에 대하여 전면적 공격을 하려고 육박했다.

이러한 위기에 UN 평화유지군은 믈라티치 장군에게 무기반납과 평화회담을 약속하면서 휴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UN 평화유지군이 제안한 휴전은 말뿐이고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세르비아 <신유고 연방>군과 UN 군과의 전투는 제2차대전 종식 후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됐으며

양측의 인종청소로 인하여 5일 동안 전투에서 8천명이 살해됐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12월에 <데이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양측에서 20만명이 숨진 후에 내전의 막을 내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구 45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이 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후 UN은 “유고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UN이 주도하는 유고전범재판은 59명을 기소하고 밀로세비치 대통령 외 9명에 대하여 전범재판을 시작했으나

재판은 말뿐이고 10년 동안 아무 결론 없이 세월만 지나갔다.
 
양민 대학살의 명목상 총책임을 지고 있는  믈라티치 사령관은 10년 동안 도피 중에 있으면서

UN이 주도하고 있는 전범재판을 무력화하고 있었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신유고연방 대통령은 2006년 3월까지 미결수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원인 모를 의문사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가 살해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UN이 설정한 유고전범재판의 지지부진한 재판 결과에 대하여 세계는 미국의 정치재판의 음모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미국의 전 법무장관 램시 클락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유명한 불가리아 인권변호사 발칸노 그리고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핀터 등이

일제히 비난의 포문을 열어 UN과 미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다음은 코소보의 옛 역사와 오늘의 내전에 대하여 알아본다.
 
코소보는 1389년까지 세르비아 왕조의 중심지였다.

코소보에는 비잔틴 그리스정교회의 화려한 문화와 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이 가득하여

발칸반도에서 막강한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를 정치와 종교적으로 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비아 왕국의 위세에 대하여 공포심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세르비아의 번창하는 위세를 꺾기 위하여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비잔틴의 정교회와 정반대가 되는 소아시아 이교도의 나라 터키의 오토만 세력을 보스니아에 끌어 들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기독교권의 나라로서 이슬람교의 터키와 격돌하는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389년에 티키 이슬람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세르비아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세르비아 왕국의 패망으로 인하여 코소보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500여년 동안 받게 된다.
 
세르비아는 1881년에 이르러서야 터키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는 국제정세를 틈타 독립국이 된다.

독립국이 된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중요한 땅으로 여기는 것은 극히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옛날의 역사적 유물들과 또 그리스정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코소보 땅이기 때문이다.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창설한 후에 코소보를 세르비아에 소속된 영토로서

<자치구역>으로 지정하는 정책을 승인했다.

하지만 요시프 티토가 죽은 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강력히 주장하기를

<코소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세르비아와 떨어질 수 없는 한 나라이며 한 민족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 UN과 미국은 코소보의 독립을 세르비아에게 강요하고 있다.

UN과 미국이 코소보의 독립을 주장하는 구실은 현재 코소보에는 알바니아계가 90%이고

세르비아계는 10%뿐이라는 구실이다.


그러면 오늘 미국에게 중동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스라엘 유대인의 인구수 보다 팔레스타인의 인구수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절대 다수이다.

그런데 미국은 절대 다수인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중동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지 않고 서구 강대국들의 이권문제로 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코소보 내전의 문제도 흑백의 문제로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1999년 3월 UN과 미국은 오직 무력과 군사력 해결 방법으로 코소보에 대해 폭격부터 퍼부었다.

코소보에서 왜 느닷없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으며

그것도 선전포고도 없이 무차별폭격부터 퍼부었으니 너무나 경악스럽다.
 
터키 오스만 제국이 500년 동안이나 세르비아를 통치하다 떠나갔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

세르비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의 땅인 코소보에 알바니아인들이 떠나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문제였다.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예속되여 있는 무슬림 이슬람교 사람들이다.

그들은 코소보에 그냥 남아 있으면서 오히려 코소보의 주인 행세를 할 뿐만 아니라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알바니아인들은 남의 땅 코소보에서 오히려 민족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미국의 태도는 알바니아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세르비아를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마도 그때 세르비아에서 시작된 말인가 싶다. 
 
현재의 미국은 지난 날에 독일의 히틀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세르비아에서 다른 슬라브족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히틀러의 악행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미국과 서구열강들의 발칸반도에 대한 태도는 일관성이 전혀 없으며

발칸반도에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세르비아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고 있다.
 
코소보 내전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이 지원하는 나토군이 코소보 원주민들과 알바니아인들 간에 중재를 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니 이것이 미국의 중재 방법인가?

1999년 당시 미국의 클린턴은 코소보 폭격을 승인했다.

승인한지 단 2시간 후에 나토사령관은 일사불란한 명령을 내려 무차별 맹폭이 계속됐다.

이와 같이 무차별로 투하된 폭탄들이 코소보인과 알바니아인들을 분간하겠는가?
 
미국과 나토군의 코소보 폭격은 어떠한 합리성도 없다.

미국은 코소보인-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은 하는척 하면서 내심으로 그 누구를 위함이 아니라

코소보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고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코소보의 피의 내전은 1999년 3월에 시작하여 3개월 동안 계속됐는데

약 1만명이 학살됐고 86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토의 무차별폭격으로 인하여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서방의 패거리 언론들은 제국주의의 침략행위를 옹호하고

오직 세르비아의 무지막지한 인종청소로 인한 인명피해라고만 왜곡보도를 했다.

 

미국과 서방 언론들은 아프리카 수단 다르푸르에서 발생하고 있는 4년간의 극악한 인종청소 사건으로 인하여

20만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나토국들이 코소보에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코소보 내전 3개월 동안에 공습 출격이 무려 38,000번이었으며 실제 폭격수는 10,500회였다고 한다.  

10,500번의 폭격에 투하된 폭탄의 양은 천문학적인 수치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코소보 내전에서 20만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나토의 무차별 폭격 10,500번으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코소보 내전 3개월 동안 38,000번의 출격과 10,500번의 폭격을 감행 했지만

미군과 나토군의 인명피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코소보 내전은 1999년 3월에 시작하여 1999년 6월 9일 3개월만에

<신유고 연방>과 나토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일단 폭격은 중지됐다.
 
밀로세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UN 전범재판에 미결수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세르비아에는 5명의 임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UN의 감시하에서 임시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 7월에 미국의 각본에 의하여 이른바 민주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두 명의 후보자 중에서 보리스 타디치가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2008년에 또 다시 재선되어 현재 세르비아를 통치하고 있다.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아버지는 요시프 티토 대통령의 집권시절부터 유명한 반공주의자로서

요시프 티토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체제운동가였다.

그럼으로 오늘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친미적 가정출신으로서

“뱃속까지 친미적이다” 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대통령이다.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의 선거공약이 “우리는 유럽으로 간다”였으니

오늘날 세르비아의 정치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며
 
서방언론들은 2011년 5월 26일, 세르비아 군부사령관이었던 믈라디치 사령관이 16년만에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UN이 극악한 <인종청소학살자>로 지목한 중범죄자를 도대체 16년 후에야 체포했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서방이 저지른 대량학살사건을 무조건 세르비아의 믈라디치 사령관에게 <인종청소>로 뒤집어 씌워놓고는,

이제 이용가치의 시효가 다 지났기 때문에 체포해서 무슨 말을 토해낸다 한들 아무 염려가 없게 됐다. 
그것도 현재 휘청거리고 있는 친미적 성향의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을 도와주기 위한 꼼수라는 생각이 된다.

 

 

(2012년 2월 26일)
 

 

 

 

 

 

 

3.

발칸반도에서 커지는 중국의 입김
        기사입력 2013.02.24 15:11:00
           
     

      

지난 음력 정월 초하루,

크로아티아 국민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소인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는 주 크로아티아 중국대사관에서 마련한 춘절 행사가 열렸다.

중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龍)문양을 새긴 기둥과 사자상 등이 설치됐으며, 밤에는 중국 전통의 불꽃놀이가 진행됐다.

대낮에는 다소 주변 환경에 녹아들지 못한 이질적이고 약간은 촌스러운 조형물들이, 밤에는 제법 멋있게 비쳤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소감이다.

크로아티아는 인근에 비해 중국인들의 진출이 드문 편이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서서히 커지고 있다.

최근 중국 정재계 거물들의 크로아티아 방문도 줄을 이었다.

2012년 3월에는 세계 굴지의 중국대표 물류기업 COSCO의 경영진이, 5월에는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이 크로아티아를 방문했다.

또 작년 4월에는 바르샤바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크로아티아의 밀라노비치 총리를 만났다.

중국의 정재계 인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크로아티아에 대표 무역항인 리예카 항만개발과 리예카-헝가리 철도 노선 현대화다.

현지 언론에서는 중국이 이와 관련 100억유로의 투자를 제안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올해 7월 크로아티아가 EU 가입을 앞둔 이 시점에서 중국의 대유럽 물류기지로써 크로아티아를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크로아티아를 경유할 경우 중국 항만으로부터 유럽시장까지의 항행일수가 로테르담 등 유럽의 다른 물류항을 이용하는 것보다

10~14일 가량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유럽으로의 중국물량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계산이 중국인들의 셈법인 것이다.

크로아티아 뿐인가. 인근 세르비아, 보스니아에서도 중국의 투자가 소리 소문 없이 진행 중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중국자본이 교량 및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선점했다는 소식이 있고,

보스니아에서는 어느 지역의 화력발전소를 중국이 점찍어 놨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유럽경제가 자중지란으로 투자여력을 잃어버린 이 때,

중국이 던지는 제안은 이들 신용등급이 낮아 투자유치에 애를 먹는 구유고 국가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구유고연방 국가들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미지의 시장이다.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동구권 투자는 다뉴브강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투자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구유고 연방국가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역설적으로 더욱 커지고 있다.

이곳 나라들의 경제부처 관료들을 만나면, 언필칭 한국의 경제성장 비법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얼마 전에 만난 크로아티아 국회의원들 역시 한국으로부터의 투자유치 방안이 없는지를 정중히 물어왔다.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이렇게 한국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이 만든 자동차, 핸드폰이 이곳 소비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한국에 대한 국가적 이미지가 매우 높다.

게다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나라로서, 한국은 1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는 중국 투자를 받으면 좋긴 하겠는데, 중국 같은 강대국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여러 심리적 장애물도 존재한다.

안 그래도 역사에 걸쳐서 주변강대국의 시달림을 받았는데,

중국이 내미는 돈을 받았다가 나중에 그 등쌀을 어떻게 견딜까라는 불안감도 있다.

또한 중국 투자를 받아들이게 될 경우 급속하게 늘어날 중국계 이민자 숫자도 경계하는 듯 하다.

이러한 현지의 불안감이야 어찌됐건, 내년 음력설 때는 크로아티아 중심광장에서 다시금 중국의 축하행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십중팔구 아마 조형물의 디자인도 더욱 세련되고 예뻐질 것이다.

현지에서 이러한 중국굴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중국이 이 시장을 장악하기 이전에 우리 기업들도 움직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만약 우리기업이 이 시장에 진출하고 싶다면 현지에서 이처럼 와주길 바라고 있을 때 오는 것이 정답이다.

[한정희 코트라 자그레브 무역관장]

          

        
 

 


           

4.

 기사의 0번째 이미지

루마니아의 국보 1호, 펠레슈성 <사진제공=레드캡 투어>

 

 

`완전 증발`. 아마도 직업병 때문일 게다.

범죄자들이 `완전 범죄`를 꿈꾸듯, 직업이 여행 전문인 기자는 늘, 완전 증발을 꿈꾼다.

그러니깐, 이런 상상.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오른 날, 무단 결근을 한다.

휴대폰 오프(off). 세상과도 완전 오프다.

그 다음은 지구본 돌리기. `휙` 팽이처럼 돌아가는 지구본에 손가락을 콱 찍어버리는 거다.

운명처럼 멈춘 자리, 그곳은 발칸반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여행 준비다.

꼬꼬면 컵라면 10개, 스팸 5통, 햇반 15개. 스니커즈와 함께 빛 바랜 캐논 G10 카메라와

예상치 못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로모,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손바닥 만한 로디아(Rhodia) 넘버13 수첩에 어울리는 굵은 필기감의 1.0 볼펜도 함께.

한 달을 버틸 MP3 473곡엔 필히 이 곡을 담는다.

크로아티아: 오래된 음악(Croatia:Music of Long Ago), 프리포비드 오 달마티아(Propovid O Dalmaciji), 즈트라보 마리요(Zdavo Marijo).

그 다음, 나의 카톡과 페북 담벼락에 `세상이여, 굿바이` 인사말을 남기고 출발.

하필이면 왜 발칸이냐고?

전세계 30여 곳을 돌며 운명처럼 스친 생각. 바람처럼 사라지기엔 발칸 만한 곳은 없다는 거다.

첫 코스는 당연히 발칸의 보석 크로아티아.

중유럽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도 자그레브나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플리트비체 호수공원은 증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필히 찍어야 할 포인트는 이젠 폐허가 된 로마 유적이 곳곳에 퍼져 있는 달마티아의 북부 자다르(Zadar).

거기서 기필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바다 오르간(Moske Orgulje)`을 봐야 한다.

코발트빛 바다로 향하는 돌계단 구석 구석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자연의 악기.

파이프와 호루라기의 원리를 응용해 최고의 건축가 니콜라 바시치가 디자인한 세계 최대 파이프 오르간이다.

이건 숫제 방파제 전체가 오르간이다.

구멍이 난 방파제 보도 아래 75m 길이의 파이프. 세어 보니 무려 35개나 된다.

연주자는? 저, 거대한 신(神), 자연이다.

상상해 보시라. 거대한 바다 오르간 앞에 앉은 신이, 심호흡 한번 한 신이 눈을 감은 채 손을 펼쳐든다.

눈을 감고, 허공에 건반을 치듯 손을 움직인다.

자다르의 파도가 기다렸다는 듯 출렁인다.

이 파도는 방파제 밑의 공기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이때 `쟁쟁쟁` 오르간 소리가 폴폴 뿜어져 나온다.

지구의 심박, 그 맥을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파도의 크기와 속도.

바다 오르간은 신의 영감이나 다름없는 자연의 흐름과 리듬을 따라 자연의 음을 만들어 낸다.

전자음과 기계음에 얼마나 지쳤던가.

지구의 전혀 다른 곳에서 완전 증발을 함께 꿈꿔 온 한 노파가 기자 옆에 대자로 누운 채 이렇게 속삭인다.

 "10분만 귀 기울여도, 평생 배울 걸, 다 깨우칠 수 있을 거다"라고.

다음 코스는 루마니아.

물론 루마니아 여행을 위한 전용 선곡만큼은 챙겨야 한다.

이글스의 데스페라도, 요요마의 `Gabriel`s oboe From The Mission`,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빼놓을 수 없는 빌리 홀리데이의 Love For Sale.

이 선곡만 보고 기자가 향할 곳이 브라쇼브의 브란 성이란 걸 눈치챘다면 독자는 상당한 내공의 여행 고수임이 틀림없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황금알을 낳던 `스토리텔링`이 현실 문제와 부딪혀 수차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드라큘라 성. 맞다.

트랜실베니아에 있는 브란(Bran) 성은 `드라큘라 성`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인근 민박집 곳곳에는 뱀파이어를 쫓는다는 의미의 마늘들이 지금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겠지.

사실, 완전 증발 여행의 방문지로 `도센 남작의 성` 배경인 일본 오카야마 성은 너무 살벌하고

`신데렐라의 성`인 독일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너무 낭만적이다.

당연히 루마니아 드라큘라의 성은 사라진 뒤 꼭 봐야 할 방문지 버킷리스트에 1순위로 올라 있었던 곳.

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집` 리스트에 올랐다는 묘한 기대감도 작용을 했을 게다.

이 성의 시가는 알려진 게 1억4000만달러.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을 전세계 관광객들은 미친 듯이 찾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 모델인 블라드 3세가 잠깐 머물렀다고 알려진 뒤 그 흔적을 찾기 위한 것이다.

정작 이 성의 실 소유주이면서 후손인 건축가 도미닉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씨는 "흡혈귀 성이 아니다.

그건 픽션이다.

브란 성은 단지 나와 내 할머니의 집일 뿐"이라고 지금도 못을 박는다.

어쨌거나 이글스의 데스페라도를 들으며 이 성을 거니는 맛은, 특별하고 기괴하다.

이 길 끝 모퉁이에서 불쑥,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맛에 반하는 거겠지.

마지막 코스는 필히 `동유럽의 스위스`라 불리는 슬로베니아여야 한다.

사막 한복판에서도 볼 수 있다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곡선이 있는 곳.

그중에서도 포인트는 포스토이나 야마 동굴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카르스트 동굴,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길이만 무려 24㎞. 상상초월 동굴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5㎞ 정도만 개방한다.

위험할 수 있으니 당연히 가이드 투어만 가능한 상태.

동굴의 2㎞ 정도는 열차로 둘러보고 1㎞는 직접 걸어서 관람을 하게 된다.

수십억 년의 역사를 품은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영국의 저명한 조각가 헨리 무어조차 `세계에서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며 격찬했을 정도란다.


[불가리아ㆍ크로아티아 = 신익수 여행ㆍ레저 전문기자]

 


           

 

 

 

 

5.

 

[머니투데이 MT교육 정도원 기자][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하는 총성이 울려퍼지다]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대공 부부를 저격한 직후 체포당하고 있는 세르비아인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

1914년 오늘(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 부인 호헨베르크 여공작 소피아 호테크가

세르비아인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했다.

◆세르비아, 19세기 들어 오스만의 세력이 쇠퇴하자 독립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신음하던 세르비아인들은 19세기 들어 오스만의 세력이 쇠퇴하자 연달아 봉기했다.

1817년 오스만은 세르비아 공국의 성립을 인정했다.

세르비아가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세르비아 공이 오스만 술탄에게 매해 공납을 바친다는 조건에서였다.

세르비아公과 보수파는 이 상태에 만족해 한동안 발칸 반도의 상황은 안정됐다.

그러나 점차 오스만과의 적극적인 개전과 발칸 반도 전역의 해방을 부르짖는 자유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1876년 정권을 잡은 자유파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전력은 오스만의 우세였지만 러시아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산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승전국이 된 세르비아는 오스만으로부터의 완전히 독립하고 영토도 확장했다.

그런데 산스테파노 조약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를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불가리아 공국도 오스만으로부터 러시아의 제후국으로 이전하며,

다르다넬스 해협을 러시아가 통제하게 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멸망과 러시아의 팽창을 좌시할 수 없었던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헝 제국)과 손을 잡고

이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산스테파노 조약은 폐기되고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었다.

◆쿠데타로 오·헝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관계 급격히 악화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영국과 오·헝 제국이 외교적 승리를 거두자 세르비아는 오·헝 제국이야말로 진정한 강대국이라 생각하고 접근했다.

1881년 오·헝과 세르비아는 밀약을 맺었다.

이듬해 세르비아는 공국이 아닌 왕국을 선포하며 오스만이 아닌 오·헝의 보호국이 되기로 선언해 오스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1903년 세르비아 왕국에서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친오·헝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피살되고

친러시아의 페타르 1세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페타르 1세가 세르비아군의 무기 조달처를 오·헝 제국에서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로 전환하자,

오·헝 제국은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인 축산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보복했다.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이 돼지였기 때문에 이 무역 분쟁을 '돼지 전쟁'이라 하며, 양국간의 감정은 급격히 악화됐다.

이는 1908년 오스만의 청년 투르크당 혁명을 틈타 오·헝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절정에 달했다.

세르비아인이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왕국도 호시탐탐 노려왔기 때문이었다.


◆대공의 귀천상혼, 결혼기념일을 위해 사라예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귀천상혼한
소피아 호테크 호헨베르크 여공작.

 

 

 

 

 

 

 

 

 

 

 

 

 

 

 

 

 

 

 

 

 

 

 

 

 

 

 

한편 오·헝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0년 6월 28일 테센 공작의 궁녀 소피아 호테크와 결혼했다.

황제와 형제인 대공들이 결혼에 대한 반대의 의사로 모두 불참한 가운데 귀천상혼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결혼한 뒤에도 소피아는 황실 일가로서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소피아의 소생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공개 석상에서 소피아가 대공의 옆자리에 앉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소피아가 대공비라 불리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단지 황제가 수여한 작위인 호헨베르크 여공작으로 불리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1914년 결혼기념일이 다가오자 대공은 군사 검열을 자처해 수도인 빈을 벗어나 보스니아로 향했다.

황족과 귀족들만 가득한 수도에서는 여공작이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지만,

수도를 벗어나 국경으로 향하면 여공작도 예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행보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비밀결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오·헝 제국의 제위계승자를 암살함으로써 의분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던 보리요베 예프티치는 "(대공의 방문 소식을 접하고)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대공의 사형 판결을 집행할 인원으로 22명의 단원을 선출했다"며

"대공이 사라예보역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스물 두 명의 동지 모두는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시청에 이르기까지 대공이 지나갈 길을 따라 500야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발의 총성,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오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 15분, 대공 일행은 사라예보역에서 4대의 차량에 나눠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두 명의 자객은 각자 고층 건물의 창문에서 저격하려고 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사이에 실패했다.

세 번째 자객인 가브리노비치는 길가의 환영 인파 속에 섞여 있다가 폭탄을 차량 행렬에 던졌다.

폭탄은 대공의 차량을 지나쳐 후속 차량 앞에서 폭발했다. 이로 인해 수행원 12명이 부상했다.

시가지를 울리는 폭음을 들은 나머지 자객들은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것으로 끝이라 여겨 뿔뿔이 흩어졌다.

시청에 도착한 대공은 사라예보 시장에게 "폭탄이 이곳의 환영 인사인가"라고 쏘아붙였다.

대공은 폭발로 다친 수행원들을 위문하기 위해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국군 주둔 사령관인 포티오레크 장군은 "반란자들이 들끓고 있어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시 관계자들은 "사라예보 전체가 자객으로 가득찬 것은 아니다"라며 재반박했다.

대공은 여공작에게 "안전하게 시청에 남아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지만 오랜만에 대공과 동석하게 된 여공작은

"오늘은 어디든 따라가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공의 차량은 병원으로 향했지만 당초 예정에 없던 동선이라 운전수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라틴 다리'에 들어서서야 이를 알아챈 운전수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인근 식당에서 요기를 마치고 나오던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우연히 대공의 차량을 발견하고 권총을 꺼내 차를 향해 쏘았다.

총격당한 대공 부부는 보스니아 총독부로 급히 후송됐지만,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둘 다 절명한 뒤였다.


MT교육 정도원기자 united97@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6.

 

 

세르비아-코소보, 역사 새로 쓴다

 

(부다페스트=연합뉴스) 양태삼 특파원 =

내전으로 '인종청소'의 깊은 상처를 가진 코소보와 세르비아가 과거를 잊고 새 출발 하기 위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브뤼셀에서 이뤄진 세르비아와 코소보 대통령의 사상 첫 만남은 화해의 첫 단추를 끼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내전의 시작

 

유고연방의 해체 후 발칸 반도에 민족주의가 퍼지자 세르비아 남부 내륙의 코소보 지방에도 위기의 조짐이 나타났다.

팽배한 위기감은 1998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인종청소'로 대응하자 미군과 NATO군이 개입했다.

미군과 나토군이 78일간 세르비아 공습이 이어가자 세르비아 의회는 1999년 유엔의 평화 계획을 수용해 내전은 일단락했다.

이후 유엔 자치주였던 코소보는 2008년부터 EU와 미국, 터키로 구성된 국제조정기구(ISG)의 '감독'을 받다가

작년 10월 감독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6천명의 NATO 평화유지군이 남아 치안을 맡고 있다.

코소보는 ISG 감독을 받던 그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부인하고 코소보가 참여하는 국제행사에 모두 불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무한히 이어질 듯하던 반목과 갈등은 세르비아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서두르면서 해결의 기미를 보였다.

 

◇코소보와 화해가 EU 가입 조건

 

지난해 EU 가입 후보국이 된 세르비아는 만신창이가 된 국가 이미지를 바꾸고 경제를 도약시키고자 EU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올 상반기에 EU 가입 협상시기를 확정 짓겠다고 세르비아는 공언해왔다.

하지만 EU는 앞서 세르비아에 두 가지 가입 조건을 제시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전쟁범죄자들을 모두 국제유고전범재판소로 넘기라는 것과 코소보와 화해해야 한다는 것.

지난해까지 전범 161명을 인도한 세르비아는 지난해 말부터 코소보에 화해 손짓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9월 코소보 대표가 나온 국제회의에 세르비아 대표가 처음 참석했는가 하면 11월에는 양측 총리가 브뤼셀에서 처음 만났다. 이번 대통령 회동도 지난달 니콜리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

경제가 침체하고 국가 이미지가 떨어져 있는 세르비아로서는 EU 가입에 국운을 걸고 있다.

EU 회원국이 되면 도로 건설, 전력 생산 등에서 EU의 지원을 받아 사회 간접자본을 확충하는 데 부담을 덜고

문화 관광 분야에서도 교류가 활발해져 경제 개발을 촉진할 수 있다.

특히 국가 전반이 '유럽 기준'에 부합해 안정화하면 유럽 내 투자가 몰려들 것으로 세르비아는 기대한다.

 

◇앞으로 어떻게 되나

 

양측은 일단 화해할 의지를 보였으나 앞으로 험산 준령을 넘어야 한다.

가장 큰 고개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 주민 문제.

코소보 북부의 세르비아 주민은 코소보가 주권국가가 되면 졸지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북부에 행정기관을 설치해 세르비아계 주민에 행정권을 행사했다.

EU와 미국 등은 이 행정기관을 철거하라고 요구하지만

세르비아는 현지 주민의 반대를 이유로 행정기관 철수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세르비아 의회가 최근 채택한 대(對) 코소보 결의안에서 코소보 주권을 부인하고

코소보내 세르비아 주민의 권익을 옹호한다고 천명한 점도 부담을 준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 결의안을 코소보 협상에서 준칙으로 삼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양측의 대립이 첨예해 문제 해법이 당장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이비차 다시치 세르비아 총리가 코소보와 교역에서 관세를 거두고

이를 코소보 내 세르비아 주민에게 쓰겠다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접점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