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3. 12:17ㆍ책 · 펌글 · 자료/생활·환경·음식
- 출판사
- 마카롱 | 2013.07.01
백파선(百婆仙: 백발의 여자 선인이라는 뜻의 별명)은 문근영이 주연을 맡는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조선의 여인이다. 그런데 사실 백파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일본 도자기의 고향 아리타에 있는 절 호온지(報恩寺)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을 뿐, 그녀의 본명조차도 알 수 없다. 이런 인물을 고증을 통해 되살려낸 역사 소설이 《백파선: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이다.
이 책의 의의는 다양한 역사 문헌 및 조선의 도자기 역사를 철저히 파헤쳐 최대한 충실하게 고증한 팩션이라는 데 있다. 최근 수많은 역사 소설, 역사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운데 재미를 위해 역사를 쉽게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심어주지는 않으려 노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끔찍한 악연이 되어버린 엇갈린 사랑과 고국을 떠나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야 했던 운명, 조선 여인으로 최초의 여성 사기장이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차별과 음모,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백파선의 꿈과 경쟁,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파선: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이 내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은 한 인물에 대한 고증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자기가 큰 인기를 끌며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기에, 임진왜란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탓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저자들은 그렇게 끌려간 수많은 도공들을 되살려냈다. 백파선의 남편 김태도, 지금도 일본 사가현 도진마치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이종환, 일본 아리타의 도조(陶祖: 도자기의 조상)로 추앙받는 이삼평 등의 인물들이 얽히며 때로는 적으로, 또 라이벌로, 그리고 협력자로 등장하면서 이야기에 입체감을 더해준다. 이 책은 잊혀가는 인물들을 되살려냄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도공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려 혈안이 된 왜군 탓에 쑥대밭이 된 김해에서 시작된다. 다행히도 백파선의 남편 김태도는 이 사실을 알고 미리 피신해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녀의 딸이 납치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을 주도한 조선인 밀정이 어렸을 적 도자기에 대한 동경을 공유하던 소꿉친구 이종환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경악한다.
이종환이 원하는 것이 자신임을 아는 백파선은 남편과 아들을 두고 자신만 희생하려 하지만, 무뚝뚝하기만 했던 남편이 그녀를 지키고자 은신처에서 나오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가족 모두가 왜국으로 끌려가게 된다. 왜국에서 사기장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재능을 착출당해야 했다.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남편과 백파선은 수년에 걸친 치밀한 탈출 계획을 짠다. 하지만 왜국에 와서까지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종환에 의해 탈출 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면서 이종환과 백파선 사이에 있었던 어두운 과거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백파선의 인생을 두 번의 전환기로 나누어 총 3부로 구성했다. 1부는 사기장의 아내로 살던 평범한 여인이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의 인연에 휘둘리면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2부에서는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빚게 된 백파선이 이종환과 이삼평,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가라쓰의 귀족 하다, 그 밖에 번주들과 승려들 사이에 벌어지는 음모와 암투 속에서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에서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백파’와 고향땅에 기술을 전파하고자 하는 조선 도공들의 꿈이 펼쳐진다.
임진왜란 때 도공인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 백파선은 환갑이 넘어 남편이 세상을 뜬 뒤 900명이 넘는 도공들을 이끌고 아리타로 이주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타 도자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900명이 넘는 도공을 이끌었으니만큼 도공들의 지도자로서 그녀의 리더십을 가늠해볼 수 있으며, 아리타 도예의 어머니라 불렸던 만큼 그녀의 예술적 능력 또한 상상이 가능하다. 그런 그녀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붙여진 별명이 ‘백파선’이다.
남녀평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여성이 차별당하는 사회. 회사에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경쟁상대로 인식되지 않고, 아이를 낳기라도 하면 승진 제외 1순위, 정리 대상 1순위다. 백파선은 이런 현실 속의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 힘이 되어주는 역할도 해줄 것이다.
조선 시대, 유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남녀차별은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은 가마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가마는 여인의 태와 같아서 계집이 근처에 얼쩡대면 시샘을 해 그릇을 사산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자들의 가마터 출입을 막았다. 사기장의 딸로 태어나 자기를 보고 자라면서 자기를 굽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백파선에게 그 꿈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그 꿈을 부여잡는다.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굽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기를 빚고 있으면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정도로 즐거웠던 그녀는 온갖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한다. 그 결과 백파선은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그녀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일본 아리타 도자기는 현재까지도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고 있다. 《백파선: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꿈을 좇아 조선인 그리고 여성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은 한 여인의 아름다운 성공 스토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죽어버리자.”
곤이 말했다.
“그냥 여기서 너도, 나도, 저 왜놈 앞잡이까지 해서! 차라리 죽어버리자, 정이야. 그게 낫지 않겠냐.
우리가 왜 이렇게! 왜 내가, 내 동생이 내 조카랑 나란히 왜인이 되겠다는 꼴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거냐?”
“그럼 그렇게 해줘, 오라버니.”
정이가 말했다.
“그럴 수 있다면. 오라버니가 나랑 삼평이뿐 아니라 잡혀간 영이도, 왜놈들도,
이 끔찍스러운 김해 땅, 조선 땅! 이것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줘.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p.55
정이는 곤을 돌려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걱정 말라고, 남편과 진성을 잘 부탁한다고, 몸조심하라고,
혼자된 어머니를 보살펴달라고, 은신처에 전해주기로 한 말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언젠가 구하러 와달라고. 그리고 또,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곤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녀 자신도 듣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게 흘러나왔다가 이내 흩어졌다.
곤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정이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살아서 다시는 곤의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56
정이는 대답 대신 가지고 온 상자를 내려놓았다.
안에 들은 게 무엇인지 호기심 많은 이들이 기웃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까이에 선 이종환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의 눈빛은 무엇을 가지고 왔어도 이미 승부는 끝났다고 말하는 듯했다.
“자기를 꺼내보아라.”
히데요시의 말에 따라 정이는 한 겹 한 겹 자기를 싼 천을 풀었다.
잘 보아라. 이것이 바로 네가, 일본이 흉내 낼 수 없는 조선의 자기다.
정이는 자기를 올리며 히데요시를 쏘아보았다.
p.261
“사기장이라면 누구나 그 고령토로 조선백자를 빚고자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던 겁니까?”
에신 같은 이도 그 속내만큼은 읽지 못한 듯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녀가 말했다.
“그처럼 귀한 백토로 빚은 백자는 단 한 분, 조선의 임금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에신은 멈칫하더니 이어 크게 웃었다.
“역시 조선의 사기장들은 다른 데가 있군요. 특히 당신은 한 번도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지요.”
p.267
젊은 영이는 야마다의 손목 깃을 쥔 채로 방 안에 들어섰다.
야마다는 약간 얼이 들뜬 상태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괜히 두근거렸다.
짓궂은 장난을 준비하다가 들킨 장난꾸러기가 된 기분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손을 잡은 것도, 안은 것도 아닌데, 그저 손목 깃을 쥐인 것뿐인데 유곽 여인네들의 벗은 몸을 보는 것보다 더 떨렸다.
젊은 영이는 야마다의 손목 깃을 쥐고 이끌어 그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게 하고 나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가 앉았다.
젊은 영이의 뺨도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같이 장난을 치려고 준비하다 들킨 어릴 적 친구 같은 모습이었다.
p.328
“저, 당신과 백파의 대화 다 알아들었다고요. 짧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돌아올 거죠? 기다릴게요.”
안 그래도 붉어져서 더 붉어질 것도 없는 얼굴일 줄 알았는데, 영이는 마지막 한 마디를 하면서 뺨에 홍조가 피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웠다.
그런 말이 아닌데 그런 말처럼 해버렸다.
야마다도 그런 말이 아닌데 그런 말처럼 들은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예,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을 다시 고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도자기는 한두 달에 다 배울 수 없는 것일 테니, 돌아와서 이 마을에서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배웅해드리겠습니다.”
p.366
'책 · 펌글 · 자료 > 생활·환경·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렇게 팔아도 장사가 되나? (0) | 2013.09.30 |
---|---|
영어 속담 (0) | 2013.09.17 |
유머 2 (0) | 2013.09.05 |
비데 (0) | 2013.08.06 |
'장마'라는 단어 (0) | 201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