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1. 08:39ㆍ책 · 펌글 · 자료/생활·환경·음식
바닷가에서 새가 조갯살을 파먹기 위해 부리를 들이민다. 조개는 방어하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문다. 적대로 한몸이 돼 오도 가도 못한 둘은 결국 어부에게 잡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기원 설화다. 어부의 이익은 새와 조개의 적대에 기인한다. 물론 어부는 둘의 적대를 획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얻는 이익은 우연적 행운의 결과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재미를 본 어부가 바닷가에 조개를 풀어 놓는다면, 그래서 새가 다시 조개부리에 걸려든다면?
어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한번쯤 상상할 법한 가정이 아닌가? 실제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매를 훈련시켜 꿩을 사냥하고, 오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동물의 생존의지를 사냥 도구로 이용한 거다. 이 경우 ‘어부의 이익’은 행운이 아닌 의지의 산물이다. 즉 새와 조개의 적대는 어부가 연출한 것이다. 이 상황에 적합한 사자성어는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어부지리의 경험은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진화하기 쉽다. 우연적 행운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물론 이용당하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용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흔히 역사 속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 가해자, 수혜자. 누구나 수혜자가 되길 원하지만, 피해자는 절대로 수혜자가 될 수 없다. 가해자가 모두 수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수혜 없는 가해자’(고문기술자 이근안, 학교폭력의 가해학생, 가난한 가정의 폭력 가장 등등)는 피해자의 다른 얼굴이다. 수혜자는 가해의 부담을 지는 수혜자와 그 부담조차 없는 수혜자가 있다. 이이제이는 가해와 피해의 부담을 비켜 가면서 순수한 수혜를 욕망하는 자의 전략이다. 문제의 초점을 피해자와 수혜 없는 가해자의 구도로 연출하고, 수혜의 주체는 그 소란 뒤로 숨어 가해에 연루된 흔적을 삭제하는 것.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런 방식의 통치를 ‘지배 없는 착취’로 명명하면서,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의 특징적 징후로 제시한다.
담뱃값 인상 법안은 흡연자라는 오랑캐의 돈으로 서민이라는 또 다른 오랑캐의 복지 재원을 충당함으로써 증세 부담이 줄어든 부자가 상대적으로 수혜자가 되는 전형적인 이이제이의 정책이다.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간접흡연의 피해자인 비흡연자 대 가해자인 흡연자, 모든 국민의 의료재정을 축내는 가해자인 흡연자 대 피해자인 비흡연자의 적대가 강조되어야 한다. 반면 자발적으로 담배를 배웠지만, 비자발적으로 흡연을 유지하고 있는 니코틴 중독 피해자로서의 흡연자 대 발암성분의 화학물질로 중독성을 높여 안정적 이윤을 유지하고 있는, 진정한 가해자인 담배회사의 적대는 가려져야 한다. 수혜자 역시 부자보다 서민이 전면에 내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새와 조개의 적대가 어부의 연출이라는 사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담뱃값 인상 법안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학교폭력을 둘러싼 논란도 사정은 비슷하다. 자살한 피해학생의 절박함과 억울함 대 가해학생들의 가혹함이라는 적대에 꽁꽁 묶여 있다. 가해학생들은 억울하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인성교육의 부재와 무한경쟁 체제의 피해자들 아닌가? 대학마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직업훈련소로 몰아가는 지금의 교육 정책이 지속된다면 학교폭력은 그치기 어렵다. 진정한 가해자는 이런 교육정책으로 학교에 적의와 경쟁의 문화를 조장한 정책입안자들이다.
여기서 질문해 보자. 그들은 왜 지속적인 학교폭력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육정책 기조를 고수하려는 걸까? 이 질문은 이런 교육정책의 숨은 수혜자가 누구인가라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피해자가 드러내면 가해자는 부인하고, 그 사이 수혜자는 숨는다. 하여 피해자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가해자의 언어는 기만적이며 수혜자는 위선적이다. 오랑캐로 살지 않기 위해서 진정으로 적대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의 기만이 아니라 수혜자의 위선이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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