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4. 21:26ㆍ미술/서양화
고야는 스물일곱 살.
이탈리아에서 관록을 쌓고 돌아와 엘 필라르 대성당의 천정화를 그렸다.
프레스코화 기술도 그런대로 쓸 만하고, 작품은 교회공사위원회와 시민들의 칭찬을 받았다.
1만5천 레알의 그림값도 받았다.
그 이후로는 일거리가 꾸준해서 먹고살기엔 충분한 돈이 들어왔다.
그 무렵에 그린 최초의 자화상이다.
고야는 여든두 살 때인 1828년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에 약 11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최초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자화상 1773
팽팽한 턱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는 입에 들어오는 거라면 뭐든지 씹어 부술 수 있는 강한 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통통한 입술은 숨어 있는 혀와 함께 음식물만이 아니라 여인의 육체든 뭐든 전부 다 맛 볼 것이다.
두툼한 코는 콧구멍이 부풀어 있어서 후각이 에민한 동물처럼 온갖 냄새를 재빨리 맡을 것이다.
넓고 단단한 이마는 망치 대신 못을 박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귀는…… 어찌된 일일까. 귀는 없다.
그의 귀와 관련하여 무언가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눈은?
그의 눈은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의 눈을 연상시킬 때가 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역시 정직하게 벌거벗은 야심이다.
그는 엘 필라르 대성당의 일거리를 놓고 경쟁할 때는 교활하게 경쟁상대가 제시한 가격을 탐색하였다.
남에게 주지 않고 빼앗기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지위와 돈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유행에 맞추어 모델을 충실히 묘사하고 고객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의 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언가를 얻으려고 노리는 맹금류의 눈이다.
명성도 얻고 싶고, 지위도 갖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당분간 최대의 목표는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카데미로 가는 길이기도 하고, 궁정과 상류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 홋타 요시에,《고야1》
1815 캔버스에 유채 46*3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프란스시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는 1746년 3월 30일에 사라고사 외곽 지역. 어머니의 고향 마을인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났다. 사라고사는 옛 에스파냐의 아라곤 지구 수도였다. 부친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고야는 사사고사에서 도금의 대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목재나 금속 조각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금해 제단을 장식하길 좋아하던 카톨릭의 나라 에스파냐에서는 대단히 수익 좋은 사업이었다.
제 1장 아라곤 사람 프란시스코 고야
호세 고야의 솜씨가 워낙 뛰어났기에, 사라고사의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필라드 (필라드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참사회 및 성직자들은 그들 아라곤의 수많은 미술가들이 작업하였던 성당 내 모든 조각물의 도금작업을 관장하는 사람으로 임명했다. 어린 프란시스코 고야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건축가, 화가, 조각사들로 이루어진 팀이 거대한 성당을 개조하고 복원하고 장식하는 광경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으리란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753년 그 성당의 돔 장식을 맡아 40미터 이상 높이 올라가 그림을 그리던 안토니오 곤살레스 베라스케스(1723-1794)를 보면서 그도 언젠가는 에스파냐 프레스코화의 저 유명한 대가의 뒤를 따르리라 꿈꾸었을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이미 정확하게알고 있던 고야는 14세가 되자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 밑으로 들어갔다. 마르티네스는 한때 마드리드위 왕궁에서 일했던 화가이다. 고야가 재능 있는 젊은 견습생 프란시스코 바이에우(1734-1795)를 만난 것도 루산의 화실에서 였다. 고야보다 열두 살 많던 바이에우는 1763년 초에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3세의 총애를 받던 독일 화가 안톤 라파엘 멩그스의 조수로 지명되었다.
이같은 특권에 힘입은 듯, 그해 말에 바이에우는 마드리드의 유명한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17세의 고야도 바이에우의 예를 따라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1763년 12월 4일 고야는 그리스 신 실레노스이 석고상을 그려보라는 시험을 치렀다. 석고상에는 취미가 없던 고야는 한 달 뒤 발표된 시험 결과에서 자신이 심사위원들로부터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1766년데도 낙방했다. 이번에는 에스파냐 역사에서 따온 주제들을 그리라는 시험이었는데, 현대적인 주제도 아니고 아라곤과 관련된 것도 전혀 없었다.
고야는 아무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심사위원의 일원이었던 바이에우는 전통적이고 학구적인 작품을 선호한 탓에 이 젊은 지원자의 패기 넘치는 서투른 그림을 높이 평가해 주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장원은 바이에우의 남동생인 라몬에게 돌아갔다. 고야는 공식적으로 1780년 7월 5일까지 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했다.
고야와 그의 동료들이 아카데미 입학시험으로 분주한 동안 군주 체제하의 관료들과 각 종교계의 성직자들 간에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카를로스3세가 제수이트교단(예수회)을 에스파냐(에스파냐 및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식민지)에서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왕과 기존의 성직자들, 그리고 에스파냐의 카톨릭 계 지식인 계급 간의 이 같은 반목과 다툼, 여타의 징후들은 장차 고야의 풍자화들 속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1766년에서 1771년 사이, 고야는 공식기록에서 사라졌다. 고야는 1767년 멩그스의 잠정적인 새 방침에 따라 궁정화가의 칭호를 받게 된 바이에우의 그늘 밑에서 마드리드에 머물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일생을 낭만적으로 다루었던 19세기 미술사가들은 흔히 이 '실종된' 기간 동안 그가 무모한 방랑생활을 하며 폭풍우 간은 청춘기를 보낸 것으로 묘사했다.
고야도 훗날 어릴 적 친구인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소 거친 청년기를 보냈음을 암시했다. 그는 자신들이 '겁 없는 허풍꾼들'로 살았음을 회고하면서 천당에 가려면"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 동안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친구인 에스파냐의 시인이자 극작가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1760-1828)에게도 "그 시절의 나는 황소와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고 손에는 검을 들고 다녔으며 아무도 무섭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라 노비야다 '(화소와 대적하는 투우사란 뜻)에서 고야는 자신을 키 큰 근육질의 투우사사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역정과 활력이야말로 그의 발전에 영향을 준 세 사람의 화가-경직외고 고상하며 성스러운 바이에우나 연약한 멩그스, 왕궁에서 좋아한 또 한 명의 화가인 보잘것없는 풍채의 이탈리아인 조바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와는 다른 점이다.
젊은 시절의 품행이야 어떠했던 고야는 당대 미술에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762-1770년 사이에 티에폴로가 마드리드 왕궁에 그린 프레스코 화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왕궁의 어전 천장에 그린, 에스파냐의 힘과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화에 큰 감명을 받았다.
어린 시절 사라고사의 성당 돔민에서 교육받은 덕에 고야는 티에폴로의 빛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와 공간 황용, 힘있고 풍만한 형상들을 찬란하게 번득이는 색채로-멀리서 보더라도 완벽하고 조화롭게-처리해낸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당대의 유일한 화가였을 것이다.
아직까지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그 5년의 기간이 지나고 1771년 봄 고야는 로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로마인에다 바이에우의 제자라고 자처하며 왕립 미술원이 주최한 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험의 주제는 고대에 관한 것이었다.
시험 걸과는 1771년 6원27일에 발표되었다. 유일한 입상작인 동시에 장원상은 '섬세한 조화를 빚은 채색'이 돋보인 파올로 보로니(1749-1819)에게 돌아갔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을 묘사한 고야의 그림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장업한 특색"이 인정되긴 하지만, "불쾌감을 주는 색조' 라고 비난했다. 그는 여섯 표를 얻었으나, 입상은 하지 못했다.
고야의 이 같은 비정통적인 그림들은 질서정연한 학구적 그림을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에게 한동안 충격을 안겨준다.
에스파냐로 돌아와 1771년 10월에 첫 그림 주문을 받다. 아마도 로마에 있다 온 덕분인 듯, 다소 명성을 얻은 고야는 사라고사의 성당 참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참사회측은 성모를 모셔둔 예배당 내부의 자그마한 성가대석의 천장에 적합한 견본 스케치를 그에게 부탁했다. 주제는 '신의 이름을 찬미하는 천사들' 이었다. 11월 초순, 고야는 자신만만한 프레스코 기법을 보여주는 그림 한 점을 제출했다.
그 그림이 참사회에서 통과되면서 1771년 11월 11일 다소 즉흥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같은 작업에 대해, 고야가 청년기에 숭배했던 돔 화가인 안토니오 벨라스케스가 2만 5천 레알을 요구한 반면 고야의 보수는 1만 5천 레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1만 5천 레알은 궁정화가의 1년치 보수에 거의 맞먹는 금액으로, 초보자에 가까운 사람에게 지급된 액수치곤 거액이었다.
1772년 1월 27일, 고야는 천장에 그릴 마지막 스케치들을 제출했다. 그림을 본 참사회 회원 들은 격찬하면서 즉시 작업에 들어가도록 주문했다. 그때 고야의 나이 25세였다. 마침내 행운이 그를 향해 미소지은 것이다.
1772년 7월 초, 고야는 막 작업 발판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의 첫 프레스코화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고야가 코라도자킨토(안토니오 벨라스케스의 이탈리아인 스승)의 영향을 받았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한편 고야 자신의 천재성도 드러내고 있어서, 아라곤 상류층 인사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는 한 백작이 소유한 소브라디엘 궁 의 기도실을 장식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곳에서 고야는 아라곤의 명문가 출신의 참사회원 라몬 피그나테이위 후원을 받게 되었고,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791년에는 이 친절한 인물의 초상화도 그리게 된다.
이처럼 귀족계층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 자 이번에는 프란시스코 바이에우가 자신의 누이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제의하며 고야 를 끌어안았다. (바이에우는 양친을 잃은 형제자매 넷을 키워냈다. 둘 다 화가가 된 남동생 마누엘과 라몬, 그리고 두 누이였다.) 이렇게 해서 1773년 7월 마드리드에서 고야는 '페파'로 알려진 호세파 바이에우와 결혼하게 된다.
페파는 26세, 고야는 27세 때였다. 처남인 마누엘위 주선으로 고야는 사라고사 부근 아울라데이의 수사들로부터 수도원에 성모의 일생을 담은 작식화를 그려달라는 청탁 을 받았다. 1772-1774년 사이에 11점의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합성작이 완성되었다. 그중에서 집중적으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7점만이 오 늘날까지 전해진다. 사라고사에서 명성을 얻은 고야는 마드리드 정복을 꿈꾸었다.
수도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고야는 왕실에 반입되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작업을 총괄하던 멩그스 밑으로 들어갔다. 1775년 고야와 페파는 마친내 마드리드에 정착한 듯하다. 오랜 친구인 사파테르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것도 이 해였다. 이 편지들에는 충동적이고 유머 있고 이따금 거칠기 는 하지만 항시 재정문제를 염려하는 인간 고야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빈틈없는 사업가였던 사파테르는 그에게 건전한 충고를 하곤 했다. 빚지고는 못 사는 고야 또한 철저하게 신세진 것을 갚았다. 사파테르는 고야갸 좋아하는 초콜릿을 보내 주기도 했다. 페파는 사라고사의 친구들에게 보낼 옷이며 숄들을 골랐다. 옷가지며 사탕과자, 와인, 때로는 고야와 사파테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사냥에 데 리고 갈 사냥개까지 단 한 주도 빠짐없이 선물상자가 오갔다, 고야가 잡은 사냥갑들 을 다시 헤아려보기도 하고 나 팔총의 질에 대해 수많은 편지들에서 얘기가 오갔으며, 곧 잘 총포 대장장이에 관한 상담도 나누었다.
이처럼 막대한 분량의 서신이 오가는 과정에서 정역적이고 관대하고 열정적이며 통찰 력 있고 게다가 삶에 대한 애착도 끔찍한, 참으로 친밀한 한 인간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드리드의 호가들은 왕궁과 상류사회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고야는 오랫동 안 그런 세계를 불편하게 여겼다.
1775년 고야는 왕실에서 첫 주문을 받았다. 마드리드 외곽의 궁전 복합단지 에스코리알의 만찬장에 걸 연작 태피스트리를 위한 밑그림 작업이었다. 사냥 장면을 담은 이 그림들 은 제작기법이 다소 경직되어 있는 데 반해- 성숙기와 성공의 절정에 이른 시기에도 그는 공식적인 그림은 사적인 그림에 비해 꼼꼼하게 처리했다-제스처나 동작, 부수적 인 디테일들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표현했다. 충분한 대가를 받으며 일하던 고야는 잠시 만족감에 빠졌다. 하지만 곧 자기 재능을 직물을 매개로 발휘해야 하는 데서 오 는 좌절감이 찾아들었다.
1776-1778년 사이에 그는 9점의 그림을 연달아 제작했는데, 그중 에스파냐 전통에 열광하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첫 걸작들도 들어 있었다. '만사나레스 강변의 춤', '새로 생 긴 여관에서의 싸움', '마하와 가면 쓴 남자들', '연', '파라솔'(티에롤로의 영향이 느 껴지는 작품이다)이 그것이다.
이 그림들에는 완벽한 하가의 자질을 보여주는 고야만 의 독특한 기법-공간과 빛에 대한 감각, 전형적 인물, 의상의 사실적 표현, 원숙한 구 도, 유연한 형상들, 따뜻한 시선과 색채감- 이 잘 구현되어 있다. 유럽의 그 어떤 화가 도 일상적인 사건들을, 그 속에 깃들인 자연스러움과 쾌활함을 한치도 놓치는 일 없 이, 역사화의 수준으로까지 성공적으로 끌어올린 이는 없었다.
고야에게 닥친 두 가지 사건
1777년 1월 21일 마드리드에서 아들 빈센트 아나스타시오가 태어났다. 고야는 사파테르에 게 그 기쁨을 전했다. '페파가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후에 태아어 다른 여러 자식들도 한 아이만 빼고 모두 같 은 운명을 맞는다.
그해에는 정치 상황의 변화로 민족주의 복귀운동이 일어났다. 1759년에 등극한 카를로스 3세는 항시 외국인 정치인들, 특히 이탈리아인들을 가까이 했 다. 그러나 1776년 말에 귀족층의 압력에 못이긴 왕은 제노바 출신 재상을 경질하는 데 동의하고 전 집정관인 호세 모니뇨와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을 그 자리에 앉혔다.
플로리다블랑카와 그의 친구 페드로 로드리게스 데 캄포마네스(1723-1802)는 고야의 일생 동안 큰 영향 력을 발휘하게 될 사람들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법률가인 동시에 왕의 고문이기도 했던 캄포마네스는 '일루스트라도스(문자 그대로의 뜻은, 계몽된 사람들)'의 리더 였다.
이 그룹 회원들은 아직도 여러가지 면에서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조국을 근대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었다. 또한 캄포마네스는 고야 에게 큰 영향을 미친 당대 자유주의 사상의 기수 중 한 사람인 가스파르멜코르 데 호 베야노스(1744-1811)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플로리다 블랑카는 쓸모 있는 인재들을 선발한 목적으로 고문단을 구성했다. 1778년 10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의 기품 있고 뛰어난 인물 호베야노스가 마드리드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미술 애호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였던 그는 곧 역사 아카데미 및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캄포마네스 주최로 당대의 문화계 엘리트들 이 모이던 마드리드 야회에서도 그는 가장 돋보이는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고야가 호 베야노스를 비릇해 재정가인 프란시스코 데 카바루스와 얼굴을 익히게 된 것도 이 야회 를 통해서였다. 당시 마드리드에 근거지를 든 젊은 바스크인 무역업자였던 카바루스는 테레사란 여석 살짜리 딸을 두었는데, 이 아이는 자차 프랑스 혁명기에 마담 탈리앵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진다.
30대로 접어든 고야는 관심이나 신념 면에서 궁정측과 뚜렷이 대조되는 입장에 서 있 는 전혀 새로운 사회단체에 가입한다. 그것은 '일루스트라도스', 즉 비효율적이고 부패 한 군주제를 소리 높여 비판하는 탁월한 철학자들, 역사가들, 경제학자들, 그리고 작가 들의 세계였다. 그들의 논쟁을 보면서 고야는 구정치 체제의 가치를 재점검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안에서 성공하고자 그토록 열망하고 있는 바로 그 체제이기도 했다.
제2장 '일루스트라도스'시대의 에스파냐
이 그룹 회원들은 고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독자적인 사고를 형성하게하고 인간생활의 복잡성을 보게 했다. 그들에게 받은 영향은 그의 후기작들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로스카프리초스'로 알려진 풍자적 에칭 시리즈가 그러하다.
이 무렵 고야는 에칭에 막 관심을 가진 종도였는데, 신축한 마드리도 왕궁에 다시 걸린 에스파냐 최고의 화가 대에고 로드리게스 데실바 벨라스케스(1599-1660)의 작품들을 에칭으로 만들어 달라는 청탁(플로리다불랑카의 주문으로 보인다)을 받았다.
벨라스케스의 화려한 채색화들에 깃들인 정신을 흑백으로 포착하다. 이 에칭들은 1778년 7월과 12월에 ''가제트 데 마드리드''지에 발표되었다. 고야는 사파테르에게 그림 도판 한 세트를 보내면서 이것들이 자신에게 숱한 문제를 안겨주었지만, 그것들은 지금 왕의 수중에 있다고 적었다.
이 젊은 화가가 거장의 작품을 그리면서, 분위기를 담아내는 그의 독특하고도 마술사 같은 재능-두터운 물감 방울로 얼굴의 느낌이나 진주 빛 직물, 혹은 보석을 표현하는 방식('임파스토' 라고 알려진 기법), 색조 배합,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색의 무한한 변화가 주는 인상을 전달하는 색채 사용법(적색과 청색의 사용은 극히 드물고 황갈색과 흰색, 검정색의 주종을 이룬다),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표현기법-을 발견해가는 모습은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다.
고야는 에칭에 쓰는 바늘만 가지고 이 그림들을 검정과 흰색으로 재창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벨라스케스의 회화기법을 가장 경제적으로 정리해 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에겐 세 스승이 있었다. 렘브란트, 베라스케스, 그리고 자연이 그들이다."
이후 1780년대는 고야가 출세가도를 달린 시기로서 그는 벨라스 케스가 군림했던 바로 그 왕궁의 접견실로 입성하는 동시에 호베야노스와 카바구스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던 캄포마네스의 저택에도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왕위 게승자였던 카를로스4세와 황태자비 마리아 루이사는 고야가 엘 파르도궁 내 그들의 거처를 새로이 장식해 주자 기뻐했다.사치스럽고 젊은 마호(용감한 남자혹은 멋쟁이)와 풍만하고 매력적인 마하(요염한 여자), 훌륭한 신사, 귀여운 아이 등, 어는 누구 할 것 없이 흔쾌히 고야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1778-1780년 사이에 그는 왕궁 침실에 장식할 7점의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대기실에 장식할 13점을 제작했다. 에스파냐 님중의 일상적인 삶이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눈앞에 펼쳐졌다.
고야의 새로이 내놓은'빨래하는 여인들' '질그릇 장수' '의사' '펠로타 놀이'는 플랑드르의 화가 다비드 테니에르의 그림들을 모사했던 구시애 태피스트리들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현대적인 미술을 선호했다. 만약 그들이 20세기를 살았더라면 파블로 피카소를 궁정화가로 임명했을 것이다. 황태자 내외의 취향은 이 젊은 화가가 재능을 펼쳐보이는 과정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1779년 1월 9일, 고야는 자신이 왕과 황태자 내외에게 네 점의 그림을 중정했노라고 즐거운 심정을 사파테르에게 전하면서 그런 기쁨을 난생 처음이라고 말했다. 왕의 가족들은 오히려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제 고야는 궁정화가의 지위를 요구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안은 거절당했다. 바이에우가 자기의 젊은 매제가 자신과 같은 지위에 오르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이에우의 우아한 작품들이 지닌 깔끔한 표현과 밝은 색채감은 생기 있고 당당한 고야의 양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두 사람의 기질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했다.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명예도 얻은 고야는 전도 양양한 미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1781년 그는 큰 수모를 겪는다. 고야는 천재성과 실리적 감각이 매력적일 정도로 잘 혼합된 사람이었다. 10만 레알이라는 엄청난 재산(당시 정원사의 1년 보수가 기껏해야 350 레알이 었다.)을 모은 그는 돈을 어떻게 투자하면 좋을지 사파테르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한편, 사라고사의 성당 참사회에서는 고야를 한번 보자고 벌써부터 요청해온 터였다.
1780년 5월, 왕실의 재정 사정으로 태피스트리 공장의 작업이 중단되자 고야는 참사회의 일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바이에우의 도움으로 돔 하나만 그려주고 6만 레알이라는 대단한 보수를 받기로 계약했다. 사라고사로 돌아와 있던 고야는 1780년 10월 두 점의 스케치를 성당 건축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림은 통과되었고 언제든지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마침내 어릴 적 꿈을 실현하게 된 고야는 틀림없이 기뻐했을 것이다.
그가 맡은 천장은 바닥에서 30미터 가량높이에 있었고, 직경은 12미터에 가까웠다. 그러야 할 천장표면의 넓이는 200평방미터를 넘었다. 능숙한 프레스코 화가들이 그러하듯 고야 역시 놀라운 속도로 작업을 해나갔다. 그는 준비기간까지 포함해서 단 4개월 만에 41개 섹션의 프레스코화 전부를 끝내버렸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인 12월 초 문제가 생겼다. 고야와 별개로 돔 작업을 하는 한편 고야의 작업을 감독하던 바이에우는 성당 작업행정을 맡고 있던 참사회원 아유에에게 고야가 자기 지시대로 수정하기를 거부한다고 고해 바쳤다. 그 말을 듣고 고야에게 달려가 프레스코화에서 '결함이 있는'부분을 직접 확인하고 난 참 사회원은 고야가 처남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1781년 2월 11일, 호출을 받고 간 이 죄인에게 펜던티브(돔구면상의 삼각형 천장면)에 쓸 스케치를 제출하고 돔 장식을 마무리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3월, 그림을 받아본 참사회원들은 '색이나 인물들의 자세, 의복들의 주름 부분에서' 먼젓번 프레스코와 '똑같은 결함이 보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스케치들이라고 거부했다. 또 그들은 " '사랑'이 인물에 걸맞게 품위 있게 표현되지 않았다.", "나머지 스케치들도 배경이 너무 어둡고 디테일이 결핍되어 있다."는 판정을 내렸다.
아유에는 이 프레스코화가 '대중의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잘못된 곳을 수정하라고 고야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핑계에 불과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높이 솟은 발판에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바이에우와 그의 조수들 외엔 없었고, 바닥에서 주름이나 붓질의 상태를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문가 입장에서 질투가인 바이에우가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심히 보면 흥미로운게 있다. 바이에우가 밭아 그린 돔의 프레스코는 원근법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아, 밑에서 바라보면 인물들의 모습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격분한 고야는 화가의 창작 권리를 내세우며 참사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건방진 자세를 보이면서 바이에우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했지만, 이 모든 사건의 와중에서 바이에우가 한 역할에 대해서는 대단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싸움이 격렬해지자 고야의 친구이자 사제인 한 인물이 중재에 자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마침내 고야는 처남의 요청을 받아들여 수정작업을 하기로 동의했고 돔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1781년 5월 29일, 참사회원 아유에는 고야에게 줄 잔금 4만 5천 레알의 지급을 허락했지만, 돈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고야가 예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격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야는 돈을 받은 즉시 가족을 데리고 마드리드로 되돌아갔다.
자신의 작업에 간섭한 바이에우와 아라곤의 사제들에 대해 대단히 격분했던 그는 그후 오랬동안 고향을 멀리했다. "사라고사와 그 그림을 생각하면 산 채로 내 몸이 불타는 것 같다."고 그는 사파테르에게 말했다. 아이러니컬한 얘기지만 고야야말로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티에폴로를 상대할 만한 당대의 유일한 호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 애호가가 아니라 종교의 수호자였던 아라곤의 사제들로서는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드리드로 돌아오자마자 고야는 설욕전을 펼쳤다. 수도에는 다행히도 고야를 후원하는 고관급 후원자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고야의 친구인 후안 마르틴 고이커에체아와 그와 가깝게 지내던 참사화원 피그나테이도 있었다.
피그나테이는 왕실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이 였다. 이후 고야의 향방을 결정짓는 궁정의 청탁이 몇 건 들어온 데는 고이커에체와 위피그나테이가 적어도 부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파테르에게 보낸 1781년 7월 25일자 편지에서 고야는 왕이 마드리드의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테 교회 부속 예배당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했는데, 그 작업에 자신과 바이에우, 궁정 화가 마리아노 데 마엘라가 뽑혔다고 의기양양하게 전했다.
산 프란시스코 엘그란데 교회는 1760년부터 재건 작업이 진행되어오고 있었다. 그림 작업을 할 부분의 건축담당자는 프란시스코 사바티니였다. 고야는 새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의 일생에서 따온 장면을 그리게 되어 있었다.
1781년 8월 말, 고야는 '설교하는 산 베르나르디노'의 스케치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그는 이 작업을 감독한 플로리다 블랑카에게 그림을 제출했다. 고야는 그림 설명을 곁들인 글을 써 보내면서 포맷이 협소해서(가로세로가 대략 5미터와 3미터였다) 구도를 잡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1783년 1월11일, 산 프란시스코 엘그란데에 그림들이 안치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2년이 돼가던 1784년 12월 8일에야 왕이 그 교회를 방문했다. 그는 고야의 작품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 그림은 뛰어난 부분이 있지만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이다.(고야는 그 프레스코화의 왼쪽에 환한 표정의 자기 모습도 그려 넣었다.) 왕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던 고야에게 왕도 만족을 표한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의 프레스코화는 승리난 다름없었다.
당시 마드리드의 수석 재판장을 맡고 있던 '일루스트라도' 출신 후원자 호베야노스도 1780년대 고야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바루스도 고야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 1782년 카바루스는 에스파냐 최초의 국립 은행인 산 카를로스의 창설을 책임지게 되었다. 중앙아메리카 계좌들을 감사하기 위해 호베야노스도 은행으로 투입되었고, 고야는 이 새 은행애 돈을 예치했다.
초상화가로 떠오르다 : 좌절과 승리
고야의 경력을 놓고 볼 때, 초상화는 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델의 특성과 기질을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초상화들을 남겼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관찰해 보면 심리적인 폭이나 통찰력의 깊이가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3년 1월 말, 고야는 재상인 플로리다블랑카의 초상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고야의 입장에서는 실물에 가까운 초상화를 제작하는 것이 중요했을 뿐, 플로리다 불랑카의 매력적이지 않은 용모를 미화하거나 변조할 이유가 없었다. 어딘가 뻣뻣해 보이는 자세, 구도에 어울리지 않는 명암 처리, 조화롭지 못한 색상처리 등에서 고야가 공식적인 초상화와 씨름하면서 느꼈을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실주의적 취향이 상류사회의 단아함을 담으라는 요구와 맞 부딛친게 분명하지만, 그는 곧 이 두 가지 문제를 절충하는 법을 터득한다. 이듬해 초, 고야는 플로리다 블랑카가 자신을 잊었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백작은 "고야, 훗날 또 봅시다."란 말만 남겼다.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실망이 켰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야는 무한한 탄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좌절감에 빠져 있지 않고 그는 다른 후원자들을 물색했다. 그 중 왕의 남동생으로서, 아라곤 출신의 처녀 마라아 테레사 바야브리가와 1776년에 결혼한 돈루이스 왕자도 포함되어 있다. 영 어울리지 않는 결혼으로 궁정에서 쫓겨난 왕자는 대여섯 군데에 거처를 두고 지냈다. 그중 마드리드에서 서쪽으로 6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그레도스산 남쪽 비탈 아레나스 데 산 페드로에 한 거주지가 있었다.
고야는 그곳에서 한 달을 보내고 돈 루이스와 함께 사냥도 두 번 나갔다. 돈 루이스는 고야에게 2만 레알을 주었고 그의 아내에게는 3만 레알에 상당하는, 금은으로 장식한 실내복을 선사했다.
1783년 9월 20일, 고야는 아레나스데 산 페드로에서 돌아오는 중이라 피곤하다고 사파테르에게 썼다. "왕자께서는 대단히 친절하게 대해 주셨네. 나는 그의 초상화와 왕자빈, 어린 왕자와 공주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되었네. 그러나 나머지 네 점의 초상화는 제대로 되지 않았지."돈 루이스와 마리아 테레사 바야브리가의 초상화는 원화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 수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공주의 초상화나 청색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왕자의 초상화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1784년 10월, 고야는 다시 아레나스로 갔다. 이번에는 돈 루이스에게 3만 레알을 받고 그림 두 점-'말 위의 마리아 테레사 바야브리가의 초상'과 뛰어난 걸작 '돈 루이스왕자일가'(이 그림이 고야의 걸작이라는 데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을 그렸다.
돈 루이스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건축가 벤투라 로드리게스의 초상을 그려달라고 고야에게 부탁한 것도 바로 이 방문 때였다. 회색의 색조가 잘 어우러진 로드리게스의 초상화는 중요한 작품이다. 고야는 이때 처음으로 모델의 사회적 지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초상화는 모델의 건축가다운 풍모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잘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1784년은 고야가 많은 걸실을 맺은 한 해였다. 돈 루이스 왕자와 그 일가의 초상화 작업 외에도 다른 귀족들에게도 주문이 들어왔고, 호베야노스의 주선으로 에스파냐 서부지역인 살라만카에 소재한 칼라트라바 대학 교회로부터도 청탁이 들어와 네 점의 그림(이 그림들은 나폴레옹군과의 전쟁기간중에 훼손되었다)을 제작했다.
1780년대는 고야의 사생활면에서도 번성기였다. 고야는 마드리드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매력적인 동북부 비탈 지역(지금은 일부 파괴되고 없다) 카예 델 데센가뇨 1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1824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그는 이곳에서 45년 이상 살았는데, 그 동안 1800년에 카예 델 데센가뇨와 경치 좋은 카예 발베르데의 모퉁이에 자리한 길 맞은편의 2층집으로 아사한 게 전부였다.
1795년에는 알바 공작부인이 이 화가의 첫 번째 집에 마련된 화실을 방문했다. 1812년에는 웰링턴 공작이 초상상화를 그리기 위해 고야의 두 번째 집을 찾았다. 그래선지 이 지역에는 유명인사의 망령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1784년 12월 2일, 아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태어난 곳도 카예델데센가뇨 1번지였다. 출산 후 페파는 심하게 앓았는데, 사비에르는 그들 부부의 자식들 둥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이다. "이 아이가 무사히 자라나길 빌자,"고 고야는 사파테르에게 썼다.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보낸 초기의 서신들에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드물지만-후기의 서신들은 사파테르의 조카가 검열했다-1785년 1월의 편지에는 재무장관이자 카바루그 의 후원자였던 무스키스의 사망 소식이 들어 있다. 그러자 카바루스는 새 재무장관으로 들어앉은 그의 최고의 적 페드로 데 레레나의 수중에 놓였다. 왕실 일을 도맡은 엄격하고 부지런한 페드로 데 레레나는 고야의 앞길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1785년 고야는 장차 30년 동안 충실한 후원자가 될 페냐피엘 후작부부(훗날 오수나의 공작과 공작부인이 됨)를 만난다. 베나벤테의 여백작인 페냐피엘 후작부인은 에스파냐 상류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인 중 하나였다. 우아하고 교양 있으며 좋은 어머니이기도 했던 그녀는 음악가, 시인, 미술가, 배우들과 교분이 많았다.
그녀는 금세 고야를 아껴주었고, 1785년에는 자기와 남편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고야는 궁중풍의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오는 함정을 잘 피해 갔다. 그는 색채주의자적 면모가 발휘된 '베나벤테의 백작부인 초상'은 청색, 녹색, 분홍색이 잘 조화된 눈부신 작품이다.
고야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자리잡았다. 이후로는 왕이든 투우사든 모두 사실주위 기법으로 그릴 수 있었다. 그는 페냐피엘 후작과 사냥도 했는데, 후작의 사냥감 자루 크기에 '놀랍고 놀랍다'고 사파테르에게 썼다. 이제 널리 공인받을 시기가 고야에게 찾아왔다.
1785년 2월 2일, 그는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의 회화부장 대리직 을 신청해 5월 4일 허가를 받았다. 고야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성취한 것도 그해가 분명하다. 새로 발견한 이 같은 자유는 고야의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가는 그의 의지를 입증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한가지 우울한 일은 돈 루이스 왕자의 죽음이었다. 관용과 아량 역시 위대한, 사람의 특징이란 점을 고야는 그에게서 배웠다. 중요한 후원자를 잃었는데도 이 화가는 출세의 길을 달렸다.
1786년 역시 결실의 한 해였다. 고야의 재능은 활짝 피어났다. 이후 그의 작품들이 이전보다 더욱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가장 놀라운 그의 자질 중 하나는 변화하는 상황과 사람, 사물에게 자신의 양식을 새롭게 적응시켜 가는 데 있다. 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면서 그의 예술은 평화와 번영의 세월에 담긴 매력을 전달했다. 훗날 그것은 전쟁의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생생하게 기록될 것이었다.
성공에 따른 부를 축적했지만 고야는 결코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이 시절, 고야는 은행과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자신의 수입이 일년에 1만 2천 내지 1만 3천 레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운이 따랐던지, 1786년 6월 25일에는 왕실 태피스트리 제작을 위한 공식화가 (궁정화가 바로 아래 직책)로 임명되어 연봉 1만 5천 레알의 고정수입이 추가되었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그는 곧바로, '온통 번쩍번쩍 빛나게 도금해서 길 가는 사람들도 쳐다보던' 자그마한 영국산 이륜마차를 사들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첫 외출에 나선 날, 말과 마차가 개천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고야는 기적적으로 발목에 약간의 부상만 입었을 뿐 큰 화는 면했다. 왕실 태피스트리 화가로 임명된 일은 고야와 바이에우(그는 이일이 자신의 사무실을 통해 성사된 것이라고 자랑했다.)간의 화해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1786년 고야는 바이에우의 멋진 초상화를 그렸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화려한 적갈색 색조의 이 작품은 대단히 자유로운 양심으로 제작되었다. 고야의 주된 임무는 왕족들의 거주지에 거는 태피스트리에 쓸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1786년 여름에는 엘파르도의 식당에 필요한 새로운 연작물을 디자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9월 12일, 그는 사파 테르에게 스케치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가을에는 스케치를 왕과 왕자에게 제출 했고 그것을 본 두 사람은 만족했다. '봄''여름''가을''겨울'에 이어 '부상당한 석공'과 '샘터의 가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스케치들은 전통적인 주제에 고야의 새롭고 자연스러운 시각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났다.
이 스케치들로 그린 밑그림은 지금 고야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가을'의 사실성, '여름'의 황금빛 햇살, 그리고 '겨울'의 차가움은 장식미술 형식의 필수적인 양식과 정확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 그림들에서 그는 평소보다 색을 사용하는 폭을 넓게 잡아 가볍고 투명한 느낌으로 부피감을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를 지나치게 대조시키지 않고도 양감을 최대한으로 획득하는 다양한 색채 사용법을 벨라스케이에게 배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림이야말로 고야의 사고에서 언제나 최우선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야외로 사냥을 나갔을 때조차도 그는 전원 현장의 형태와 색채의 유희를 무의식적으로 기록해 두었다가 화실로 돌아와 캔버스 위에 살려냈다.
1786-1787년의 겨울 : 맹렬한 활약
겨울 몇 달 동안 고야는 알타미라 백작의 초상화의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 한 점을 비롯해 산 카를로스 국립은행에서 주문한 것까지 대여섯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에 드러난 알타미라 백작은 아주 잘못 만든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고야가 왕 앞에서 긴장했기 때문인지 전설적인 정도로 못생겼다는 왕은 뻣뻣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카바루스의 초상화를 끝으로 그해의 초상화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현대적인 감각의 구도를 취한 이 초상화는 배경이 전혀 없다. 노란 비단옷 차림에 편안한 자세로 모델이 된 이 재정가는 아마도 엄숙하고 정적인 모델을 좋아하던 고야를 쩔쩔매게 만든 듯하다.
1787년 4월 22일, 고야는 오수나 공작 부부의 고향인 알라메다로 갔다. 공작의 거실에 걸 7점의 그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주제들은 절반은 로코코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절반은 현대적이었다. '당나귀 등에서의 추'과 '그네'는 유럽의 안방들에서 인기 있던 장면들을 담은 것이고, '기름 바른 장대' 나 야만적인 '마차습격''마을의 행렬''황소 고르기'(분실됨)는 시골의 서민적인 주제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공상적인 색조에 고야 작품세계의 특징이 되어가던 빠른 붓질, 빛과 공간 감각을 적용해 만들었다.
같은 해 4월, 카바루스는 중요한 재무직에 기용되어 프랑스로 불려갔다. 그는 4월말부터 8월까지 파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호베야노스가 비서로 추천한 젊은 시인 레안드로 데 모라틴과 동행했다. 이 시인은 장차 고야의 절친한 벗이 된다. 고야도 그들과 합류하자고 했을까? 그 점에 대해선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그가 불어를 배우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1월 14일자 편지에서 그는 사파테르에게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벗이여, 난 모험을 하고 있다네. 이렇게 불어로 자네에게 쓰고 있다니 말이야. 자네도 불어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이 말을 익히려고 나는 머리속에다 집어넣고 있다네. " 고야는 자신이 완전 초보자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사파테르에게 사전을 보내달라고 은근히 부탁했다.
이 얘기가 나오기 전, 6월초 그는 왕의 명으로 그리고 있던 실물크기의 초상화 3점(성 요셉, 성 베르나르드, 성 루트가르디스)를 성 안나 축일(7월 26일)을 기해 마드리드 북쪽의 도시 바야돌리드의 산타 아나 수도원에 안치할 예정이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고야는 "그 얘기가 나왔을 땐 시작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사파테르에게 썼다. (편지에 적힌 날짜에 따르면 앞으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5주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아마도 조수를 기용해 대단히 그림들을 마무리지었음에 틀림없다.
추측하건대 왕실의 명을 받은 터에 감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스케치 스타일로 작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급하게 그린 이 그림들에서 고야의 작품에서 보기 힘든 신고전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듬해에도 오수나 공작부부(전 페냐피엘 후작부부)가 발렌시아 대성당 내 그의 봉헌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들의 선조인 보르히아의 성 프란시스를 기리는 그림을 주문했다.
고야는 놀라운 그림 두 점을 완성함으로써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대가로 고야에게 3만 레알이 2년여에 걸쳐 할부로 지불되었다. 산타아나의 작품을 다소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린 데 반해 '보르히아의 성 프란시스와 그 일가'에서는 색다른 양식-붓 터치와 채색 부분에서 베네치아 양식에 가까웠다.
-이 채택되었고, '보르히아의 성 프란시스와 회개하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에서는 미래의 장르가 선보였다.(이 그림에서 최초로 고야 작품세계의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카프리초스'와 블랙 페인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뛰어난 명암법은 고야의 영감을 자주 자극하곤 했던 램브란트의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고야는-직업적, 사적으로-여러 면에서 좀더 중량감 있는 쪽으로 발전해 갔다. 그가 "늙어서 주름살이 많아져, 자넨 내 들창코나 푹 들어간 눈으로밖에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사파테르에게 털어놓은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고백에는 분명히 진실한 구석이 있다. 1788년 고야는 일이 너무 벅차다고 밝혔다
1788년 5월, 그는 엘 파르도궁에 있던 아스투리아스의 황태자 부부 침대에 걸 그림을 청탁받았다고 전하면서 '왕이 그림이 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다고 사파테르에게 썼다. "주제들이 너무 어려워서 고생이 크다네, 특히 축제 일이라 온갖 습관적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 프라데라 데 산 이시드로를 그리자니 말야." 마다르드의 이 광경을 담은 '산 이시드로 초지'는 최근에 들어서야 1788년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전에는 이 그림이 1790년대 후반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이 경우처럼 제작 양식을 근거로 고야 작품의 제작연도를 추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100년후의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를 예고하는 듯한 이 뛰어난 파노라마는 마드리드 위로 쏟아지는 5월 일몰의 색조를 훌륭하게 살려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인사의 주문 중에는 알타미라 백작부인(암바공작부인의 시누이)과 그녀의 딸의 초상화-르누아르를 보는 듯한 매력적인 청색과 분홍색색조로 그린 주옥같은 작품이다-를 비롯해 그녀의 아들들, 트라스타마레 백작과 그 유명한 '붉은 옷의 꼬마', 마누엘 오소리오의3-4세 때의 초상화들이 있다.
이 그림들은 고야가 어린아이의 매력과 우아한 태도 및 진솔한을 표현하는 데 완벽하게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이들의 자연스런 태도며 익살맞으면서도 부드러은 특성들을 잘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야가 사랑하는 아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것이 틀림없다.
벨라스케스처럼 거야도 친한 사람들의 초상에서는 배겅을 생략하고 있다. 대담한 구도의 '도수나공작부부와 아이들의 초상'에서는 사실적인 인상이 전달되고 있으며 꾸민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새 왕과 왕비는 고야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1788년12월,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아스트리아스의 황태자가 카를로스4세로 등극했다.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심하게통제하는 늙은 왕에 반항해 늘상 음모를 꾸미곤 했던 새 왕과 왕비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실 전체가 절대적으로 애도해야 했는데'상복이 그다지 많이 보이니 않았다.'고 고야는 항변했다.
새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의기충천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부인 젊은 경호원 마누엘 고도이를 필두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영향력 있는 자리에 승진시키면서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고야는 카를로스3세와 호케야노스의 후원에 힘 입은게 분명하지만, 새 왕과 왕비의 명으로 1789년 4원 30일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궁정화가에 임명되었다.
그는 선서식을 진행하는 동안 '대단히 무게를 잡았노라.'고 전했다. 1789년은 고야의 삶에 정치 상황이 개입된 해였다. 프랑스 혁명의 첫 충돌 소식- 이 소식은 에스파냐 민중들에게 정해지지 않았다.- 으로 마드리드 정권과 왕실은 근심에 휩싸였다. 그들은 자기들 끼리 만 정보를 주고 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의 유혈사태에 완전히 굴복한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친사촌인 카를로스 4세에게 비밀리에 전갈을 보냈다. 그는 에스파냐에 피시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제3장 위험한 행운
한편, 갓 승진해 의기양양해하던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화를 연작으로 그렸다. 지배세력의 변화와 프랑스 격변으로 평온이 깨진 왕실이 왕궁 장식에 관심을 잃은 바람에 고야가 잘 해오던 테피스트리 밑그림 작업도 다시 중단되었다. 유명인사들의 주문도 대폭 줄었다. 다들 긴축하느라 고심하는 모양이었다. 고야는 발데모로의 교회 제단 장식을 위한 단 한 점의 그림만을 완성했다.
이 무렵 고야의 친구와 지지자 대여섯 명이 고위직에 올랐다. 1789년 8월에 사파테르가 아라곤 귀족에 봉해졌고, 12월 26일에는 -플로리다블랑카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노재무장관 레레나에게 미움받던-카바루스가 백작에 봉해졌다.
마리아 루이사는 카바루스와 호베야노스, 플로리다블랑카를 몹시 적대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실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왕이 아니라 그녀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명백해진다. 거꾸로 도는 행운의 수레바퀴 드디어 '일루스트라도스'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1790년 6월 25일 카바루스는 영문도 모르고 체포돼, 레레나의 명에 따라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 해 이 일에 앞서, '아스투리아스에서 어떻게 석탄채굴울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다시 말해,추방된) 호베야노스가 친구를 변호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급히 돌아왔지만 아무 도움도 줄수 없었다. 모든 통로가 막혀서 그는 포기하고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7년간 추방되었다.
1790년 7월 17일, 갑작스레 고야에게도 발렌시아로 '가서 바닷바람이나 쐬고 오라.'는 '허가'가 떨어졌다. 그러나 10월경 고야는 사라고사로 되돌아가 있었고, 거기서 사파테르의 초상을 그렸다. 1790년 크리스마스에서 마르리드로 돌아온 그는 궁정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았다.
그는 카를로스 4세를 만나려 애썼지만, 왕은 이미 고야가 왕을 섬기려 하지 않는다는 모략자들의 말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사파테르에게 이렇게 썼다. "그 얘긴 그만두세,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끓어."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야가 (작업이 재개된) 태피스트리 공장의 밑그림 작업을 우습게 여긴다고 비난하면서 '흑심'을 품고 있다고 왕에게 간언한 사람은 같은 궁정화가인 마엘라였다.
태피스트리 공장의 감독은 왕에게 호소문을 올렸다. 레레나가 중재에 나섰고 이 화가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심각한 사건이었다. 특히 고야가 일부 지지자를 잃은 상황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마침내 바이에우가 끼여들었다. 고야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보다도 겁이 나서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안가 다시 왕과 왕비와 좋은 관계를 회복했다. 1791년 5월 그는 에스코리알에 있는 왕의 집무실에 걸 대형 태피스트리'결혼'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기이한 한 노인과 젊은 미녀의 결혼 장면을 담은 수작이다.
선왕과는 달리 카르로스 4세는 재미있는 주제를 좋아해서 당시에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정치적 배경을 많이 깔고 있는 그런 밑그림 '마네킹'은 또다른 놀라운 그런 작품이. 같은 해, 고야는 희화적인 풍자에서 유년기의 매력으로 슬쩍 넘어와, 명랑한 꼬마, 어린 루이스 시스투에를 담은 분홍색과 청색의 초상화를 그렸다.
1791년 10월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참사회원 피그나테이의 초상(현재 그 모사작만 남아있다)을 그린 것 같다. 12월에는 7점의 밑그림을 완성하고 생애 마지막으로 태피스트리 공장에 청구서를 제출했다.
1792년 2월, 그는 자신을 '거인 고야'로 그린 재미있는 편지를 사파테르에게 쓰고, 자신의 족보를 작성하는 문제를 언급했다. 이는 귀족이 되는 것과 관련해 문의를 할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심지어 화가로서의 다소 따분한 임무에서 벗어나는 한 방편으로, 벨라스케스처럼 궁정의 명예직에 오르는 꿈도 꾸었던 것 같다. 역시 같은 편지에서 그는, '남자라면 항시 갖추어야될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에 이젠 옛날처럼 '세기디야'(대중무곡)를 듣지 않기로 선언했다.
프랑스 혁명의 반향은 궁정에서도 느껴졌다. 1791년 도망가던 프랑스왕이 바렌에서 체포되자, 에스파냐의 대다수 귀족들은 자유주위를 무조건 적대시했다. 궁정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1792년 2월, 일부는 무능하다고 여기고 다른 일부는 부담스러운 존재로만 여기던 플로리다브랑카 재상이 경질되고 아란다의 노백작이 새 재상에 올랐다. 하지만 1792년 11월 이 새 재상도 쫓겨난다. 왕비의 총애를 받던 25세의 힘 좋은 금발의 경호원 고도이에게 유리한 입지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였다.
1792년 8월, 프랑스 왕이 권좌를 내주고 수감되자 에스파냐는 프랑스 공화국이 이미 독일에 선포한 전쟁의 여파가 이베리아 반도까지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올랐고,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는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1792년 고야의 행적에 대해서나, 이 존경받던 화가가 불과 2년 사이에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된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무튼 프랑스 사태로 야기된 궁정의 정치적 동요로 - 고야의 몇몇 후원자들이 왕의 총애를 잃게 된 사태까지 포함해서 - 그의 장래가 막혀버렸음이 분명하다. 이 위급했던 해에는 사파테르와 주고 받은 편지도 남은 게 거의 없고 왕실이나 개인에게 청탁받은 편지도 전혀 없다.
다만, 마지막 태피스트리 밑그림들과 관련된 6월의 계산서와, 5월과 7월 족보 연구와 관련된 영수증 몇 장, 귀족 추대 추천에 필요한 회신문이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다. 고야가 9월 2일에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를 방문하고 10월 14일에 그곳에서 미술 교수법에 관해 강의했다는 증거는 있다. 직업상의 난관에다 더 힘든 고난이 겹쳐, 고야는 병을 앓으면서 청각을 잃는다.
1793년 1월 17일 고야는 오수나 공작부부의 회계담담자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지난 두 달 동안 병을 앓았고, 요양차 세비아와 카디스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 무렵 고야가 성병에 감염됐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 얘기는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재는 그가 일종의 수막염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납득하기 힘든 점이 있다. 이 편지는 마드리드에서 부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파테르가 고야와 함께 지내던 카디스의 부유한 사업가이자 수집가인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에게 쓴 편지로 볼 때 그는 1793년 1월 5일에 이미 카디스에 가 있어야 했다.
마르티네스는 고야가 세비야를 출발해 병이 심각한 상태로 자신의 집에 도착했었다고 전했다. 게다가 궁정 고위관리인 프리아스 공작은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1월에 고야에게 두 달의 휴가를 주면서 '안달루시아에 다녀오라.'고 했던 것이다.
고야가 관청의 허가도 받지 않고 안달루시아에게 간다고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 비밀리에 카바루스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프랑스 왕을 구해 내려던, 그 실패한 시도에 그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일까? 불확실한 단서들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다.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신들의 사촌을 구하기 위해 비호 세력의 도움 속에 안간힘을 썼다. 훗날 고야의 손자는 이 화가가 시에라모레나 산맥을 넘어 날아갔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어쪄면 일말의진실이 깃들인 얘기인지도 모른다.
한편,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이단 심문소-원래 교회와 군주가 이교도를 적발할 목적으로 세운 기관이다.-의 핵심층이 교체되었고 마드리드에는 의혹과 두려움의 분위기가 짙게 깔렸다. 극진하게 간호한 덕택에 고야는 사지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머리속에서 소음이 윙윙거리는 증상은 여전했지만 현기증은 가셨다. 병을 앓고 난 후 놀랍게도 그는 청력을 완전히 잃고 치유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에 대한 그의 반능은 묵묵히 자신의일을 지속하는 쪽으로 모아졌을 뿐이었다. 1793년 여름 그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화가의 화실에서 새로운 걸작들이 나오다.
어쩔 수 없이 수도에 다시 태어난 고야는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 학장인 베르나르도 데 이리아르테에게 11점의 연작물을 보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것은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에 산란해진 상상력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해서',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충동과 창작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충돌과 재능이란 표현이야말로 고야의 개성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두 단어이다. 고야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앉아있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자신이 직업상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는 것을 자타에게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회복기 동안 병이 재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관청의 청탁을 수행하기 위한 그의 붓질을 막지는 못했다. 피레네 전선 (에스파냐와 프랑스간의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저명한 지휘관을 그려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먼저 그는 안토니오 리카르도스 장군의 초상을 그렸다.
이 인물은 1794년 초에 적의 손에 죽는다. 이 그림은 고야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인물초상화의 하나로, 세심한 붓질과 뛰어난 채색으로 진실한 심리 상태를 모색하는 그의 분명한 의도를 강조했다. 또 하나는 육군중령 펠릭스 콜론 데 라레아테기의 초상이다. 이 인물의 형제들은 카바루스 일가의 친구들이었다.
고야는 그의 행동거지는 변함없이 본받을 만하지만 호감은 가지 않는 듯, 꼭 다문 얇은 입술에 드러난 거만함을 캔버스에 훌륭하게 옮겨놓았다. 같은 해에 그는 호베야노스의 처남의 친척인 라몬 포사도 이 소토의 초상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 인물은 고야가 완전히 귀먹었다는 사실을 방문하여 확인했다고, 한 편지에 기록해 놓았다. 이처럼 빈정대기 좋아하고 거만한 신사들 틈에 다소 우호적인 얼굴도 끼여 있다. 라 티라나로 알려진 여배우(마리아 로사리오 데 페르난데스)의 초상이 그것이다.
고야는 그녀가 고별 무대를 갖던 해에 그녀를 그렸다. 자기와 친한 사람(수년 전에 이미 이 여배우를 그린 적이 있었다)을 모델로 할 때면 늘 그랬듯이 이 그림에서도 고야는 모델을 대단히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이처럼 흠잡을 때 없는 솜씨로 볼 때 그는 붓질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태피스트리 공장 책임자에게 중병으로 인해 아직 작업하기가 힘들다고 떳떳하게 말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험악한 한 해 1794년 4월의 한 일간지에 따르면, 추방된 4년 동안 단 한번도 절친한 친구 카바로스-마드리스 자택에 구금되어 있었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 호베야노스가 느닷없이 그 사건을 재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무렵 프랑스 귀족과 결혼했던 카바루스의 딸 테레사는 조국의 정부와 결탁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하에 프랑스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또한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의 지도자들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도록 장 랑베르 탈리앵과 그 일당을 부추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9일(혁명력-1794년 7월 27일)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이 처형되었다. 공포정이 막을 내리자 프랑스는 크게 안심했다. 사실 그 점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파냐 궁정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고야도 새로운 고객을 얻었다. 주로 동료이거나 전 후원자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산 카를로스 국립은행의 임원인 엘 카르피오 백작은 호베야노스 일가의 친구였는데, 33세가 된 그의 아내 라솔라나 여후작이 고야에게 초상화를 의뢰해 왔다.(그 직후 그녀가 사망한 것으로 보아 외동딸에게 줄 유품으로 제작한 듯하다.)
1795년, 고야의 모델로 널리 알려진 알바 공작 부인과 만나다.
전쟁은 끝났다. 1795년 7월, 프랑스, 에스파냐, 프로이센이 바젤 협약에 서명했다. 이어 몇개월 동안 에스파냐의 귀족들에게 성은이 내려졌다. 고도이는 평화의 왕자라는 새 직함을 받았고, 플로리다 블랑카는 무죄가 입증되었다. 호베야노스는 사면되고 카바루스도 해금되었다.
이 전 은행장은 고도이의 재산증식을 도와줌으로써 사실상 훌륭한 재정고문 역할을 했다. 철저한 낙관주의자였던 카바루스는 '계몽된' 자신의 친구들이 다시 권세를 누릴 때까지 기다리려고만 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고야의 전망도 밝아졌다. 곧 알바 공작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이어 공작부인의 초상화도 그렸다. 전신상인 유명한 이 초상화는 녹색계열의 산등성이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색과 노랑, 검정이 잘 조화된 작품으로서, 실제 풍경 속에 모델을 배치한 것이 이 화가로서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예술 사가들이 이 대공비와 귀먹은 화가 간의 연애설을 그렸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나 문서는 없다. 공작부인은 뛰어난 미모와 개성으로 예찬받은 여인이었다.
약간 경박하고 변덕스럽지만 상냥한 그녀는 서민들과 잘 어울렸고, 투우사와, 학생들, 심지어 농부들과도 잘 지냈다.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수차례 대좌하는 가운데 고야가 그녀를 사랑하게 됐으리라는 상상은 퍽 그럴 듯하다. 하지만 당시 고야는 나이 50세 귀머거리였고 아름다운 공작부인은 불과 33세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공작 부인과 그녀의 시선을 담은 자그만 캔버스에 담긴 지배적인 정서는 사랑이 아니라 유머이다.
7월에 바이에우가 사망했다. 이 왕년의 라이벌에 대한 추호의 원한도 품지 않았던 고야는 미완이기 하지만 뛰어난 바이에우의 초상 한 점을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 전시했다.
9월에 그는 바이에우의 뒤를 이어 연봉 4천레알을 받는 이 아카데미 회화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알바공작이 사망하자 고야는 알바가문 소유의 궁이있는 산루카루 데 바라메다로가 애도기간 동안 공작부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카디스에 잇는 산타 쿠에바 예배당에 장식할 세 점의 수작을 그린 시기가 아마 이때인 듯하다. 과감한 레이아웃과 독창적인 기법,절묘한 채색이 돋보이는 이 그림들은 예수의 일생을 그림으로 담는 전통 회화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산루카르 노트'라고 일컬어지는 삽화들을 그린것도 이 시기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던 고야는 이 스케치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관심사들을 전달할 수 있었다.
알바 공작부인을 두세 차례나 그렸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뛰어난 미모의 젊은 여인을 나체로, 혹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그렸다. 1797년 공작부인을 그린 또 하나의 걸작이 나왔다. 공작 부인은 만틸라(베일의 일종)와 검은 치마의 상복 차림으로 밝은 해안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다.
그녀가 갸름한 얼굴과 당당한 자태, 슬픈 표정은 명석한 고야가 화려한 모델에 깃들인 무의식적인 연극조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기법이 어찌나 능란한지 얼핏 봐서는 그 점을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엑스선 검사 결과 공작부인의 발이 그려진 모래사장에 '솔로고야(오직 고야뿐)'란 글자가 새겨졌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 위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공작부인은 고야의 득위 양양하고 애정 어린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무렵 지난 한 해 안정된 것처럼 보였던 고도이 집권체재가 단명으로 끝났다. 1796년 10월에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에스파냐는 재정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고도이는 안달루시아에게 왕가와 여행 중에 만난 듯 보이는 페피타 투도란 미녀에게 빠져 왕비와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마리아 루시아는 고도이를 돈 루이스의 딸이자 카르로스 4세의 사촌인 친촌 여백작과 결혼하라고 했다. 인기를 만회하기로 결심한 고도이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카바로스의 충고에 따라 그의 친구들을 각료로 영입했다. 호베야노스를 법무장관, 베르나르도 데 이리아르테는 농업장관, 프란시스코 사베드라는 재부장관에 임명했다.
물론 고야가 옛 친구들의 공식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가발을 쓴 이리아르테는 격식을 차리고 소신이 뚜렷한 인물로 그려놓았고, 호베야노스는 품위있고 명석한, 그러나(아마도 이 화가에 대한 그의 감정을 표현한 듯) 자애로움이 엿보이는 눈길의 수심찬 몽상가로 그려놓았다.
이제 부패한 총재 정부(루이 16세의 축출 이후 5인의 총재단이 집행권을 행사해 오고 있었다)의 통치하에 있던 프랑스는 고도이가 영국을 지지한다고 비난하며 비밀리에 그의 해임을 요구해 왔다. 1798년 3월 28일 마침내 고도이는 강제 사직당했고, 그가 새로 구성했던 자유주의 행정부 역시 그 뒤 몇 달 사이에 해체되었다.
왕비의 그림 청탁 1798년 봄, 마드리드에 있는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의 왕실 예배당을 장식해 달라는 왕비의 명이 고야에게 떨어졌다. 그는 52세에다 완전히 귀가 먹고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발판에 올라 새 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장차 현대로 오면서 가장 유명한 돔의 하나가 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시콜콜히 트집 잡던 바이에우나 심술궂은 참회사로부터 벗어난 고야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돔을 버티는 원통형 벽제에 빙 돌아가며 널리 알려진 한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
것은 마치 성 안토니우스가 바닥 위 1미터 높이에서 설교하는게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뛰어났다. 회색과 청색의 조화 위에 노랑색이 가미된 이 프레스코화는 그 독창성이나 명료한 표현의 자유라는 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 작업에는 4개월여의 시간(8월부터 11월말까지)이 걸렸다.
그는 금방 바른 석회 위에 곧장 스케치를 하고 거장다운 솜씨로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너 밑그림들을 수정해 나갔다. 펜던티브(돔 구형상의 삼각형 천장면)위에 그린 천사들이 마치 오귀스트 루느아르의 화실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프레스코화는 당대로부터 한참 앞선 모습을 하고 있다. 1798년 6월 고야는 알다
메다성에 장식할 작은 그림 대 여섯 점을 오수나 공작부부에게 전달했다. 이 그림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카프리초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데, 당시 고야가 몇 년에 걸쳐 에칭 연작을 위한 예비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잇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점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일례로, '마귀의 잔치'란 제명이 붙은 그림을 살펴보면 커다란 염소가 한 마리 보이는데, 이 동물은 장차 에칭화 들에서도 재등장하고 고야가 말년에 그린 같은 제명의 또다른 그림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아라곤에서 악마의 상징물로 널리 알려진 이 염소는 위기의 시기를 겪고 난 고야의 작품들에서 주로 주제가 되었다.)
이 그림들은 이 화가가 기법면에서 완벽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해 준다. 그는 마치 머리속에 스치는 것을 필름으로 찍어내듯,상상에 이어 곧바로 손을 놀리면서 자신의 꿈과 상념들을 캔버스위에 옮겨 놓았다. 고야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의 예배당 프레스코화를 작업한 데 이어 수많은 초상화들을 그려냈고, 톨레도 성당의 성물보관실에 걸 '예수의 체포'도 제출했다.
이 작품에 표현된 밤의 빛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것을 보노라면 마치 한편의 예수 극에 참여한 듯한 느낌이 든다. 통곡과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멋지게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1799년 2월, '카프리초스'의 공개를 선언하다
훗날 82점의 에칭 시리즈로 알려지는 '카프리초스'판매전은 행사를 시작한지 불과 이틀 만에 이단 심문소의 요청에 의해 철수했다고 전해진다. 27점의 사본만이 팔려나갔는데 그중 4점은 오수나 공작부부가 샀다.
고야의 에칭화들은 사상이 너무 자유롭고 지나치게 선동적이며, 비록 초보자들의 눈에는 화가의 냉소족인 비판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나 손에 넣기 쉬운 작품으로 여겨졌다. 사회의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 가운데는 궁정 스캔들을 다룬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그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만 풀 수 있는 복잡한 수수께끼로 여겨지기도 했다.
보편적인 수준에서 소통되는 것이 위대한 작품들의 속성이다. 더무나 뛰어나고 독창적인 판화가로서의 재능과 폭발되어 넘치는 정력적인 상상력, 능수능란한 기법의 소유자였던 그는 친구들이 일구어낸 사회 비판을 예술로 표현하면서 대단히 함축성 있게 포장해 냈다.
그의 주제는 매춘, 미신, 이단 심문소, 탐욕, 야심, 권력의 남용 따위를 망라하고 있었고, 그의 생각들은 뛰어나게 활기찬 이미지들로 변형되었다.
팔려나간 '카프리초스' 사본들 가운데 상당수는 외국에 있는 고야의 숭배자들이 사들였다. 프랑스 대사인 페르디낭 기예마르데는 마드리드에 있는 프랑스 대사인 페르디낭 기예마르데는 마드리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저에 고야의 사본 하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1798년에 고야는 원래 부르고뉴 출신의 의사였던 이 유별난 외교관의 초상(81페이지 오른쪽)을 멋지게 그려냈다. 이그림은 1799년에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선보였다.
마드리드에 머물던 기예마르데는 알바 공작부인의 결혼으로 젊은 친척 아주머니가 된 산타 크루스 후작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이 후작부인의 '만틸라 차림의 초상'은 1799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야가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실물감까지 성취해낸 수작에 속한다.
이 두 사람의 초상화는 현재 루브르 미술관에 서로 마주보고 걸려있다. '카프리초스'의 취지가 용케 왕가의 눈을 피해 갔는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신랄한 고야의 메시지가 의도적으로 묵살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1799년 9월에 고야는 새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왕비의 청탁을 받았다. 그 결과에 만족한 왕비는 한달 뒤 두 번째 초상화도 이 화가에게 부탁했다. 이번에는 말을 탄 모습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제4장 궁정화가
말을 탄 초상화를 보고 크게 만족한 왕비는 고도이에게 이렇게 썼다. "만틸라를 쓴 초상화보다 이번 것이 더 실물에 가깝다고들 합니다." 사실 이 광대한 캔버스는 고야의 성공작에 속한다. 시에라 데 구아다라마(마드리드 북쪽의 산지)정경을 벨라스케스 못지않게 처리한 이 작품은 자연스러운과 사실주의가 짙게 배어 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마리아 루이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도전적이고 음흉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후세에 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이 여인의 여러 면모가 드러난다.(모델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고야의 또 다른 감동적인 작품으로는 같은 시기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시인 친구 레안드로 모라틴의 초상화가 있다.)
1799년 10월 31일, 고야는 마침내 수석 궁정화가에 임명되어 연봉 5만 레알을 받는다. 그는 사파테르에게 승진 소식을 알리면서 조금도 주주하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왕실은 나 한테 푹 빠졌다내." 한편, 프랑스에서는 1799년 브뤼메르 18일(공화력으로 둘째 달18일, 즉 11월 19일)-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하고 막 귀환해 전 유럽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초재 정부를 전복하는 데 성공했다.
마드리드 정부는 곧 나폴레옹에게 손을 들었다. 고도이를 유용한 도구로 이용할 만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한 나폴레옹은 그를 다시 권좌에 앉혔다. '일루스트라도'들은 추방하거나 가차없이 제거했다. 특히 카바루스와 당시 프랑스인 은행가 가브리엘 쥘리앙 우브라르의 아내였던 그의 딸 테레사 탈리앵은 가부리엘이 보나파르트의 이익과 상치하는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고야는 자기 주변의 사건들을 정활하게 감지하며 지내는 한편 정치권과 이데올로기 진영 모두와 손을 끊었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그는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며 얻은 지위와 신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1800년 1월, 고야는 새 거주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1788년 이후로 그가 살아오던 집을 고도이가 자신의 정부인 페피타 투도에게 주려고 사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을 옮겨야만 했다. 6월에 화가는 카예 델 데센가뇨 부근 카예 발레르데 15번지의 사유지를 23만 4천 레알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주고 사들였다. 고야는 처음으로 집주인이 되었다.
궁정화가가 된 고야는 고급 매춘부, 공주, 장관, 왕을 가리지 않고 흔쾌히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1800년 4월 22일,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고도이에게 편지로 고야가 지금 그의 아내인 친촌 여백작을 그리느라 바쁘다고 전했다. 라 솔라나 여후작의 초상화와 함께 고야는 최고의 여자 초상화로 꼽히는 이 작품은 모델의 수줍은 듯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친밀감이 짙게 느껴진다. 은백색의 모슬린 드레스가 수수한 배경과 대비되어 눈에 띄고, 곱슬거리는 금발사이로 드러난온화한 얼굴에는 곧 어머니가 된다는 상징인 밀이삭을 장식했다.
이 초상화가 완성될 무렵 여백작은 남편의 방탕한 생활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왕비의 훈계에도 아랑곳없이 말없이 남편을 경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고야는 이 초상화에서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보이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역작일 것이다. 왕가의 다른 인물들의 초상화도 진행중에 있었다.
고야는 1800년 8월에 여러 인물을 담은 '카를로스 4세와 그 일가'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고야의 작업 속도로 볼 때 이 작품은 몇 개월만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왕족들이 왕과 왕비를 앞에 두고 왕궁의 접견실 벽앞에 무리지어 서 있는 전신상이다. 고야는 왼쪽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라스 메니나스'에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그려넣은 것에 비하면 고야는 훨씬 겸손해 보인다.
1800년 11월, 미술 애호가들은 고도이의 거실에서 고야의 새 그림 '나체의 마하'를 보았다. 누드화는 에스파냐 화단에서도 보기 힘들지만 고야에게는 희귀한 일이었다. 마하의 빼어난 몸매는 백밀랍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부동성이 기묘하게 애로틱이란 느낌을 준다.
모델은 알바 공작부인일 거라는 추측이 무성했지만 페피타 투토일 가능성이 크다. 이듬해 6월 이전, 고야는 왕과 왕비의 전신 초상을 각각 한점(왕비는 터번을 썼다.)씩 제작했다.그러나 말에 올라탄 카를로스 4세의 초상화는 마리아 루이사의 것보다 못했다.
고도이, 고야의 새 후원자 1801년 5월, 에스파냐는 고도이의 주도로 포루투갈을 공략해 성가를 올렸다. 고도이는 무방비 상태인 포루투갈을 나폴레옹에게 내주려 했다. 비록 자격도 없는 인물이지만 성공적인 침략으로 고도이는 월계관을 수여받고, 고야는 이 '영웅'의 초상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고도이의 개성이 이 화가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간 듯 보이는 이 작품은 다소 실망스러운 감이있다. 그가 모델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고야는 1801년-1803년 사이에 고도이의 청탁으로 그림을 몇점 더 그렸다. 그 중 고도이의 궁을 장식하기 위한 4점의 톤도도 있었다. 이 톤도들에는 공장에서의 작업 장면들이 담겨 있다. 이 시기에는 또한 고도이의 정부를 모델로 한 또 다른 작품으로 보이는 '옷입은 마하'도 그렸다.
여 후원자와 평생지기의 사망
1802년 7월 알바 공작 부인이 사망했다. 그녀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사실은 한달쯤 병을 앓고 난 뒤였다. 그녀의 묘지 설계도 중 고야가 그린 스케치 한 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몇 번의 터치만으로 여후우너자의 작은 얼굴과 감긴 눈을 인상적으로 되살려냈다.
다음해 여름, 아마도 왕과의 긴장관계를 완화 시킬 속셈으로 화가는 팔고 남은 '카프리초스'의 사본들과 그 에칭들을 왕에게 바쳤다. 그의 아들이 여행경비를 왕실에서 대준 데 대한 일종의 답례였다. 이 일을 끝으로 고야는 1808년까지 궁정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봉급을 받앗고, 사적, 공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 같다. 넉넉한 봉급에다 화료 덕분에 몇 년 사이에 그는 상당한 돈을 저축했다.
1803년에는 마드리드의 카예 데 로스 레이에스에 집을 한 채 더 장만했다. 바로 그해, 1803년에 사파테르가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 약 4년 동안, 그는 고야와 편지 왕래가 없었던 게 확실하다. 고야가 간청한 대로 그가 마드리드에서 살게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사이에 불화가 잇었던건지, 이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만한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몇 년 동안 고야는 초상화에만 매진했다. 1802-1804년 사이에 고야는 젊은이들의 빼어난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하나는 카를로스3세 친구의 아들인 24세의 젊은 백작 페르난 누녜스의 초상화였다. 전통적인 검은 망토를 두른, 후리후리하고 강렬한 용모를 지닌 이 젊은이는 멋진 모자를 쓰고 장엄한 배경을 뒤로 한채 서 있다. 여기서 고야는 양식화 된 기법과 사실주의를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거장의 재능을 또 한번 입증해보였다.
1804년에는 카바루스 집안의 친구로서 나바레 귀족 가문 출신의 세련된 인물인 산 아드리안 후작의 초상을 주문 받았다. 다리를 꼬고 있는 이 전신 초상화는 영국 화단의 영향이 엿보이는데, 이는 격식을 많이 따지는 에스파냐인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포즈였다. 솔직하고 인정스럽게 보이는 표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채색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인 이 작품 역시 빼어나다. 같은 시기, 그는 매력있는 아이의 초상 두 점을 그렸다.
클라라 데 소리아와 그녀의 남동생이 모델이었다. 고야는 사례를 넉넉하게 해주던 최초의 후원자들에게 변함없이 충실했다. 알바 가문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그림을 청탁했다. 그중 하나가 바야프랑카 후작 부인의 초상화이다. 그녀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남편을 그리느라 바쁜 포즈를 취했다. 그녀의 둥그스름한 얼굴은 미인형은 아니지만, 활기로 홍조를 띠고 있다.
여인들의 초상화
1805년 여러 여인들이 고야의 붓끝에서 영원한 인물로 남았다. 이사벨 코보스 데 포르셀은 안달루시아 민속의상을 변형한 우아한 차림에 검은 만틸라를 받쳐주는 리본을 장식한 긴 빗을 꽂고 있다. 커다랗고 영롱한 눈, 관능적인 입술, 흠잡을 때 없는 용모로 그녀는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하나로 남았다.
또 다른 여인 초상화로 호아키나의 초상이 있다. 그녀는 오수나 공작 부부의 둘째 딸로, 산타 크루스 후작의 아들과 결혼했다. 화가는 정숙하고 우아한 뮤즈처럼 긴 의자에 기댄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은 젊은 여인의 육체를 매끄럽고 탄력잇게 그렸다는 점에서 '나체의 마하'를 연상시킨다. 이는 고야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에서 보이는 시각적인 유연성의 한 전형이다. 반면에 의상은 극히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
1805년 아들 시비에르가 21살이 되다. '마드리드에서 제일 잘생긴 아이' - 아이 아버지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 가 이제 버릇없이 멋이나 내는 부유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화가라고 자칭하기를 좋아한 그는 서투른 그림을 몇 점 그렸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고도이가 신 카를로스 국립은행의 전 행장들을 쫓아내 버리긴 했지만, 고야는 계속해서 사업가와 재정가들을 만났다. 그 덕에, 새로운 행장이 외삼촌뻘 되는 구메르신다 고이코에체아와 그의 아들의 결혼을 성사 시킬 수 있었다. 이 결혼으로 고야의 아들은 일하지 않고도 이자, 배당 등의 수입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1805년 아들의 결혼을 계기로 수작 두 점이 탄생했다. 회색 옷차림의 신랑 초상화는 부드러움과 사실성이 엿보이는 역작이다. 혼례복을 입은 신부의 초상화는 인디언 인형을 연상시킨다. 신혼부부는 처음에는 고야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고야가 물려준 카예 데 로스 레이에스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집에서 1806년 고야의 손자 마리아노가 태어났다. 고야는 행복한 마음으로 그 기쁨을 기록했다. 이때 그의 나이 60이었지만, 그는 조종이 우리지 않을 것처럼 의욕적으로 삶을 대처해 나갔다.
고야의 변함없는 철학: 돈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예술의 자유는 경제적 자립 여부에 달려있다고 고야는 확신했다. 돈이야말로 고야 자신을,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온갖 정치적 격변을 목격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작업을 통해 축적한 재산과 재계와의 접촉 덕분이었다. 이같은 관계는 또한 그가 궁정이라는 제한된 세계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성장하고 있던 중산계층의 초상화 작업이 차츰 그의 일거리가 되었다.
고야가 그린 일거리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이사벨 코보스의 남편인 안토니오 포르셀(자신의 투견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박물학자 펠릭스 데 아사라, 부엔 레티로 도자기 공장장과 그의 아내, 시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놀라운 여성 초상화인 '사바나 가르시아', '카예 데 카레타스의 책방'이란 제목을 붙인 마리아 마존의 걸작 초상화, 은퇴한 투우사처럼 생긴 페드도 모카르테 등이 있다. 고야는 이 인물들을 각 개인의 개성과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어 태도나 표정, 채색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다양하게 표현해 냈다.
그러나 고야가 이 시기에 초상화만 제작했던 것은 아니다. 1806년 엘 마라가토라는 한 강도가 어떤 수도사 덕에 무기를 버리고 붙잡힌 사건이 벌어졌다. 고야가 아니었더라면 이 사건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화가는 20세기 기자가 '특종'을 써내듯, 상상력을 발휘해 이 드라마를 여섯개의 패널화로 그렸다.
이 패널들에는 용감하고 결단력있는 수도사가 강도를 무장해제시키고 체포되게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표현돼 있다. 마치 영화의 각 장면처럼 패널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재능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 할 수 있다.
1805년 10월 21일, 에스파냐 서남부 트라팔가르 곶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에게 무참이하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에스파냐 양국은 심각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에스파냐 국고 파산에 크게 기여한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배세력이 잔존하던 부르봉 왕조를 유럽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 조제프를 에스파냐 왕좌에 들어 앉혔다.
제 5장 어둠 속으로
왕의 납치
나폴레옹은 1807년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때까지 굴복하지 않던 영국이 올가미를 죄어오자, 나폴레옹은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에스파냐를 침공하기로 했다. 고도이의 귀가 얇은 페르디난드 황태자는 부친인 카를로스 4세를 퇴위시키고 고도이를 몰아내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도움을 구할 정도였다.
에스파냐 민중은 정치 상황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고도이를 몹시 증오한 탓에 나폴레옹을구세주로 여겼다. 1807년 12월 침공한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1808년 3월 뮈라(나폴레옹의 처남)가 에스파냐 주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마드리드의 왕궁은 공포에 휩싸였다. 3월 18일 한차례 폭동이 일었다. 페그디난드 왕자의 지지자들에 의한 암살 기도를 용케 모면한 고도이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왕과 고도이의 부패정권에 대한 민중위 적개심이 거세어지자, 마를로스 4세는 아들을 밀어주고 퇴의했다. 3월 23일, 새왕을 기다리던 마드리드의 어리숙한 군중은 동맹군이라고 생각한 뮈라가 들어오자 기뻐 날뛰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는 프랑수 남소부의 바욘에 유페되고, 곧이어 역시 나폴레옹의 속임수에 넘아간 페르디난드 7세도 그 뒤를 따를 판이었다. 페르디난드 7세가 에스파냐의 새왕에 즉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는 고야에게 말을 탄 그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이 초상은 고야가 그린 수많은 왕의 초상화들 중 왕이 실제로 포즈를 취한 유일한 초상화로 보인다. 페르디난드7세가 떠나야 했던 관계로 이 그림은 왕벽하게 마무리짓지 못했고, 고야가 기억을 더듬어 완결해야 했다.
1808년 4월말, 에스파냐 민중은 마침내 나폴레옹이 자유를 위한 해방군이 아니라 정복자임을 깨달았다. 마지막 부르봉 왕가가 바욘(전 왕실 가족이 1814년까지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다)으로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민중운 분노했다. 그들은 에스파냐 왕위를 차지한 나폴레옹의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증오했다.
5월2일, 마드리드에서 거센 항의가 터져나왔다. 5월3일, 뮈라와 그의 군대가 스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6년 뒤, 고야는'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3일'이란 그림에서 이 사건을 영원히 기록했다. 이 그림들은 '전쟁의 참사'시리즈와 더불어,"지금까지 예술가가 남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잔학한 행위를 고발한 곳 중 가장 통렬한"작품으로 평가받았다.
6월15일, 프랑스 병력이 맹렬히 사라고사를 공략했다. 아라곤인들은 돈 호세 데 팔라폭스 장군의 격려 속에 애국심이 크게 고양되고 있었다. 공략에 실패한 프랑스군이 마침내 8월에 퇴각하자 팔라폭스는 고야에게"시민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그릴 수 있도록 도시의 창상을 돌아보고 조사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2월에 프랑스군이 다시 돌격해 오면서 이 계획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에스파냐는 6년에 걸쳐 정치. 군사적 혼란 속에 고투했다. 절대 댜수의 에스파냐 국민의 프랑스 점령군과 점령군과 맞서 맹렬한 유격전을 펼치는 애국심을 발휘했다. 귀족과 자유주의자들의 충절은 그보다는혼란스러웠다. 어떤 이들(플로리다. 불랑타, 사베드라, 호베야노스)은 자유 민족주의적 신정권을 선택했다. 어떤 이들(모라틴, 이리아르테, 카바루스)은 나폴레옹의 동생 조제프 주위로 모여들었다.
'침략군 왕'을 지지하는 이 사람들은 '아프란세사도스'(친불주위자들)로 불렸다. 노령으로 넘아가던 고야는 친구와 후원자들이 분열되자 고민스러웠겟지만 1810년부터 애국자들의 편에 섰다. 영국과 에스파냐, 프랑스군이 죽음과 기아를 양산하며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던 이 전쟁 기간 동안, 고야는 대형 캔버스 연작을 제작하느 데 노쇠한 힘을 끌어모았다.
'발코니의 마하들''젊은 여인들''늙은 여인들''대장간''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등이 풍속화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다져준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양식과 기법상 한 세기를 앞서 있다. 이 그림들에서 보이는 형식의 자유로움은 그것들이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야의 일반 고객들은 새로운 계획을 밀어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고야자신이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해 그렸다.
1810년, 전쟁의 참사에 질린 고야는 또 다른 에칭 연작물은 제작했다. 총칭해서'전쟁의 참사'로 불리는, 고대 서사시와 같은 이 판화들은 전시의 공포와 무고한 희생자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폭로했다. 고야를 특히흥분시켰던 것은 집단의 고통보다 개인의 고통이다.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서 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저항했다. 격한 분노가 격한 예술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한 장면 장면 넘아 갈 때마다 그는 동일한 테마로 되돌아가곤 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명암법과 정서는 다시금 렘브란트와 그를 비교하게 만든다. 이 시기에 그린 두 점의 그림-'시에라 타르디엔타(아라곤의 산악지역)에서의 화약 제조'와 '탄환 만들기'-은 둘 다 기법이 뛰어나고 전투장면을 담고 있다.
1812년 6월, 고야의 부인이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남편과 아들 몫으로 나눈 그려의 재산목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고야와 사파테르의 서신 왕래가 끊어진 이후로 이 화가의 가정생황에 관한 정보를 주는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야의 재산은 36만 레알로 평가된다.
1812년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된 해였다. 영국의 장성 아서 웰즐리(훗날 웰링턴 공작이 된다)는 나폴레옹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위업을 달성하는 틈을 이용해 포르트갈, 에스파냐군과 연합을 형성했다. 1813년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 치하에서도 여전히 수석 궁정화가였던 고야(장차 페그디난드 7세 치하에서도 이 자리를 고수한다)는 에스파냐의 해방자를 그리라는 주문을 받았다. 아서 웰줄 리가 포즈를 취하기 위해 화가의 화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간의 반감의 엄마나 컸던지 이 영국 장성의 초상은 풍자화에 가까울 정도-두터운 턱에다 초점잃은 눈까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자기 작품에 만족한 화가와 격분한 저명한 모델 간에 격한 언쟁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1812년 코르테스(에스파냐 의회)가 재구성되고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강경한 자유주의 헌법이 작성되었다. 코르테스는 조제프와 프랑스군이 철수한 1813-1814년 마드리드에 자리를 잡았다. 고야는 '1812년 헌법을 비유함'을 그려 자유주의자들과 일맥상통하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이상을 자발적으로 공언했다.
그들 모두가 바란 것은 입헌정 위에 왕정이 복귀하는 형식이었지만, 1814년 다시 왕좌로 돌아온 페그디난드7세는 오직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정착만을 꿈꾸었다. 1814년 2월 24일, 고야는 "유럽의 압제에 맞서 찬열히 봉기한 우리 동포의 저 유명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나의 붓으로 기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관청에 요청했다. 이요청이 받아들여져 고야는 1808년 5월에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추도식에서 공개되어 전 에스파냐 국민을 민죽주의의 열기로 단결되켰다.
1937년 에스파냐 내전의 만행을 묘사한 유명한 그림'게르나카'에서 피카소가 그랬듯이, 고야는 서술하는 양식을 피했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둣, 전쟁의 만행에 희생된 자들의 원을 풀어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무장하고, 억압받는 인간성의 저항의 외침을 붓을 매개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없엇더라면 결코 그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일개 에피소드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1814년 5월13일, 1812년 헌법을 폐지한 페르디난드7세는 마드리드로 입성해 의회를 해산하고 자유주의 대표들을 구금했다. 독재, 반계몽주의, 인권박탈-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신성한 이성'은 그야말로 죽어버렸다. 왕권의 축소를 원한다는 이유로 자유주의자와 '아프란세사도스'를 박해하는 구태의연한 전제군주가 내놓은 멍청한 정책들이 전쟁으로 무참하게 파괴된 나라에 질서를 부여 해줄리 없었다. 고야의 걸작들은 서둘러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로 숨겨졌고, 1833년 왕이 사망하는 날까지 그곳에 보관되었다.
에스파냐는 황페했고 페르디난드 7세는 돈이 부족했다. 왕은 재계의 협조가 필요했다. 고야는 여전히 재계와 유대를 다져오고 있었다. 프랑스군 점령기 동안 왕실 내부인들의 행적에 대한 심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고야는 부엌자란 의혹을 깨끗이 벗을 수 있었다.
페르디난드 7세는 계속 이 화가를 적대시했지만 조용히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괴로운 기간 동안에 그는 '말을 탄 동 호세 데 팔라폭스 장군 초상'이라는 수작을 그렸다.
1815년, 3월 30일, 고관들의 집합체인 '왕실 필리핀 회사'는 왕의 주재로 특벽 회의를 열고 왕에게 막대한 돈을 대부해 주기로 결정했다. 에스파냐 재계의 연례행사 중에서도 유례없는 행사가 된 이회의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이 고야에게 떨어졌다.
그 결과 에스파냐 화단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그림 중 하나가 탄생했다. 의례적일 수밖에 없는 이 주제를 고야는 철저하게 느긋한 태도로 다루었다. 궁전의 장엄한 배경속에 인물들을 배치했는데, 수도상 여백과 광선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이 회의를 기화로 고야는 세 명의 영향력 있는 회원들-마구엘 데 라르디사발, 이그나시오 오물리안, 호세 무냐리스-의 초상화를 조화로운 단색 톤으로 그렸다.) 일흔에 가까워진 고야는 1815년 유명한 상반신 자화상을 그렸다. 세월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모습이다.
그는 젊은 날의 호전적인 기상을 전혀 잃지 않았다. 이제 곧 그는 국가적 기예인 투우 장면을 담은 연작-1816년의 에칭'타우로마키아'-을 낳을 것이다. 같은 해'카프리초스' 판매전이 재차 열렸다. 이번에는 고야의 오랜 후원자인 오수나 공작부부의 자녀들을 그릴 차례였다. 아브란테스 여공작은 꽃을 치창한 모습으로, 그녀의 오빠인 오수나 공작 10세는 여유 있는 포즈를 취했다.
1817년, 세비야 대성당에 장식할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그림을 걸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세비야까지 가서 '거리와 조명 및 관람 지점을 점검하고' 난 다음에야-그가 원근과 구도에 대해 끈질기고도 꼼꼼하게 신경쓴 사람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대여섯 장의 예비 밑그림을 그렸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어 1818년 1월 '성자 주스타와 루피나'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대했던 종교화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후원자인 세 비야의 두 성자의 모습이 토실토실하고 풍만한 마하처럼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듬해 고야는 전원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불가사의한 우연의 일치지만, 이미 전부터 '킨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로 알려졌던 집이다. 이집은 마드리드에서 만사나레스강을 건너 산이시드로 초지 쪽에 위치해 있었다.
종교화의 걸작 같은 해8 월, 마드리드의 에스쿠엘레스 피아스 교회에 장식할 '칼라산스의 성 호세의 마지막 성찬식'을 그리게 된 이 화가는 사실성과 타당성을 결합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심오한 종교적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주제였으므로 매력을 느낀것이 당연했다.
그는 이 주제를 17세기 종교화의 신비적 전통을 따르면서도 대단히 날카롭게 묘사했다. 작업의 대가로 1만6천 레알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과 동향인인 칼라사스의 성 호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6800레알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이그림에다 자신의 뛰어난 걸작 '올리브 정원의 예수'(1819)도 곁들여 제공했다.
'블랙 페인팅'
아마도 국제 프리메이슨단의 주의에 자극을 받은 듯, 에스파냐에서도 헌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이 다시 일었다. 1820년 페르디난드 7세는 자신의 통치력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에스파냐 헌법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1822년 8월에 베로나 회의가 폐막된 후 프랑스는 에스파냐에서 국왕전제주의를 지원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823년 여름, 입헌파 군대는 철저하게 패배하고 다시 권좌를 움켜쥔 왕은 복수의 의지를 다졌다. 이렇게 해서 1820년대 초, 고야는 격렬한 반항심과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그는 유럽의 혁명, 외국의 침략, 내전의 결과들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집 담에다 고발하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연구에 따르면 고야는 이미 집담을 광대한 풍경화로 장식해 놓았다고 하는데, 이제 그 위에다 블랙 페인팅(핀투라스 네그라스)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덮어 씌웠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난생 처음 고야는 정치적 이유로 에스파냐를 떠나고 싶었다.
1823년 고야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친구 돈 호세 두아소의 집으로 피신했다. 귀머거리의 집 소유권을 17세의 손자에세 넘겨주고 난 뒤였다. 1824년 5월 그는 프랑스 해안에서 해수욕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의 친구들인 '아프란세사도스'가 많이 사는 보르도에 정착살 생각이었다.
6월24일, 그는 보르도에 도착해 옛 친구 레안드로 모라틴의 황영을 받았다. 모라틴은 그를"귀먹고 늙고 가냘프고 허약하며 불어는 한마디도 몰랐지만, 세상을 보게 돼서 무척 기뻐하고 열심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곧장 길을 떠나 1824년 6월 30일 파리에 도착했다. 자신의 천재성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고 있지도 않은 파리에 여행객으로 간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거기 머무는 동안 그는 투우 장면을 담은 그림과 그의 아내의 뛰어난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9월에 그는 보르도로 돌아가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그녀의 딸을 만났다. 그는 석판화라는 신 기법을 배우려고 애쓰며 '인쇄공 골롱의 초상'과 '보르도의 황소들'이라는 유명한 판화 4점을 제작했다. 여기에서 그는 형태와 색채의 지극히 본래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크레용과 면도기, 스크레이퍼(긁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듬해 그는 6개월간 체류기간을 연장했다. 이번에도 늙은 모라틴의 평화로운 일상에 끼여들면서 "도시와 들과 기후와 음식, 보르도에서 찾은 독립감과 평정감을 즐겼다." 모라틴은"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는 자신의 베레모와 망토와 말 등자와 장화와 배낭을 챙겨가지고 노새를 타고 달아나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월 고야는 심하레 앓았다. 의사들은 방광이 마비되고 회음부에 큰 종양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그런데도 그는 회복되었고 서둘러 작업을 재개해서 상아 위에다 40여 점에 이르는 세밀화를 '전혀 수정하지 않고' 빠르게 제작해 냈다. 그는 외유를 연장해줄 것- 이번에는 1년 기한으로-을 에스파냐 정부에 신청했다.
그러나 1826년 프랑스에 싫증이 난 그는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고야는 자신의 봉급과 같은 금액인 5만 레알의 연금을 받고 은퇴할수 있게 해 달라고 궁정을 설득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되돌아가도 좋다는 허락도 받아냈다.
다시 보르도로 온 그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 주던 은행가 산티아고 갈로스의 초상화를 그렸다. 1827년 5월에는 자신의 며느리의 친척인 사업가 후안 바우티스타 무기로를 그렸다. 이 작품은 현대적인 감각과 살아 숨쉬는 듯한 육체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놀라운 그림이다.
1827년 여름, 그는 마지막 마드리드 여행을 한다. 그곳에서 이제는 의젓한 청년이 된 사랑하는 손자 마히아노(실제로 이손자는 싸움을 좋아하고 전혀 교육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룰 그렸다. 1827년에 다시 보르도로 돌아온 그는 최후의 걸작들을 탄생시킨다.
전 마드리드 시장인 돈 호세 피오 데 몰리나의 초상과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우유 판느 보르도 여인'이 그것이다. '우유 파는 보르도 여인'에서는 잘생긴 늙은 마놀라의 여동생의 모습을 산뜻하게 잡아냈다. "나에겐 시력도 힘도 펜도 잉크 스탠드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없다 해도 내 의지력만은 남아 있다"
1828년 1월 고야는 예의 그 몸에 밴 에너지와 능률을 발휘해, 가족과 함께 파리를 거쳐 그를 찾아가기로 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겨울 끝 무렵, 그는 또 다는 병에 걸려 고생했지만, 당시로선 큰 액수인 4만 5천 레알을 마리아노의 이름으로 된 구좌에 넘기는 일을 의논할 정도로 충분이 회복되어 있었다.
"난 침상에 있다, 다시 병이 났어."4월 초, 그는 사비에르에게 이렇게 썼다. 4년 전 그는 아들에게 자신은 타이탄처럼 99세까지 살 거라고 속 편하게 말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짜여 있지 않았다. 1828년 4월 16일 고야는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기록과 증언
고야와 비평가들
고야의 천재성이 에스파냐의 국경을 넘어 널리 인정받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위대한 에스파냐 화가로 알려진 이는 고전파 벨라스케스였지, 진기한 이국풍의 고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의 다음 비평가들이 증명하듯, 고야의 찬란한 환상의 세계는 결국 주목을 받는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1857년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사를 피에르 보들레르(1821-1867)는 《르프레장》지를 통해 고야의 대의를 지지하고 장차 고야의 평판에 주요소가 될 부분을 강조했다. 환상과 공포에 대한 고야의 관심이 그것이었다.
고야는 언제 봐도 위대한, 가끔은 무섭기까지 한 화가이다. 고야는 세르반테스 시대에 절정에 달했던 유괘하고도 익살맞은 에스파냐의 풍자정신을 바탕으로 그 위에 대단히 현대적인 요소, 즉 현대로 넘어와서야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한 특성을 추가했다.
그것은 설명할 수없는 것에 대한 사랑,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것들에 대한 느낌. 그리고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 짐승 같은 성질을 가지게 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느낌이다. 이 같은 정신이 18세기의 비평 및 풍자 운동에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아마 볼테르라면, 수도승들을 다룬 고야의 온갖 풍자들에 깃들인 사상을 무척 고마워했을 것이다....하품하는 수도승들,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수도승들, 아침 기도를 준비하는 고집 세고 잔인해 보이는 무시무시한 수도승들,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엄큼하고 사기성 짙은 두뇌를 가진 수도승들, 마치 육식성 조류를 소개하는 것 같다.
이렇게 수도승을 혐오하는 사람이 마녀나, 마귀들의 잔치, 악마들의 장난짓거리, 꼬치구이로 요리되는 아이들, 그밖에 나로선 알 수도 없는 것들을 그렇게 빈번히 꿈꿨다는 게 신기하다. 꿈의 세계에서 아단스레 펼쳐지는 온갖 주연들, 환영 속 이미지들의 온갖 과장된 표현들, 이에 덧붙여서, 저 호리호리하고 하얀 에스파냐 소녀들, 늙은 마귀 할멈들이 마녀 집회나 저녁에 벌어질 매춘 행각에 쓰려고 이 소녀들을 씻고 있다-문명의 휴식일에! 이 모든 기괴한 공포 속에서 빛과 어둠, 이성과 불합리가 서로 맞서며 상연된다.
그 얼마나 비범한 회국적 감각인가! 나로선 특히 놀라운 두 점의 판화가 떠오른다. 그중 하나는 바위와 구름이 뒤섞인 환상적인 풍정이다. 황페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험준한 산맥의 어느한 귀퉁이일까? 아니면 먼 옛날 혼돈의 한 구석? 몹시 역겨운 무대 중앙에서 공중을 휙휙 나는 두 마녀들 산에 격력한 전투가 벌어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고 때려댄다. 이 두 괴물이 어두운 공중에 나다닌다. 상상할 수 있는 추함의 극치, 최악의 도덕적 타락, 온잦 사악함들이, 반수반인으로 보이는 두 괴물의 얼굴에 씌어 있다. 이런 모습은 고야에게선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판화에서는 불운한 존재-고독하고 절망적인 한 인간이 무덤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보인다. 해악한 악마들, 수백명의 지긋지긋한 소인국의 늙은 난쟁이들이 힘을 합쳐 반쯤 열린 무덤의 뚜껑을 닫으려 한다. 죽음의 파수꾼들은 반항하는 이 영혼에 대항애 힘을 모으고, 그는 승산 없는 투쟁에서 지쳐간다.
이 악몽 같은 장면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지만 철저히 공포스러운 배경하에 상연된다. 말년의 고야는 시력이 약해져서 연필을 깎아주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대단히 중요한 대형 석판화들을 제작했다. 그중에는 수많은 인물들로 가득 찬 투우 장면도 있다.
이 판화들이야말로 위대한 화가들의 운명을 지배하면서, 그들으 생명은 그들의 지성에 반비례할 것임을 천명하는 확고부동한 법칙이 있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 준다. 그들은 한편에서 잃은 것을 다른 평에서 얻으며, 항시 더 젊어지고, 힘과 정력과 과단성 있게 살다가 마침내 무덤가에 도달한다.
대소동과 혼란이 지배하는 이 석판화들 중 한 점의 앞면에는 발광한 황소 한 마리-죽은 자를 난폭하게 공격하는 앙심품은 짐승 가운데 하나-가 한 격투사의 바지 엉덩이를 찢어 놓았다. 그는 죽지는 않고 부상만 입었는데, 무릎으로 기어가며 힘겹게 몸을 끌어당긴다. 이미 셔츠를 뿔로 갈가리 찢어 등을 다 드러나게 한 이 가공할 짐승은 다시 위협적인 자세로 머리를 낮춘다. 그래도 군중은 이 뻔한 살육 앞에서 그다지 동요가 없다.
고야의 주요 장점은 기괴한 것을 신뢰할만하게 창조했다는 데 있다. 그의 괴물은 생생하고 균형도 잘 잡혀 있다. 괴기스런 실체를 창조하는 데 고야보다 과감하고 깊이 있게 나아간이는 없었다. 이모든 뒤틀림, 짐승 같은 얼굴, 악마 같은 찌푸린상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자연의 역사라는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빈틈없이 짜여져 주의 깊게 전체 속에 통합된 그것들에서 흠을 찾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현실과 환상이 어느 지점에서 엮여 결합되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현실과 환상이 어느 지점에서 엮여 결합되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그둘 사이의 경계가 너무도 능란하게 교차되어 정교한 분석으로도 그 경계를 추적할 수 없다. 그뒤에 숨은 예술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르 프레장', 1857년)
프로스페 메리메
고야는 매사에 비판을 받았다. 드로잉은 "기술적 역량이 결핍되었다."고, 채색은 "실제와 전혀 다르다"고, 그리고 일반적인 얘기로 주제는 "병적 상태와 극단에 대한 낭만적 취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많은 것들을 제대로 고찰하지 못한 채 환상을 펼쳤다."고 하는 비평가를 받았다. 에스파냐통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 메리메(1803-1870)도 그런 맥락에서 고야의 환상에 대해 철저히 반감을 표시했다.
당신이 고야를 존경한다면 나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가 노란 슈미즈와 속이 비치는 드레스 차림으로 묘사했던 알바 공작부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과 에칭에 관한 한 나는 눈곱만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벨라스케스를 모방한 그의 판화들이 원화들을 떠오르게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참사'를 두고 어떻게 미학적으로 만족하겠습니까? 그 자신 애호가로서 투우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황소조차 제대로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반 미친 상태에서 동판에 새긴 '카프리초스'는 그래도 꽤 대단한 상상력과 유머 감각을 보여줍니다.
내가 혐오하는 것은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그림 기법입니다. 전통적인 룰을 깨고 일상적인 실재들에 뛰어들고 싶으면 최소한 자연을 모사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야는 물감만 팔레트에 짜부으려 들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련의 색조들을 찾아내면 그것이 그림의 종말이었습니다.
물감 방울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그것으로 형태를 만들고자 애쓰지 않았도라면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당신은 라스델리시아스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그곳은 오수나 공작이 친척인 베니벤테 여공작에게 물려받은 시골집입니다. 그곳에 고야는 '카프리초스'양식을 본따 마법의 세계를 다룬 실물 크기의 연작들을 그려놓았답니다.
마녀가 염소로 변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실주의자가 되려면 벨라스케스를 좇거나 사물을 온전히 두어야 할 겁니다. (프로스페 메리메, 콜로나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1869년 5월16일)
앙드레 말로
1950년 앙드레 말로(1901-1976)는 "서구의 가장 극단적인 정신적 탐색 중의 하나와 씨름해 본다"는 목표를 표방하며, 고야를 주제로 한 에세이'사투르누스'를 썼다. 이 에세이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 노화가가 프랑스를 떠돌아다니며 귀먹고 병들고 맹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예술에 헌신했던 사실을 다루고 있다.
신의 뜻으로 석판화를 만나면서(시력의 약화로 더 이상 동판 작업을 할 수 없었다)그의 데생도 변했다. 하지만 그의 판화는 급격한 변화의 영향을 입지 않았다. 색채 반점들은 더 흐릿해지고 강약 표현은 날카로움을 잃어갔다. 그는 이탈리아풍의 지나친 정교한-지금의 신고전주의-을 멀리하지만 석판화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 그렇듯이 돌 앞에서 그의 양식은 머뭇거렸다...그의 에칭은 판화일 뿐이었다.
마찬가지고 그의 콤퍼지션과 초상화들도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데생들은 불안정하고 다소 구겨진, 그리고 종종 그가 티에폴로의 기법을 도입한 판화들에서처럼 색상이 가볍게 느껴지는서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청년기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이 현상은 그가 검정뿐 아니라 흰색도 석판화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발견하는 그날까지 계속됐다. 그전에 에칭을 제작하면서도 그는 그런 발견을 한 적이 있었다. 보르도에 와서, 자신이 그린 괴물들을 받아들일수 없었던 그는 그것들을 다시 그렸다.
그러나 망설임이 엿보이는 데생에서는 괴물들도 늙어버렸다.…'카프리초스'의 어둠을 도구로 했듯이 그는 그것과 디시 부딪혔다. 먼저 석판 전체에 회색을 펴바르고 그중 흰 반점들을 스크레이퍼로 긁어냄으로써, 검정을, 기초를, 그
토록 열망하는 그 선을 되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색채의 액센트였다.
그는 석판을 마치 캔버스처럼 이젤 위에 세웠다. 그는 연필을 뽀족하게 깎아 사용하는 대신 붓처럼 사용했다. 그는 거리를 두고 보아야만 제대로 보이는 평온한 통일의 효과를 얻기위해 애썼다. 그것은 그가 그림에서 추구했던 효과지만, 장차 그 누구도 석판에 디고 요구하지는 않을 효과였다.
그는 확대경을 사용해 가면서 마무리를 했는데, 이는 디테일을 도 잘 다듬기 위해서- 그는 그런 일을 싫어했다-가 아니라 시력이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뾰족한 연필을 들고 데생을 했던 그 망설이던 손, 그것은 노쇠한 대가의 휘갈김이 된다. 이제 괴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휘갈김이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변함없는 또 다른 열정, 허깨비들 이전에 그가 알고 있었던, 허깨비들이 제압하지 못했던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고뇌의 회침 속에서도 그는 숨죽여 나오는 피의 징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잠자던 전쟁의 아우성의 메아리, 그가 남겨두고 온 에스파냐-황소-의 노쇠한 또 한번의 메아리였다. 앞서 그는 여러 장면들에 40점의 판화를 바친 바 있었다.'타우로마키아'는 멋진 컬렉션이었다. 천재성이 쇠잔해 가는 듯, 반복이 뚜렷한데도 구도 하나하나가 다시 그 장중한 양식을 되찾았다. 모든 투우마다 곡예(위험한 요소도 있지만 곡예사도 때때로 죽게 된다)에서 오는 구경거리와 피의 성찬이 뒤섞여 있다.
고야는 구경거리에서 성찬 의식으로, 애호가의 유희에서 제물 의식으로 나아갔다. 공상적인 검정색은 죽음의 일환이었다. 판화의 주제가 어떤 것이든 황소는 언제나 황소였다. 개들과 기마 투우사들과 반데리예로(소에게 창을 찌르는 역을 맡은 투우사)에게 위협을 받고 창을 들이대고 황소는 부동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 부동성이야말로 고야가 황소에게 그토록 강력하게 부여했던 것, 그가 살육자에게 스스로를 내던지던 것이었다-쉽게 굽히지 않는 뿔에 받쳐 내장이 튀어나온 말들이나 죽은 사내들은 이어지는 판화 속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될 것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로스 토로스'의 예술에서, 죽음과 경기와 세상의 어두운 측면의 결합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이 무엇이었던가! 투우, 그 의상들, 그 희생은 그의 눈엔 피로 물든 카니발이었다.
그것은 아라곤 산등성이 위로 펼쳐진 하늘을 배경으로 자주 보일 것이었다. 마치 미노타우로스(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괴물)가 시간이 흐린 후 크레타섬 돌출부 경사면 앞으로 솟아올랐던 것처럼. 그러나 이젠 황소들조차도 동판에서 보여주었던 그 근육질의 청동색 광택을 잃어버렸다.
고야는 자신의 그림들에서 발견되던 그 광채를 암중모색했다. 그는 아직도 저 날카로운 빛, 그 석에서 죽음에 접근함으로써 삶에 지친, 그러나 그림에는 지치지 않은, 그러다 마침내 자신들을 위해 인류와 그림에서 등을 돌렸던 노장들, 티치아노, 할스, 렘브란트,미켈란젤로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그 빛속에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늙어가지만 그들의 그림들은 그렇지 않다. '수녀'와'수도승'은 그의 마지막 초상화 작업물이다. 흘린 둣한 외로움, 이제 영원에 의해서도 흘려버릴 욀움에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청각장애가 더해졌다. 그의 데생들은 지쳐 있었다. 그는 데생 양식을 바꾸어, 긁어낸 석판의 순결에 맞먹는 등가물을 구아슈에서 찾아야만 했다.
그는 파리를 경험했고, '스키오의 대학살'을 보았다. 그리곤 무시해 버렸다. 그는 해골과 도마뱀과 뱀을 부리는 사람과 바보 천치를 그렸다. 그리곤 다시 날아다니는 개들과 꾸물대는 악마 서넛을 그렸다. 에스파냐, 만일 그가 그리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상상 속에 그 나라가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남지 못해쓸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던 그 에스파냐는 그에게서 멀리 있었다. 그런데도 오직 에스파냐만이 변함없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림의 왕 외에 또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몇몇 화가들뿐이었다.
때로는 현대적이고 때로는 민족주의적이었던, 그러나 결코 이국적인 적은 없었던 그의 작품 속에 깃들인에스파냐적 요소가 오직 에스파냐인들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틸라나 수도승들, 그의 고뇌들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눈에는 공상에 가까운 연극 정도로 비쳤다.
파리에서 볼 때 가로트(에스파냐식 교수대)에 죽는 사람은 비현실적이었다. 기요틴(프랑ㅅ의 단두대)에 죽는 장면은 그렇게 안 보였을 것이다. 런던에서 볼 때 '수도승의 방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름아닌 수도승이었다. 마드리드에서 그것은 정의를 요구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에서 온 늙은 유령, 소리내지 않는 부동성으로 인간사의 모든 소란과 심지어는 먼 바다의 굉음까지도 잠재우눈 유령이었다.
그는 새로운'카프리초스'를 구상했고 '전보다 나은 아이디어'도 있었다. 이제 그의 단조로워진 양식은 '정원에서의 고뇌'에서 보이는 형식주의와 '칼라산스의 성 호세의 마지막 성찬식' '신생아들을 위한 미사'에서 보이는 성직자에 대한 두터운 비호를 분쇄해 보린다.
어떤 영상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일련의 그림들, 빛을 목표로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식,-훗날 프랑스 화가 몽티셀리는 이 양식에 대한 가녀린 슬픔의 메아리 같은 해답을 찾으려고 애쓴다-그것은 그의 망설임의 데생에서 출현한 것이다. 까마귀들을 타고 하늘을 가로질렀던 황소들, 후기의'본질족으로 다른 것들의 한 장면인 비속에서 추락했던 황소들이, 비록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마지막'투우'의 서사적 환각에서 재등장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들으 수 없는 세계를 보려 들지 않았다. 자신의 스케치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강건한 '물 나르는 사람'이'우유 파는 보르도 여인'로 변한다.(여기서 말년의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떨리는 손을 보게 된다.) …'이 좋은 밤에…'그와 같은 밤, 청각장애 때문에, 발렌시아 초콜릿 제조업자의 집에서 그 지인들이 모여 한가하게 나누던 잡담을 피하려고 시장을 비롯하여 여기저기를 쏘다니곤했던 늙은 망명자는, 절대자를 끝없이 열망하면서도 지금까지 예술이 알아온 그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려고 여전히 애썼다.
그가 반쯤 실명된 상태에서 '잠자는 거인'을 그렸던 그때도 아마 그와 같은 어느 날 밤이었으리라. 그는 결코 그치지 않는 고뇌로부터, 그리고 나면 그를 휩싸는 악마들의 어두운 외침을 넘어 그것을 기억해 냈고, 근심스럽게 별들 사이에서 꿈꾸는 얼굴의 또 다른 '거인'을 포착해 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회화가 시작되었다.
(앙드레 말로,'사투르누스:고야에 관한 소론', 1957년)
고야와 카를로스 4세 일가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테오필 고티에(1811∼1872)가 고야의 집단 초상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두고 "복권이 당첨돼 부자가 된 거리 모퉁이의 빵가게 주인과 그의 아내"로 묘사한 이래, 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던 학자, 미술학도, 일반 방문객들은 고야의 왕실 후원자들이 그처럼 품격 떨어지는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자문하곤 했다.
초상화, 특히 공식 초상화는 최소한 기념물이다. 화가는 자신의 모델을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그리고 신체적 특징의 단순한 합산 이상의 것으로 미화시켜 보여준다.
그러나 고야는 초상화에서 그 신비하고 형이상학적인 속성들을 박탈해 버린 최초의 화가였다. 그의 시대 이후로 초상화는 19세기의 정신적 격변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영향받은 장르였다. 그것은 예전의 그힘과 인기를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와 같이 지독하게 비타협적인 사실주의 초상화가를 어떻게 해서 그 모델들이 받아들였을까? 이 화가의 특이한 위치 또한 의문이다.
그는 그의 모델들 뒤에 서 있다. 고야가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를 구도상의 원형으로 어설프게 활용한 의미를 먼저 고려해야만 한다. 두 그림의 전체 구조를 일견해 보자. 두 그림 다 화면 왼편 약간 기울어진 캔버스 뒤에 화가가 서 있다. 뒤쪽 벽에 걸린 대형 캔버스 두점이 배경을 막고 있는 것도 똑같다.
화려한 의상의 인물(벨라스케스는 왕녀, 고야는 마라아 루이사)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이 대단히 느슨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중심 인물이 고개를 약간 돌린 채로 그림 밖을 똑바로 응시라고 있는 것도… '라스 메니나스'는 그림의 주제와 구도상의 핵심이 전면에 있는 사람들 뒤에 걸린 거울-왕녀의 부모가 비치고 있다-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안전하다.
벨라스케스의 고집스런 눈길, 왕녀, 그리고 배경의 시종이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주는데, 이 긴장감은 그림 바깥의 어딘가에 서 있는 왕과 왕비에 의해 해소된다. 만일, 주요 인물들이 주목하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그 거울이 없었더라면,'라스메니나스'는 설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야의 그림에서도 인물 대부분이 그림 바깥의 어떤 물체를 향햐고 있다. 실제로, 기이하게 생긴 왕의 누이 마리아 호세파는 호기심에 일부러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그 물체를 우리는 결국 찾아내지 못한다.
자기 그림의 기초를 '라스 메니나스'에 두기 위해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야는'라스 메니나스'를 의미 있게 만들어중 그 한 가지 요소를 보류했다. 거울과 내막을 설명해 주는 것을 그는 넣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카를로스4세 일가'에 핵심적인 요소가 부재한다는 것 어쩌면 그 부재야말로 고의로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야 자신이 냉소적으로 숨겨둔 거울을 찾아 우리가 안달하게끔 만들기 위해 말이다.
결국 '라수 메니나스'를 어설프게 참고한 것처럼 보이는 그 자체도 그가 의도한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거울을 찾아내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고야의 그림도 의문이 풀릴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려진 집단 초상화 가운데 가장 난해한 그림의 하나에 해답을 줄 거라고-기대하며 그것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거울이란 착상을……이 왕실 일가의 초상화에 옮겨 놓는다면, '카를로스 4세 일가'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먼저, 고야가 인물들을 정면에서 직접 바라보며 그린것-그가 주제들 뒤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방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그들을 그리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야의 위치를 이해할수 있다. 고야가 벨라스케스를 도용한게 아닌가 하는 난처한 문제도 해결된다. 거울이 있긴 있지만 그림 속에 있지 않다.
거울이 바로 그림인 것이다. 이처럼 아첨과는 거리가 먼 그림이 용인된 것과 관련한 최초의 의문은 이제 그렇게 불가해하지만은 않다.그 이유는 그가 설치한 그 난해한 상황에 달려 있으며, 이 상황은 그가 자화상들을 그릴 때 이용하던 것과 같은 수단에서 파생되었다.
고야는 인물을 그릴 때 자신이 본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본 대로 표현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도저히 왜곡할 수 없는 증거를 기록한다. 거울에 비친 냉혹한 사실은 모델들도 목격했다.. 고야의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위태위태하다. 우선 왕은 왕이면 위당 취해야 할 태도가 뭔지를 모르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살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를 모른다. 그림 속의 아이들만이 억지로 기만적이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자기들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프레드 리치, '고야:미술의 현대적 경향의 기원',1980년)
고야와 '타우로마키아'
에스파냐 독립전쟁은 에스파냐를 피에 굶주린 투우에 탐닉하는, 야만과 미신과 마술에 사로잡힌 나라로 보았던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여기 실린 삽화들은 고야가 그린 투우 장면들이고 설명은 프로스페 메리메가 쓴 것이다.
우리에 있을 때부터 잔뜩 약이 오른 황소가 돌진해 나온다. 대개 그놈은 경기장 한가운데까지 단숨에 달려가 자신을 둘러싼 함성과 광경에 졸라 잠시 멈춰 선다. 목에는 가죽을 뚫고 꿰놓은 리본 매듭이 걸려 있다. 이 리본의 색으로 혈통을 표시하는데, 노련한 애호가들은 리본을 보지 않고도 그놈의 혈통과 출신지까지 안다.
'쿨로'들이 접근해 화려한 망토를 흔들어대며 황소를 '피카도르'중 한 놈이면 주저하지 않고 피카도르에게 달려든다. 겨드랑이에 창을 끼운 피카드르는 타고 있던 말을 바짝 끌어안은 다음 황소 정면에 정확하게 나선다. 그놈이 고개를 낮추는 순간 공격해 목에 창을 꽂아야 한다. 다른 부위는 안 된다. 대응 자세를 갖춘 황소는 제 힘에 밀려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 다음으로 쿨로들이 할 일은 피카들가 한쪽으로 비켜설 시간을 벌도록 황소를 교란하는 것이지만, 이 동물들은 누가 자신의 진짜 적딘지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녀석은 사납게 몸을 흔들어대며 말을 향해 돌진해 말의 복부에 뿔을 박음으로써 말과 기수를 전복시킨다. 기수는 쿨로들이 즉각 구조한다.
일부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다른 쿨로들은 황소의 눈앞에서 망토를 흔들어 자신들 쪽으로 유인한 다음 재빨리 울타리로 뛰어올라 피신한다. 에스파냐 황소들은 말만큼이나 빠르다. 그래서 울카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쿨로는 도망가기가 힘들다.
기수도 쿨로의 민첩성 여부에 자기 목숨이 달려 있어서 감히 경기장 한가운데까지 나서는 일은 흔치 않다. 만일 그럴 경우에는 그는 특별하게 용감한 묘기자로 통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피카도르는 말이 일어나면 다시 말에 오른다.
불쌍한 말은 피를 쏟고 꼬리가 땅에 끌리고 다리가 얽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한 황소와 대며히야 한다. 말이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면 파카도르는 경기장에서 나가 즉각 새 말을 타고 돌아온다. 말과 충돌한데다 제 힘에 부치기도 하고, 급정거하는 과정에서 뒷다리 무릎에 충격을 받아 황소는 급작스럽게 지친다.
창에 찔린 상처의 고통이 녀석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경우도 자주 있다. 마침내 녀석은 과감하게 막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는다. 혹은 전문용어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이때쯤이면 원기 좋은 황소는 이미 4∼5마리의 말을 죽인 후이다.
피카도르들은 휴식을 취하고 그사이 반데리야를 박으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반데리야란 길이가 70센티미터 남짓한, 긴 종이 조각들을 만 막대로서 뾰족한 끝이 갈고리 모양이다.
그래서 한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는다. 쿨로들은 이 투창을 한 손에 하나씩 잡는다. 이 창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몰래 황소 뒤로 가소 갑자기 창 두 개를 부딪힌다. 그러면 놀란 황소가 즉각 몸을 돌려 공격해 온다. 황소가 고개를 낮추고 쿨로 앞에 온 순간, 쿨로는 양손에 들고 있던 반데리야를 황소 목 양쪽에 일격에 박아 넣는다.
이 동자은 그가 황소와 정확히 정면을 마주하여 소의 양 뿔 중간에 서는 순간에만 가능하다. 그런 다음 쿨로는 안 켠으로 빠져나와 황소가 지나쳐가게 두고 안전지대로 피한다. 정신을 팔거나 주저하거나 겁먹은 동작을보이면 그는 목슴을 잃게 된다.……만일 반데리야를 꽂는 도중에 운이 나빠 넘어졌다면 일어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어야 한다.
소가 바닥에 누운 사람을 뿔로 받는 경우는 드물다. 소가 관대해서가 아니라 공격할 때 눈을 감는 습성이 있어,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다가와서 코를 킁킁거리며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해 보곤 그를 날려버리려고 대여섯 말치 뒤로 물러나 고개를 낮추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동료들이 소의 주의를 흐트려놓는다.
시체 같은 그것을 녀석이 포기할 때까지. 황소가 겁이 많아 기준 횟수인 네 차레의 창 공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에는 엄정한 재판관인 관중이 고문에 가까운- 처벌이기도 하고 소의 분노를 일으키려는 수단이기도 한- 함성을 질러 소를 비난한다. 경기장 전체가 '푸에고! 푸에고!'소리로 뒤덮인다.
이때 쿨로들은 보통 때 쓰는 무기 대신 창자루에 폭중이 달리고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는 부싯깃이 달린 반데리야를 들고 나온다. 그것이 쇠가죽에 들어가는 순간 부싯깃이 도화선 불을 붙인다. 폭발물이 황소 쪽으로 터지면서 금세 소가 타들어가면, 녀석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그 광경이 관중을 만족시킨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광경이다.
그 큰 체수의 짐승이 분노로 거품을물고 타오르는 창들을 뒤흔들면서 불길과 연기 속에서 몸부림 친다. 시인 나리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내가 본 동물 중에서 황소만큼 눈에 표정이 없는 짐승도 없다고 말해야겠다. 다시 말해 표정의 변화가 적다는 얘기이다. 황소의 표정은 거의 언제나 동물적이고 야만적이며 어리석다.
녀석은 자신의 고통을 신음으로 표현하는 일도 드물다. 상처 때문에 걱분하고 놀라기는 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보는 것 같지 않다. 숫사슴처럼 우는 일도 없다. 따라서 소가 동정시을 일으키는 경우는 용기 있게 떨쳐나서서 주목을 받을 때 뿐이다. 황소의 목에 서너 쌍의 반데리야가 박히면 이제 녀석을 끝장낼 시간이 된다.
복소리가 한차례 울린다. 죽각 쿨로의 하나인 투우사가 동료들 가운데서 나선다. 그는 금은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차림에 긴검과 사용하기 편하게 막대기에 부착한 주홍색 천을 들고 있다. '물레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의장석 밑에 와 소를 죽이게 허가해 달라는 의미로 살짝 절을 한다.
이 의식은 대개 경기 정체를 통틀어 딱 한 번 있다. 당연히 의장은 동의의 고갯짓을 한다. 투우사는 '비바'라고 소리치며 몸을 홱 돌려 자신의 모자를 바닥에 던지고 황소와 맞서러 전진한다. 결투한 때처럼 이 전사들은 규칙에 따라 싸워야 하고 위반할 경우에는 적을 비겁하게 죽였을 때와 똑같은 불명예를 안게 된다.
예를 들어, 투우사가 소를 칠때는 반드시 소의 목과 등이 만나는 부위만 허용된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 부위를 '크로스' 라고 한다. 타격은 반드시 위쪽에서 '순간적으로' 가해야 하며 절대로 밑에서 공격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목슴을 잃는 게 천 배나 낫지, 밑에서 찌르거나 측면에서, 혹은 듸에서 공격하면 안 된다. 투우사의 검은 길고 튼튼하며 쌍날이다.
칼자루는 대단히 짧은데, 끝이 손바닥에 꽉차는 공 모양이다. 이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특별한 기술이 요구된다.… 검 찌르기를 시도하기 전에 투우사는 물레타를 선보이며 황소를 흥분시키고, 물레타에 몸을 낱길 것인지, 아니면 조용하게 접근할 것인지 주의 깊게 관찰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충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될 때 공격하기 위해서이다.
흔히 황소는 위협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듯 땅바박을 차거나 심지어슬슬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몸을 피하기 어려운 무대 중앙으로 투우사를 유인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녀석들은 똑바로 공격하지 않고 지친척하며 엎걸음질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 가틈이 끝나면 곧장 돌진한다. 투우의 기술을 아는 사람은 다음 장면이 흥미진진하다. 접그하는 투우사와 황소는 마치 두 면의 숙련된 대장들처럼 사대의 전략을 점쳐보기도 하고 시시각각 기슬을 바꿔보기도 하는 듯 보인다. 노련한 투우사는 소의 고갯짓, 곁눈질, 귀를 움직이는 것에서도 적의 계략을 눈치챈다. 결국 초조해진 황소는 적색 깃발을 향해 돌진한다.
깃발 뒤에는 투우사가 몸을 숨기고 있다. 소는 뿔로 담을 박살낼 종도로 힘이 세다. 투우사는 가벼운 동작으로 옆으로 빠진다. 요술을 부리듯 사라지는 것이다. 소의 격분은 무시한 채 가벼운 천만 소의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소는 달려온 힘에 의해 자신의 적을 저만치 지나쳐간다.
그러다 뻣뻣한 다리를 갑자기 세우고 멈춰선다. 이 과정이 계속되면서 녀석은 지치고 결국 초죽음 지경에 이른다.……수없이 스쳐 보내면서 투우사는 적을 완전히 알게 되고,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한다. 그는 적당한 거리에 꼼짝 않고서 있는다. 오른손에는 러미 높이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검을 들고 있다.
왼손에 든 물레 타는 앞쪽으로 쑥 나와 있다. 거의 바닥에 닿을 둣한 지점에서 물레타는 황소가 고개를 낮추도록 유도한다. 투우사가 온 힘을 다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그 일격이 제대로만 들어가면 그는 겁날 게 없다. 소가 갑자기 멈춰선다. 피는 거의 흐르지 않는다. 소가 고개를 쳐든다. 다리가 떨린다. 그리고 육중한 몸뚱이가 쓰러진다. 그 즉시 원형 경기장은 '비바!' 함성으로 뒤덮인다.
(프로스페 메리메,'에스파냐에서 보낸 편지',1931년)
전쟁의 참사
고야가 '전쟁의 참사'라고 명명했던 에칭 연작은1808년에서1814년 사이에 에스파냐 민중이 프랑스군에 대항애 벌인 게릴라전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연작은 고야의 작품들 가운데서 역사적 고착성이 가장 낮은 작품들이다. 이 판화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베트남과 보스니아에서 날아온 갓 찍은 사진들에서 보았던 생생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의 한 비평가가 고야의 공포스런 전쟁의 이미지에 깃들인 탈시간성과 미에대해 논하고 있다. 집행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예리한 총검이 달린, 무자비한 그들의 소총이 오른편에서 돌진해 온다. 희미한 재색에서 검정색으로 눈동자가 총들의 일격을 따라간다.
움츠리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평범한 평민들이다. 그들의 일생은 이제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얼굴없는 살해 현장에서 막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영웅적 행위나 존엄성 따위와는 관계없이 죽어가지만, 거기에는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음란한 무엇인가로 만들어버리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한 남자가 총에서 시선을 돌리고 꿇어않아 기도한다. 좀더 가까이 있는 또 다른 남자는 헛된 애원의 눈길로 저들을 바라본다.
이 남자들 사이로 빛이 들어와 아이를 보호하느라 몸을 웅크린 두건 쓴 여자를 비춘다. 손으로 가린 얼굴과 절망하여 바닥에 뻗은 여자도 비춘다. 둘러보면 당연히 눈에 띄는 가정집에도 햇살이 꽂혀 있다. 이성을 잃고 무릎 꿇은 여자도 보인다. 무기는 팽개쳐져 있고 바닥에 않아 대답 없는 하늘만 올려다본다. '눈 뜨고 불 수 없다'는 설명이 붙여 있다.
그러나 봐야만 한다.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다. 내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명이 에스파냐어로 되어 있다. 판화가가 고야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소총이 프랑스군의 것이며, 이 상황이 1808∼1814년까지 이어진 에스파냐 독립전쟁임을 알게 된다. 이 전쟁은 최초의 게릴라전이며 근대사 최초의 '민중의 전쟁'인 동시에 에스파냐 최초의 근대 시민전이다.
희생된 사람들은 '프에블로'(마을 사람들)이다.… 다시 프랑스인들이 보인다. 떼지어 다니는 짐승무리같이 살인마들은 등을 구부려 총검을 찌른다. 푸에블로 둘이 임시로 구해온 창과 단검을 휘드르며 대항한다. 그들은 태연하다,인간적이다.
자기 집과 여자와 종교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푸에블로이다. 그들에게선 뭔가 영웅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결코 이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은 학살의 현장일 뿐이다. 이것은 고야가 1808∼1814년의 전쟁기간 동안과 이후에 제작한 취추의 연작물, 흔히 '전쟁의 참사' 로 알려진 작품의 하나이다.
이 연작물은 전쟁의 잔인성과 무목적성, 모든 명분과 신조들도 결국에는 학상의 늪으로 가라앉고 마는 전쟁의 속성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역량도 뛰어나다. 형체, 질감, 빛과 어움의 유희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리하여 공포조차도 차가운 아름다움이 된다.
이 작품의 힘은 경험을 상기시키는 그 의형에 있다. 디테일은 모두 잘라버렸다. 부차적인 줄거리도 없다. 무리지은 이들의 모습만이 빛 속에, 중앙에, 화면 안에 정확하게자리잡고 있다. 저들이 시체를 구덩이에 넣고, 죽은 살마을 벗기고, 부상당한 사람을 동강내고, 아사한 시체를 끌고 갈 때, 우리는 거기서 몇 걸음 떨어져서 있다. 남자들이 고살될 때 우리는 좀더 가까이 가 있다. 뒤틀린 얼굴과 뿌리까지 뽑힌 혀를 본다.
남자들은 사지가 졸단 된 채 목이 졸려 나무둥치에 걸려 있고, 여자들이 수없이 강간당할 때 우리는 이미 더 갈 수 없을 만클 가까이 가 있다. 한 병사가 검으로 남자의 사타구니를 자르려 할 때 우리는 어깨 너머로 보고 있다.… 결국, 우리는 다른 면을 보고 한 단면을 말할 순 없다.
저들은 점점 금수와 괴물로 변해 갔다. 프랑스인들을 퇴치하자 곧 바로 에스파냐 왕조가 복귀해 에스파냐를 어둠과 반동으로 몰고 간다. 반쯤 묻힌, 해골이다 된 시체가 무덤에서 메시지를 휘갈긴다. '나다(Nada)'-"아무것도 아니야, 그것은 그렇게 말한다."
(구윈A. 윌리엄스 '고야와 물가능한 혁명', 1976년)
1808년5월3일
고야의 작품 가운데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졌을 '1808년 5월 3일'은 직접 목격한 기록물로 보일 만클 강력하고 사실적인 그림이다. 훗날 고야가 묘사한 끔찍한 장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그가 직접 본 것들이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의 필자에 의하면, 프랑스군을 격퇴했는데도 고야는 에스파냐 국민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1808년, 고야는 카예 발베르데 15번지에 살았다. 그 집은 아니지만, 그 거리는 지금도 전화국 뒤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5월 2일의 그 사건을 그는 자기 집 창에서 직접 목격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5월 3일의 총살 정면도 자기 집(그는1819년에 '귀머거리의 집'을 샀다)에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5월 2일과3일,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푸에프타 델 솔에서 살해당한 첫 번째 프랑스 병사(회교권에서 온 용병)는 고야가 며느리를 봄으로써 친척이 도니 가브리엘 발레스 가문의 한 주택 창문에서 발사된 탄황에 맞았던 것이 분명하다. 고야의 아들도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전하는 얘기대로, 고야가 길을 가다가 62세의 나이에 난생 처음으로 고요 속에서(귀가 먹어서 총소리를 못 들었을 데니까) 그 영웅적이고 잔학한 장면들을 직접 보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선 아무도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전쟁의 참사'의 에칭들은 직접 관찰한 것을 그린 듯 보이지만 그런 것은 생각처럼 그리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고야는 비록 몸소 겪지 않았다 해도 목격자들을 통해 전쟁의 끔찍성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불'에 묘사한 그 불꽃을 직접 보았을까? 그렇지 않다 해도 이 그림은 더할 데 없이 사실적이다. 그는 보지 않더라도, 느꼈다. 그러나'전쟁의 참사' 가운데 '나는 그것을 보았다'와 그것 역시'란 제목의 두 점은 적어도 그가 아는 것에 대해 묘사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가 '친촌의 남자(엘 데 친촌)'라고 써든, 참사 37번 '이것이 최악이다'도 그럴 것으로 추정된다.
친촌은 마드리드 동남쪽의 마을로서 고도이의 아내이자 돈 루이스 왕자의 딸인 친촌 여백작이 고야의 형제에게 성직록으로 하사한 곳이었다. 그가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을 하면서 소풍이며 무도 장면들을 스케치하곤 했던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지역이 자신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그림의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아리러니를 느꼈음이 분명하다.
프린시페 피오 언덕도 과거에는 알바 일가의 여름 별장에서 잠시 산책하던 곳이었다. '팔라세테 데 몬클로아'란 그 별장은 원래 오수나 공작의 성이었는데 이미 왕이 사들인 상태였다. 게다가 앞서 보았듯이 그 언덕 자체도 과거에 고야가'산 이시드로 초지의 전원 축제'의 왼편에 묘사한 적이있었다.
벨라스케스의 양식을 딴 이 야심적인 작품을 두고 산체스 칸톤은, 과장해서, 고야의 '유일한 풍경화'라고 평했다. 그 언덕 밑으로 플러리다의 산 안토니오 교회가 보이고 그 반대편에는 프랑스 병사들이 서있다. 처형이 거행된 5월이란 시기도 산 이시드로 성인을 기념하는 마드리드의 유명한 축제의 달이다.
1808년 당시 고야는 사라고사 시절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의 여동생인 호세파 바이에우와 35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야의 부인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몇 명의자식을 보았는데(과거에는 20명으로 알려졌으나 현대의 전기들에는 6명으로 나온다)그중 단 한 아들 (사비에르)이 살아남아 1806년에 마리아노란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태였다. 고야의 주친과 어머니, 누이는 사망하고 없었다.
다만 그의 형제 하나가 여전히 친촌에서 성직자로 일하고 있었다. 1808년 5월 고야의 정치적 견해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그도, 당시 바르셀로나의 총사령관이자 노령의 '일루스트라도'였던 콘데 데 에스펠레타처럼, "에스파냐는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고야의 친구들은 계몽된 사람들이었고 그중에 시인 멜렌데스 발데스, 베르나르도 데 이리아르테, 모라틴, 그리고 전직 이단심문소 사무관이었던 참사회원 요렌테는 조제프 보나파르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결국 모라틴은 왕궁 도서관장이 되고, 이리아르테와 요렌테는 국정 자문워원이 되었다. '카프리초스'의 창작자는 분명히 합리주의자였다. 그리고 여전히 막강한 힘을 지닌 이단 심문소와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들과 수도승들에게 반감을 샀던 게 확실하다. 그러나 '전쟁의 참사'로 보아, 프랑스인들이 에스파냐에서 자행한 총살, 약탈, 강간, 강탈은 한결같이 그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고야가 마드리드에서 총살이 집행됐던 그날 이후로 전쟁에 대해 그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오래된 이야기(이 얘기는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엔리케 라푸엔테 페라리가 자주 인용함으로써 신뢰도가 다소 높아졌다)가 전한다. 그의 하인이 그에게 프랑스군의 만행을 그리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고야는 "야만인이 되지 말라고 영원히 인간들에게 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하나 알려진 이야기로, 나폴레옹군과 한창 전쟁중일 때, 그가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그의 부인은 사망하고 없었다) '문명국'으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다 에스트레마두라에서 령찰에 잡혀 되돌아왔다고 한다.
전쟁중에 나온 그림들은 말할 것도 없고,'카프리초스'나 1790년대의 일부 그림들처럼'전쟁의 참사'는 계몸주의의 희망찬 기백과는 대조되는 비관주의가 깃들여 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전쟁의 참사'는 인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보는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그의 그림들이 모두 반교권주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1808년 5월 3일'에는 사형수 사운데 수사도 끼여 있다. 강도 마라가토를 속인 페드로 데 살디비아 수사는 현명하고 용감한 모습이다.
18세기 에스파냐의 근대적인 사상가였던 페이조가 베네딕트 교단의 수사란 건 고야도 몰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인 성직자 카릴로와도 친하게 지냈음이 분명하다. 플로리다의 산 아토니오 교회에 그린 프레스코화들(1789)이나'칼라산스의 성호세의 마지막 성찬식'(1819)같은 일부 종교화들은 최고 수준의 작품들이다.
고야가'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에 아마도 의식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은 그가 당대 사람들 애부분이 그렇듯, 교회 교리의 진실성에 대해 그렇게도 수없이 의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회의 위력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한다.
사실 당시 고야의 정신 상태를 알 수 있는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발견된 것도 없다. 따라서 1808년 5월의 그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점은 다른 사건들에 대한 그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참사'에 관한 말로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즉, 이 그림들이 "훗날 그의 조국이 러시아군에 강점당했을 때 나온 한 공산주의자의 스케치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고야가 조제프와 페르디난드에 대해 어떤 정치적 감정을 느꼈든 간에 (그리고 당애의 박식한 에스파냐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고뇌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자신이 본 웅돌 상황에 섬뜩함을 느꼈으리란 것은 '전쟁의 참사'를 보면 명백해진다.
소름끼치는 작품'이것이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분노의 감정 없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특별한 이념을 좇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만행 때문에 (휴 토마스,'고야: 1808년 5월 3일' 1972년)
'카르리초스': 두 가지 해석
고야의 동시대인들이 '카프리초스'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발견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여기 실린 이 연작물에 관한 두 개의 평은 고야 생존 당시에 씌어진 것들이다. 곤살레스 아사올라는 궁정의 화학교사여였는데도 계몽주의적인 종교와 정치 사상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조제프 마리 드 마이스트르는 프랑스인 외교관이었다.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라는 유명한 화가를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천장들이며 비너스 및 초상화들을 보면서 그에게 경탄했다. 그러나 드로잉 및 판화 분야의 걸작인 '카프리초스'가고 불리는 풍자판화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 판화들을 본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화가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좀더 지성 있는 사람들은 이 판화들 하나하나에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사실 온갖 종류의 인물 400명이 등장하는 데다 80점에 이르는 이 컬렉션은 도덕적 시구 80편을 조각한 교훈적 작품, 혹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80가지 편견과 악에 대한 풍자적 조약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 최고위층의 악행부터 범죄집단의 악행에 이르기까지 이 비범한 작품에서 그는 모든 악들을 예리하게 조롱했다. 구두쇠, 호색한, 용기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인간, 무지한 의사, 변덕스런 노파, 더러운 노인, 부랑자와 느림보, 창녀와 위선자, 한 마디로 말해 바보와 게으름뱅이와 악한의 온갖 행태가 능수능란하게 묘사되어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해볼 많은 재료를 제공해 준다. 단, 그가 이 풍자에 깃들인 섬세한 생각들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가지 자신의 견지에서 어느 정도 적절한 해석을 찾아낼 수 있을 때 말이다.
'두엔데시토스(꼬마 유령들)'를 이 연작의 49번만큼 적절하게 풍자한 작품이 또 있을까! 잘못된 교육의 결과를 72번만큼 진실에 가깝고 서글프게 보여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거기에서 우리는 어느 가정의 기쁨으로 태어난 듯 보이는 한 아름다운 처녀를 찾아다니며 불미스러운 짓을 하는 악한들을 본다.
그 악한들이 자기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묘비를 지켜보는 59번만큼 무서은 교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아무도 자신들의 버릇을 고치지 않다니!… 이러한 장면들이 너무나 정교해서, 예리한 사람도 한번 봐서는 전체적인 도덕적 주안점을 포착하기 어렵다.…… 어떤 나라에도 이런 류의 풍자물은 없다고, 아니 견줄 만한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야가 이 컬렉션을 구상하고 새기는 데 걸린 시간에 초상화를 그렸다면 800점은 그렸을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와 해외의 감정사들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외국대사로 부터 화가나 여행객에 이르기까지 최근 마드리드를 방문한 사람치고 고야의 판화를 얻어 보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 고야를 칭송하니 그의 나라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사본들은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 미술을 공부하는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드로잉의 입문서이다.
모사하기 어려운 각종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여러 뒤틀린 형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야의 독보적인 솜씨와 재치로 빚은……이 작품에는 무려 400가지 형상의 인간과 동물이 등장한다. 갖가지 지혜의 변형, 특이한 상황, 잘 묘사된 의상, 독창적인 얼굴들, 감정이 풍부한 표정, 해부학적인 지식을 감안할 때, 화가나 판화가들은 여기에서 참된 교과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탁월한 솜씨와 저돌성, 대담성의 측면에서 고야와 겨룰 자 누구겠는가? 명암법을 이보다 잘 이용한 사람이 누구인가?
시인이나 문학가들은 각각의 풍자에서 그들의 정신을 자극하고 도덕적 반성을 부추기는 풍부한 사상의 보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인간 행동의 원천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그들의 글에 필요한 영감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풍자 판화들은 악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보여주면서 우리의 잘못을 그 응분의 곤봉으로 때려준다.
이렇게 얻어맞음으로써, 우리는 먼저 억제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으로 끔찍한 결과를 모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처럼 진실된 희극에서 이보다 도 큰 효용이 있겠는가?
(그레고리오 곤살레스 아사올라 '세마나리도 파트리오티코' 1811년 3월 27일)
지금 나는 에스파냐의 상황을 주제로 한 영국풍의 풍자화집을 들고 있다. 이 책은 1년 전에 마드리드에서 출간된 것이다. 여기에는 80점의 판화가 들어 있다. 그중 하나는 강렬하게 왕비를 조롱하고 있다. 비유가 빤해서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른 하나는 담이 무너진 장면이다. 그 밑에 깔린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담을 버팅기고 있다. 이 판화의 밑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미친 사람들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24번)세 번째 판화에서는 수오복을 걸친 나뭇등걸이 보인다. 팔에 해당되는 듯한 다듬지 않은 가지 두 개 위로 소매를 입혔다. 두건은 나무 꼭대기 위로 올라가 있고 일단의 선량들이 이 작은 신을 향해 열렬히 기도하는 자세로 양손을 꼭 낀 채 들어올리고 있다.
그 밑에는 이런 제명이 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양복쟁이의 모습이다.'우리는 거기다 덧붙여 '이것이 바로 에스파냐의 모습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궁의 화가로서 작업실 앞에 왕의 초상화까지 걸어둔 고야에게 찬사 따위를 보내는 나라이니 말이다.
(조제프 마리 드 마이스트르가 슈발리에 드 로시에게 보낸 편지,1808년)
고야의 사생활
1771년부터 그 세기 말까지, 고야는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로서 독신의 부유한 사업가였던 마르틴 사파테르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제 보게 될 이 편지들은 고야의 일상생활을 비롯해 그가 궁정 사람들이나 기타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며 생생한 그림까지 곁들인 이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이 화가의 사생활을 일별해볼 수 있다.
( 마드리드, 1781년 10월6일)
친애하는 마르틴, 난 지금 시정에 빠질 기분이 아니라네, 하지만 자네가 자작시를 보내줘서 대단히 기뻤다네, 마음이 무거워 혹시 자네한테 답장을 못하더라도 내가 자네 편지를 받고 느끼는 이 기쁨을 자넨 상상할 수 없을 걸세, 어제 난 마누엘의 딸에게 줄 생일선물을 샀네.
첫 우편으로 보넬 거라네.……선물 속에 유모차와 요새 유행하는 자그만 쪽머리를 한 인형을 비롯해 기타 등등,기억도 하기 힘든 자잘한 것들이 들어 있는데(내가 아는 건 부엌이나 집안에 필요한 것들뿐이야), 정말 온갖 것들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 친구여, 자네가 지난번 버낸 편지는 내 가슴에 비수로 와닿았네. 자네가 사냥 얘기를 할 때 내가 자네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를 거야, 신은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나로선 그보다 더 큰 낙이 없네.
딱 한 번, 어렵사리 밖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나보다 더 잘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19발 쏴서 18발 명중했거든. 산토기 2마리에, 집토끼 1마리, 새깨 엽조 4마리에 늙은 엽조 1마리, 메추라기 10마리였다네. 빗나간 그 한 발은 엽조를 쏜 거였어. 나는 운이 좋아서 정말 즐겨웠어. 제일 좋은 총 두 자루로 제대로 시작했으니 말이야. 난 그들과 더불어(누군가 하면, 특히 촣을 잘 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셋이 잡은 사냥감만 해도 꽤 됐다네) 제법 명성을 얻었다네. 하지만 이번 사냥을 위해 우린 마드리드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시에라산까지 가야만 했네.
(마드리드, 1782년 11월 30일)
자넨 지금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겠군. "정말 엄청해,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쓰다니. 자기 돈이 아니라서 그런 게야." 난 내가 옳다고 대답하겠네. 만일 자네가 마드리드에서 최고로 멋진 옷을 원하지 않았다면 나더러 자네 대신 소핑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도냐 호아키나네 옷 두 벌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네. 자네 외투로 말하자면, 아나 거기선 그렇게 멋있는 걸 많이 보지 못했을 거야. 그 옷감을 찾느라 이리저리 뛰었거든. 옛날에 딱 한 번 본 물건이었지. 그걸로 외투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피란에서 똑같은 기성복을 보긴 했지만 색상이 형편없어서 그 엇감하고 어울리지 않겠더라구. 날짜 미상(1782년 12월)
여차 하면 내게 1000레알을 보내주고 자네 장부에 적어두게나. 자넨 지금까지 나한테 투로오온이든 투로오오온이든 아니면 토르데야아아스네 케이크든 아무튼 그 잘난 똥개들 말고 내게 보내준 제 없으니 말이야. 이런저런 것, 아무것도 없어, 없다구. 어넨 내가 뭔 얘길하려 했는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야. 모두들 말로만 떠들곤 그 순간이 지나면 다 땡이야.
날짜 미상
여보게, 자네의 귀한 편지 잘 받아보았네. 그런데 그 쓸모 업슨 코르셋 배달부가 자기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듣고나니 이성이 사라지더군. 그 작자 아마도 그걸 자기 집에 갖다 놓은 게 틀림 없어. 아니면 그의 아내가 싫증이 날 때까지 그걸 입고 다녔을 거야. 게다가 자네나 나, 아니면 우리 둘 다 취했어. 왜냐하면 내가 그 코르셋 값이, 자네가 편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14페소라고 자테 한테 말했을리가 없을 테니까. 그 옷상자에 쓰인 값이 11.5페소 이하였개 때문일세. 벨트값이 14이긴 했지만 그건 레알 동전 단위였어. 그래서 착오가 생긴 게 틀림없어.
1786년 12월 16일
아, 자네 곁에서 지난날 우리가 함께 누린 충만함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환호는 끝나고 왕궁의 만족 표시도 끝났어! 서로를 위한 배려만이 남았네! 하지만 발을 뻗고 잘 수가 없네. 다만 자네가 우정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야. 투론 과자 12개를 보내줘 고맙네. 차 마실 때 6개를 먹으니 충분한 양이지. 자네가 부탁한 초리소스(소지시의 일종)12다스를 같은 우편으로 보내려 하는데 부피를 줄일 방법을 일러주게. 난 전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최고로 진정한 친구에게 진정으로 써보내 주시게.
마드리드, 1787년 8월 15일
신의 보살핌으로, 자네가 앓고 있는 3일 열학질은 내가 사보내는 황산 키니네 1파운드면 치유될 걸세. 이 약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일등급이야. 국왕의 약방에서 지은 거나 마찬 가지라네.
1789년 5월 23일
우리 네 살짜리 아들은 얼마나 잘생겼는지 마드리드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네. 애가 너무 자주 앓아서 그 애가 아픈 동안은 사는 것 같지가 않네. 신의 은총으로 요즘은 좋아졌다네. 자넨 그처럼 재능도 많고 사업도 잘되니 하는 얘긴데, 10만 레알을 어디다 투자하면 좋을지 가르쳐주게나. 은행이든 왕실 채권이든 기업체든, 아무데고 이윤이 제일 많이 나오는 데로…
날짜 미상(1792년?)
자네한테 편지한 다음에 누가 내게 볼레로 형식의 이 노래 네 편과 세기디야 네 편을 갖고 왔어. 약속대로 자네는 이 곡들을 베끼고 싶겠지만 남들은 베끼지 못하게 주의하게. 잘못했다간 이 노래들이 세상에 퍼져버릴 테니. 내가 작은 종이 한 장에 베낀 이 노래들은 그다지 길지 않아.
자네한테 주려고 영국네 나이프 두 자루를 샀네. 케이스 하나에 같이 들어 있는데 케이스는 칼을 갈 때 이용할 수 있어. 자네한테 보내기 전에 내가 시범으로 한번 써보려 하네. 나이프를 사느라 돈이 많이 들었지만 런던에서 사면 아마 훨씬 더 비쌀 거야. 100레알 들었네. 내가 속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진 않아.
1794년 4월 23일
난 여느 때와 똑같다네. 건강 상태에 따라 어떤 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울화가 치밀고, 어떤 땐 좀 차분해지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서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세. 하지만 난 벌써 지치려 하고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신이 허락하신다면 월요일에 투우장에 갈 예정인데 자네도 같이 갔으면 해서라네. 지난 월요일 일 때문에 항간에 자네가 미쳤다는 웃기는 소문이 나돌긴 하지만 말이야.
1795년 8월 2일
저런, 내 농담이 자넬 그렇게 혼란스럽게 했나 보군. 그들은 좀 무례하긴 해도 자네의 좋은 상대들이야. 자네도 주의해서 보면 저들이 이겨낼 거란 걸 알게 될 걸세. 난 오직 그들만이 세상을 완벽하게 묘사해 낸다고 헛되이 믿을 정도거든. 자네도 내가 알바 부인을 그리는 데 와서 도와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내 모델이 도기 위해 화실로 왔다가 끝나면 다시 가버린다네.
그녀를 화폭에 담는 일을 난 분명히 좋아하고 있어. 이제 그녀의 전신 초상화도 그리게 될 거야. 지금 그리고 있는 말 위의 알쿠디아 공작 스케치를 끝내는 대로 그녀가 돌아오기로 돼 있어. 그 공작이 소식을 전해 왔는데 내가 가서 머물 숙소에 대해 얘기하더군. 그 사람 초상화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어. 맹세컨대 이 일은 화가가 만날 수 있는 주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주제라네.
영국과 미국의 고야 컬렉션
고야를 감상하려면 아직까지도 에스파냐에 가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밖에 세계 유수의 화랑들 가운데 그의 작품을 두세 점 이상 자랑하는 곳은 드물고, 소장하고 있다 해도 주요 작품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 소장품들은 그의 경력의 각 발전 단계-유흥과 구애 장면을 담은 매혹적인 풍속화(일상 장면을 담은 그림), 공인들의 위엄 있는 초상화, 아름다은 여인들의 감각적인 이미지, 그리고 어둡고 초자연적인 그의 천재성이 드러난 마술과 악마 숭배를 담은 작품들-를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다.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동북부 사라고사주에서 출생. 부친, 호세 고야는 도금사, 모친은 15세기 기사의 후예
1754년(8세) 이때부터 56년까지 신부가 경영하는 국민학교에 다님
이 학교에서 평생의 벗, 마르틴 사파데르와 알게됨
1757년(11세) 모친의 가계가 귀족임을 재확인
1760년(14세) 고야 일가, 사라고사 시로 이사. 이때 베네치아파에게서 배운 사라고사의 화 가, 호세 르산 아틀리아
에 들어가 원화를 복제, 데상의 기본을 배우는 등 4년 동안 수업
1763년(17세) 왕립 미술 학교 장학생 시험을 치르기 위해 연말께 마드리드에 도착
1764년(18세) 연초 장학생 시험 작품 심사에서 고야는 한표도 얻지 못함
1766년(20세) 재차, 장학생 시험에 응시했으나 또 한 표도 얻지 못함
1769년(23세) 프랑스 경유 이탈리아 여행
1770년(24세) 이탈리아의 파르마 왕립 미술 학교 콩쿨레 응모했으나 여기서도 낙방
1771년(25세) 이탈라아에서 고향 사라고사로 귀환. 10월, 사라고사의 교회에서 천정화 주 문을 받음
1773년(27세) 7월, 마드리드에서 화가 프란시스코 파이유의 여동생, 포세화 파이유와 결혼
1774년(28세) 고야, 사라고사 시 화가 가운데서 고소득자가 됨
1775년(29세) 독일 화가 멩크스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시에 있는 왕립 직물 공장에서 직물 의 초벌 그림을 주문받음
이후 10여년 동안 직물의 초벌 그림을 계속. 12월 장남 출 생했으나 요절
1778년(32세) 중병을 앓음. 이즈음 궁전 안에 비장되었던 스페인의 천재화가, 벨라스케즈의 작품이 발견되었는데,
고야는 이후 방대한 궁전 수장품을 감상한 것으로 추측되며, 벨 라스케즈 작품 18점을 에칭으로 모사함
1779년(33세) 처음으로 카를로스 3세에게 4점의 그림을 보여, 왕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는 영광을 얻음. 7월 궁중화
가가 되고자 원서를 제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뒤에 장녀도 태어나자마자 요절함
1780년(34세) 5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제출하고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기를 원했는 데, 전원일치의 추천을
받음
1781년(35세) 마드리드 그랑데 교회 제단화 1점을 맡음 부친 사망
1783년(37세) 당시의 재상 플로리다 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그림. 귀족 사회와의 접촉을 처음으로 시작. 카를로스
3세의 동생 루이스 왕가의 초상화를 그림
1784년(38세) 보벨라노스의 중개로 기사 수도회를 위한 종교서를 그림 12월 요절하지 않은 유일한 아들인 3남 출
생
1785년(39세) 6월, 왕립 페르나드 미술 아카데미 회화부장 대리로 임명됨. 오스나 공작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는데 오
스나 공작 부인은 왕가 다음가는 고야의 최대 후원자가 됨
1786년(40세)라몽 파이유와 함께 궁중화가가 임명된. 2륜마차를 최초로 구입. 알바공작과도 접촉을 시작함
1787년(41세) 말 두필이 끄는 4륜마차를 구입. 이무렵 마드리드의 금융계 주요인물들과 접 촉을 깊게 함
1788년(42세) 6월, 아카데미 회화 부장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한 표도 얻지 못함. 카를로스 3세 사망
1789년(43세) 1월 카를로스 4세 즉위 4월 고야 궁중화가로 임명됨. 이해 프랑스 혁명이 일 어나 그 신사조의 파도
가 점차로 스페인에도 침투됨.
1791년(45세) 궁중화가로서의 다망을 이유로 직물 초벌 그림을 오랜만에 사양함
1792년(46세) 갑자기 병에 걸려 이후 전혀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됨
1793년(47세) 판화집 -Los Carprichos- 착수 이와 연관성있는 작품 11점을 제작
1795년(49세) 프란세스코 파이유 사망. 고야, 파이유의 후임으로 왕립 페르나드 미술 아카 데미 회화 부장이 됨. 알
바 공작 부처와 가까와지고 그들의 초상화를 그림
1796년(50세) 6월, 알바 공작, 세빌랴에서 사망, 알바 공작 부인은 안달루시아로 은둔. 고 야 종교화를 제작
1797년(51세) 알바 공작 부인 방문. 그의 초상화를 그림. 청각장애를 이유로 아카데미 회화 부장직 사임.
1798년(52세) 알바 공작 부인의 라이벌, 오스나 공작부인에게서 재차 많은 주문을 받아, 마 녀를 테마로 한 작품 6점
을 그림. 플로리다 교회 천정화를 제작
1799년(53세) -Los Carprichos-판화집 발간.10월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중화가로 임명됨
1800년(54세) 아란포에스 궁에서 -카를로스 4세 가족-를 제작
1802년(56세) 알바 공작 부인 사망
1803년(57세) 로스 레이어스 가에 3층 벽돌집을 구입 -Los Carprichos-의 동판 30점을 왕 에게 헌납. 댓가로 아들
의 여행을 위한 장학금 지급을 요청
1804년(58세) 왕립 페르난드 미술 아카데미 원장에 입후보했으나 낙선
1805년(59세) 아들, 마드리드 상인의 딸과 결혼
1806년(60세) 손자 출생, 아들 분가
1807년(61세) 카를로스 4세, 나폴레옹과 조약 체결
1808년(62세) 3월, 카를로스 4세 퇴위, 아들인 페르난드 7세 즉위. 아카데미에서 페르난드 4세 초상화 제작을 고야
에게 위촉. 4월 페르난드 7세 스페인을 떠남. 5월 마드리드 시민,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봉기, 독립전쟁이 일어남. 7월 호세 1세, 스페인 왕이 되 어 마드리드 입성. 10월 고야는 사라고사 방문. 12월 호세 1세에 대한 충성의 서약
1810년(64세) 마드리드 시청 의뢰로 호세 1세를 찬양하는 그림 제작.
1811년(65세) 호세 1세에의 충성 서약에 또 서명. 부부공동으로 유언장 작성. 이 해부터 다 음해까지는 마드리드는
기아의 참상을 빚었고, 고야는 이 정경을 판화로 남김
1812년(66세) 3월, 스페인의 자유주의파, 새 헌법 발표. 6월 부인 사망. 7월 호세 1세 마드 리드에서 도망, 8월, 영국
의 웰링턴 경에 의해 마드리드 일시 개방. 고야 웰링턴 경 의 초상화를 그림. 고야와 아들, 공동으로 재산목록 작성
1813년(67세) 페르난드 7세, 스페인에 귀환
1814년(68세) 페르난드 7세에 대해, 나폴레옹군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가장 영웅적인 투쟁 장면을 그릴 것을 희망-
마드리드,
1802년 5월 2일--마드리드,1802년 5월 3일-을 제작 12월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가 종교 제판소에 제소됨
1816년(70세) 페르난드 7세의 집권체제 확립. 오스나 공작과 접촉을 재개.
1817년(71세) 또다시 종교화를 그림 약 3년간
1819년(73세) 스페인에서는 최초로 리도그래픽 수법을 써서 직물을 짜는 노인을 완성
1821년(75세) 다음 해까지 이른바 귀머거리의 집 1층 식당과 2층 살롱의 벽면에 총 33평방 미터에 달하는 벽화를
그렸는데, 옷칠을 해 번쩍번쩍하는 벽면에 직접 유채로 그려넣 었기 때문에 검은 그림으로 통칭되고 있다.
1823년(77세) 페르나드 7세 복권, 전제 정치 부활됨. 손자에게 -귀머거리의 집-을 상속
1824년(78세) 페르난드 7세로부터 6개월간의 휴가를 얻어 프랑스의 보르도에 감, 6월 부터 9월 까지 파리 관광. 이
후 내연의 관계인 솔리야와 함께 보르도에 체재
1825년(79세) 국왕에게 휴가 연장원을 제출 늦봄에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웠으나 곧 회복
1826년(80세) 일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궁중 화가직 사퇴서를 제출. 6월에 수리됨. 그동안 수석 궁중 화가인 로페스,
왕명에 의해 고야의 초상화를 그림. 7월, 보르도로 귀한
1828년(82세) 4월, 보르도에서 노환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