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9. 10:03ㆍ미술/서양화
옛날에 배우던 미술책 기억나십니까?
국민학교때 배우던 미술책이나 중학교때 배우던 미술책이나 똑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지금까지도 그때 어떤 그림들이 실렸었는지, 거의 기억을 다 합니다.
르노아르의 독서하는 소녀, 마넨가 모넨가 발레하는 소녀, 세잔의 정물, 고흐의 자화상, 고갱의 타히티 처녀, 피리부는 소년,
나폴레옹이 말 탄 그림이었든가 대관식이었든가. 그리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베르메르의 소녀 초상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개껍질에서 나온 괴물여자, 루벤스, 렘브란트,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칸딘스키,
그리고 밀레, 쿨베도 나왔었습니다. 밀레야「만종」이고, 쿨베는「돌 깨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험문제에도 자주 출제되었죠. '다음 중에서 사실주의 화가는?'
사실, 제게는 미술에 있어서의「사실주의」라는 말은 좀 생뚱맞게 들렸습니다.
왜냐면 이전 시대에도 사실적인 표현을 한 그림은 지천으로 많거든요. 거의 "다"가 아닙니까.
그런데 새삼스럽게「사실」을 그리자니요. 뭔 사실을 "더"요?
사실주의는 말 그대로 내 눈앞에 사실로 존재하는 것만 그리자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본질을 호도하지 마라', '수작부리지 마라', '있는 그대로, 거기가 출발점이다', 이런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저는 '사실주의'라는 표현보다 '솔직주의'로 바꿔부르면 어떨까 합니다.
쿨베의 발상이나 취지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쿨베라는 화가,, 화가 이전에 멋진 남자로 보입니다.
펌))
「1849년에 그려진 [돌을 깨는 사람들]은 쿠르베가 추구한 리얼리즘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낸다. 커다란 화면
안에는 다 헤진 옷을 입고 그들의 노동에 열중해 있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관객을 등진 채 돌이 담긴 바구니를
옮기고 있는 소년과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굳게 다문 입과 움푹 패인 주름만이 드러나 보이는, 망치질에 여념
이 없는 노인, 그리고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 외에 별다른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 최하층 계급
의 노동자를 그린다는 것 자체가 금기를 깨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논란이 되었던 것은 어떠한 감흥도 가
치도 부여되지 않은 인물들의 표현이었다. 비평가들은 쿠르베가 그린 인물들이 그들이 깨는 돌보다 더 의미 없
어 보인다고 비난했다.
쿠르베가 생각한 19세기 리얼리스트의 임무란, 현실세계에서 체험하고 포착한 경험정보와 시각정보를 가감 없 이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1819 – 1877)
Gustave Courbet (portrait by Nadar).
구스타브 쿠르베는 스위스의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 동부, 오르낭에서 부유한 농부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 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하는 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얻은 그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Courbet with a Black Dog)" 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 전람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센강변의 처녀들》(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 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1
The Wave, 1870
Stream in the Jura Mountains (The Torrent), 1872-3, Honolulu Academy of Arts
2
The Artist's Studio (L'Atelier du peintre): A Real Allegory of a Seven Year Phase in my Artistic and Moral Life, 1855, 359 × 598 cm (141.33 × 235.43 in),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미술 > 서양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Jules Bastien-Lepage (0) | 2011.06.05 |
---|---|
케테 콜비츠 (0) | 2011.05.24 |
「촛불 든 여자」 그림 (0) | 2011.05.13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펌) (0) | 2011.05.12 |
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 (0) | 2011.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