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27. 18:57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북송시기 화가 범관이 그린 ‘계산행려도’. 바위에 새긴 듯 강인한 붓놀림과 ‘우점준’으로 불리는 독특한 기법으로 중국 산수화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대만 고궁박물관 보관
북송(北宋)시기 범관(范寬)이 그린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는 중국 산수화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이 중국 산수화를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거의 전부 ‘한번 보고 나면 잊기 어려울(一見難忘)’ 정도이며
많은 이들은 호기심을 갖고 또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 한 폭의 그림에 왜 이다지도 큰 힘이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 아주 수학적인 구도를 지닌 이 그림에 대체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지 독자들과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들어가는 말
리린찬(李霖燦)은 자신의 저서 ‘중국미술사고(中國美術史稿)’에서 “언젠가 류궈쑹(劉國松)이 이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감격했다’고 했다”고 썼다.
류궈숭은 대만 현대예술의 초기 개척자 중 한 사람.
그가 북송시기에 그려진 산수화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감격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감격’이란 두 글자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 사건 혹은 사물에 대해 감격했다는 표현을 쓴다.
이는 그 대상으로부터 정신적인 승화나 계발을 받았거나 잘못에 대한 관용, 용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예술에 몸담은 류궈쑹이 왜 1000년전에 그려진 ‘계산행려도’에 감격했을까?
리린찬은 “천번만번의 미세한 붓질로 그려진 ‘우점준법(雨點皴法)’을 보면
누구인들 그 정성에 감동받지 않을 수 있으랴?”고 했다.
분명히 범관의 정성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대예술의 다양한 이론을 섭렵한 류궈숭이 단지 범관의 우점준법에만 감동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그림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어쩌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감동인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범관은 누구인가?
범관(范寬·10세기 무렵 활동)의 이름은 중정(中正)이고 자는 중립(中立)이며 섬서화원(華原 지금의 요현․耀縣) 사람이다.
화가이자 구도자였던 범관은 1:3:9의 화면분할로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을 담았고 나그네와 구도자, 폭포와 고찰을 통해 깨달음의 실마리를 풀어냈다. 대만 고궁박물관 보관
북송의 류도순(劉道醇)은 ‘성조명화평(聖朝名畫評)’에서 그를 “성품이 온후하고 도량이 커서 범관(范寬)이라 불렸다.
산림에 거처하며 늘 단정히 앉아 사방을 둘러보며 오묘함을 추구했다”라고 평했고,
북송의 곽약허(郭若虛)는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서 “행동에 예의가 없고 술을 즐겼으며 道를 좋아했다”고 적었다.
범관은 호방한 성품을 지닌 구도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범관은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북송 ‘선화화보(宣和畫譜)’에는 그가 그림을 배우며 도를 깨달은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성(李成·당시의 유명한 화가)에게 배웠으나 ‘전인(前人)의 법은 가까이 사물에서 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을 스승삼기보다는 대상을 스승삼는 것이 낫고 대상을 스승삼기보다는 마음을 스승삼는 것이 낫다
(前人之法,未嘗不近取諸物. 吾與其師於人者,未若師諸物也. 吾與其師於物者,未若師諸心).”
이에 범관은 구습을 버리고 종남산 태화산에 들어가 산수를 유람하며 직접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빼어난 산세를 표현했다.
그는 특히 눈내린 산을 잘 그렸으며 그가 그린 산세는 웅건하고 장대한 기세를 지녔다.
강하면서도 견실한 필치의 준법을 사용해 산의 골격을 잘 표현했고 산과 교감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말해, 범관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상을 그리기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추구했다.
스스로 山水 사이에 녹아들어가 ‘정통해질 수 있었고’ 자연과 자신을 관조하며 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산의 진정한 정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었다.
구도의 특징
― 중축거비식(中軸巨碑式) 구도
계산행려도의 전체적인 화면은 소박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는데 이런 특징은 구도에서 잘 드러난다.
가운데를 축으로 해서(中軸式), 큰 비석이 서 있는 듯한(巨碑式) 구도로 바르고 곧으며 두드러진 인상을 준다.
― 주산(主山)이 화면의 2/3를 차지
편폭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세로와 가로의 길이가 206×103cm로 정확하게 2:1비율이다.
또 원경(遠景)인 산이 전체 화면의 2/3를 차지하는데 이 산이 바로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이는 화면을 가득 차게 하는 효과를 주면서 영원하고 안정적이며 포용적인 이미지를 준다.
― 등비급수 비례로 도약의 느낌을 표현
이 그림의 구도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바로 前景, 中景, 遠景의 비례가 정확히 1:3:9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등비급수식의 비율은 시각적으로 도약하는 느낌과 리듬감을 주는 동시에 중간축인 主山을 거대하게 보이게 한다.
왜 이런 효과가 있는가?
예를 들어 타이베이 101빌딩(101층)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와 주변의 낮은 빌딩과 함께 볼 때를 비교한다면
후자의 경우 높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이 그림이 바로 그렇다.
원경인 주산은 묵색(墨色)으로 전경과 마찬가지로 묵직하고 또 아주 거대하다.
그 강도는 전경에 있는 다른 바위들과 비교할 때 더 강하고 직접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마치 당신이 바로 산 아래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당신이 산 밑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산 밑에는 또 아주 허령(虛靈)한 구름과 안개가 있어
실제로 산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장담하기 어렵다.
중국의 수련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 친숙한 개념인데,
범관은 ‘생각을 움직이니 눈앞에 다가온다(移念到眼前)’는 일종의 공능을 그림속에 담은 것이다.
화법의 특징
― 사실(寫實)과 사의(寫意)
이 그림은 산에 내재하는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지만 매우 사실적이다.
섬북(陝北)지방 고원 특유의 지형과 지세를 아주 잘 표현했다.
―우점준법(雨點皴法)
범관이 우점준을 만든 이유는 바로 바위의 견고함을 표현해 산의 형체와 질감을 모두 갖추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점준이란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작은 타원형 점을 찍어 바위나 산을 묘사하는 기법이다.
―노련하면서도 강인한 붓터치
붓의 사용은 모두 아주 단단하고 강인하며 견실하다.
점과 윤곽선 모두 아주 견실해서 마치 석공이 돌에 새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위 안쪽의 여백
범관은 바위의 윤곽을 그릴 때 내부에 흰 여백을 남기곤 했는데 일반적인 산수화에는 아주 보기 드문 부분이다.
흔히 서양인이 동양화를 비판할 때 ‘화가가 마음대로 그린 것 같은 광선 처리’를 문제삼는데,
범관은 서양화에서 반사광을 처리하는 것처럼 바위의 윤곽선 안에 여백을 남겨 반사광으로 보이게 했다.
수련하는 이들은 다른 공간에서 그 물체를 보면 미미한 빛을 내고 있음을 아는데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범관의 계산행려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속 물체들이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범관은 윤곽선 안쪽 여백을 통해 바위 사이의 거리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수련인으로서 깊은 내포를 표현하려 했다.
1:3:9의 화면분할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숫자 ‘구(九)’를 아주 중시해왔다.
전설에 따르면 구(九)는 용의 토템이 문자로 변한 것이라 하는데 신비함과 신성(神聖)을 상징한다.
고대에 황제를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제왕(帝王)들 역시 ‘九’를 이용해 상서롭고 경사스러움을 표현하길 즐겼다.
또 음양오행학설에서 九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로 하늘을 상징한다.
하늘에는 아홉 개의 층이 있는데 구층천(九層天)이란 바로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을 지칭한다.
‘황제내경’에도 “천지의 수는 일에서 시작해 구에서 끝난다”라는 기록이 있다.
범관이 그림 속에 1:3:9의 비율을 담은 것은 우주의 구조 및 하늘의 가장 높은 곳(極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1:3:9의 비례관계와 전경, 중경, 후경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층차’와
‘사람과 우주의 관계’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귀에 짐을 싣고 가는 나그네들은 속세의 사람들이 많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채 아주 바쁘고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은유한다.
승복을 입은 구도자는 산길을 헤치며 절벽으로 건너가려 한다.
폭포는 조물주의 은혜를 상징한다. 화폭에서 사찰이 폭포과 가장 가까운 것은 수련을 해야만 하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전경(前景): 속세
이들은 뜨거운 햇빛아래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채를 흔들면서 나귀 네 마리에 무거운 짐을 싣고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이는 마치 속세의 사람들이 많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채 아주 바쁘고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표현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나그네의 앞에 펼쳐진 길은 얼핏 아주 넓게 보이지만 영원히 층차(層次)를 제고할 방법이 없다.
또한 하늘을 볼 수 없으며 심지어 고개를 치켜들 여유조차 없다.
이 층차 중에서 당신은 아주 자유롭다고 느끼고 하고 싶은 대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날마다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마치 같은 평면위를 맴돌뿐 위로는 영원히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경(中景): 수도(修道)하는 층차
이 승려는 화면의 왼쪽에서 산과 고개를 넘고 위험해 보이는 다리를 건너려 한다.
길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고 숲속에서 더듬거리며 찾아야만 화면 오른쪽 숲 뒤에 있는 사찰에 도달할 수 있다.
수련을 해본 이라면 누구나 수련의 어려움을 잘 알 것이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심령을 건드리는 고험(考險)을 만나는 것과 흡사하다.
중경은 앞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황에 놓인 승려를 통해 간고한 구도(求道)의 길을 상징한다.
◎원경(遠景): 우주 최고 의지의 주재
견실하고 둥근 주산은 거대하기 그지없고 하늘 끝까지 우뚝 선 모습이 마치 굳센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다.
이는 우주 최고 의지의 주재자가 줄곧 영원불변하며 아래의 모든 생명을 주시하는 것을 상징한다.
산 양 옆에 그려진 개천, 폭포 및 어스레한 물안개는 흐르는 영혼의 원천(靈源)을 상징하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 그려진 숲은 중경 침엽수림과 비교해 측량할 수 없는 높이와 꾸밈없는 소박함을 전한다.
도끼로 파낸 듯한 우점준은 산의 실질과 골격을 그려냈다.
세포나 분자처럼 방울지는 빗방울(雨點)은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원소와 흡사하다.
이런 그림은 돌에 조각을 새기는 석공처럼 한점 한점 인내심을 갖고 세심하게 그려야 웅장한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다.
마치 수행처럼, 매일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그려낼 수 없다.
원경 주산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끊임없이 중경(中景)으로 흘러드는데 전경으로 갈수록 점차 폭이 넓어진다.
이는 마치 조물주의 은혜가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처럼 만물에 두루 미치는 것을 상징한다.
산속 깊은 곳에 숨은 폭포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폭포의 물줄기는 아주 가느다란데 아마 소리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림 속에서는 사찰이 폭포와 바로 아래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
이는 수련(修煉)을 해야만 주산과 연결된 폭포에서 들리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하늘로 올라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데,
산세(도체․道體)가 아주 높고 험해 어느 정도나 떨어졌는지 거리를 측량하는 것조차 어려워보인다.
대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나가는 말
범관의 ‘계산행려도’는 확실히 대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우점준법과 화면분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잊혀진 다짐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당신이 감격했다면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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