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8. 18:36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 중국화 (中国画) - 중국 최고의 화가 우관중(吴冠中)의 작품을 엿보다.
- 조회645 댓글0 추천0 2010.02.09 16:31 마운틴
국제시장에서 중국화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되는 사람이 바로 우관중이다.
중국화를 대표하는 우화백은 90세를 넘은 연세에도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관중은 근 반세기 동안 노력끝에 국제시장에서 인정하는 중국 작품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우관중의 이름은 마치 국제시장에 널리 퍼진 유명한 브랜드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 ‘제비 한 쌍’( 1981 ), 화선지 수묵채색,70 |
우관중 작품1
우관중 작품2
우관중 작품3
우관중 작품4
우관중 작품5
우관중 작품6
우관중 작품9
우관중 작품10
우관중 작품11
우관중 작품12
우관중 작품13
우관중 작품14
우관중 작품16
우관중 작품17
Culture |세계 미술시장 블루칩, 중국 현대미술의 실체는
세계 미술시장 블루칩으로 불리는 중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시장을 흔들고 있다. 이렇다 보니 중국 현대미술을 알아야 세계 미술을 아는 시대가 왔다. 중국 현대미술, 그 실체는 무엇인가. 중국 현대미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Step 1◇
중국 현대미술 이해하기
지난해 중국 내 미술시장 규모는 무려 9조원에 달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집계한 전 세계 중국 미술시장 규모는 13조에 달한다. 현재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서 기록을 갈아치우는 주인공은 중국의 현대작가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중국 미술은 산수화, 수묵화 등 동양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79년 개혁·개방 정책으로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문화적 해빙기를 맞으면서 중국의 현대미술은 태동했다. 당시 중국 현대미술 1세대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장 샤오강, 우관중, 하오화, 황조우 등이 전성기를 누렸으며 중국 전역으로 확산돼 갔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 현대미술은 절망에 빠졌고 예술인들의 작품은 냉소와 조롱으로 가득 찼다. 그 후 2000년대 이후 냉소와 조롱을 해학과 풍자 그리고 팝아트 등으로 발전시켜 세계 미술계를 이끄는 4대 천황(영국 yBa, 독일 라이프치히, 인도 현대미술)으로 등극했다.
◇Step 2◇
실전! 중국 현대미술
■우관중(Wu Guan Zhong)■
유럽의 수채화를 중국 전통기법으로 그린 ‘연못’은 수묵화로 추상을 즐겨 그리는 우관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통적인 기법에 현대적인 기법을 최초로 접목했다. 중국인으로서 유럽인의 예술 양식을 이해하고 그대로 재현해 냈다. 그는 유럽에서 각광받고 있는 중국 미술계 거장으로 손꼽히며, 중국 전통화법에 서양화적 기법을 도입한 독자적인 화풍으로 유명하다. 중국인 최초로 프랑스에서 문화예술 훈장 받음. 2007년 기준으로 그의 작품가는 평균 20억∼30억원대다.
■하오화(Hao Hua)■
검정 먹만을 이용해 그리는 수묵담채와 기법을 유럽식 수채화에 그대로 접목시킨 하오화의 ‘에게해 섬’. 지중해의 투명한 바닷가를 검정색만으로 이용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 점이 특징이다. 유럽에 중국 전통 수채화를 자연스럽게 선보이는 계기가 됐다. 수채화이면서 유화 느낌이 강하면서 유럽 귀족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져 중국인 작가의 작품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황조우(Huang Zou)■
네이멍구 출신의 황조우는 전통적인 중국화 기법에 서양화에서 느껴지는 액티브함을 네이멍구 지역의 역동적인 인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다른 중국 내 화가들이 중국 전통기법에 현대적 화풍을 가미해서 새로운 중국 현대미술 시장을 만들어 가는 것에 비해 중국화만을 고집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반면 색감, 인물, 터치 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우 독특한 화풍이 특징이다. 이 그림을 포함해서 황조우의 그림은 수백억을 호가하는 국보급 작품이다.
■하오준 (Hao Jun)■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 있을 때를 회상하며 인생의 갈등, 희로애락은 다 먼지에 불과하다라는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그림. 특히 ‘천안문’은 인간의 위업으로 달성한 대건축물도 결국에는 먼지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수채화적 기법을 선보여 매우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오준은 우관중의 수제자이며 인민대회당 주석실 내에 걸린 ‘만리장성’ 그림의 작가다.
■쿠슈에밍 (Ku Xue Ming)■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내 작가들 사이에선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그 영향으로 이 그림도 자세히 살펴보면 본인 모습과 비슷하다. 사람의 각기 다른 수많은 표정을 연결, 격변을 겪은 중국사람들의 얼굴이자 굴곡진 인생을 겪은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 하지만 결코 무겁거나 냉소적이지 않고 인생의 깊은 의미가 담긴 해학적인 그림이다.
쿠슈에밍은 최근 2∼3년 사이에 급성장하고 있는 작가로서 팝아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대중 작가의 대표주자다.
◇Mini Interview_이엠아트 조성룡 부사장◇ “화가만 4000만 명… 특별대접 받으며 활동” 중국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두 가지 오해를 지워야 한다. 첫째는 중국 현대미술이 단순히 팝아트와 아방가르드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오해다. 중국 현대 미술의 근간에는 중국 전통 미술이 매우 탄탄히 깔려 있다. 단순히 팝아트와 아방가르드에 한정한다는 것은 매우 작은 부분일 뿐이다. 팝아트 등이 상업적으로 매우 각광받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중국에서 팝아트를 하는 화가는 10%가 안 될 만큼 일부이며, 미술시장 내 있는 트렌드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 미술시장은 트렌드에 휩쓸리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중국은 예술인의 폭이 넓기 때문에 트렌드를 이끄는 작가들이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화풍을 이끌며 중국 전통기법을 융합하는 움직임이 훨씬 더 많다. 둘째 중국의 미술 시장이 급속 성장을 했다는 보도는 사실 오해다. 중국 정부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천문학적인 숫자로 미술시장에 투자해 왔으며 베이징에는 11개의 문화 특구가 있을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다. 이 문화특구 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한 달 5만원가량) 작업실을 임대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놓고 작품 활동을 활 수 있다. 중국 내 화가가 4000만 명에 달한다. 화가 층이 넓고 두터운 만큼 좋은 예술인이 탄생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민대회당 내에는 수백 점의 그림이 걸려있는데, 이곳 그림은 국보로 취급받을 만큼 자국 내 화가에 대한 위상도 높다. 현재 ‘중국 현대미술 세대전’에서는 우관중, 하오화, 황조우, 두타카이 등 중국 내 신화와도 같은 현대미술계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
지난 6월 25일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중국 미술계의 거성은 마침내 찬란한 빛을 거두었다. 중국의 모든 매체가 연일 사망 소식과 관련 뉴스를 보도하고, 포털사이트에는 전용 링크가 개설돼 그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 ‘우관중이 죽었으니, 이 나라에 더 이상 대사(大師)가 존재하는가?’라는 공개적인 탄식은 이미 그의 생전 궁색해지기 시작한 어떤 이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중국미술관은 즉시 추모전 준비에 돌입했고, 그 외 국내외 수많은 미술관과 미술계 인사들이 분분히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중국 제도권 미술의 부패와 문제를 비판하던 그는 최후의 길까지도 한 치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 세계로부터 추앙받던 거장은 장례식도, 묘비도 거절한 채 바다에 뿌려져 이 역사를 계속 맴돌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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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의 세계에 눈뜬 청춘기 소년은 주저함 없이 당시 중국에서 가장 진취적인 미술학교 항저우예전(杭州藝專)에 원서를 제출했고, 린펑미엔(林風眠) 등에게 수학했다. 졸업 후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인 국비생의 신분을 획득한 그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건너가 동서 문명의 충돌을 직접 체험했다. 추상화가이자 파리 고등미술학교 교수인 J. M. Souverbie는 낯선 동방에서 온 젊은 화가를 깊이 주목했으며, 그가 회화의 순수 형식과 언어 문제를 연구하는 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도자가 되었다. 우관중은 최고의 활동무대에서 풍요로운 예술을 만끽했으며,
졸업 전 이미 살롱전에 두 차례나 입선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자오우지(趙無極), 주더췬 등 그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에 남아 화업을 지속할까 깊이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토양에 기반을 둔 예술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으로 귀국을 선택했다.
그는 제도권에서 가장 빈번히 경질되는 교수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가장 시간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은 극한의 창작활동으로 자신을 몰고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전국 각지로 돌며 자신의 예술 탐구를 지속했다. 열악한 숙식, 험난한 환경을 감내하면서도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식사조차 거르던 스케치 여행은 일종의 고행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간신히 혹은 필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예술 신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절망은 더욱 짙어만 갔다. 사청(四淸)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작품 훼멸도 모자라 아예 창작 금지령이 내려졌다. 삶의 유일한 수단마저 박탈당하고, 병든 몸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이미 극한에 달한 오기인지 곧 발광할 히스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차라리 ‘그림으로 죽으리라’ 절규하며 또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파리에 남은 친구들이 자유로운 무대에서 일가를 이루는 동안, 우관중이 이렇게 견뎌낸 시간은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되었다.
1978년 마오쩌둥 집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관중도 기나긴 암흑의 세월에서 벗어났다. 이미 화단의 원로가 된 그는 기나긴 겨울을 이겨낸 기름진 춘토(春土)가 되었다. 웬만한 이론가의 논리력과 필력을 넘어서는 그는 ‘회화의 형식미’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추상미에 관하여’ 등의 글을 통해 제도권의 창작 이념에 공식적으로 도전했고, 자신의 복권된 지위를 통해 젊은이들의 창작과 연구를 이끌고 지원했다. 35년에 달하는 교직 기간 중 그는 단 한 명의 직계 제자조차 둘 수 없었지만, 저우춘야(周春芽), 황루이(黃銳), 마오쉬휘(毛旭輝), 장샤오강(張曉剛) 등 현대미술의 수많은 주량은 자신의 토대로 그를 지목한다.
우관중의 작품은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되 농촌의 필부까지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양식으로 유화와 중국화 양쪽에서 모두 일가를 이뤘다. 30년 역경의 세월을 흔적도 없이 무색하게 만든 그의 뜨거운 창작열은 국내를 넘어 유럽, 미국, 아시아의 수많은 미술관에까지 전달되었다. 젊은 날 그에게 모더니즘을 알려주었던 파리시는 문화예술 최고훈장으로 다시 돌아온 그를 포옹했다. 평소 “<837C>”(의미:씀바귀, 독, 불꽃 같은 맹렬함과 왕성함)라는 서명을 즐겨 쓰던 그는 안거를 자처할 만한 최후 말년까지도 제도권을 향한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조국을 통렬히 비판하되 동시에 필생의 애정을 다했던 그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와 성원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국 현대미술 시장이 채 형성되기도 이전,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위작 시비를 가리는 재판에 참가해야 했다. 현재까지도 2000년 이래 옥션 거래 총액 집계가 17.8억 위안(약 3200억원)에 이를 만큼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섯 평방미터의 작은 방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위엄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다만 그렇게 불꽃처럼 뜨겁고, 왕성하고, 절절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보연 미술평론가 haiyue01@naver.com | 제173호 | 20100704 입력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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