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6. 06:17ㆍ미술/한국화 현대그림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 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옛말이지만 '고생을 사서 한다'라는 모던한 말이 있다.
이 말이 꼭 들어맞는다.
그림과 술로 고생하는 나나 그런 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내 처나
모두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좋은데 어떡하나.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한다.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 장욱진, 『그림과 솔과 나』
"장 선생은 도와 드릴 건 아무 것도 없어요.
혼자 하시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뿐이예요.
그분이 남이 안하거나 못하는 일을 멋대로 하실 수 있도록 바라볼 뿐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그분이 작품이 안되고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스무 날이고 꼬박 술만 드실 때입니다.
그때는 소금조차도 한번 안 찍어 잡수시지요.
술로 생사를 헤맬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어요.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 후에는 다시 캔버스에 밤낮없이 몰두하시지요.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 장욱진 화백의 부인 동아일보 인터뷰 중에서
장욱진
1917년 11월 26일 ~ 1990년 12월 17일
충남 연기군 동면 송용리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8세 무렵부터 이미 그림에 대한 소질을 보여 1937년에는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1939년에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진학하였다. 경성 제2고보 재학 중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하다 퇴학당한데다가 성홍열을 앓고 몇 년 쉰 탓에 대학 진학이 이른 편은 아니었다. 그는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유학 2세대군에 속하며 어느 정도 서구미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일제하에서는 선전(鮮展) 및 재동경미술협회전(在東京美術協會展=白牛會)에 출품했다. 1944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해 일하던 중 해방을 맞고 박물관 직원과 미술교사로 일하며 미술활동을 재개한다. 1948년 이후에는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2·9전 등에 동인(同人)으로 참가했고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동남아시아 문화교류전, 미네소타대학 미술학부 교환전에도 출품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앙가쥬망전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충남 연기군 동면 내판리에 장욱진 탑비가 있다.
파울 클레나 호안 미로의 영향력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킨 독보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아동화(兒童畵)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기법으로 동심(童心)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데 검소한 색채와 화면의 평면적인 처리가 두드러지며 그의 모든 작품은 소품(小品)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한결같이 생활의 주변 즉 마을·가족·가로수·건물·자전거·어부 등 동화의 이미지를 좇아 프리미티브한 생략법을 쓰는 작가이다. 작품으로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