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8. 16:47ㆍ중국
묘채(苗寨)가 아니고 묘채(妙寨)로세~!!!!!
야트막히 언덕길을 올라서는가 싶더니 짜짠~!!!!! 설마 이런 곳이 숨어있으리라곤~!!!!!!
환영나온 사람들 좀 봐바바! 천호(千戶) 묘채(苗寨) 란 말이 거저 나왔간디?
1,000戶 - 대가족으로 치면 거의 10,000명이 이 골짜기에 산다는 얘기여.
참말로! 절묘하게 생긴 동넬세!
서강묘족 박물관
나, 이번에 너무도 놀랐는데 말여,
묘족(苗族)이 즈덜의 조상(鼻祖)을 '치우'라고 하는걸 보고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당께!
난 여태 ‘묘족’이라면 티벳 계통인 줄로만 알았시야.
'치우천황(嗤尤天皇)'이라면 바로 우리 조상이란 말이여!
('환단고기' 등등에 나오는 내용인데, 금서(禁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많을 뿐이지,)
중국 전토는 물론 아시아 전 대륙을 호령하던 사람이 바로 그 치우천황이란 말여.
염황이제(炎黃二帝) 연합군에게 패망했지만 고대사의 대영웅이랑께!
아니 세상에! 묘족이 치우천황의 자손이라니!!!!!
2층식 구조라거나 내부 설계는 현지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니 그렇다 치지만,
지붕 라인을 잘 보더라고. 어느 나라 식인가를.
저게 한 두해에 생겨나는 게 절대로 아니여.
묘하게 나라마다 민족마다 미적인 감각이 다르더라구.
중국건축과 일본건축을 보면 지붕 모양새나 배분 비율이 확연히 달라.
환경적인 여건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더라니께?
치우(蚩尤) 후예 묘족(苗族)의 대이동(大移動) (펌)
묘족(苗族, 먀오쭈)은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민족이다.
이미 5천여 년 전부터 중국 고대 전적(典籍)에 이들의 선조(先祖)에 대한 기록이 기재되어있다.
중국 왕조 성립 이전부터 중원에서 ‘치우부락(蚩尤部落)’으로 맹위를 떨쳤으며,
상주시대(商周時代)에는 장강 중류 남쪽에 ‘삼묘국(三苗國)’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묘족은 중국 내에서 귀주성, 호남성, 운남성, 사천성,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묘족의 역사적인 다섯 번에 걸친 대이동의 결과다.
묘족 선조는 본래 사천성 아롱강, 민강, 파강, 그리고 가릉강 등의 상류와 중류 지역에 거주하였다.
고대 강족(羌族)이 남하함에 따라 이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것이 묘족의 첫 번째 대이동이었다.
이들은 장강 중류의 북쪽 강한평원과 남쪽 동정호와 팽려 사이에 머물렀다.
장강 중류에 머물던 묘족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문화와 생산력이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로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들은 ‘구려(九黎)’라 불렸다.
구려는 9개 부족과 81개 씨족을 관장하였다.
이때 역시 동진(東進)하던 ‘염제족(炎帝族)’5)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염제족은 구려족에게 격퇴 당하고 황하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구려족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이때 치우(蚩尤)가 등장한다.
나면서부터 총명한 치우는 배우기를 즐겼으며, 용감하여 싸움도 잘 하였다.
장성한 치우는 구려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 병기를 제조하는 등 군사력의 증대를 꾀하였다.
한편 황하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던 ‘황제족(黄帝族)’이 남하하면서 구려족과 충돌하게 되었다.
황제족은 구려족과의 아홉 번의 싸움에서 연패하였다.
다급한 황제족은 염제족과 연합하고 탁록(涿鹿)에서 치우와 대접전을 가졌다.
치우는 이 싸움에서 대패하고 목이 잘렸다.
이후에도 구려족은 계속해서 황제족과 싸웠으나 연패를 당하고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북쪽으로 이주한 일부 구려족은 ‘여국(黎国)’을 건립하였다.
이들이 산동 일대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인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 문양이 오늘날 묘족 자수(刺繡)의 문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연합한 황제족과 염제족은 중국 한족(漢族)의 선조인 ‘화하족(華夏族)’을 형성하였다.
탁록 대전 이후에 있은 계속된 싸움에 또 다른 일부는 포로가 되어 화하족의 노예가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한족의 일원이 되었다.
탁록대전 이후, 대부분의 구려족(九黎族)은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대이동이었다.
이들은 장강 남쪽 동정과 팽려 사이에, 삼묘를 주축으로 부락연맹체 성격의 국가인 ‘삼묘국’을 건립하였다.
이때가 중국 상고시대의 황제(黄帝)에서 요(堯)에 이르는 시기였다.
장강 남쪽의 부락연맹체인 삼묘국(三苗國)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세를 비축하여 강대하여졌다.
요(堯)는 삼묘(三苗), 공공(共工), 환두(歡兜, 또는 驩兜) 등을 공격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순(舜)은 이들을 공격하였다(‘南巡狩猎’).
그 결과 공공은 유주로 이동하고, 환두는 숭산으로 물러나고, 삼묘는 삼위로 쫓겨났다.
이로서 부락연맹체인 삼묘국은 분산, 와해되었다.
이 싸움으로 우(禹)의 아비인 곤(鲧)이 우산(羽山)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삼위로 쫓겨난 무리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나, 일부는 하 왕조 우(禹)에 이르러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다섯 번째 대이동은 와해된 부락연맹체의 이동으로, 다른 이동과는 달리 뿔뿔이 분산되었다.
삼위(三危)로 쫓겨난 삼묘(三苗)는 가장 강한 부족이었다.
이들은 물러나면서 저항하였고, 패하면 또 이동하였다.
이들은 다시 삼위산을 출발하여 남하하였다. 대설산을 지나고, 혼수하(黄河지류)를 건넜다.
이어서 금사강을 따라 남쪽의 운남성 북동부와 귀주성 북서부로 이동하였다.
숭산(崇山)으로 물러난 환두(欢兜)는 가장 짧은 거리를 이동하였다.
숭산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호남성 상덕에 도착하였으나, 다시 동정과 팽려 사이로 이동하였다.
훗날 이들은 주 왕조(周 王朝)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초(楚)와 화목하게 지내 ‘초만(楚蠻)’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전국시대에 진(秦)에 의해 초(楚)가 점령당하게 되자, 일부는 무릉산(武陵山)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에 ‘무릉만(武陵蠻)’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그들은 곧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서한시대(西漢時代)까지 빠르게 발전하였다.
서한시대 ‘장사국(長沙國)’ 승상이던 이창(利蒼)의 가족 무덤인 ‘마왕퇴(馬王堆) 무덤’이 이를 뒷받침한다.
1호 무덤에서 발견된 관을 두른 T자 형 띠가 묘족의 장례 관행인 것으로 보아 묘족 여인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서기 47년 동한(東漢)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된 곳은 지금의 호남성 서부, 귀주성 북동부, 사천성 동남부,
그리고 호북성 남서부 일대였다.
삼묘(三苗) 중 일부는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오랫동안 정착하였으나, 서서히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지방이 귀주성 묘족과 비슷하고 문화적으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귀주성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묘족의 오래된 노래’의 마지막 부분인 ‘산 넘고 물 건너는 노래’에 따르면
동해안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싸움이 없이 평화적으로 이동을 하였다.
점차적으로 본래 삼묘(三苗) 부락연맹체가 있었던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시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
동정호(洞庭湖)를 떠나 오계(五溪) 지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수(巫水)를 따라 남령(南岭)을 들어선 이후 오늘날의 광서장족자치구 융수(融水)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다시 북상하여 귀주성 남동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때가 약 1,200여 년 전인 송 왕조(宋 王朝) 시기였다.
송대(宋代)를 전후하여 대부분의 묘족(苗族)들은 오늘날의 거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원(元), 명(明), 청(淸)의 통치자의 끊임없는 침공을 당하였다.
또한 기근, 질병, 농지의 황폐, 그리고 인구 증가 등의 이유로 지역 내에서 이동은 끊임이 없었다.
청(淸) 건륭연간(乾隆年間, 1736-1795년)에는 묘족들의 호적을 정리하면서
그간 유지해온 부자연명제(父子連名制)를 강제로 폐지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한족(漢族)의 성(姓)을 부여하였다(蔣, 唐, 侯, 楊, 董, 宋, 顧, 龍, 陸, 李, 梁, 毛, 陳, 金, 吳 등).
마치 일제 때 있었던 창씨개명과 같은 만행이었다.
비록 과거와 같은 세력을 비축하지는 못했지만, 묘족(苗族)들은 끊임없이 중원 왕조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국공내전 때, 패퇴하던 모택동은 이들의 도움으로 연안(延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의 묘족(苗族)들은 수천 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겨우 백여 년 전부터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민족 평등이란 미명 아래 몇 십 년 전부터 자치 지역이 형성되고, 비교적 평안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북부, 라오스, 미얀마, 타이 등에 거주하는 묘족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특히 라오스에 거주하던 묘족들은 월남전에 휘말렸다. 1954년 베트남 북부가 공산화 되면서
카톨릭 신자 등이 남쪽으로 탈출로로 이용하던 길이 월남전 동안 ‘호지명 루트’로 사용되었다.
미국 CIA는 이 비밀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 라오스의 묘족을 그들의 비밀전쟁에 이용하였다.
이념에 상관없이 거주한 지역에 따라 서로 총을 겨누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1만 명의 라오스 거주 묘족이 전사하였다.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된 이후, 박해가 뒤따를 약 16만 명의 묘족이 미국, 프랑스, 호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아직 남아 있는 묘족은 월남전에서의 역할과 상관없이 소수민족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베트남, 미얀마, 타이 역시 마찬가지다.
출처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민속공연
공연을 하루에 몇 번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때가 오후 5시 좀 넘었을겨.
이들의 공연 막판은 꼭 저런식으로 관객과 함께하더만.
춤을 추며 태극문양으로 도는겨.
룸메이트 우리 김 선생님, 선물도 안 사시고, 일체 허튼 돈을 쓰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 큰 돈 쓰셨넹? 하하하하하
"선생님과 함께 지낸 추억,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저렇게 복장 갖춘 사람과 사진 찍으면 1$씩이라도 주는 게 매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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