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2009. 3. 26. 14:14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 1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것은 이른바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이다.

이 아름다운 말은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대한민국 헌법에 그것을 적어넣은 고마운 이는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청년들에게 괴롭기 짝이 없는 청춘을 선사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바로 그 사람이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협력한 어떤 헌법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1981년 여덟번째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행복추구권' 조항을 넣었다.

 

    

 

 # 2

 

다시 묻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이것은 무척 이상한 질문일 수 있다. 헌법 제1조가 분명히 그렇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제2조부터 제127조가지 헌법의 다른 조항들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과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헌법 제1조는 그저 종이에 먹으로 써놓은 의미 없는 글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연 대한민국 헌법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할부금을 다 치르지 않은 채 타고 다니는 승용차와 비슷하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다 치르지 않았다.

헌법 제1조는 ‘존재’Sein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Sollen를 선언한 것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진화하는 중이며, 그 진화는 때로 매우 폭력적인 증상을 동반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이후,

우리 국민들은 여러 차례 ‘불법적’인 집단적 주권 행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정부를 무너뜨리거나 헌법을 바꾸었다.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거대한 국민 불복종운동이며 저항운동이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고 야간에 도심을 행진한 그 모든 것이 당정당한 행위였으며,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

그런 행위를 조직하는 데 들어간 희생과 노고는 모두 이 헌법을 획득하기 위해 미리 지불했어야 마땅한 비용을 후불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완전한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가끔씩, 예외적으로만 주권을 행사했으며, 지금도 그런 상황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늘 주권을 행사한다고 착각하거나, 그와 같은 착각을 하도록 강요당하면서 산다.

대한민국에는 국민에게서 나오지도 않았고 국민의 위임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국민의 행복을 해지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부당한 권력이 너무나 많고, 그 힘 또한 매우 강하다.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존재’가 아닌 ‘당위’를 선언한 것이다.

이 당위를 존재로 전환하는 주체는 국민이다. 더 정확하게는 집단으로서의 국민 이전에 시민 개개인이다.

자기가 주권자임을 알고,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나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나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학습하고,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은 부당한 권력이 나의 주권을 침해할 때 분연히 일어나 연대하고 투쟁할 줄 아는 개인.

그러한 개인이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다.

대한민국에는 이런 주권자가 많다. 그러나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데 충분할 만큼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말하고 보니 확실히 불편하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보는 진실이다.

   

 

 

# 3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한 가지다.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

진보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싸운다.

예컨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려고 한다.

진보의 사고방식은 연역적 구조를 가진다.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추상적 공리에서 시작해 구체적 실천 전력과 전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일관성 있고 복잡한 논리 체계를 만든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의견이 갈라지면 누가 옳은지를 두로 논쟁한다.

그들 사이의 내전은 때로 보수와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고 처절하다.  

진보의 경쟁력은 이상을 향한 열정과 논리의 힘이며, 망할 때는 거의 언제나 ‘연합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망한다.

 

보수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불가피한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키려 한다.

어떤 질서든 상관없다.

전제군주제, 개발독재, 천황제, 심지어는 공산당 일당독재조차도 보수가 지키려는 대상이 될수 있다.

보수는 진보와 달리 경험주의적·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견해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익이 일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단결한다.

보수의 경쟁력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단일한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줄서기 문화와 냉철한 이해타산 능력이다.

그래서 보수가 망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부패로 망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보수의 힘은 일반적으로 진보를 능가한다.

보수의 무능과 부패와 나태함이 민중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진보가 승리를 거두며,

그 진보의 승리는 보통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은 5,000만 가지의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질 수 있다.

민주공화국은 그런 생각의 차이를 모두 인정하고 용납한다.

유신 시대 청년들의 사상적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쟁과 공존이 건전한 사회 발전의 필수 요소임을 강조했다.

 

민주공화국은 지적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보장한다.

홍세화 선생이 정치적 망명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귀국 선물로 들고 왔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전파한 기념비와 같은 책이다. 

민주공화국은 딱 한 가지를 배제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것과 다른 생각을 관용하지 못하고 힘으로 말살하려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불관용)이다.

민주공화국에서 관용의 대상이 될수 없는 것은 불관용 그 자체뿐이라는 뜻이다.

‘불관용’은 민주주의를 내부어서 파괴하는 폭탄과 같다.

불관용으로 무장한 보수는 극우가 된다.

대한민국은 50년 동안 불관용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극우 세력이 지배한다.

거기서 풀려난 지 겨우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용의 정신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힘으로, 폭력으로, 때로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률과 제도를 동원하여 이견 집단을 배제하고 말살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극우 세력은 그 힘이 약화되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를 위협할 만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선언한 ‘당위’는 아직 ‘존재’로 전환되지 못했다.

나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하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작정이다.

   

 

 

  

 

 

※ 위에 소개한 내용은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후불제 민주주의》 앞부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책값은 13,000원입니다. 꼭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