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없는 조직력' .. 끌리고 쏠리고

2008. 7. 5. 11:10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클레이 서키 | 갤리온

 



 

 

 

2006년 5월.

폭정에 대한 불만이 높던 벨로루시에서 ‘플래시 몹’(flash mob,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매개로 모여서

주어진 행동을 하고 곧바로 흩어지는 것)을 제안하는 글이 한 블로그 사이트에 올랐다.

수도 민스크의 옥티아브르스카야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내용이었는데 결과는 어처구니 없었다.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사람들 몇 명을 연행해 간 것이다.

그러나 그 폭압적인 과정은 디지털 사진에 고스란히 찍혀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 몹도 잇달았다.

정부로선 고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개 시위를 벌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억압하면 대중이 자료를 만들어 공개해버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아이스크림 몹’ 사례는 이 시대 세계를 움직이는 변화의 한 징표일 뿐이다.

이제 새로운 대중이 탄생하고 있다.

도처에서 ‘대중행동’이 분출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쉽게 가라앉던 분노와 사소한 문제가 거대한 이슈로 사회를 들썩이게 만든다.

개인의 삶이나 사회를 틀어쥐고 있던 권력의 힘은 점차 약해지는 반면,

대중은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시민과 소비자 군단은 권력과 기업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다.

 

 

 

 

 


필리핀에선 정부의 부패에 분노한 시민들이 문자메시지를 통해 순식간에 ‘검정색 복장’ 시위를 벌였고

성추행 파문에 휩싸인 미국 가톨릭교회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평신도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항공사들은 비행기 지연 사태에 분노한 고객들의 조직적인 서명운동에 직면했고

대학생 고객들을 무시했던 HSBC 영국지점은 성난 소비자들의 집단 행동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두 달을 넘긴 촛불집회를 보라.

집회의 대중에겐 정부와 보수언론이 말한 ‘배후 세력’도 없고 지도부도 없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퍼뜨리면서 전국 곳곳에 열정과 분노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원제 ‘Here Comes Everybody’)은

세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변화의 원인과 기제, 양태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그룹 네트워크 및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저자(뉴욕대 교수)는

특히 웹 2.0시대에 우리 사회는 물론 우리의 삶이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도구들에 의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박진감 넘치게 서술했다.

저자는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인 변화의 뿌리를

원서 부제이기도 한 ‘조직없는 조직력’(the power of organizing without organizations)에서 찾는다.

예전의 기준으로 보자면 조직 혹은 ‘배후’가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조직 없이 조직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는 조직의 형성·유지에 드는 비용 때문에 생길 수 없었던 잠재적 조직이나 일들이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새로운 사회적 도구의 등장으로 인한 거래 비용의 급감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학자 세브 파케는 새로운 사회적 도구가 창출해낸 기본적인 장점을 “말도 안될 정도로 쉬운 그룹 형성”이라고 했다.

과거의 장애물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능력을 갖춘 그룹들이 더 쉽게 한 자리에 모여 원하는 대로 해낼 수 있는 방법론을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애물이 제거된 사회에서 대중은 이제 ‘공유’하고 ‘협력’하며 나아가 ‘집단행동’에까지 나서고 있다.

특히 과거 미디어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작업에 진출하는 ‘아마추어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소비자도 말 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예전의 ‘소비자’가 아니다.

약간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만 참여하는데도 큰 힘을 발휘하면서 기업의 말을 되받아치고 불만을 당당히 밝히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 책은 현재를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단한 변화’는 새로운 도구가 도처에 흔해지고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지금, 도구를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시대다.

저자는 말한다. “혁명은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채택할 때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가 새로운 행동을 채택할 때 일어나는 법이다.

대중은 이미 새로운 행동을 채택하고 있다.”

저자는 나아가 혁명적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변화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손해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은 카약 조종과 같다.

우리는 약간의 통제력은 갖고 있지만 방향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질문은 “과연 이런 도구들이 사회의 모습을 바꾸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사회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다.

영미권에서 비즈니스 리더십 분야, 커뮤니케이션 분야, 경제·경영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던 책이다.

‘변화하는 조직’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을 주고 있는 실용서로도 볼 수 있다.

효율적인 조직과 마케팅 등을 고민하는 CEO나 관리자, 마케터 등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책은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고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사회의 모습을 바꿔나가는

현재와 미래의 트렌드에 대해 명석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동적인 변화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송연석 옮김. 1만5000원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