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29. 11:11ㆍ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그들을 대통령으로 키운건 8할이 콤플렉스"
콤플렉스(열등감·강박관념)는 인간의 성장에 걸림돌인가, 아니면 디딤돌인가. 양날의 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답이다. 제대로 극복하면 자기 계발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평생을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갖고 있는 게 콤플렉스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콤플렉스의 정도가 크고 깊은 경우가 많았다.
실제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콤플렉스에 단련된 덕분에 어지간한 수모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콤플렉스를 통해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래서 굴곡이 심했던 시기에도 살아남아 대권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결과론적이지만 콤플렉스가 디딤돌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온감 때문일까. 대다수 대통령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콤플렉스 제어에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때는 디딤돌이었던 콤플렉스가 종국엔 걸림돌로 작용한 셈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콤플렉스를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김호진 고려대 명예교수(전 노동부 장관)가 최근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이란 책을 통해 대통령의 콤플렉스를 분석했다. 대통령 개인의 성장과정·가족관계 등이 분석의 근거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라는 책을 내놨다. 또 정치 컨설팅회사 ‘폴컴’의 윤경주 대표 역시 전임 대통령들의 정치적 배경 속에서 콤플렉스의 흔적을 찾아 분석했다. 이들의 분석을 통해 역대 대통령들의 콤플렉스, 그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 큰 인물·분단 콤플렉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큰 인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김호진 교수는 주장했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인 그는 황해도의 조그만 농촌부락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다. 혈통적 우월의식이 있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던 셈이다. 이런 점이 큰 인물 콤플렉스의 시발점이 됐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한다며 외국을 떠돈 생활은 그에게 ‘주변인 콤플렉스’를 안겼다.
그는 이런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집요하게 권력을 추구했다. 집권 당시 제왕적 리더십을 행사한 것도 큰 인물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실제 그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등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제거했으며, 제헌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추진하자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약해서 도저히 일을 해나갈 수 없으니 나 같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김 교수는 “콤플렉스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독재의 화신으로 돌변했고, 급기야 자존자대의 편집증에 걸렸다”고 했다.
폴컴 윤경주 대표는 이 전 대통령이 ‘분단 콤플렉스’를 지녔다고 분석했다. 이 전 대통령은 해방시점에서 임시정부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지지가 없음에도, 미 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초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은 미군이 추진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집권과정은 그에게 ‘분단 콤플렉스’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전 대통령은 집권내내 반공을 국시로 하고 친미 사대주의 노선을 걷게 됐다고 윤 대표는 주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 친일·좌익·쿠데타 콤플렉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은 콤플렉스의 변주곡이었다고 김 교수는 기술했다. 어린시절 자신을 옥죄었던 가난 콤플렉스의 한을 극복하기 위해 대구사범에 들어갔으나, 교사 시절 일본인 교사와 차별 대우를 받았다. 교사시절 수모를 상쇄하기 위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오히려 친일 콤플렉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해방정국 등 격변기에 국군 장교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지만 현역 장교의 신분으로 남로당에 가담한 것이 문제가 돼 군복을 벗었다. 6·25 때 사면을 받고 소령으로 복귀했으나 좌익 전력 때문에 진급이 늦었다. 결국 그는 좌익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단행했다. 설상가상으로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가면서 독신 콤플렉스에도 시달렸다.
평생을 ‘가난 콤플렉스-친일 콤플렉스-좌익 콤플렉스-쿠데타 콤플렉스-독신 콤플렉스’에 시달린 셈이다. 김 교수는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을 옥죄는 콤플렉스로부터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콤플렉스를 보상하려는 권력 동기가 보통 이상으로 강했다”고 했다. 권력동기는 그를 독재자로 만들었고, 무한 권력을 추구한 유신이 그 결과물이라는 설명이다.
윤 대표는 ‘쿠데타 콤플렉스’에 무게를 뒀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은 본인이 쿠데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고, 그 결과 정보정치와 독재에 집착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는 근거를 경제성장에서 찾고, 이를 국가적 목표로 추진했다고 분석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 주변인·가난·광주학살 콤플렉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초라한 유년시절은 그들에게 주변인·가난 콤플렉스를 안겼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또 둘은 정규 육사 출신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문민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어린시절부터 가난한 삶에 시달렸고, 대구공고를 다녔다는 열등의식도 컸다. 주변부적 생활체험이 콤플렉스화해 인간 전두환에게 성취욕과 공격성을 길러주었다. 그의 야성은 그로 하여금 늘 보스가 되도록 추동했고, 나아가 권력을 만나면서 광폭성을 띠게 됐다. 보안사·안기부 등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펼쳤다.
노 전 대통령 역시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이런 배경이 그의 성취 욕구를 자극하는 충동제로 작용했고, 쿠데타 충동으로 표출됐다. 다만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40여년이나 전두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2인자 역할을 하다보니, 대통령이 돼서도 소극적 리더십으로 일관했 다는 지적이다.
윤 대표는 두 사람이 ‘광주학살 콤플렉스’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진압해 집권할 수 있었지만, 집권내내 정통성의 위기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정통성의 위기는 독재의 원인이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매달렸다. ‘광주학살’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서울올림픽 개최(전두환), 북방정책(노태우) 등 국가적 이벤트에 집중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최초의 단임 대통령’(전두환),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노태우) 등 억지스러운 수사에 집착한 것도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윤 대표는 분석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부잣집 외아들·3당합당 콤플렉스
김 교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외아들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남5녀의 첫번째 아들.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옛날의 외아들은 욕심이 많고 독선적이며 왕자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데, 김 전 대통령은 어린시절의 이런 왕자병이 대통령꿈으로 나타난 경우라는 것이다. 외아들 특유의 외고집은 정치권에 들어서자마자 소영웅적인 충동성을 띠었고, 이는 승부사 기질로 발현됐다. 1969년 40대 기수론, 83년 단식투쟁, 90년 3당합당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집권 뒤엔 하나회 해체와 기무사 개혁, 금융실명제 시행 등을 통해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하지만 감에 의존하는 승부사 기질은 합리적 사고와 정책적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국가경영에는 맞지 않았다고, 그 결과 임기 말 외환위기를 부르기도 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윤 대표는 ‘3당합당 콤플렉스’를 꼽았다. 한국 정당정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3당합당을 통해 집권한 것이, 민주세력임을 자부하는 그에게 집권 내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가 집권과 동시에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고, 같은 당(민자당)을 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것도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집권의 기반이었던 5공 세력을 척결하면서 그는 배신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됐고, 이는 상도동 측근 중심의 정국운영과 황태자 김현철의 국정농단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 출생·색깔·호남 콤플렉스
김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출생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부인의 자식이라는 그의 신분은 유교 문화적 분위기에서 콤플렉스로 작용했고, 이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초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또 조선신민당에 입당했다가 북측 공산당의 기간 조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탈당했지만, 이런 전력은 그를 줄곧 색깔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했다. 콤플렉스를 뛰어넘으려는 자아실현 욕구는 그가 다섯번의 죽을 고비, 6년 반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세 번의 대선패배를 버텨나가는 힘이 됐다.
윤 대표는 색깔 콤플렉스에 주목했다. 색깔 콤플렉스는 보수적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합’ ‘뉴 DJ플랜’ 등을 구사하게 했다. 김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추진해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색깔 콤플렉스를 긍정적으로 극복한 드문 사례라고 분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호남 콤플렉스에도 시달렸는데, 이는 집권과정에서 지역등권론과 DJP연합으로 연결됐다. 집권 이후 호남 콤플렉스는 동진정책으로 표출됐는데, 노태우 정권 출신의 보수적 영남 인사인 김중권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하고 민주당 대표로까지 기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윤 대표는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 가난·탄핵·지역주의·아웃사이더 콤플렉스
봉하마을 귀향 후 재조명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콤플렉스 덩어리라는 분석이 많다. 김호진 교수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가난 콤플렉스가 노 전 대통령을 성취욕과 권력의지에 불타는 인간형으로 만들었고 대권까지 거머쥐게 했다”면서도 “세상은 바꾸려 하면서 자기 자신은 바꾸려 하지 않았고 끝내 콤플렉스의 멍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콤플렉스가 심하면 인사가 감성적 배타성을 띠고, ‘도덕적 우월의식’과 ‘이념적 편집증’이 더해지면 국정운영이 외곬으로 치닫게 되는데, 노 전 대통령이 그 단적인 사례라는 지적이다. 탄핵 이후 통치권을 유린당한 수모감(탄핵 콤플렉스)을 갖게 된 그는 이후 종종 자제력을 잃고 흥분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윤 대표는 ‘지역주의 콤플렉스’를 꼽았다. 영남출신인 그가 호남 정당인 민주당 소속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강한 ‘지역주의 콤플렉스’를 안겼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담론에 매달렸는데, 이는 ‘대북송금 특검’의 수용과 민주당 분당 및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연결됐다.
강준만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정체성을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라고 규정했다. 영남 정치권 아웃사이더와 호남 정치권 아웃사이더인 노 정권은 피해의식에 시달렸고, 이런 특징은 ‘내지르기’보다는 ‘수렴’이 필요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치권과 거리를 둔 노 전 대통령의 귀향생활에 대해 “이명박 정권이 계속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고, 노 전 대통령의 인기는 오르게 돼있다”면서 “그때도 쓰레기만 줍겠느냐. 성질 잘 알면서 왜 그러느냐”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용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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