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2008. 5. 6. 10:43책 · 펌글 · 자료/ 인물

 

 

 

 

 

 

큰나무 스러짐에 천지가 아득

 

 

선생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에 그만 천지가 어둑하고 아득해집니다.
언제라도 찾아뵈면 밭에서 일하시다가 흙 묻은 손을 바삐 닦으시며

“어서 와라” 그 높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다정히 맞아주시고,

선생님 표현하신 대로라면 ‘악’ 소리가 나게 맛있는 된장을 퍼주시고

손수 농사 지으신 알 굵은 감자도 싸주시고, 언제까지라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10대의 문학소녀시절부터 제게 선생님은 그리운 분이셨습니다.

꿈속에서 선생님을 찾아간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흠모나 그리움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선생님의, 등을 곧추세우고 긴장된 표정의 옆모습 사진을 서랍 안에 붙여놓고 바라보면서

저 또한 등을 곧추세우며 젊음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외롭고 처절했던 시간들이셨을 1974년 가을,

처음 선생님을 정릉 골짜기 자택으로 찾아가 뵈면서

저는 그때 선생님께서 겪으시는 고초에 얼마나 많은 문학인들, 독자들, 국민들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으로 작은 위안이나마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자상에 놓인,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와 만년필, 소박한 밥상,

“소설쓰기란 장부가 일생을 걸고 할 만한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그 뜨거운 열정에

외려 제가 큰 용기와 위안을 받게 되었지요.

이곳이 선생님께서 글 쓰고 사시는 곳이구나, 작가란 이런 사람이구나,

작가의 생활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평생의 마음을 새기게 되었지요.

 닮고 싶은 분, 그 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분이기에

제게는 어느 것 하나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는 일, 쓰는 일이 그저 아득하고 두렵고 종잡을 수 없었던 20대 후반의 나이,

문청기질만 가득한 햇내기 작가였던 제게 고통과 고독을 숙명처럼 끌어안으며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하시던 모습과 그 낡고 소박한 자택이 품고 있던 정신적 품격은

어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 어떠한 언설보다도 강렬하고 직접적인 학습효과를 주었던

것입니다.

꿈길로라도 찾아가던, 선생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지내던 소설가 후배는,

글이 안 풀릴 때나 나태해질 때면 방을 나와 선생님 사시는 자택을 바라본다고,

불빛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한동안 선생님이 계시는 곳을 바라보고는

힘을 얻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문청, 작가들, 문학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먼발치에서 선생님을 뵙고

다시금 살아갈 힘, 글을 쓸 힘과 용기를 얻었을는지요.

천지간에 생명만큼 존귀하고 아프고 슬픈 것이 있겠는가 하고 애타게 호소하시며

우리들의 굳은 마음과 잠든 영혼을 일깨우시던 선생님,

늘 닮고 싶은 큰 나무이고 쉬고 싶은 넉넉한 그늘이셨던 선생님,

어둑해지는 저녁, 선생님 혼자 계시는 댁을 나올 때면 선생님의 그 시린 고독과 쓸쓸함에

마음이 아파서 혼자 중얼거리곤 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잘 지내실 거야. 작가시니까’라고.

창작이란 어떻게 말해도 결국은 고통과 고독의 산물이고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서릿발같은 결기와 존엄성과 아픈 사랑의 힘으로 위대한 문학,

장하고 아름다운 생애를 완성하셨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최근에 발표하신 시의 마지막 연을 가슴으로 읽으면서도

이것이 먼 길 떠나시는 작별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천년만년 가까운 곳에 그대로 계실 줄로만 생각하는,

나중된 자의 영원한 미욱함 탓입니다.

선생님, 바람 불고 꽃 지는 봄날입니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는 말을 당연히, 예사로이 해대면서도

선생님께서 떠나신 이 아름다운 봄날의 세상이 저는 낯설고 이상하고 외롭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선생님의 크나큰 빈자리에의 그리움과 슬픔은

남은 자들의 몫일 터인즉

이제 어떤 생명도 아프지 않은 ‘평화와 선’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2008. 05. 06 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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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건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 '눈먼 말' 전문.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 '司馬遷' 전문

 

 





까치 설

섣달 그믐날, 어제도 그러했지만
오늘 정월 초하루 아침에도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푸짐한 설음식 냄새 따라
아랫마을로 출타중인가

차례를 지내거나 고사를 하고 나면
터주대감인지 거릿귀신인지
여하튼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채판에 담아서
마당이나 담장 위에 내놓던
풍습을 보며 나는 자랐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음식 내놓을 마당도 없는 아파트 천지
문이란 문은 굳게 닫아놨고
어디서 뭘 얻어먹겠다고
까치설이 아직 있기나 한가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그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현대문학 200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