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쿠사이 / 마루야마 오쿄 / 이토 자쿠추

2020. 8. 23. 19:45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삶과 작품들 (일본판화)

 

19세기 중엽에서 1933년까지 살았던 아일랜드의 저명한 작가 조지 무어는 호쿠사이를 일러

'호쿠사이의 그림 한 폭은 전 일본인의 생명과 동일하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조지 무어는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주로 파리에서 활동을 했고,

일본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에밀 졸라와도 교류가 많았기에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이렇게 까지 호쿠사이를 격찬한 이유는 뭘까?

 

2000년 가을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간 세계사를 만든 100명의 위인 중 이 호쿠사이를 86위에 올려놓았다.

거의 서양인 일색인 이 리스트에 난데없이 일본화가가 올라간 놀라운 일은 무슨 까닭일까?

 

19세기 말 유럽의 많은 화가들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드뷔시 같은 음악가에 까지 영향을 주어 '파도'라는 교향악을 만들게 한 화가 '호쿠사이',,는

1760년 지금의 동경인 에도에서 태어났다.

1849년 5월에 죽었으니 90까지 장수한 셈이다.

태어난 해 즈음에는 우리나라에선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사기 시작해서 슬슬 죽음자초한 즈음이고,

그가 죽었던 해, 우리나라는 강화도령 철종의 치세가 거의 완료되고 몇년 뒤 고종임금이 재위하게 되는 때였다.

 

하여간 그는 5세 즈음에 유명한 공예가 집안으로 양자를 들어갔으나, 후계자가 되진 못했고,

15-18세까지 책 대본가게에서 일하던 중 목판화가 집에서 도제수업을 했다한다.

이는 아마도 우키요에가 소설의 삽화로부터 시작했으니 삽화 우키요에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18세때인 1778년 우키요에의 대가인 가쓰가와 순쇼의 제자로 들어가

가부키 연극배우들의 그림을 그리며 우키요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그후 도카이도의 풍경을 주제로 한 판화시리즈를 많이 만들었다.

그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1825년부터 1831년사이에 제작된 후카쿠 36경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는 붉은 후지산 (위의 사진)이나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맨 아래)도 여기에 포함된다.

 

당시 풍경판화가 유행했던 것은,

막부시대, 에도와 각 영지를 잇는 도로가 많이 건설되었고 일반인까지 여행이 가능해지자

여행가이드나 여행기 등이 발달하고, 실경산수화에까지 대중적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뿐 아니라 '전국 폭포유람' 등 명승지에 관련된 판화제작에도 힘을 쓴다.

 

그는 1844년 85세의 나이로 '나카노'시 '오부세마치'란 곳으로 와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이곳에는 지금 그의 미술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당시 상공업의 중심지이던 오부세마치에 살던 코우잔이란 상인이 그의 그림에 매혹되어,

이곳에 '헤키이겐'이란 집을 지어 그림을 그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화광인(그림 화자,미칠광자)이란 그의 별명대로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 열정적인 화가이다.

'호쿠사이 만가'에는 4,000여 점이 실린 디자인 도안첩 같은 것으로

여러 동식물이나 인물의 표정과 행동 등을 다룬 것인데,

이것은 에니메이션 왕국인 일본에서, 그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아마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이런 그림을 그린 것 같다.

 

 

 



























 

 

 

 

 

 

 

 

 

 

 

 

 

 

 

 

 

 

마루야마 오쿄 (1733~1795)

 

 

 

 

 

 

 

 

 

 

 

 

 

 

 

 

 

 

 

 

 

 

 

 

 

 

 

 

 

 

 

 

 

 

 

 

 

 

 

 

 

 

 

 

 

 

 

 

 

맛있는 치킨 그림 이토 자쿠추 (伊藤若冲, ITO Jakuchu)

킹효봉 2018. 5. 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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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시금 토요일이 찾아왔군요. 오늘 또 팬티 벗고 정줄 놓고 더 없이 세속적으로 놀 너희들에게 야리꾸리한 그림을 추천 드리기 보다는 좀 차분한 쪽의 그림을 추천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림들 감상하시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셨으면 합니다.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年生)은 1700년대 일본의 화가입니다. 핸드폰으로 보시기 보단 컴퓨터 모니터로 크게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굉장히 섬세한 그림들입니다. 전시를 잘 가지 않는 저로써도 이런 그림은 직접 보고 싶어집니다. 실크에 고급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300여년이 흐른 지금도 보존상태가 좋다고 합니다. 작가 그림의 묘미는 색감이라고 생각하는데, 보존상태가 좋아 다행인 부분! (물론 누렇게 바랜 그림을 복원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당시 일본에는 몇가지 갈래의 유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이 작가는 가노파(狩野派) 화가라고 합니다. 이 화파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중국의송, 원나라의 미술까지 알아야 제대로 된 공부가 되겠구나 싶지만 공부를 보류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분도 공부할 게 많은데, 여기까지 공부하기란 무리... 그래서 단순히 그냥 감상만 간간히 해 오고 있습니다. 이 작가 분 유명해서 우리나라에도 관련 글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에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길!

伊藤若冲 - Wikipedia

写実と想像を巧みに融合させた「奇想の画家」として 曾我蕭白 、 長沢芦雪 と並び称せられる。 目次 [ 非表示 ] 1 生涯 1.1 生い立ち 1.2 隠居、絵師として自立 1.3 町年寄若冲の活躍 ─錦市場再開をめぐって─ 1.4 晩年 2 作風 3 再評価 4 作品 5 鳥獣花木図屏風の真贋について 6 若冲の弟子たち 7 展覧会 8 脚注 9 関連文献 10 関連項目 11 外部リンク 生涯 [ 編集 ] 生い立ち [ 編集 ] 正徳6年(1716年)、京・ 錦小路 にあった 青物 問屋 「枡屋」( 家名 と併せて通称「枡源(ますげん)」)の長男として生を受ける。

ja.wikipedia.org



주로 새를 많이 그린 것 같습니다. 제가 본 그림은 대부분 새였어요. 그 중에서도 치킨을 그렇게 좋아하셨던 듯. 치킨 그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치킨의 멋을 이분 때문에 알게 됐습니다.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요? 치킨 하니까 또 효봉포차에서 판매하는 '데빌치킨'이 생각나 버리네요. 뼈에서 살을 완전히 분리한 후 먹기 좋게 갈기갈기 찢어 밑에 깔린 파채와 겨자소스를 곁들여 먹으면??? ~~~ 조지러 오시기 바랍니다. 효봉포차에 대한 정보는 인스타그램 @hyo1bong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저는 생선 손질을 하러 이만...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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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맛있는 치킨 그림 이토 자쿠추 (伊藤若冲, ITO Jakuchu)|작성자 킹효봉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59] 레오나르도 후지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의 파리의 화단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미술가들이 파리에서 저마다 개성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도 그중의 하나였다. 동경미술학교(현재의 동경예대)를 졸업하고 1913년에 27세의 나이로 파리에 온 후지타는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드로잉 실력으로 유백색 바탕에 누드 여인과 고양이를 그려 유명해졌다.

후지타의 1947년 작‘나의 꿈’

 

그는 일본 전통미술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금박을 사용하기도 하고 유화에 먹을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수틴, 스페인의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후지타는 소위 '에콜 드 파리'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933년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일약 일본화단의 스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서양화가 김환기나 김병기도 자신들이 드나들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앞머리를 단발로 한 후지타를 통해 파리 화단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일본은 전쟁화 전담기구를 설립하고 전쟁기록화, 또는 일본군의 전쟁을 영웅화한 성전화(聖戰畵)를 220여점 제작하였으며, 이 작품들은 군에 헌납되어 순회 전시되었다. 유명한 스타 후지타는 군부가 가장 눈독들이던 화가였다. 그는 전쟁화가로 위촉되어 16점의 대작을 제작했다. '앗츠 섬 옥쇄(玉碎)' 같은 작품에서 그는 치열한 전투의 장면을 웅장한 구성과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로 재현했다. 후일 자신의 행위는 전시하(戰時下)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전 이후 전쟁화가들은 전범으로 몰렸고 가장 규탄을 받은 화가는 후지타였다.

1949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존경했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했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프랑스의 미술관에 기증했으며,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 김영나 서울대 교수·서양미술사

 

 

 

 

 

 

 

 

 

사에키 유조....일본인 서양 화가이며...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객사한 인물이다...

아마 28살때일꺼다.... 맨 아래 작품은 얼굴없는 자화상이란 작품으로 사에키 유조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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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에키 유조|작성자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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