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휘슬러

2020. 8. 18. 19:38미술/서양화

 

 

 

 

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

1834. 7. 14 미국 매사추세츠 로웰~1903. 7. 17 런던.
미국 태생의 미술가.
Tonalism 색조주의

America, circa 1880 to 1910
Tonalism is a style of painting in which landscapes are depicted in soft light and shadows, often as if through a colored or misty veil. Imported to the U.S. by American painters inspired by Barbizon School landscapes, it was a forerunner to the many schools and colonies of American Impressionism which arose in the first part of the 20th century. The most influential practitioners of the style were George Inness, whose roots were in landscape painting, and James McNeill Whistler, whose approach was primarily aesthetic, aiming for elegance and harmony in the colors of a painting. Tonalism's soft-edged realism also had an influence on the photography of the early 20th century - specifically on Alfred Stieglitz and his circle.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1834~1903)아일랜드계 미국 인상파 화가.
매사추세츠 주 로웰에서 토목기사인 아버지에게서 셋째 아들로 출생.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보내고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다 그만두고

1855년 파리로 유학하여 C G 글레르를 사사했다.

구성상의 요소를 추상화하면서 주제성을 배제하는 과정이 음악과 통하는 점이 많았다.
작품의 부제로 '심포니','야상곡' 등과 같은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표작으로 '화가의 어머니','야상곡 연작' 등이 있다.

런던의 밤 풍경을 주제로 한 그림들과

진보적인 양식으로 그린 인상적인 전신 초상화 및 뛰어난 에칭 판화와 석판화들로 유명하다.

명석한 미술 이론가인 그는 영국에 프랑스의 현대회화를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 제1번 : 미술가의 어머니〉(1871~72)

보통 〈휘슬러의 어머니 Whistler's Mother〉라고 함)이다.

그의 '야경화'로는 〈낡은 배터시 다리 : 파랑과 금빛의 야상곡> 등이 있다.

 

 



초기

휘슬러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 그는 아버지가 토목기사로 있던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동안 지냈으며,

도중에 잠깐 영국에 머문 뒤 1849년경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다가 곧 화가가 되기 위해 그 학교를 그만두었다.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파리에 매혹되어 1855년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그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들의 생활 정경〉(1847~49)을 읽고는

곧 보헤미안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학생들을 사귀었으며,

조르주 뒤 모리에의 소설인 〈트릴비 Trilby〉에 나오는 '게으른 견습생 조 세들리'처럼 지냈다.

그는 귀스타브 쿠르베, 앙리 팡탱 라투르, 프랑수아 봉뱅 등의 화가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주의에 호응해 프랑스의 현대 미술운동에 참여했다.

〈자화상〉과 〈자연을 주제로 한 12점의 에칭 판화〉 등의 초기 작품들은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1860년대에는 영국과 파리를 오갔으며, 또한 브르타뉴와 비아리츠 근처의 해안을 여행했다.

그곳에서는 쿠르베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후기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바다에 대한 애정을 명백히 볼 수 있다.

1863년 런던에 정착해서 특히 템스 강을 즐겨 다루었고

이 주제의 에칭 판화들은 파리에 전시되었을 때 샤를 보들레르의 호평을 받았다.

런던으로의 이주

휘슬러는 1863년 낙선전에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를 전시하면서 파리에서 상당히 유명해졌다.

이 그림은 그가 사실주의의 주창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1848년 영국에서 시작된 라파엘 전파 운동에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절충적인 성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는 점점 이상주의적인 그림을 추구했다.

일본 미술의 영향은 〈낡은 배터시 다리 : 파랑과 금빛의 야상곡〉에서 가장 뛰어나게 표현되었다.

그는 동양 미술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도기인 타나그라 입상(立像)도 높이 평가했는데

그 우아한 형태들은 그의 인물화와 소묘에 영향을 미쳤다.

선명한 색조로 그린 일련의 스케치들인 〈6점의 습작 Six Projects〉(워싱턴 프리어 미술관)에는

동양 미술의 요소와 헬레니즘 미술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고전 미술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가 가까이 지냈던 영국의 화가 앨버트 무어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휘슬러는 1860, 1870년대에 특히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교향곡'이나 '화성'과 같은 음악적인 제목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여기에서 그는 음악을 예술의 가장 추상적인 분야로 평가하는 예술지상주의 이론과

프랑스 시인인 보들레르와 테오필 고티에가 주장한 예술간의 '교감' 이론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휘슬러는 음악 그 자체의 애호가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런던, 특히 첼시의 밤풍경을 소재로

시적인 강렬함과 세기말적인 정취를 띠고 있는 야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휘슬러는 당대의 미술 사업에 다방면으로 참여했다.

1878년의 파리 박람회를 위해 만든 스탠드나

그뒤 런던의 그로스버너 미술관을 위해 만든 프리즈와 같은 장식사업에 참여했으며,

특히 런던에 있는 리버풀의 대해운업자의 집을 위해 유명한 공작실(1876 착공)을 장식했다.

1877년 유명한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이 그의 〈검정과 금빛 야상곡 : 추락하는 로켓〉을 비판하자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서 그의 생애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그 소송에서 이겼지만 겨우 1파딩(당시의 영국에서 가장 적은 화폐단위)의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1879년 그는 상당한 소송비용을 지불하는 바람에 파산하게 되었으며,

그결과 첼시에 있는 그의 아름다운 집인 '화이트 하우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연인인 모드 프랭클린과 함께 베네치아로 갔으며 거기에서 14개월 동안 머물면서,

그 도시에 모여든 많은 외국 미술가들 사이에서 곧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유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채색이 아주 뛰어난 파스텔화와 수채화를 그리는 데 보냈다.

'미술협회'로부터 동판화 연작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는

베네치아를 주제로 50여 점의 동판화를 만들었는데,

이것들은 당대의 가장 인상적인 판화 작품에 속한다.

그는 런던에 돌아오자 1880, 1883년에 그의 동판화들을 전시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지만,

완전의 경지에 이르려는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렸기 때문에 점점 어려움에 부딪히고 말았다.

마지막 도전

휘슬러는 말년에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이 현대미술운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890년대경에는 인상주의가 지배적인 양식이었는데,

그 자신은 자연을 모방하는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화가들의 밝은 색이나 기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도시나 바다 풍경 습작들을 그리는 데서 가장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많은 동판화와 석판화를 만들었지만,

다색 석판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단지 3~4점에만 채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흑백 석판화들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1889년 네덜란드의 풍경을 묘사한 몇몇 동판화들은 그의 미술발전의 일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수를 놓은 커튼〉에서는 평면적인 공간 배치가 사용되었으며,

그리하여 시선이 세부보다는 전체 장면에 이끌리게 되는데,

이 점에서 그것은 당시의 프랑스 화가들의 그룹인 나비파의 미술 개념과 비슷했다.

휘슬러는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뒤 런던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논쟁에서 오스카 와일드를 누르고 널리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1888년 그는 예전에 파리 박람회를 위해 공동으로 작업한 E.W. 고드윈의 미망인인 비어트릭스 고드윈과 결혼했다.

휘슬러와 그의 아내는 파리의 센 강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96년 아내가 죽자 휘슬러는 깊은 좌절에 빠져 말년을 슬프게 보냈다.

그는 계속 동시대의 화가들과 교제하고 파리에서 미술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작품활동은 하지 않았다.

평가

1900년대초에 많은 뛰어난 미술 감정가들은

휘슬러가 당대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주요화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다재다능한 미술가의 영향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까지 널리 퍼졌는데,

월터 시커트나 필립 윌슨 스티어와 같은 영국의 미술가들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런던의 야경을 그린 풍경화들과 베네치아를 주제로 한 인상주의적인 동판화들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했는데,

이 점에서 그는 일종의 선구자였다.

그는 개성적인 초상화가로서,

그의 초상화들은 보들레르가 주장한 모더니즘의 철저한 주창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휘슬러는 또한 뛰어난 판화가였는데

전생애에 걸쳐 그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나 장면을 기록한 그의 많은 동판화들과 석판화들은

그의 미술의 특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휘슬러는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그는 세련된 성격과 뛰어난 재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편지들이나 〈경쟁자를 만드는 좋은 방법〉(1890)과 같은 간행물에는 이 2가지 요소가 모두 나타난다.

'10시'(Ten O'Clock)라는 유명한 강연(1885)에서는 '예술지상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강조했다.

말년에 그는 국제 조각가 ·화가· 판화가 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영국에 프랑스의 현대 회화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영국 미술가협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다재다능한 미술가의 명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쇠퇴했으며,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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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 for "Rose and Silver: La Princesse du Pays de la Porcelaine"

1863-1864
Painting
Height: 61.28 cm (24.13 in.), Width: 33.5 cm (13.19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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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turne in Blue and Gold: Valparaiso Bay

1866
Painting - oil on canvas
Height: 75.57 cm (29.75 in.), Width: 50.17 cm (19.75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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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mony in Green and Rose: The Music Room
1860 - 1861
Oil on canvas
37 1/2 x 27 3/4 inches (95.5 x 70.8 cm)
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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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ling Rocket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 떨어지는 불꽃

 

휘슬러... 그를 재판정으로 데리고 갔던 문제의 그림이다.

`공중의 면전에 물감통을 끼얹은 그림'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작품.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관현악곡 `녹턴'을 작곡했던 드뷔시.

`회화에서 중요한것은 주제가 아니라 그것을 색채와 형태로 전이시키는 방식' 이라고 휘슬러는 말한다.

휘슬러가 본 밤의 인상만큼이나 음울하고 몽환적인 바이올린 소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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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s Studio
c.1865
Oil on Millboard
24 3/8 x 18 1/8 inches (62.2 x 46.3 cm)
Hugh Lane Municipal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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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pping on Thames
1860 - 1861
Oil on canvas
27 7/8 x 40 inches (71.1 x 101.6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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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에 있어서도 그는 자연주의적 묘사보다는 추상적 형태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미술가의 어머니>에 그가 붙이고 싶어 했던 제목은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이었다.

이 작품의 차분하고 섬세한 색조는 벨라스케스를 반영하고 있지만

평면화된 공간, 화폭에 절묘하게 계산된 배열은 20세기 회화의 추상적 편향을 예견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특성은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882년 파리에서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쇠라뿐 아니라 보나르나 뷔야르 같은 앙티미스트들에게도 수용되었다.

초상화의 주제에 대하여 휘슬러는 일반대중이 관심을 가질 권리를 공공연하게 부정하였다.

즉 검은색과 흰색의 배열이란 "검은색과 흰색의 배열일 뿐이며

내 경우에는 이 그림이 우리 어머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일반대중이 그 초상의 주인공에 대해 무엇 때문에 관심을 가지며 또 가져야 한단 말인가?"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휘슬러는 이 작품에서처럼 순수한 조형적 가치를 강조하고

그의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즉흥적인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이론이나 실천에 진정으로 함께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인상파처럼 그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휘슬러와 기존의 영국 미술 및 일반대중과의 마찰은

<떨어지는 불꽃 : 검은색과 황금색의 야상곡>이 전시된 1876년 런던 전시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874년경에 그려진 이 작품은

런던의 오락공원에서 펼쳐진, 밤하늘에 쏟아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불꽃을 본 즐거움을 그린 서정적 예찬이다.

영국의 평론가 존 러스킨은 불분명한 이유를 들면서 그 작품에 대해 반발했다.

(왜냐하면 러스킨은 터너의 후기 작품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술적인 권위와 예언가에 못지 않게 민족적인 윤리사상가로서의 최고의 위치에 있던 러스킨은

유명한 기고문에서 "대중의 면전에...한 통의 페인트를 내던졌다."고 휘슬러를 비난했다.

휘슬러는 이에 명예훠ㅔ손으로 고소하였고, 역사에 남는 가장 흥미로운 재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휘슬러의 번득이는 재치는 그가 그린 불꽃 못지 않았다.

그가 남긴 몇몇 구절들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 그림을 "해치우 데" 얼마나 걸렸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틀쯤"이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 이틀간의 작업에 200기니나 요구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다. 나는 일생을 걸려 깨달을 수 있는 지식에 200기니를 요구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이 대답은 법정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그 박수갈채는 오늘날까지도 울려퍼지고 있다.

휘슬러는 승소했지만 단지 명목상의 손해배상금 1파딩(1/4페니)을 받았을 뿐이며, 재판 비용은 그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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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in White no.3
1865 - 1867
Oil on canvas
20 3/8 x 30 inches (52 x 76.5 cm)
University of Birmingham, Birmingham, UK

 

 

At the Piano
1858 - 1859
Oil on canvas
26 3/8 x 35 5/8 inches (67 x 90.5 cm)
The Taft Museum, Cincinnati, Ohio, USA

 

1855년 학생의 신분으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쿠르베의 그 유명한 개인전 <사실주의 전시관>을 보았고 관변미술인 파리 살롱전에 대한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1859년에 살롱전에서 퇴짜를 맞은 휘슬러는 마네와 함께 후일의 낙선전과 유사한 전시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선보다는 양감과 색채로 입체감을 표현한 휘슬러의 <피아노 앞에서>가 쿠르베에게 인정받게 된다. 결국 휘슬러는 쿠르베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되었고, 때로 그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브르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섬세한 색조와 일본 판화의 평면적이면서도 도식화된 패턴에 매혹되어 꽤 오랫동안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일본 판화는 1850년대 파리에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1860년대에 휘슬러는 일본 작품들을 상당히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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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 and Rose: The Lange Leizen of The Six Marks

1864
Oil on canvas
36 x 24 1/8 inches (91.5 x 61.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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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turne in Blue and Silver: The Lagoon, Venice

1879 - 1880
Oil on canvas
20 x 25 7/8 inches (51 x 6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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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turne: Blue and Silver - Chelsea

1871
Oil on wood
19 3/4 x 23 3/4 inches (50.17 x 60.6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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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인상파의 거목 제임스 휘슬러 "내 작품이 문제? 평론가 당신이 문제야"

당신이 미술가라면, 내 작품을 형편없다고 폄하한 비평가에게 어떤 대응을 하겠는가.
아마 대부분은 어쩔 수 없으니 분을 삭일 것이다. 해봐야 소셜미디어에 반박글을 올리는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 명예훼손죄로 평론가를 고소한 열혈 화가가 있다.
그것도 당대 최고로 명망 높은 비평가를 말이다.

이처럼 전무후무한 사례를 만든 겁 없는 화가는 미국 출신으로
거의 평생을 런던에서 활동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년)다.
가히 그의 불같은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사건의 발단이 된 작품은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제목의 유화다.
공원에서 열린 불꽃축제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주제가 뭔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붓질이 과감하고 대상이 상당히 모호하게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하얀색 교향곡 No. 1 : 하얀 옷을 입은 소녀(Symphony in White No. 1 : The White Girl, 1862년)’.
당시 휘슬러의 애인이자 사업 매니저였던 조안나를 그린 초상화다.
1863년 파리의 낙선전에 출품돼 마네의 작품과 더불어 논란의 중심에 서는 동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870년대에 휘슬러는 파격적일 정도로 추상에 가까운 풍경화 ‘야상곡(Nocturne)’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도 그중 하나다.
갤러리에 전시된 이 그림을 보고 당시 영국 문화계를 주름잡던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년)은
화가의 명성뿐 아니라 컬렉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갤러리는 이런 수준의 작품을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혹평을 신문에 실었다.

기사를 읽은 휘슬러는 인격 모독 수준이라며 격분해 명예훼손으로 러스킨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어렵사리 승소하기는 하지만 얻은 것은 파산뿐이었다.
비용 부담을 위해 그는 작품과 소장품은 물론 집까지 모두 경매에 넘겨야 했다.

휘슬러는 왜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소송에 매진했던 것일까.
정말 모욕적인 비평을 참을 수 없었던 게 다일까.

휘슬러는 ‘예술을 위한 예술’ 개념의 전도사 같은 인물이었다.
그에게 그림은 아름다운 시각적 효과 이외에 그 어떤 목적도 갖지 않아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법정 공방 중 그는 문제가 된 작품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에 대해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 회화가 아니라 색채 구성을 위한 화가의 실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결국 그가 이 소송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진짜 이유는
야상곡 연작의 중요성에 대한 예술적 신념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몰이해와 혹평으로 인해 컬렉터 사이에 형성된 불신을 종식해야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편견에 갇힌 러스킨이
휘슬러의 앞선 감각과 미학적 혁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평론과 비평은 꼭 필요하지만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2000년 5월 25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출품된
휘슬러의 1864년작 ‘회색의 화성곡 : 빙판이 덮인 첼시’라는 유화가 다시 한 번 이를 입증했다.

 

‘회색의 화성곡 : 빙판이 덮인 첼시(Harmony in Grey : Chelsea in Ice, 1864년)’.
템스강의 겨울 풍경을 절제된 색상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
2000년 5월 25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286만6000달러(약 32억원)에 낙찰,
현재까지도 휘슬러 작품 중 경매 최고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 2018 Christie's Images Limited.


휘슬러는 어려서 가족을 따라 러시아와 영국에서 산 적이 있다.
부모의 뜻에 따라 신학교, 사관학교를 거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결국 스무 살 무렵에 본격적인 화가의 꿈을 갖게 됐다.
1855년 보헤미안 예술가의 삶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독불장군 성격 탓에 거장의 문하생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철도 없고 허세가 많아 어머니가 어렵게 보내준 돈을 순식간에 탕진하고
빚더미에 앉아 몸도 마음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여행을 통해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는 1859년, 가족과 살아본 경험이 있는 런던에 정착한다.

이때부터 심기일전해 창작열을 불태웠다.
1861년부터는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첫 번째 작품 ‘하얀색 교향곡 No. 1 : 하얀 옷을 입은 소녀(1862년)’처럼
당시 유행하던 화풍의 초상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색상을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
색감의 조화에 집중하는 추상적인 풍경화를 그리며 예술적 혁신을 시도했다.
2000년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회색의 화성곡 : 빙판이 덮인 첼시’가 이 시기에 그려진 실험적인 유화 중 하나다.
런던 첼시에서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제방 근처에 살았던 휘슬러는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이 강을 주제로 동판화, 유화 등 다양한 작업을 했다.

‘회색의 화성곡’은 빙판을 묘사하는 하얀색에서 알 수 있듯 매서운 추위로 얼어붙은 2월의 템스강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멀리 안개 속에 증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예인선의 모습과
제방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실루엣,
앙상한 나뭇가지 등을 제외하면 알아볼 수 있는 형체가 별로 없다.

이 작품은 당시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
예상대로다.
‘하얀색 교향곡 No. 1’ 같은 아름다운 초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싸늘한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럽에 전파된 일본 목판화의 특징인
간결한 묘사, 절제된 색상의 사용과 평평함 등을 접목해
새로운 그림을 추구한 휘슬러의 실험 정신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마무리가 덜 된 그저 그런 작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이 작품이 경매에 등장했던 200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어두운 색감과 미완성처럼 거칠게 처리된 붓질 등으로 인해 경매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
1870년대의 추상적인 풍경화 ‘야상곡’ 연작의 하나.
이 작품으로 인해 평론가 존 러스킨과 법정 공방을 펼치게 된다.
이 때문에 비록 경제적으로는 파산했으나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철학을 널리 공표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언론과 일부 미술계 인사들의 우려에도 불구, 이 작품은 286만6000달러(약 32억원)에 낙찰됐다.
이는 아직까지도 휘슬러 작품 중 최고 경매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 작품이 휘슬러의 대표작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미술관에 소장돼 있기 때문에 시장에 나오는 일이 극히 드물다.
중요한 것은 컬렉터들이 휘슬러가 추구하고자 한 실험성과 혁신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자 했다는 점이리라.

‘회색의 화성곡’ 같은 단색조 풍경화에 대한 주변의 차가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더욱 발전시켜 1870년대에는 약 8년간에 걸쳐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풍경화, ‘야상곡’ 연작을 그렸다.
그 결과 중 한 점이 바로 러스킨과 이론 대결을 펼친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이었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색채의 배합과 배열을 통한 음악적인 색감의 창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작품에 ‘야상곡’ ‘교향곡(Symphony)’ ‘화성곡(Harmony)’ 같은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전에 완성한 작품을 이런 제목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휘슬러는 괴짜였다.
일부러 비평가들을 짜증 나게 만들기 일쑤였고 잘난 척이 심하고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이 그가 예술가로서 일군 독보적인 미학적 혁신과 이론가로서 성취한 업적을 상쇄할 수는 없다.
예술가는 그의 인품이 아니라 작품의 질로 평가돼야 마땅하니 말이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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