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des Sosa

2010. 10. 11. 13:27음악/쟈덜- f

 

 

 

1.

 

 

 출처.  http://blog.daum.net/pbw5701/16455329

 

 

 

Todo cambia  - Mercedes Sosa
     
Sera Posible El Sur
Mercedes Sosa (1935. 7. 9 ~ )
Todo cambia
 
 
     
남미 민중가요들과의 만남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얼마 후, 그 우울한 향수를 달랠 길 없을 때, 자주 들렀던 바가 있었다. 그 근처에는 아르헨티나 해방신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이세�(ISEDED) 신학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학교 학생들이 자주 가던 젊고 저항적인 분위기의 바였다.
때는 바햐흐로 1980년대 중반, 80년대 학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했겠지. 나는 어느날 갑자기 생소한 곳에 혼자 뚝 떨어져 외로워 하다가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그 속에서 오히려 친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곳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 박력있게 내지르는 카리스마, 때때로 휘어 감기는 매력적인 목소리~ 가슴의 맺힌 것들을 모두 끌어 내게 하는 노래였다고 기억된다. 스페인어를 마디마디 이해하던 때였지만, 그 노래는 가슴의 한을 모두 끌어올려 한구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 솔아 솔아 푸른 솔아" 를 부르는 듯 느낌이 절절했다.
그녀가 민중가수이며 체제 저항가수인 탓에 망명까지 했으며, 생기길 어디 시장통 아줌마처럼 생겨서 우리한국사람에게 친숙한 외모를 하고 있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계통이 남미 민중가요 가수들이 시작한 음악운동 Nueva Cancion(누에바 깐시온:새로운 노래) 쪽 이라는 것, 그리고 그쪽 계열의 가수들 - 피노쳇에게 총살당한 칠레 민중의 정신, 빅똘 빠라의 노래, 바에즈처럼 아련하게 노래하는 비올레따 하라, 임병수처럼 목소리를 가늘게 떨던 쿠바가수 빠블로 밀라네스, 남미의 음유시인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노래등 그곳에서는 각종 저항의 가요들, 자유와 개혁을 외치는 노래들이 불려지고 소개되었다.
군정이 끝난지 얼마 후였고, 군부처리문제로 알폰신 민정이 사회화합을 주창하며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폭압의 시절에 목숨을 걸고 부르던 그 노래들은 이제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동양의 한 이방인과 함께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노래들이 그리고 그 저항의 삶들이 하나도 생소하지가 않더라구요. (나를 그곳에 끌고 다녔던 사람은 해방신학하던 형이었는데, 지금 캐나다 어디선가 맘잡고(?) 성직자가 되셨단 소식을 …, 그분은 지금 어떤 노래를 하시고 계실려나, 오로지 성가? ^^ )
출처 : 고훈
Todo cambia - Mercedes Sosa
Cambia lo superficial
Cambia tambien lo profundo
Cambia el modo de pensar
Cambia todo en este mundo
Cambia el clima con los anos
Cambia el pastor su rebano
Y asi como todo cambia
Que yo cambie no es extrano
Cambia, todo cambia
Cambia, todo cambia
Cambia el sol en su carrera
Cuando la noche subsiste
Cambia la planta y se viste
De verde la primavera
Cambia el pelaje la fiera
Cambia el cabello el anciano
Y asi como todo cambia
Que yo cambie no es extraño.
Pero no cambia mi amor
Por mas lejos que me encuentre
Ni el recuerdo, ni el dolor
De mi pueblo y de mi gente.
Y lo que cambió ayer
Tendra que cambiar anaña
Asi como cambio yo
En esta tierra lejana.
모든 건 변하네 - Mercedes Sosa
피상적인 것은 변하지요
심오한 것 역시 변하구요
생각의 방법도 변해요
그렇게 세상의 모든 건 변해가지요
해가 가면서 계절도 변하고요
양치기의 양떼도 변하네요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내가 변해간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변해가네, 모든 건 변해가네
변해가네, 모든 건 변해가네
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태양의 궤도는 변하네
식물들도 변해 봄에는 초록이 되네
맹수의 털도 변하고
늙은이의 머리칼도 변하네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내가 변해간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그러나 내 사랑은 변치 않아요
내 살던 동네와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한 추억과 아픔 그것들이
아무리 멀리 내곁을 떠나 있어도
어제 변한 것들은
내일 또 변할 거에요.
이 멀리 떨어진 땅에서 내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처럼...
     
Mercedes Sosa
소사에 대한 아르헨티나 음악사이트에 올려져있는 글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 아메리카의 소리 voz de America - 어떤 면에서 보면 Mercedes Sosa야 말로 아메리카의 누에바 깐시온의 첫 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전설은 바다와 Alfonsina 란 노래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물론 후엔 라디오에서 듣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그리하여 그녀의 놀라운 가창력과 힘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중략………
Mercedes Sosa 는 이미 예전부터 새로운 개념을 도입시키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누에바깐시온”이란 거대한 빙산의 윗부분이다. 그녀는 우리 대륙 최고의 작곡가들 노래를 부른 가수이며, 그녀를 매개체로 많은 노래들이 세계의 청중들에게 전해졌다. 예를 들자면 그녀로 인해 Violeta Parra 의 노래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Pablo Milanes 와 Silvio Rodriguez 의 노래가 새로운 대중에게 가까이 가게 했으며, 스페인어권에 브라질 가수 Milton Nascimiento 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녀의 도움없이는 많은 아르헨티나 민속노래 작곡가들이 무명에서 생을 끝냈을 것이다.
 … 중략…
그녀 안에선 아메리카의 옛 음악과 새로운 음악이 융합 된다. 마치 벌린 팔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어머니처럼, 그녀는 모든 것을 큰 목소리로 모든 대륙이 들을 수 있도록 나누어 준다 ] 소개가 좀 거창한 감이 있지만 메르세데스 소사는 그 정도의 위치에 서있고, 충분히 평가 받을만 합니다. 아쉬운 것은 군정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서 소사의 의미가 축소되어 가고 있고, 한편에서는 이미 잊혀지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정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 입맛이 씁니다.
이미 예견됐듯이,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하며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포성은 울리고 말았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하나도 없다던 이스라엘 성서의 말은 진리군요.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반복됩니다. 80년대에 듣던 그 노래들을 2003년에 다시 듣거니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전쟁의 소식과 광기로 가득차 있고 여전히 노래는 필요합니다.
AL DESPERTAR
Mercedes Sosa (1935. 7. 9 ~ )
Gracias a la Vida
 

 
  
 
 
 
 

2.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노래운동 Nuevo Cancionero Argentino은 1960년대 페론 정부의 민족음악 보호정책 덕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라디오 방송은 아르헨티나 작곡가의 음악이나 전통 민속음악을 50% 이상 내보내도록 의무가 부과되었고,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시온은 정통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페론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아르헨티나의 노래운동도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정치적 저항성을 담게 되었고,

군부에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실종된 다수의 민중을 대변하는 노래로 변모했다.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5일 아르헨티나 북서부 투쿠만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방송국에서 개최한 아마추어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수줍음이 너무 많아 무대에 올라서도 고작 서너 곡밖에 부르지 못했어요.

나는 이런 소심함을 극복하고 관객과 호흡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노래 자체를 즐겁게 하고싶었어요.

대중의 덕택으로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은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로선 뚜꾸만이나 그밖의 어떤 곳에서도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소사의 음악은 칠레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의 선봉 비올레따 빠라와 누에바 깐씨온의 선구자 유빵끼 등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강력한 저항 음악의 출현을 예고했던 누에바 깐시온 운동에 크게 영향받았다.

그녀는 1966년 아르헨티나 코스킨 페스티발 우승에 이어, 필립스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지명도를 높이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굴곡진 현대사는 소사의 노래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연인인 에비타가 사망한 후, 망명객이 되었던 페론이 재집권하지만 7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곧바로 페론의 두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1976년 다시 군부쿠데타가 발생하고 만다.

군사정권은 반정부 세력에 해당되는 페론 지지자와 좌익 등을 탄압한다.

군부 집권 초기 1년간 수천 명이 실종되었고, 더러운 전쟁 La Guerra Sucia이라고 불리는 1976?83년 7년 동안에는

 9천~1만5천 여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한국에 민가협 어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있듯이,

아르헨티나에서도 이 기간에 실종된 사람을 찾기 위해 붉은 스카프를 두른〈5월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소사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로 아르헨티나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소사의 노래의 커다란 인기는 곧 군부에게 걸림돌이 되고, 소사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당한다.

마침내 소사는 1975년에 체포되어, 죽음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1979년에 고국 아르헨티나를 떠나 망명의 길을 떠났다.

(망명 전 남편의 죽음도 심한 고통이었다.)

"이런 정치적인 문제들은 극복할 수 있어요. 정말 이겨내기 힘든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통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거 아니겠어요."

망명자의 신분이 된 후에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존 바에즈,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등 포크가수들과

전쟁의 만행을 고발하는 콘서트를 열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 자유와 평화를 향해 한 목소리를 냈다.

이런 정치적 행동으로 인해 소사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로 일컬어지고있다.

"난 1979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라디오와 TV에서 내 노래를 내보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같은 언어권인 마드리드로 갔던 거예요. 망명은 가장 처참한 형벌입니다.

누군가 한 개인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대중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 그만큼 강해져야만 한다는 거죠."

하지만 유럽 망명기간 동안 심한 심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소사의 음악적 역량은 보다 원숙해졌다.

결과적으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2월, 군정종식과 더불어 3년간 국외추방을 당했던 소사는 고국으로 돌아와

유빵끼나 록 가수 피토 빠에스Fito Paez 같은 다양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인권을 위한 투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자적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그녀를 누에바 깐씨온 최고의 해석자 반열에 올려놓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죠.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죠.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답니다."

사람들이 소사의 노래가 정치적 이슈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했을 때,

소사는 변화를 인정하며 "난 급격하게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 노래하는 방식의 변화죠.

전세계로 열린 많은 길이 있잖아요.

그럼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잖아요.

 



2000년 앨범 <미사 크리오야Misa Criolla>로 그래미 베스트 포크 수상
 

참고 “Rhythm Planet: The Great Music Makers”, Tom Schnabel著, Universe Publishing, 1998


- Mercedes Sosa

1. Cancion Con Todos(모두가 부르는 노래)
2. Cancion y Huayno(깐시온과 와이뇨)
와이뇨는 폴크로레 형식 가운데 하나로 빠르고 경쾌한 리듬의 무곡이다.

주자마다 즉흥성을 발휘하고 변주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매력을 갖고있다.


3. Caruso
4. Chacarera de las piedras(돌무덤의 차카레라)
차카레라는 아르헨티나 북동부 지역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Santiago del Estero의 폴크로레 리듬이다.

삼바zamba와 함께 대표적인 보통 빠르기의 서정가요이다.

 

5. Cancion del derrumbe indio(준령의 인디오의 노래)
6. De Alguna Manera (어떤 스타일)
7. Drume Negrito (잘자라, 인디오 아기야. 원곡: 아따우알빠 유빵끼)


8. El tuerto y los ciegos(애꾸눈과 장님들) - 찰리 가르시아Charly Garcia와 듀엣
9. Gracias A La Vida - 존 바에즈Joan Baez와 듀엣
10. Hermano, Dame Tu Mano(형제, 자매들아. 서로 손을 잡고)


11. Almas en el viento(알마스의 바람)
12. Inconciente Colectivo - 찰리 가르시아와 듀엣
13. La Belleza(미인)


14. Los Hermanos(겨레)
15. Te recuerdo Amanda(원곡: 빅토르 하라)
16.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하네, 작곡: Julio Numhauser)
17. Unicornio(원곡: 실비오 로드리게스)


18. Vientos del Alma
19. Volver a Los 17(원곡: 비올레따 빠라, 밀톤 나시멘투Milton Nascimento와 듀엣)
20. La Peregrinacion(순례의 밤) 2000년 앨범[Misa Criolla]

 

 

출처 :Verdenen Musikk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