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시회에 오랬더니,

2019. 6. 21. 08:10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무위당 장일순의 창작자세 



무위당이 글씨를 쓰고 난초를 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안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요시찰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붓을 잡고 "먹장난[戱墨]"을 시작했다.

반은 감시자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반은 자신의 정서적 욕구에서였다.

 

무위당이 그때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글씨를 배웠다.

밖에 나가 무작정 뛰노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던 5, 6세 어린 시절에

붓을 잡고 신문지 전체가 먹으로 가득차도록 획을 긋고 또 그어야 했던 호된 훈련과정이

훗날 그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붓을 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할아버지인 여운 장경호(旅雲 張慶浩)는 그 자신이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관동지방의 이름난 서화가인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과 절친한 사이였다.

차강은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墨客)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의병에 참여했고 끝내 '書畵協會'에조차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뜻을 지켰던 분이다.

무위당의 서화는 이러한 차강의 훈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위당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호는 청강(淸江)이었다.

혼탁한 세상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에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로 원주에서, 한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또는 시구를 적어주곤 하였다.

깊은 골 난초는 사람이 없다 하여 그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 (幽蘭不以無人息其香)
넓고 활달한 이 나라 이 강산 (飄逸此江山)
맑게 비운 마음 (淸虛)

그리고 그림을 받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형(雅兄), 학형(學兄)이라는 표현보다는

도반(道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벗이라는 뜻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80년대 말 수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너나없이 열다시피 했을 때

무위당은 한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없이,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만약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날로 나는 붓을 꺾을 것"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은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자세를 나는 무한대로 존경한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 옛날이라고 몇이나 있었겠는가 싶다.

나는 청나라 때 문인화가 정판교의 글을 읽다가 꼭 무위당의 창작자세에 들어맞는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고자 함이지,

그것을 갖고 형통한 세상사람들과 즐기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출처: 장일순 수묵전 (그림마당 민 1991) / 유홍준(영남대 교수) / 팜플렛 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