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5. 08:51ㆍ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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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에 나오는 오주석의「주상관매도 」해당 부분을 직접 옮겨적었고,
다른 해설글들은 지웠으며, 댓글로 남겼던 ‘모놀로그’를 본문으로 올려서 정리해 넣었습니다.
舟上觀梅圖 / 김홍도 / 종이에 수묵담채, 164×76㎝, 개인 소장
오주석 著『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p10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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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느긋이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하도 넓다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그렇다, 김홍도가 시에서 읊었듯이 "물 아래가 하늘이고 하늘 위가 물인가"보다. 또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잎새 같은 조각배는 둥실둥실 흔들리며 기운없는 노인에게 가벼운 어지럼증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늙은 눈에 보이는 저 꽃나무는 어슬프레하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둣하다."
그림은 바로 위 시조 그대로이고 시조는 그림을 꼭 빼닮았다. <<주상관매도>에서는 그려진 경물보다 에워싼 여백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은 마치 지금은 들리지 않는 노년의 단원 김홍도, 그분이 소리하는 가녀린 시조창인 듯하다.
허공 중에 아스라히 떠오른 언덕, 그것은 신기루와도 같다. 그림 한복판의 언덕은 짙은 먹선으로 초점이 잡혀 있지만 오른쪽과 왼쪽으로 뻗어나가는 필선은 점점 붓질이 약해지고 말라가면서 뿌연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꽃나무도 마찬가지다. 가운데 가지 하나가 쨍하고 짙게 보이지만 그 좌우로 가면서는 역시 흐릿해지는 것이다. 나무 아래 언덕의 주름에도 김홍도의 순간의 흥취가 배어 있다.
경물과 여백이 서로에게 안기고 스며드는 이 작품의 시적인 공간감각은 김홍도 노년기 산수화에 엿보이는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저 언덕의 모습은 실제 풍경일까? 아니다. 언덕과 꽃나무는 우리가 바라본 것도, 맞은편에 앉은 뱃사공이 바라본 것도 아니다.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인 주황빛 도포를 걸친 노인의 늙은 눈에 얼비친 풍경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림 속의 노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그대로 화폭 위로 떠오른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우리 옛그림의 맛이 아닐 수 없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저 언덕 위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아래쪽은 저절로 뿌예질 수밖에 없다. 작가 김홍도는 완전히 저 노인과 한마음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시선 또한 작품의 하변 바닥까지 내려와서 노인이 타고 있는 배를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것처럼 그리고 있다.
김홍도는 화제(畵題)를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이라 썼다. "늙은 나이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 듯하네" 라는 글이 주인공의 쓸쓸한 심정을 묘사한 것임을 고려하여, 그 글씨 역시 전체적으로 약간 비스듬히 써서 그 연장선이 뱃전의 노인 쪽을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화제는 김홍도가 한시를 본따서 시조를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