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5. 12:22ㆍ책 · 펌글 · 자료/생활·환경·음식
2016.
황석영 소설가가 ‘음식’을 모티프로 삼아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낸 에세이 『황석영의 밥도둑』을 출간했다. 이 책은 작가가 걸어온 길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함께 웃고 울던 곡절 많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맛깔난 문장으로 풀어낸 ‘음식회고록’으로 굴곡진 한국현대사의 이면에서 묵묵히 살아온 우리네 이웃들과 노작가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읽는 이에게 한 끼 식사가 주는 행복감과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치유해준 한 여인과 주고받은 편지, 출가하여 절집을 돌아다녔던 이야기, 군대 시절 닭서리를 하여 철모에 삶아 먹던 이야기,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함께 먹었던 언 감자국수에 얽힌 사연, 감옥에서 봉사원과 함께 만들어 먹던 부침개, 노티(평안도식 지방의 향토 음식)에 얽힌 이산가족 이야기, 함께 먹거리 여행에 나섰던 사람들과의 이별 이야기 등 한 편 한 편이 저마다 각별하다.
저자 황석영
-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다.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단편소설 「탑塔」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1989년 방북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고, 1993년 귀국 후 방북 사건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사면 석방되었다.
-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객』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등이 있다. 한국문학 100년사를 정리하는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을 펴내기도 했다.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오래된 정원』 『객지』 『손님』 『무기의 그늘』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1 유배지의 한 끼니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
건빵 다섯 봉지와 행복한 죽음
법무부 한정식
범치기 요리
2 흘러간 사랑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
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의 창
애플파이와 칵테일 두 잔
마당 한 귀퉁이의 쓸쓸한 과꽃처럼
그 비듬을 털어주고 싶었어
3 잃어버린 그 맛
배고픈 날, 장떡 지지던 냄새
노티 이야기
시커멓게 언 감자를 먹는 지혜
밤참의 특별한 맛과 ‘온반’의 기억
옥수수 먹듯 산천어를 뜯으며
술 취한 아버지 손에 들린 간고등어 한 손
허리춤에 매달렸던 벤또
4 나그네살이
배불리 먹고 낮잠 한숨
어느 노천카페의 마늘 수프
외베눔 마을의 브뢰첸과 배맛
독일의 가정식
추억의 에스프레소 한 잔
나이든 창부 같은 도시, 베네치아
카프카의 음울한 눈이 생각나는 밤에
5 밥도둑, 토박이 음식
주문진에서 막을 내린 청춘 시대
불목하니로 절밥 신세 지다
경상도 음식 순례
전라도 한정식
땅끝에서 만난 새로운 맛들
바다의 선물, 맛의 혁명
고봉밥을 먹어치우는 밥도둑놈
구쟁기된장국에 자리물회 한 점
사람 거시기 먹고 자라는 돋통시
떠나간 친구가 남긴 맛
이별주나 한잔 할까
1
구치소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식사가 좋은 편이었다. 아직 刑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죄인은 아닌 셈인데다, 날마다 가족 친지들이 면회 오고 걸핏하면 변호사와 접견하게 되어서 산경을 써주는 편이었다. 이른바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때려 조지고, 가족은 팔아 조지고, 피의자는 먹어 조진다’는 말처럼 ‘개털’ 잡범들의 신세도 구치소 시절에는 영치품과 구매물의 인심이 후해서 살도 통통 찌고 속옷이나 침구 같은 준비도 구치소에서 마련하곤 했다.
사식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범털’들은 구치소 식사를 ‘법무부 한정식’이라고 불렀는데, 밥과 국 그리고 찬 두 가지의 규정식 외에 김, 각종 나물, 젓갈, 장조림, 장아찌, 통조림 등등 열 가지 이상을 주욱 늘어놓고 먹었다. 반찬 가짓수가 얼마나 다양한지, 젓갈 한 가지만 보더라도 오징어젓, 꼴뚜기젓, 명란젓, 어리굴젓, 새우젓 등속이 다 있으니 이건 징역을 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가족들이 팔아 조져다가 囚人을 먹는 일에 전념하도록 만든 꼴이었다.
( * 이런 게 군사정권때에 정착되어 '사식'이랍시고 번성하다 민간 정부에서는 부조리의 온상이 된다고 하여 페지된다.)
2
지나간 날의 사랑을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여자는 연장되지 않은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현재의 사람에 관한 가까운 기억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이며, 아니면 할머니나 삼촌이나 사촌형제나 또는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를 떠올리듯이 친근하고 일상적이던 추억을 간직한단다.
그에 비하면 남자들의 흘러간 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퍼즐을 맞추어놓듯이 여자와 가졌던 에로틱한 순간들을 모아서 간직하거나, 쫗고 나쁜 일에 대해서도 전체의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간의 미세한 부분만을 곰살궂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3
민박을 하던 집의 뒷간은 마당 뒷편에 텃밭을 건너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녀가 밤에 뒷간엘 가려면 무섭다고 꼭 나를 데려가서 울 밖에 파수를 세워놓곤 했다. 그러면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초를 서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어야 했다. ‘“날 저문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같은 노래였을 것이다. 그건 누나가 변소에 간 나를 지키러 와서 저도 무서우니까 부르던 노래이다.
4
전쟁이 끝났을 때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야시장에 흘러나온 헌책들을 죽어라고 읽었다. 초등학교를 나오기 전에 이미 나는 세계명작이며 어른들이 보는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거의 모드를 읽어버렸다. 역시 독서는 글 쓰는 능력도 길러주기 마련이라 작문시간이 되면 나는 담임선생을 깜짝 놀라게 했다.
5
만찬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은 언제나 활달하게 좌중에게 음식을 권하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김主席은 15도짜리 들쭉술을 좋아했다. 들쭉은 제주도의 먹구슬처럼 새까맣고 동그란 일종의 들딸기라고 하는데,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 진품 들쭉술은 약간 쌉싸름하고 조금 떫은 것이 진한 적포도주 비슷하면서도 매우 향기롭다.
6 온반
내가 몇 차례 김 주석과 나눈 점심 중에 한번은 온반을 먹게 되었다. "이거이 주로 먼길 떠나는 사람들이 먹었디. 손님이 많고 일손이 바쁘고 할 적에 온반 한 그릇씩 주면 얼마나 편리했겠소. 속도 풀리구 든든하디."
온반 역시 설이나 제사 뒤의 비빔밥의 유래와 같은 계통의 음식이었을테지만 추운 지방에서는 더운 국물을 부어서 먹었던 것이다.
국물을 낸 쇠고기나 닭고기를 잘게 찢어 갖은 양념을 해놓고 볶은 표고버섯과 숙주나물을 두고, 가늘게 채썬 달걀 지단과 녹주전을 밥 위에 얹고 나서, 그 위에 양지머리나 닭을 푹 고아낸 맑은 육수를 부어서 먹는다. 대개는 국물을 자박자박하게 잡지만 나는 뜨거운 국물을 밥과 건더기가 푹 잠기도록 부어 먹는다.
7 스파게티
우리가 이탈리아 음식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피자와 스파게티다. 그러나 이것들은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음식일 따름이다. 전채(前菜)는 '안티파스토'라고 하여 햄이나 샐러드 또는 해산물 등이다.
다음으로 스파게티 등속의 라자냐, 피자 등을 먹는 첫번째 접시가 '프리모 피아토'이고, 고기나 생선이 나오는 주요리는 '세콘도 피아토'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먼저 샐러드를 먹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주요리와 곁들여 먹는데 '콘토르노'라고 한다. 그리고 후식이 나온다.
스파게티 같은 파스타와 후식만으로 식사를 끝내는 것은 마치 반찬만 먹은 셈이므로, 생략한다 할지라도 주요리는 꼭 먹어야 하는 게 그들의 전통 식사법이었으나 요즘은 많이 간소해졌다.
8 홍어좃
어부들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중간상인들은 홍어가 들어오면 뒤집어 배를 살피고 나서 수놈 홍어의 좃부터 얼른 떼어낸다. 암넘과 같은 가격을 받아내려는 속셈에서다. 그래서 만만한 게 홍어좃이 되어버렸다.
9 영암 어란
바다에서 잡히는 숭어가 아니라 갯벌에서 낚시로 잡히는 숭어를 참숭어라고 따로 부르는데, 참숭어는 아랫배가 축 쳐질 정도로 큼직한 알을 배고 있다. 거의 한 뼘만한 크기의 알이다.
숭어의 알을 내어 우선 맛좋은 간장에 하루이틀 담가둔다. 장이 배면 건져내어 한식경쯤 물에 담가두었다가 건져서 보름쯤 그늘에서 말린다. 그것을 무거운 돌로 눌러두었다가 다시 말린다. 말리는 동안 틈틈이 참기름을 바른다. 바르고 말리고 하기를 다시 스무 날쯤 하고 나면 짠닥짠닥한 어란이 완성된다.
어란을 칼로 얇게 저며서 술상에 내는데 고소하고 감칠맛 나고 쫀득러리는 것이 소주 안주로 곁들이면 좀처럼 속이 패지도 않는다.
10 칠산멸치
멸치가 미어터질듯이 알을 배고 있었다.목포 건어물 시장에서 이것을 찾으면 아주 특별한 단골손님이거나 기관장들에게만 겨우 한 상자씩 내어준다고 하였다. 잡는 철이 보통 멸치와 다른데 언제가 적기인지는 오래 전 일이라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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