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죽기 직전에 남긴 유서

2017. 3. 21. 08:27책 · 펌글 · 자료/ 인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죽기 직전에 남긴 유서


1945년 4월 29일 자정을 갓 넘겼을 무렵, 베를린에 있는 총통의 지하 벙커에서는 조촐한 결혼식이 거행됐다.
신랑은 56세의 독일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 신부는 33세의 에바 브라운이었다.
 
주례는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가 불려온 발터 바그너라는 공무원 출신의 국민척탄병(민병대)

병사가 보았다. 국민계몽선전장관 요하힘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나치당 총통대리 마르틴 보르만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약식으로 거행된 이날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제3제국의 혼례준칙에 따라
[완전한 아리안 민족의 후예이며, 결혼을 가로막는 유전성 질환은 없다]고 선서했다.


이어 두 사람은 결혼신고서를 작성했다.

에바 브라운은 결혼 신고서를 쓰면서 姓을 [브라운(Braun)]이라고 적으려다가, 실수를 깨닫고 두 줄을 그어

B자를 지워 버리고 [히틀러(Hitler), 舊姓(구성) 브라운]이라고 적었다.
이날이 오기를 13년 동안 기다려 왔던 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40시간 히틀러의 부인으로 산 에바 브라운은 결혼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남아 있던 측근들에게
결혼피로연을 베풀었다(주례를 본 바그너는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다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어 히틀러는 두 개의 유언장을 口述(구술)했다.
하나는 독일 국민과 군대에게 보내는 [정치적 유언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유언장]이었다.
[개인적 유언장]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투쟁하는 동안, 나는 결혼 생활을 책임질 수 없다고 믿고 있었지만, 生의 마지막을 앞둔 지금, 나는 한 여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참된 우정을 지켜 왔고, 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포위된 이 도시로

찾아왔다. 그녀는 소원대로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녀가 결혼을 축하하자 에바는 [이제는 나를 히틀러 부인이라고 불러도 돼]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情婦(정부)와 함께 빨치산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屍身(시신)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이미 자결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굳혀 주었다.
 
4월30일 오후 히틀러와 에바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총성이 들렸다.
측근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매캐한 화약 냄새와 청산가리 냄새가 났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에바는 청산가리로 자결했던 것이다.

 


▒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 남긴 유서


이 유서는 히틀러가 자살을 하기 전 1945년 4월 29일 베를린의 벙커에서 작성한 것이다.

정치적 유언과 개인적 유언으로 나누어지며 정치적 유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 유언의 부분은 윌리엄 L.샤이러의 저서 '제3 제국의 흥망'에서 발췌한 부분에 생략된 부분을 더하여

유언서 전문을 작성하였다. 개인적 유언은 요하임 C.페스트의 저서 '히틀러 평전'에서 전문 발췌한 것이다.

 


▒ [첫번째] 정치적 유언


내가 독일국에 강요된 제 1차 세계대전에 지원병으로 출전하여 적으나마 봉사해온 이래, 이미 30년 이상이

흘러갔다. 이 30년 동안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만이, 나의 사상, 행동, 생활의 지침이었다.

그것은 삶이 있는 인간이 일찍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힘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이 30년 동안 내 시간과 업무능력, 내 건강을 소진했다.

 

독일에서, 내가 또는 다른 누군가가, 1939년의 전쟁을 원했다고 하는것은 거짓이다. 전쟁은 전적으로

유대민족, 또는 유대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국제적 정치가가 원했고 , 또 도발된 것이다.

 

나는 후세가 언제까지 무시할 수 없는, 그리고 금번 전쟁 발발의 책임을 나에게 돌릴 수 없을 만큼,

수도없이 군비의 제한과 관리를 제언해왔다. 그리고 또, 나는 저 비참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두번째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세기는 거듭해서 오고 갈 것이지만, 우리의 도시, 기념 건축물의 폐허를 보면 궁극의 책임자에 대한

증오감이 항상 새롭게 불타오를 것이다.

 

국제적 유대민족과 그 협력자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이러한 모든 일에 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다. .

독일-폴란드 전쟁 발발 3일전, 나는 또다시 자르 지구의 경우와 유사하게 국제적 감독 아래에서의

독일-폴란드 문제 해결을 베를린의 영국대사에게 제안했었다.

 

이 제안은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일부는 상업적인 이유에서, 또 일부는

국제적 유대인이 유포한 선전에 영향을 받고, 영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거부되었다.

 

나는 또한 유럽의 국가들이 국제적 음모에 의해 자본과 금융으로 사고 팔리는 주식처럼 또 다시 취급된다면,

그땐 잔혹한 투쟁을 해온 진범인 유대종족은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해왔다.

 

더욱이 인도적 수단에 의한다 하더라도,그 진범이 이런 유죄에 대해 죄값을 치름없이 수백만의 유럽 아리안

민족의 자녀들이 굶어죽고, 수백만의 성인이 죽어가며 수백 수천의 여자와 아이들이 도시에 닥친 죽음에

불타고 폭사당하는 이 현실에 한치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좌절에도 불구하고 , 한 나라의 생존을 위한 빛나는 영웅적인 투쟁의 상징으로서, 역사에 남을 6년간에

걸친 전쟁을 치른 오늘날, 나는 이 나라의 수도인 이 거리를 버릴 수는 없다.

 

이곳에 대한 적의 공격에 비해 저항할 힘이 훨씬 더 적고, 창조성이 결여된 그들만큼 현혹된 이들에 의해

우리의 저항은 점점 더 약화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역시 자진해서 이 도시에 머물러 있는 다른 몇 백만의

국민들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한다.

 

그리고 또, 나는 유대인들이, 그 신경질적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공할, 새 구경거리를 바라는 적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따라서 나는 베를린에 머물며, 총통의 지위와 총통관저가, 이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자진해서 죽음을 택할 결심을 했다.

 

나는, 우리의 농민, 노동자들의 측량할 수 없는 공훈과 업적, 내 이름을 걸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역사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공헌한 것을 알고, 환희에 가득찬 심정으로 죽어가겠다.

 

나는 마음속 깊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투쟁을 포기하지 말고 더 나아가 클라우제

비츠의 교리와 일치하는 곳이면 어디서건 조국의 적들에 맞서 계속 싸워나가는 것이 나의 자명한 바램이다.

 

우리 병사들과 죽음까지 그들과 함께한 나의 희생에 의해 씨앗이 뿌려졌고, 그것이 어느때인가 독일 역사

속에서 싹이 터서 성공하여 진실로 통일된 국가로서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빛나는 재생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많은 용기있는 남녀들이 최후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의 생명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부탁해왔고, 마침내 그들에게 이와같이 행동하지 말고 그보다 국가의 전투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 운동의 설립자이자 창시자로서의 내 자신이 비겁한 사임이나 항복보다 죽음을 택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여 국가사회주의 사상안에서 우리 병사들의 저항정신을 가능한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강화하기를

육군과 해군, 공군의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해군은 이미 그렇게 되었지만, 독일 육군장교의 장래는 지역적인 항복은 문제 외이고, 무엇보다 먼저

사령관이 된 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임무에 충실히 헌신하여 빛나는 모범을 표시하는 것으로

명예를 삼아야 할 것이다.

 

 

▒ [두번째] 정치적 유언

 

나는 죽기 전에, 이전 독일국 원수 헤르만 괴링을 당에서 제명하고,

1941년 6월 29일의 명령에 의해 되니츠 제독을 독일대통령,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한다.

 

나는 죽기 전에, 이전 S.S.의 라이흐스퓌러 겸 내무장관 하인리히 히믈러를 당과 모든 국가의 관직으로부터

추방한다. 그를 대신하여, 나는 S.S.의 라이흐스퓌러 겸 독일경찰의 지도자로 대관구지도자 카를 항케를,

제국 내무장관으로 대관구지도자 파울 기슬러를 임명한다.

 

내게 대한 불충은 고사하고 괴링과 히믈러는 내게 알리지도 않은 채. 내 의사에 반하여 적과 비밀리에

교섭하고 또, 비합법적으로 국가의 지배권을 탈취하려고 기도함으로써 전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오욕을

남겨주었다.

 

독일민족에게 계속되는 전쟁의 과업을 그들의 뜻대로 모든수단을 다해 수행할 존경할만한 이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구성해주기위해, 나는 국가의 총통으로써 새 내각을 구성할 인물들을 다음과 같이 임명한다.

 

제국 대통령 : 되니츠
제국수상 : 괴벨스 박사
당 장관 : 보르만
외무장관 : 자이스 잉크발트
내무장관 : 대관구지도자 기슬러
전쟁 장관 : 되니츠
육군 최고사령관 : 쇼르너
해군 최고사령관 : 되니츠
공군 최고사령관 : 그라임
S.S.의 라이흐스퓌러 겸 독일 경찰의 최고 지도자 : 대관구지도자 항케
상무(商務) : 풍크
농무(農務) : 베케
사법 : 티이락
문화 : 쉘 박사
선전 : 나우만 박사
재정 : 슈베린 폰 크로지크
노동 : 후프파우어
군수 : 자우어
독일 노동 전선 지도자 겸 정무(政務)장관 : 라이 박사

 

마르틴 보르만과 괴벨스 박사, 그리고 그외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어떤 상황에서도 수도를 떠나길 원치 않고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 자신의 생각보다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기를 바라는 내 바램을 그들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동지로서의 충직함과 업적으로, 그들은 죽은 후에도, 영혼은 그들 가운데 살아가며 늘 함께 하고자 하는

내 희망처럼, 내 가까이에 남게 될 것이다.


검소하고 부정하지 말며, 무엇보다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지구상의 그 어떤것보다 국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끝으로 할수있는한, 국가사회주의 정부의 통합이라는 과제는 모든 이들이 개인의 흥미보다

일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하기 위한, 다가오는 세기의 임무를 나타낸다는 점을 늘 기억하라.

 

나는 모든 독일 국민들, 국가사회주의자들과 모든 남녀와 독일 국방군의 모든 병사들이,

죽을때까지 새로운 정부와 그 대통령에게 순종하고 충실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정부에게, 민족에 관한 여러 법령을 최후까지 유지하여,

모든 민족의 해독자인 국제적 유태민족에 철저히 저항할 것을 명한다.

 

1945년 4월 29일 04:00 베를린에서..


[증인 : 요제프 괴벨스 박사, 빌헬름 부르그도르프, 마르틴 보르만, 한스 크렙스]

 

 

▒ 1945년 4월29일 베를린에서 남긴 히틀러 유서[개인적]


나는 지난 전쟁 기간 동안 결혼하는 것이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믿었기에 지금 지상의 이력을 끝내기에 앞서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다음 자유의사로 거의 완전히 포위된 도시로 들어와서 나의 운명을 함께 나누려는

이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에 따라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은 민족에게 봉사해야 하는 나의 일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우리에게 보상해줄 것 이다.

 

내가 가진 것은 그것이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만, 당의 소유가 된다.

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 소유이고, 국가마저 파괴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들인 그림들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았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내 고향 도시

도나우 강변의 린츠에 화랑을 건설하기 위해서 모았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귀한 소망이다. 유언장 집행인으로는 가장 충실한 당 동지 마르틴 보르만을

임명한다. 그는 모든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릴 권한을 가진다.

 

개인적인 추억의 가치를 가진 것이나 시민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나의 형제자매들과

내 아내의 어머니, 그리고 그도 잘 알고 있는 충실한 직원들에게, 특히 여러 해 동안이나 업무에서 나를

도와준 나이든 남녀 비서들과 빈터 부인에게 나누어줄 권한을 가진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파면이나 항복의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지난 12년 동안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내 일상의 업무 대부분을 처리한 이곳에서

즉시 불태워진다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1945년 4월 29일 04:00 베를린에서..


[증인 : 요제프 괴벨스 박사, 마르틴 보르만, 니콜라우스 폰 벨로브]

 

 

▒ 그림을 좋아했던 히틀러

 

평범한 독일소년, 평소 미술을 좋아 했으며 그의 꿈은 목사였다. 그의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근친관계로 아버지와 그의 사촌과 결혼한부부에서 태어났다.
후에 그는 아버지를 싫어 하여 죽어도 냉담하게 되었다고한다.

 

반면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에는 매우 슬퍼하였었다.
20대의 그의 부모님이 죽게되고 빈으로가서 화가의 꿈을 품게 된다 .
그는 유산으로 어는정도 살만했고, 그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제출하지만 불합격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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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지망생이였던 히틀러는 살아생전 700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남겼다.

그 일부를 공개한다.

 

 

 

 

 

 

 

 

 

 

 

 

 

 

 

 

 

 

 

 

 

 

 

 

 

 

 

 

 

 

 

 

 

 

 

 

 

 

 

 

딴에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라고 항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류에 엄청난 빚을 지고 간 사람들..

두번 다시 이런 사람들이 정치에 발 부칠수 없도록 우리 모두 각성할 지어다.

 

 

 

2012/12/27 - 휘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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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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