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9. 09:14ㆍ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글쓴이. 이정우
모든 일은 시간 속에서 벌어진다.
사건들은 시간의 지평을 그 조건으로 해서 세상 속에 얼굴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생생한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현재를 산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현재를 사는 내가 경험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확한 외연(길이)은 무엇일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현재인 것일까?
1시간? 현재라는 것의 생생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1시간도 길지 모른다.
아니 생각해 보면 현재의 길이는 무한히 짧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현재는 1시간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
일상의 삶에서 현재라는 시간의 감각은 몇 시간, 심지어 며칠일 수도 있다.
아니 몇 달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순간”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벌써 지나가버리는 순간)의 흐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현재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재를 과거와 함께 생각해 보면 사태를 달리 파악할 수 있다.
과거는 현재가 흘러감에 따라 그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에 불과할까?
창고에 쌓이는 물품들처럼 계속 쟁여지는 것일 뿐일까?
과거를 달리 생각함으로써, 더 정확히 말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는 시간에 대한 좀 더 입체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과거는 늘 현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가 바다 위에서 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아래에 거대한 빙산이 존재하듯이,
과거는 현재의 바로 아래에 현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사실 현재가 ‘흘러가는’ 것은 그것이 현재인 동시에 과거라는 사실 이외의 것이 아니다.
시간이란 현재인 그 순간 곧장(아니, 동시에) 과거가 되기 때문에 ‘흘러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와 과거의 공존과 현재가 동시에 과거로 ‘되는’ 운동이 없다면 현재란 허깨비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현재의 역동성과 생생함을 밑받침해 주는 것은 현재 자체가 아니라 바로 과거라는 사실을 뜻한다.
과거가 현재 바로 아래에 늘 존속함으로써, 현재는 과거로 흘러가고 과거는 현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20세기 철학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앙리 베르그송과 질 들뢰즈는 시간의 이런 근저를 정치하게 분석해 보여준 바 있다.
과거는 그저 흘러간 현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또 그저 창고에 쟁여 있는 낡은 재고품들인 것도 아니다.
현재는 과거로 흘러감으로써만 현재일 수 있으며, 과거는 늘 현재의 아래에서 역동적으로 현재를 가능케 하고 있다.
현재는 단지 ‘지금’인 것이 아니라 지금과 과거(의 어떤 특정한 단면)의 동적인 혼합체이며,
과거는 항상 현재와 혼합됨으로써 계속 새롭게 생성해 간다.
미래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미래는 항상 우리 옆에 와 있으며, 현재는 과거로 흘러감으로써만 현재일 수 있듯이
또한 미래를 계속 불러들임으로써만 현재일 수 있다.
미래는 항상 현재와 함께 있으며, 우리의 기대, 희망과 절망, 불안, 기다림, 기투(企投) 등등과 함께하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 미래를 일직선상에 표시하고, 시계라는 기계를 기준으로 삼아 계산하는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 개념일 뿐이다.
시간이란 현재, 과거, 미래가 입체적으로 함께 생성하면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역동적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이런 구조는 나라는 개인에게, 우리라는 집단에(물론 무수한 형태의 ‘우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주 전체에 있어 다르다(여기에서 ‘우주’란 물리적 차원으로 추상된 우주, 자연과학적 우주가 아니라
생명, 정신, 역사와 문화 등등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우주이다).
특히 ‘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함축한다.
‘우리’라는 개념에는 하나와 여럿의 존재론이 들어 있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우리’인 한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나 이 하나는 개체의 경우와 같은 의미에서의 하나는 물론 아니다.
그것은 매우 성긴 하나이다. 그래서 개개인과 ‘우리’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지금의 경우는 한국 사람들)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고 있지만,
모든 개개인이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을 공유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못할 때, 즉 역사를 함께하지 못할 때, 개개인과 ‘우리’ 사이의 성긴 간극들은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대가 달라지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기억을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들 사이의 메우기 힘든 균열을 목도하고 있다.
이는 곧 역사를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들의 공존을 뜻한다.
지나간 세월을 살아온 세대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지난날 사람들이 어떻게 투쟁했었는지, ‘좋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런 세월이 오늘날의 현실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역사가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기억이 공유된다.
과거는 저 멀리 흘러간 지난날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바로 아래에서 약동하는 ‘현실’이다.
기억을 그저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 재고품인 양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그것은 그저 소산적 기억일 뿐이다.
현재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작동하면서 현재를 만들어 가는 과거,
그런 과거의 기억 즉 능산적 기억을 약동하게 만드는 것이 사유가 죽어버린 듯 보이는 이 시대에 사유가 해야 할 일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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