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이 감방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

2011. 1. 4. 16:41책 · 펌글 · 자료/문학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석 자도 떼어버리고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구 칸도 못 되는 방 속에 열 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듯이 했는데

그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 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 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여움을 받는답니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방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와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이나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요.

지금 조선에서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처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 중에서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요.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 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 버려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 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못하는가?

 

- 심훈, <거리의 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