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27. 22:59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몇년만인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 물어물어 드뎌 찾았네,
은둔이여 칩거여,
왜 이리 길어,
이젠 좀 나와라,
다들 보고싶어 하잖냐...
국어시간에 졸기만 했는지 띄어쓰기 무시하고
쉼표 조차 아랑곳 없는 거친 억양이 속사포 처럼 수화기 저 쪽에서 튀어나온다.
목소리도 잊어
누구쇼?
물었을만큼 오랜만인데 동창회 때문에 연락했단다.
아이 첫돌때 우리집에서들 만나고 그 후 못 봤으니 십수년이 넘었다.
여러 제약으로 외출도 힘들고, 그러다보니 스스로도 위축되어
집안과 단지내에서만 뱅뱅도는 세월이었는데,
- 너그 실랑은... 잘 지내지?
대가리 꽁지 다 자르고 대뜸 남의 신랑 안부 부터 궁금한 건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다.
- 어, 잘 크고 있다, 무럭무럭...
이 잉간은 언제나 남편을 키웠단다.
물론 신체가 아니라 그릇을 키웠다는 소리겠지만,
어릴때부터 모래로 밥 지어 놓고, 밥 머거...했으니 몸과 마음을 함께
키운 게 맞긴 하다.
앞뒷 집에 나란히 살던 고향에서 소꿉장난 할때
언제나 실랑각시였던 둘은 진짜 실랑각시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동차 부속상인가, 하는 업종으로 자리를 왠만큼 잡아가던 젊은 날,
내 아이들이 혹시 천재아녀?
이렇게 장사가 된다면 몇년안에 빌딩 신축하는 거 아녀?
어릴때부터 실랑 역할로 묶어두길 잘했어,
그나저나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겨?
착각과 희망이 주는 감미로운 일상에 묻혀 지내던 어느날,
도저히 납득 되지않는 청천벽력을 겪었었다.
삶을 포기하려 시도할만큼 호된 홍역을 치루었는데
이른바, 친구 실랑이 바람을 피운 사건이었다.
- 낌새가 이상했었어........,
집에만 오면 현관서부터 짜증을 내는거야,
그리곤 피곤을 입에 달고 돌아누워 코부터 골더라...
가끔 직원들과 함께 먹을 점심을 해 갔었는데 어느날부터 나오지 말라더라,
내 수고를 들어주려는지 알고 감격했지.
얼마 전에 시장에 나갔다가 펄펄뛰는 생선을 보니 매운탕을 해주고 싶더라,
그리고 무슨일이 잘 안풀리는게 있는지 얘기를 좀 들어보고 싶었고,
밖에서 하면 부드러울 거 같아
매운탕이 기울어 쏟길새라 조심조심 갔는데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더라,
그후 두세번인가?
점심때 몇시간씩 자리를 비우는걸 알았는데
그때마다 경리 역시 자리에 없다는 걸 발견했어...
남매를 낳아 씩씩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던 친구의 목소리에
풀기가 없다는 걸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아차린 나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동네까지 와 준 친구가 우선 반가웠고
집 보단 밖이 좋을 거 같아 아담한 호프집을 찾아들어
커다란 잔에 그득히 채운 맥주 한잔씩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위로 솟구치는 작은 기포들를 한참 들여다 보던 친구는
내 잔이 반쯤 비워졌을때 겨우 입을 열었다.
- 관찰한 결과, 월, 수, 금, 징검다리였어...,
그 아이 자취하는 집을 알아 놓고, 금요일 미리 가서 근처서 기다렸어,
낯익은 차가 들어오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들어가더라,
아래위 이빨이 맞혀 소리가 나고
걸음이 후들거려 내 의지대로 방향이 잡히지 않더라,
나도 모르게 길가에 돌맹이 한개를 집어들었어,
그런데 그냥 돌아섰다, 내가 무서웠어, 주길 거 같았거던...
그 후 친구는 남편에게 멈추라는 암시를 여러번 했는데
변한 건 징검다리의 날짜와 시간의 변경이었다 한다.
- 현장 목격후를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가 관건이었어,
내 새끼들의 미래는?
영글어 가던 내꿈은?
신뢰와 존경이 사라진 그 자리를 차지할 혐오와 환멸은?
자신과의 타협점을 찾지 않을 수 없어 조용히 해결해주길 바랬어,
나 비겁하지?
아이고.... 인생의 진부함이여...
탐색하듯 질금거리며 한모금씩 삼키다
느닷없는 질문에 화들짝 놀란 나는 허겁지겁 손사레치며,
아아아아아니,
전혀 아~~~ 니야, 를 연발했고,
호기심 가득 실은 얼굴로 친구의 불행에 짐짓 격앙된 분노를 보태
성토에 가담했었다.
한쌍의 비둘기 같이 항상 붙어다니던 교복입었던 모습이 떠올라
둘의 분리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다지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더 이상은 참고 기다릴 수 없었어,
며칠전 결국은 그 아이가 살고있는 집으로 갔었다.
방문 앞에 신발 두켤레가 나란히 있더라, 눈에서 불이 튀더군,
............ 문을 당기니 안으로 잠겨있었어.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열어, 알고 왔으니 열어 어서!
그러나 나란 생각은 전혀 못한 모양이야,
의아한 그아이 얼굴이 반쯤 보였을때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어...
파자마 바람으로 앉았다 아득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서는 남편에게
몸을 날려 따귀를 갈긴 친구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경리의 머리채를 잡아 던졌는데
저만치 벽에가서 부딪치더란다.
- 나는 말이야...
연속극을 볼때마다 그들의 유치한 대사를 한심하게 생각했었어,
저런 상황에서 더욱 우아하게 고상을 떨어 범접 못할 위엄을 갖추면 좋을텐데,
왜 저리 저급할까, 아쉬웠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머리는 텅비어 버석이고 귓가에 기계음만 윙윙대고..
입은 바싹 마르고 목은 컥컥대서 대사는 커녕
문장의 형태도 못 갖춘 외마디 짐승같은 소리만 내뱉고있더라.
내가 기억하는 건,
니가, 니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니한테 시집와서 내가 어떤 세월을 살았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수가...
내가 평소에 경멸했던 비명만을 되풀이 하고있더라...
.............
어찌어찌 수습해서 집으로 돌아는갔으나
그 후 친구는 우울증에다 대인기피증까지 겹쳐
참담하고도 혹독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친구 실랑이 싹싹 빌면서 했다는 귀여운(?) 대사 때문에
나는 두고두고 웃었었다.
- 내 진즉에 끝낼라 작정했었어,
차라리 이렇게 당신에게 들켜서 다행이야,
그래서 빨리 끝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됫지모,
당신 알지? 장난인 거... 기회를 줘바바 만회할 기회를...
- 너도 알지?
내가 그자슥을 얼마나 아꼈었는지, 내가 얼마나 충직한 마눌이었는지를,
하늘로 받들어 모시고 살았었는지를 넌 알지?
참 이상하더라, 그냥 우습게 보이고... 그자슥을 하늘로 착각했던
세월이 허망하고...
남편을 서슴없이 그 자슥,이라 부르며
모든 걸 과거형으로 바꾼 친구의 언어엔 냉소가 짙게 묻어났다.
그 후
친구가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종합검진 결과였었다 하니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인지...
난해한 의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내내 생각했단다.
- 그래... 아프지만 마라...
바람을 피워도 좋고 어떤짓을 해도 좋으니 제발 아프지만 마라,
내 지난 거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바람까지 이미 용서했으니 절대 아프지만 마라,
나를 두고 먼저 떠나는 짓만은 용서 못한다,
차라리 바람을 필 때가 좋았으니 서슬 퍼렇게 나돌아 다녀라...
비로소 혐오와 환멸, 불신과 냉소을 밀어내고
새살이 돋듯 그자리를 채운 건 연민과 안타까움이었나 보다.
진짜 위기의 벼랑 앞에서
자신을 비우고 남편을 포용해버린 친구의 체념섞인 넉넉함이
애면글면 보다야 좋긴 했지만
웃음 뒤에 여운처럼 번지던 쓸쓸한 표정을 본 건 착시였을까...
이번에 안 나오면 아예 그 동네서 동창회를 할테니
빠질 생각일랑 일찌감치 버리라며
특유의 씩씩한 억양으로 공갈치는 걸 보니,
젊어 한때 속 썩이던 남편을 포기않고 살아낸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자심감으로 충일하게 목소리에 배어있는듯 해서
나도 덩달아 며칠동안 기분이 좋다.
< 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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