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3. 21:26ㆍ책 · 펌글 · 자료/종교
선의 통쾌한 농담 ─ 선시와 함께 읽는 禪話|
2020.8.5.
책소개
왜 스님은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내를 태연하게 보고만 있을까?
왜 스님은 매서운 얼굴로 한 손엔 장검을, 한 손엔 고양이를 그러쥐고 있을까?
왜 사내는 경전을 박박 찢으며 호기롭게 웃고 있을까?
왜 원숭이들은 물에 비친 달을 향해 손을 뻗고 있을까?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한중일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를 선사들의 시와 함께 흥미롭게 담아냈다.
자신의 마음을 깨우치고 철저하게 밝히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선(禪)의 구도자들.
그들의 깨달음을 소재로 그린 선화는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오랜 시간 전통미술을 연구하며 글을 매만져온 저자 김영욱은
선화의 숨은 뜻을 다채롭게 밝혀줄 선시를 다양한 문헌에서 엄선하여 수록하고,
이와 관련된 일화와 배경을 작가 특유의 친근하고 담박한 문체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특히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진하게 배어 있는 설명은 그림 속 인물과 배경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쉼 없는 세상에서 막막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청량한 휴식을 안겨줄 선(禪)예술 인문교양서.
저자 : 김영욱
옛 그림을 보며 차담(茶談) 나누기를 좋아하는 전통미술 연구자.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전통회화를 전공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미술사 석사과정을 마친 뒤,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성대학교 등에서 한국의 전통회화와 회화사를 강의했으며,
2017년부터 《법보신문》과 인연을 맺고,
‘불교 작가를 말하다’ ‘선시로 읽는 선화’ 등 옛 화가들과 현대 작가들의 그림을 읽고 소개하는 짧은 글을 연재했다.
지금은 조선 시대에 그려진 고사화(故事畵)를 연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옛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짧은 글을 틈틈이 쓰고 매만지고 있다.
목차
들어가며
1.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을 아는 첫걸음_김명국, 〈달마절로도강도〉
한 글자에 담긴 무심_대진, 〈달마지혜능육대조사도〉
깨달음이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_양해, 〈육조파경도〉
양해 <육조파경도> 남송 지본수묵 72.8x31.6cm 신마치 집안 기증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지 말게나_후가이 에쿤, 〈지월포대도〉
빈 것마저 비워낸 충만의 경지_작가 미상, 〈마조방거사문답도〉
사리가 없는데 어찌 특별하다 하는가_인다라, 〈단하소불도〉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네_마공현, 〈약산이고문답도〉
세 치의 작은 낚싯바늘_카노 치카노부, 〈선자협산도〉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_가이호 유쇼, 〈조주구자도〉
나의 본래 모습을 보다_마원, 〈동산도수도〉
앎과 삶의 차이_양해, 〈도림백낙천문답도〉
지혜와 지해_카노 모토노부, 〈향엄격죽도〉
선지식을 만나 입법계를 이루다_시마다 보쿠센, 〈선재동자도〉
2.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흔들림 없는 단정한 마음_오빈, 〈달마도〉
마음은 마음자리에 있다_셋슈 토요, 〈혜가단비도〉
본래의 참된 마음을 잘 지키게나_카노 츠네노부, 〈재송도인도〉
전도몽상의 마음을 끊어내다_하세가와 도하쿠, 〈남전참묘도〉
마음을 길들여 선에 들어가다_석각, 〈이조조심도〉
집착 없는 마음, 무소유_임이, 〈지둔애마도〉
기지개 한번 쭉 펴게나_김득신, 〈포대흠신도〉
쇠똥 화로에서 향내가 나다_타쿠앙 소호, 〈나찬외우도〉
소와 함께 떠나는 선의 길_작자 미상, 〈목우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라_셋손 슈케이, 〈원후착월도〉
고요하고 적막한 경지_유숙, 〈오수삼매〉
서방정토로 나아가는 마음 수레_김홍도, 〈염불서승도〉
내 마음의 초상_타쿠앙 소호, 〈원상상〉
3. 도법자연(道法自然) 선지일상(禪旨日常)
자연은 한 권의 경전_가오, 〈한산도〉
마음을 비추는 밝은 달_장로, 〈습득도〉
일상에 담긴 불법_가오, 〈조양도〉/ 가오, 〈대월도〉
가사에 담긴 선승의 마음_심사정, 〈산승보납도〉
어느덧 가을인가, 아직도 가을인가_작가 미상, 〈월하독경도〉
경건한 마음의 예불_육주·진경, 〈육주예불도〉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 되지_가오, 〈현자화상도〉
사찰에 울리는 목어 소리_고기봉, 〈목어가승〉
산중 도반과의 하루_이수민, 〈고승한담〉
나무아미타불_김홍도, 〈노승염불〉
일상 속 소소한 행복_이인문, 〈나한문슬〉
밝은 달빛에서 마음을 찾다_우상하, 〈노승간월도〉
깨달음은 어디에서 오는가_작가 미상, 〈산중나한도〉
나오며
부록 1. 중국의 선종과 선종화
부록 2. 중국 선종 법맥의 계보
참고 문헌
선화... 출처
찾아보기
책 속으로
* 바람이 분다. 굳고 긴 가지에 돋은 바늘같이 가는 솔잎 사이로 맑은 솔바람이 인다. 북북, 박박. 한 사내의 손에 잡힌 종이 뭉텅이가 찢어지고 있다. 박박 찢어진 종잇조각이 사내의 발 앞에 툭툭 떨어진다. 가지가지 종잇조각에 쓰인 글씨며 아직 펼치지 않은 두루마리를 보니, 상당한 분량이 담긴 경전인 듯하다. 돌연 혜능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시원한 웃음소리가 솔바람처럼 막힘없이 퍼져나간다.
_〈육조파경도〉 해설 부분(p. 34)
* 혹독한 추위를 못 이긴 단하가 나무 불상을 태워 몸을 따뜻하게 했다. 이를 듣게 된 주지가 부리나케 뛰어와서 소리쳤다. “왜 절에 있는 소중한 불상을 태웁니까?” 이에 단하가 지팡이로 재를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처를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 하오.”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주지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어찌 나무로 만든 불상에 사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단하가 되물었다. “사리가 없다면 왜 나를 탓하시오?”.
_〈단하소불도〉 해설 부분(p. 56)
* ‘나’의 모습이 있지만, 늘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얽매인다.
그러나 그 모습 또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본래의 ‘나’와 타인이 보는 ‘나’를 애써 분별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이름을 버리고, 내 직업을 버리고, 내 나이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오직 본래의 나인 것이다.
과연 본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_〈동산도수도〉 해설 부분(p. 87)
* 하세가와 도하쿠는 마치 우리에게 대답을 해보라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남전 선사가 한 손에는 고양이를, 다른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는 강렬한 모습을 화면에 옮겨놓았다. 남전 선사는 마치 불법을 수호하는 나한 혹은 무가의 검객처럼 호방한 기풍을 드러내며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내뿜는다. 좌중을 압도하는 선사의 손에 사로잡힌 고양이가 두려움에 떨며 발톱 세운 앞다리를 허공에 쭉 내뻗고 있다.
_〈남전참묘도〉 해설 부분(p. 137)
* 물건이 남으면 ‘부(富)’라고 부르는데, 이 부를 바라는 마음을 ‘빈(貧)’이라 한다. 반대로 물건이 부족하면 ‘빈’이라고 하는데, 이 빈에 만족하는 마음을 ‘부’라고 부른다. 이처럼 부귀는 재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는 옛 학자의 가르침이다. 쇠똥 지핀 불에 구운 토란을 부귀와 명성과 바꾸지 않은 나찬 선사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_〈나찬외우도〉 해설 부분(p. 167)
* 한 사내가 뒷짐 지고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본다. 둥그런 흰 달이 내뿜는 달빛에 취한 듯 입을 크게 벌리며 헤벌쭉 웃고 있다. 그 모습이 참 편안하다. 정돈되지 않은 산발한 머리와 굵고 강렬한 필치로 그린 투박한 의복에서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_〈습득도〉 해설 부분(p. 212)
* 깨달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깨달음은 특별한 화두와 수행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잠시 고개를 돌리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일상과... 고요한 자연에도 깨달음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 도(道)의 법이 자연에 있고, 선(禪)의 뜻이 일상에 있다.
_〈산중나한도〉 해설 부분(p. 273)
출판사서평
깨치고, 그리고, 노래하다
호쾌한 필치로 순간의 깨달음을 그린 선화(禪畵)와
담박한 어조로 마음의 이치를 노래한 선시(禪詩)의 만남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내와 배 위에서 태연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스님, 매서운 얼굴로 한 손엔 장검을, 한 손엔 고양이를 그러쥔 한 노승, 경전을 박박 찢으며 호기롭게 웃고 있는 사내, 석양 짙은 저녁 소와 함께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 물에 비친 달을 잡기 위해 나무에 의지한 채 서로 몸을 잇고 있는 원숭이들, 그저 …. 대체 이 그림 속은 인물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지극히 당연하여 마치 농담을 주고받는 것 같은 선사들의 심오한 이야기를 수묵의 선과 농담으로 통쾌하게 그려낸 선화.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선시와 함께 흥미롭게 풀어낸 선(禪)예술 인문교양서다.
전통미술 연구자 김영욱은 세계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자료와 다양한 문헌을 모았고, 국내 최초로 한중일 선화와 선시를 한 권의 책으로 녹여냈다. 저자는 3년간 《법보신문》에서 옛 그림과 현대 그림을 감각적이고 정갈한 문체로 풀어낸 글을 연재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다.
직관적 체험의 경지를 그림과 노래에 담다
선화(禪畵)는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의 교리나 선종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선종은 자신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깨우치고 철저하게 밝히는 것을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본다. 정신적 체험의 경지를 직관적 시각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선화다. 다시 말해, 말이나 글로는 묘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회화적 은유에 가깝다. 또한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강조하는 선의 정신답게, 화면에 담긴 필선 역시 거침없고 간결하다. 먹선과 담채, 그리고 여백이 만들어낸 세계를 응시하다 보면, 고즈넉한 산사를 깨우는 풍경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사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분발하도록 만든다면, 선종화는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선종화가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단지 이야기만 나누고 있거나 텅 빈 하늘이나 꽉 찬 밝은 달을 보고 있거나 잠만 자기도 한다. 물론 특정한 사건을 그린 장면도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그린 장면이 대부분이다. 처음 그림을 마주하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p. 8-9)
형식이나 격식에서 벗어나 고도로 정제된 언어로 깨달음을 노래한 선시(禪詩) 또한 선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심히 툭 던진 시구 하나하나에는 궁극적 깨달음의 정수가 스며 있고, 시구 사이사이마다 무한의 우주가 펼쳐져 있다. 선시 역시 선화와 마찬가지로 선사들의 번뜩이는 깨달음과 선의 섬세한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격이었다.
저자는 대표적인 39점의 선화와 이 그림에 담긴 숨은 의미를 풍부하고 생생히... 드러내줄 39수의 선시를 가려 담고, 이를 쉽고 친절하게 읽어냈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된다.
1장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일화와 선을 깨닫게 되는 계기를 그린 선화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2장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는 여러 선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마음이 어딘가에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심했던 옛 선사들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3장 ‘도법자연(道法自然) 선지일상(禪旨日常)’에서는 옛 선사들이 자연과 일상에서 선의 이치를 깨우쳤던 그림과 이야기를 담았다.
부록에는 선종의 기본 개념과 선화의 흐름을 정리하고 선종의 주요 계보도를 추가하여, 한눈에 전체 흐름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180도 펼쳐지는 제본 방식으로 엮어 독자들이 모든 글과 그림을 편히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림 속 인물에 숨결을 불어넣다
“찬 새벽인 듯 짙은 골안개가 암자 주변을 감싼다. 서늘한 기운을 느낀 한 스님이 긴 대나무 있는 앞마당으로 나왔다. 쓱쓱. 고요한 자연에 일정한 빗자루질 소리가 듣기 좋게 퍼진다. 삭삭. 두 손에 쥔 비가 지나가니 땅이 제 얼굴을 드러낸다. 땅의 민얼굴을 덮었던 대나무 잎과 잡초가 서로 얽히고설키다가 이리저리 치인다. 텅! 그 안에 엉키던 작은 기왓조각이 빈 대나무를 치며 소리를 냈다. 순간 스님의 빗자루질이 멈췄다.”
_〈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 해설 중에서(P. 96)
“참 달고 맛있는 낮잠이었나보다. 따사로운 봄볕 내리쬐는 어느 날, 낮잠 즐긴 포대화상이 기지개를 켠다. 낮잠의 행복만큼 팔은 쫙 늘어지고 다리는 쭉 뻗어 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듯 크게 입 벌린 하품은 마냥 통쾌하기만 하다. 절로 따라서 하품하고 싶지 않은가. 소나무 아래 그늘로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유쾌하고 시원한 김득신의 〈포대흠신도〉다.”
_〈포대흠신도布袋欠伸圖〉 해설 중에서(p. 158)
마당을 쓸다가 기왓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힌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향엄(香嚴)의 일화를 그린 〈향엄격죽도〉와 늘 웃는 얼굴로 중생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안겨주었던 포대화상의 모습을 그린 〈포대흠신도〉를 풀어낸 대목이다. 저자는 책에 수록된 모든 그림마다 높은 예술적 안목과 뛰어난 상상력, 문학적 감수성을 동원하여 마치 그림 속 인물이 살아 있는 듯 숨결을 불어넣는다. 또한 독자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부분들을 세밀하게 포착해내어 그 안에 담긴 숨은 의미나 예술적 장치들을 짚어주기도 하는데, 마치 친절한 미술관 큐레이터의 설명을 직접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에 청량한 파문을 일으키다
“화면 속 습득은 눈으로 달을 보고, 귀로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달을 보는 것은 청명한 마음을 알기 위해서지, 밝고 어두운 달과 밤의 변화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내 그는 저 달에 걸린 시선 너머로 충만하고 진공한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그 마음이 마치 둥글고 밝은 달과 같지 않았을까.” (p. 214)
“경전에 녹아든 달빛의 시간만큼 노승의 공부 역시 깊지 않겠는가. 차의 맛과 풍미 또한 맑고 깊어지는 가을이다. 잠시 읽던 책을 덮어두고 나서 차 한 잔 마시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의 공부는 과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가. 어느덧 가을인가, 아니면 아직도 가을인가.” (p. 273)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의 경지를 표현한 선화와 선시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해설에도 은근한 선의 여운이 감돈다. 옛 선승들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을 지금 우리의 삶으로 가져왔을 때다. 저자는 선화와 선시를 읽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과 일상을 목도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도록 여지를 열어두었다.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일상을 쉬이게 하는 휴식처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장이 되어줄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청정한 마음으로 이끄는 수행처가 될지도 모른다. 숨 가쁜 일상, 잠시 틈을 내어 향기 그윽한 햇차와 함께 이 책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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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尺絲綸直下垂(천척사륜직하수) 천 자 낚싯줄 곧게 아래로 드리우니
이 시는 중국 당대(唐代)의 선승인 선자덕성(船子德誠, 미상) 선사의 ‘발도가(撥掉歌)’ 중 2수이다. 너무나 유명한 선시(禪詩)여서, 남송(南宋) 때 선승인 야보 선사가 재음(再吟)한 이후에는 야보송처럼 알려져 있다. 조용한 한밤 중 홀로 낚싯대를 드리운 뱃사공 머리 위로 환한 보름달이 강 위에 있는 작은 뱃전을 비추고 있는 풍광을 고스란히 묘사한 절창으로 손꼽힌다. 소주(蘇州) 화정현(華亭縣) 오강(吳江)에서 작은 배 띄우고 뱃사공을 하면서 인연 따라 오가는 사람들을 교화한 선자덕성 선사의 선시이다. 시와 도 그리고 삶이 무르녹은 선시의 백미이다.
1구는 무심의 경지를 나타내고, 2구는 만법일여의 경지, 3구는 고요·적멸의 경지, 4구는 공(空)의 경지를 나타낸다. 1~4구까지 뭐 하나 번뇌 망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감상적인 것 같은데도 그렇지가 않다. 특히 “밝은 달빛 아래 배에 가득 허공을 싣고 돌아온다(滿船空載月明歸)”는 결구는 이 시의 압권이다.
한마디 말이 없는 침묵이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무게가 나갈 때가 있다. 말 없는 길을 찾는 선(禪)도 그런 세계다.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을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하면 선시(禪詩)가 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를 그림으로 그려내면 선화(禪畵)가 된다. 선사와 묵객(墨客)의 ‘말 없는 가르침’은 오랜 세월 예술로 남아 깨달음의 빛을 찾는 후학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오고 있다.
韓中日 박물관에 소장된 선화 39점과 그에 맞춘 선시가 어우러진 『선(禪)의 통쾌한 농담』
520년경 보리달마(菩提達磨·Boddhi―dharma,?~528?)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전한 선종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종교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과 일상에서 깨달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언어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不立文字), 경전이 아닌 별도의 가르침으로 법으로 전하는(敎外別傳), 선종의 특성상 교리와 선종 대가들을 그림으로 그린 선종화(禪宗畵)는 회화의 또 다른 장르를 구축하기도 했다.
선종화는 마음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암시적이다. 선종화 속 인물들은 단지 이야기만 나누고 있거나, 텅 빈 하늘이나 꽉 찬 밝은 달을 보고 있거나 잠만 자기도 한다. 특별한 사건을 그린 장면도 있지만, 일상생활을 그린 장면이 대부분이다.
신간 『선(禪)의 통쾌한 농담』(김영욱 지음/김영사)은 그런 선화(禪畵)의 세계를 선시(禪詩)와 함께 읽어내는 책이다. 한·중·일(韓中日)의 박물관에 소장된 선화 39점과 그에 맞춘 선시를 곁들여 해설하고 있다 ●禪을 아는 첫걸음 - 달마가 갈대 한잎 타고 강을 건너다
翫水看山虛送日(완수간산허송일) 물 즐기고 산보며 나날을 헛되이 보내고
호방한 필치가 일품이다. 단번에 휘갈긴 필선의 동세가 바람에 나부끼듯 리드미컬하다. 붓을 눌러 방향에 따라 꺾고 비틀기도 하고 일필로 시원스레 내려 긋기도 하고, 혹 어느 부분에서는 부드러운 율동감을 주었다. 발 디딘 갈대에 툭하니 그은 갈댓잎의 구성이 그림에 멋을 더했다. 달마의 부릅뜬 눈과 담담한 얼굴로 시선을 옮기면 그의 전신(傳神)이 다가온다. 달마는 인도 선불교의 제28조이자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이다. 석존께서 넌지시 든 연꽃을 보고 조용한 미소로 가르침을 받았다(염화미소拈華微笑)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그는 6세기경 불법(佛法)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왔을 때, 양무제(梁武帝, 464~549)와 만나게 됐다. 양무제는 스스로 불가에 귀의하고 수많은 불사를 이끌어 ‘황제보살’이라 불렸다. 달마는 양무제가 자신이 쌓은 공덕에 대한 물음에 “공덕이 없다(無功德)”라고 답했다. 다음으로 무엇이 불가의 가장 성스러운 진리인가에 대한 양무제의 질문에는 ‘확연무성(廓然無聖)’ 즉 “텅 비어서 성스러운 것이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양무제가 “그렇다면 내 앞의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되묻자, 달마가 “모르겠다(不識)”라고 말했다. 달마는 그가 불가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자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갈댓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낙양의 숭산으로 들어가 면벽수행에만 몰두했다.
김명국(金明國, 1600~1663?)의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는 달마가 양무제를 떠나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감필체(減筆體)로 그린 김명국의 선종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화면에 순식간에 그려진 거침없고 호쾌한 필치는 그의 대담하고 호방한 선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의 문인 남태응(南泰膺, 1687~1740)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여 법도(法道)를 초월했으니 그 어느 것 하나도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고 했고, 덧붙여 ‘그의 돈오(頓悟)와 신해(神解)가 천기에 있으므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기록은 그의 회화 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김명국의 그림은 순수한 마음에서 발현된 의취(意趣)와 자연 본연의 형상이 어우러진 것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배워 이룩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과연 달마가 서쪽에서 건너온 까닭은 무엇이던가. 조주(趙州)는 ‘뜰 앞의 잣나무’라 하고, 취미(翠微)와 용아(龍牙)는 대답 없이 목판으로 내려쳤고, 마조(馬祖)는 ‘상다리’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 그저 비어있을 뿐이다. 존재의 성질과 형상의 ‘허’와 ‘실’에 대한 의문은 모두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실상과 허상의 의식적인 분별이 곧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덕이 없고 진리가 공허하고 ‘나’라는 실체를 모른다는 달마의 대답은 불가(佛家)의 진리와 깨달음을 의식적으로 분별하기 위해 집착하는 중생들을 향한 일침이다.
이러한 선종의 대표적 인물이 달마로서 『선(禪)의 통쾌한 농담』의 첫 장을 장식하는 조선 중기 화가 김명국의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는 갈대 한 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 부릅뜬 눈과 담담한 얼굴표정이 중국 선종의 첫 조사로서 선(禪)의 종지(宗旨)를 가장 극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붓과 먹으로 순식간에 쓱쓱 그려낸 듯한 화폭 위엔 김명국의 아호인 ‘취옹(醉翁)’이란 글씨 이외에 아무런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달마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또 중국 남조에서 활동하던 달마가 갈댓잎을 타고 북조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이 그림은 던지고 있다. 불법과 선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 그림이다. 대답은 그림을 보는 이들이 각자 찾아야 한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상황과 인물을 바꿔가며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선종은 6세기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크게 꽃을 피운 불교의 한 종파이기도 한데, 520년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를 초조(初祖)로 본다. 달마의 불법(佛法)은 제2조 혜가, 제3조 승찬, 제4조 도신, 제5조 홍인, 제6조 혜능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이 선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入雪忘勞斷臂求(입설망로단비구) 눈 속에서 괴로움 잊고 팔 끊어 구하니 覓心無處始心休(멱심무처시심휴) 마음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음 편하구나. 後來安坐平懷者(후래안좌평회자) 훗날 편안히 앉아 평온한 마음을 누리는 이여 달마와 신광의 대화가 오간다. “그대는 눈 속에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감로의 문을 열어 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주소서.” “어찌 작은 공덕과 교만한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 것인가? 그저 헛수고일 뿐이네.”
달마의 말을 들은 신광이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이에 달마가 그에게 가르침을 전하니, 그가 곧 선종의 제2조 혜가(慧可)이다. 이 일화는 훗날 ‘혜가가 팔을 자르다(慧可斷臂)’, ‘팔을 잘라 법을 구하다(斷臂求法)’로 불리며 마음과 분별에 관한 중요한 화두로 불가에서 널리 오르내렸다.
●깨달음이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 - 혜능이 경전을 찢다
知但自知己(지단자지기) 앎은 단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니 無知更知知(무지경지지) 앎이 없어져야 다시금 아는 것을 아네. -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지지편을 보다(看到知知篇)’
불가에서 말하는 앎이란 무엇인가. 중국 남송시대의 천목중봉(天目中峰, 1263~1323) 선사는 세 가지 앎을 말했다. 도(道) 그 자체인 영지(靈知), 깨달음인 진지(眞知), 알음알이인 망지(亡知)가 그것이다. 영지는 본래부터 마음에 있는 것으로 누구나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없는 앎이다. 진지는 일체의 법이 마음의 자성(自性)임을 알고 단적으로 깨닫는 앎을 말한다.
청매인오의 시처럼, 앎이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종교와 학파를 불문하고 만고의 스승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하며 자신을 추종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마음을 안 제자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홀로 설수 있었다. 석존(석가모니)은 넌지시 연꽃을 들었고, 초조 달마는 마음을 자져오라고 했다. 제2조 혜가(慧可, 487~593)는 죄를 가져오라 했고, 제3조 승찬(僧璨, ?~606)은 묶이지 않은 해탈을 말했으며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은 성(性)을 물어보았다. 여러 조사가 가르치는 방법은 달랐으나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다르지 않았다.
말과 글로 전하는 진리의 깨우침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 남송(南宋)시대의 화가 양해(梁楷, 1140?~1210?)의 ‘육조파경도(六祖破經圖)’는 파경(破經), 곧 불립문자의 이치를 담은 그림이다.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이자 선종의 제6조인 혜능(慧能, 638~713)이 불경을 찢어버린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본래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육조절죽도(六祖截竹圖)의 한 쌍의 화폭이다.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제3대 쇼군(將軍)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1368~1394)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에도(江戶) 후기의 다이묘(大名)이자 다도가인 마쓰다이라 후마이(松平不昧, 1751~1818)까지 전래된 내력을 지닌 명품이다. 육조절죽도가 니시혼간지(西本願寺)를 거쳐 와카사(若狹)의 영주인 사카이(酒井) 가문에 전해진 점을 보면, 아마도 근대의 어느 시기엔가 두 작품이 나누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능은 젊었을 때 가난하여 장작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어느 날 ‘금강경(金剛經)’ 독송을 접하고 중국 북부에 있던 선종의 제5조 홍인(弘忍, 601~675)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홍인의 수제자인 신수(神秀, 606~706)를 제치고 법맥을 이어 중국 남부 광둥성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폈다. 혜능은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경전을 읽거나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는 것보다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면 곧 깨달음에 이른다고 했다. 곧 돈오(頓悟)를 말한다.
●사리가 없는데 어찌 특별하다고 하는가 - 단하천연이 불상을 태우다 時人向外求(시인향외구) 지금 사람은 밖에서만 구한다네. 內懷無價寶(내회무가보) 안에다가 값 매길 수 없는 보물 품었건만 不識一生休(불식일생휴) 알지 못하고 일생을 놀기만 하는구나.’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화상(和尙: 수행을 많이 한 승려)은 당나라 때의 고승이다. 불가에 출가하기 이전의 행적은 분명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해 장안(長安: 그 당시의 수도)으로 가던 중에 한 여관에 머물다가 꿈을 꾸었고, 꿈을 풀이하자마자 곧바로 남쪽에 있는 마조(馬祖) 선사를 찾아가 불가에 입문했다.
이 이야기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역대 부처와 조사들의 어록과 행적을 모은 책)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경덕전등록 등 송대宋代에 발간된 다섯 가지 선종사서禪宗史書를 압축한 선종의 통사通史)에 실린 이래로, 중국과 일본에서 선기도(禪機圖)의 주제로 빈번히 그려졌다. 그중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전하는 작품이 원나라 화가 인다라(因陀羅, 생몰년 미상)가 그린 단하소불도(丹霞燒佛圖)이다. 화면에는 기교 없이 먹으로만 그려진 두 인물이 있다. 왼쪽에서 불상을 태운 불에 두 손을 대고 쪼그려 앉아 뒤를 돌아보고 있는 인물이 단하 화상이고, 나무 옆에서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타고 있는 불상을 가리키며 서 있는 인물이 혜림사 주지이다. 원나라의 선승 초석범기(楚石梵琦, 1296~1370)가 화면에 적은 시구(詩句) 중에서 “본래 사리가 없다면 어찌 특별하다고 하는가”라는 부분은 이 그림의 본질을 명확히 전달한다.
흙으로 빚은 불상이 비바람에 의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불에 타서 재로 변하고, 금속으로 주조한 불상이 녹아 한낱 쇠붙이로 된다 한들, 마음의 불심도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퇴옹(退翁) 선사께서 평소에 말하기를, “우리 모두 자신이 부처님이다”라고 했다. 이미 내 마음이 부처인데, 지금의 사람들은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마음을 빚어놓은 형상에만 집착한다. 불상을 태우며 내뱉은 단하 화상의 한 마디는 그 어리석음마저 태우라는 묵직한 가르침이다.
●서방정토로 나아가는 마음 수레 -염불 외는 노승이 서쪽으로 올라가다
茫茫水接天(망망수접천) 한없이 아득한 물결이 하늘과 닿아있네. 浮雲無起滅(부운무기멸) 뜬구름 일어나 다함이 없고 孤月照三千(고월조삼천) 외로운 달 삼천세계 비추는구나.
노승(老僧)이 앉아 있다. 그의 뒷모습은 단정하고 말쑥하다. 마음은 회색빛 장삼처럼 흔들림 없이 침착하다. 불가의 극락에 있다고 전하는 연화대(蓮花臺)처럼 노승이 앉아 있는 자리에는 연꽃과 연잎이 만개해있다. 노승은 마치 연꽃 무리에서 피어난 듯 차분하고 단아하다.
화면에 구사한, 마치 흐르는 구름 같은 필선인 유운선법(流雲線法)은 김홍도가 노경(老境)에 이룬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만년에 그려진 불교 소재의 인물들은 주로 뒷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아마도 만년에 이르러 세속에 연연하지 않고 초탈한 그의 심회가 투영된 듯하다.
제목인 ‘염불서승(念佛西昇)’은 염불하며 서방정토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이는 후대에 부여된 이름이다. 약 200년 전의 김홍도가 그와 같은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으나, 구름 위로 놓인 연화대에 앉은 승려의 모습을 보면 매우 적절한 이름인 것 같다.
노승은 홀로 저 먼 세계를 바라본다. 그가 보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이자, 그가 염원하는 서방의 정토이다. 그의 염불 소리는 들을 수 없으나, 염불의 울림은 흰 구름 따라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저 먼 정토로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去來無非道(거래무비도) 가고 옴에 도가 아님이 없고 執放都是禪(집방도시선) 잡고 놓음이 모두 선이구나. 春風芳草岸(춘풍방초안) 봄바람에 향기로운 풀 언덕에서 伸脚打閒眠(신각타한면) 다리 쭉 뻗어 한가로이 낮잠 자네.
포대화상은 천하를 주유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고 갔다. 길을 걷다가 잠이 오면 땅을 자리삼고 하늘을 이불삼아 잠을 청했다. 넉넉한 공양을 받으면 부족한 이에게 전하고, 부족한 공양이더라도 전혀 없는 이에게 나눠 주었다. 그에게 가고 오는 모든 것이 도이고, 소유와 무소유가 모두 선이다. 그는 정신과 물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다.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유에서 비롯된다. 자유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것이다. 어느 동자승이 스승에게 “해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스승이 “누가 너를 옭아매고 있느냐, 누가 너를 일찍이 묶어 놓았느냐?”라고 답했다. 어린 승려는 자유에 의문을 품은 자신에 묶여 있었다. 이 선문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행복을 옭아매고 있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묻고 있다.
포대화상은 중생의 번뇌와 고통의 짐을 포대에 담는다. 그리고 포대를 열어 중생에게 희망과 웃음을 준다. 그는 포대를 매었음에도 행복하다. 무소유와 자유에서 오는 행복을 아는 것이다.
●직관적 체험의 경지를 그림과 노래에 담다
“고사화(故事畵)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분발하도록 만든다면, 선종화는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선종화가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단지 이야기만 나누고 있거나 텅 빈 하늘이나 꽉찬 밝은 달을 보고 있거나 잠만 자기도 한다. 물론 특정한 사건을 그린 장면도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그린 장면이 대부분이다. 처음 그림을 마주하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p. 8-9)
●책 속으로
혹독한 추위를 못 이긴 단하가 나무 불상을 태워 몸을 따뜻하게 했다. 이를 듣게 된 주지가 부리나케 뛰어와서 소리쳤다. “왜 절에 있는 소중한 불상을 태웁니까?” 이에 단하가 지팡이로 재를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처를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 하오.”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주지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어찌 나무로 만든 불상에 사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단하가 되물었다. “사리가 없다면 왜 나를 탓하시오?” - 「단하소불도 해설 부분」중에서
‘나’의 모습이 있지만, 늘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얽매인다. 그러나 그 모습 또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본래의 ‘나’와 타인이 보는 ‘나’를 애써 분별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이름을 버리고, 내 직업을 버리고, 내 나이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오직 본래의 나인 것이다. 과연 본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 「동산도수도 해설 부분」중에서
깨달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깨달음은 특별한 화두와 수행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잠시 고개를 돌리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일상과 고요한 자연에도 깨달음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 도(道)의 법이 자연에 있고, 선(禪)의 뜻이 일상에 있다.
물건이 남으면 ‘부(富)’라고 부르는데, 이 부를 바라는 마음을 ‘빈(貧)’이라 한다. 반대로 물건이 부족하면 ‘빈’이라고 하는데, 이 빈에 만족하는 마음을 ‘부’라고 부른다. 이처럼 부귀는 재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는 옛 학자의 가르침이다. 쇠똥 지핀 불에 구운 토란을 부귀와 명성과 바꾸지 않은 나찬 선사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한 사내가 뒷짐 지고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본다. 둥그런 흰 달이 내뿜는 달빛에 취한 듯 입을 크게 벌리며 헤벌쭉 웃고 있다. 그 모습이 참 편안하다. 정돈되지 않은 산발한 머리와 굵고 강렬한 필치로 그린 투박한 의복에서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하세가와 도하쿠는 마치 우리에게 대답을 해보라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남전 선사가 한 손에는 고양이를, 다른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는 강렬한 모습을 화면에 옮겨놓았다. 남전 선사는 마치 불법을 수호하는 나한 혹은 무가의 검객처럼 호방한 기풍을 드러내며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내뿜는다. 좌중을 압도하는 선사의 손에 사로잡힌 고양이가 두려움에 떨며 발톱 세운 앞다리를 허공에 쭉 내뻗고 있다. - 「남전참묘도 해설 부분」중에서
선(禪)은 문학이 아니다.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로 문자와는 먼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승들은 문인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선시(禪詩), 선문학을 낳았다. 탈속 무애한 시적(詩的) 영감, 그것은 직관적 사유로부터 발아된다.
깨달음의 세계, 선의 세계에 대해 읊은 선승들의 게송(偈頌, 싯구)을 ‘선시(禪詩)’라고 한다. 선문학의 백미는 선시이다. 선시에는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오도송(悟道頌), 임종에 즈음해 읊은 열반송(涅槃頌) 그리고 일상 속에서 선미(禪味)를 느낄 때 읊은 시(詩), 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詩)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선시는 탈속함이 있어야 한다. 해탈한 선승의 입에서 나온 시구(詩句)가 그리움·이별·슬픔·고뇌 등 애잔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거나, 중생적인 감성 혹은 음풍농월(吟風弄月)적인 시는 세속의 명시가 될지 몰라도 선승의 시(詩)는 될 수 없다. 탈속한 맛이 없다면 그것은 선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적 시와 선시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살펴보자. 모두 다 널리 알려진 명시이다. 먼저 이백(李白; 701~762)의 ‘정야사(靜夜思; 고요한 밤의 그리움)’이다.
床前看月光(상전간월광) 침상 앞 밝은 달빛 바라보니
이백은 당송(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울분을 안고 평생토록 중국 전역을 방랑했던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낸 대표적인 시(詩)이다. 특히 3, 4구 “고개 들어 산에 걸린 달 바라보다/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워(생각)하네”는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명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시 속에는 ‘그리움’이라는 애잔한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울적, 침울해진다. 수심이 깊이를 더한다.
또한 고려 후기의 문인인 이규보(李圭報; 1168년∼1241년)의 ‘영정중월(詠井中月; 우물 속의 달)’이라는 시이다. 역시 이규보의 대표작에 속한다.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산에 사는 스님 달빛 탐내어
이 시는 ‘일체는 모두 공(空)한 것’이라는 것을 달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산에 사는 스님이 우물에 비친 달빛이 매우 교교해 물과 함께 병 속에 담아 가지만, 암자에 이르러 물을 부으면 달도 함께 텅 비어 공(空)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물의 달을 사랑해 길어가고 싶은 것은 스님이 아니고 아마 이규보일 것이다. 맑고 아름다운 달빛, 보름마다 떠오르면 바라보면 될 뿐, 탐하면 애착이 생긴다. 애착은 스스로를 구속한다. 따라서 사랑은 하되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1, 2구는 달빛이 너무 좋아서 탐내고 있는 모습은 여느 세속 시와 차이가 없다. 그런데 3, 4구에서는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게 되리./ 물을 부으면 달도 따라 텅 비게 되는 것을’이라며 ‘일체는 공,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결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 두 시를 놓고 본다면 이백의 시에서는 번민, 고뇌, 그리움 등 인간적인 애잔함을 불러일으키고, 이규보의 시에서는 애착, 탐욕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일깨워서 번뇌를 끊게 하고 있다. 이규보의 시는 선시(禪詩)로서도 백미이지만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당송팔대가를 능가하는 시(詩)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진리’여서 언어문자를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곧바로 당사자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직시하게 하여(直指人心)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見性成佛) 그래서 선은 언어의 수식을 뽐내는 시문학과는 강 저편에 있다.
또 다른 선시를 감상해 본다. 남송 때 묵조선(默照禪: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굉지宏智가 주창한 간화선看話禪에 대응되는 대표적인 선법. 묵묵히 말을 잊고 본성을 관찰하면 밝은 본성이 저절로 묘한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음) 계통의 선승(禪僧)인 천동여정(天童如淨; 1163~1228)선사가 지은 반야송(般若頌)이다. ‘땡그렁 뎅’ 하는 풍경 소리가 반야를 노래하고 있다고 한 시(詩)이다. 선시 가운데서도 첫째나 둘째를 다툰다.
通身是口掛虛空(통신시구괘허공) 온 몸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이 시는 선시 가운데에서도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풍경소리가 반야를 노래하는 것으로 본 그 자체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시상(詩想)이다. 깊은 직관력을 갖춘 경지라야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소리”라고 노래한 적도 있지만, 천동여정의 시는 조금도 가식이나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다. 매우 문학적이면서도 선의 뿌리인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유감없이 읊어내고 있다.
통신시구(通身是口), 처마 끝에 달려 있는 풍경을 올려다보면 그것은 그대로 입 전체다. 무심한 풍경은 동서남북 풍(風)을 가리지 않고 바람과 함께 쉼 없이 반야 지혜를 설하고 있다. ‘땡그렁 뎅’ ‘땡그렁 뎅’. 깊은 산사의 풍경소리는 니르바나로 향하는 반야의 소리, 무명 번뇌를 정화한다.
천동여정 선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영평사 도원(道元; 1200~1253)은 이 시가 선시로서 단연 최고의 격을 갖췄다고 했다. 도원은 이 선시에 감동돼 여정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선승의 입에서 나온 게송, 즉 선시는 탈속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선과 시(詩)의 결합체가 선시이기 때문이다. 선시는 조금도 가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자기가 있어서도 안 된다. 또 인간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도 안 된다. 선시는 번뇌 망상을 제거해 주는 언어라야 한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여야 한다.
이 시는 ‘금강경 오가해’에 있는 야보 선사의 게송인데 아주 문학적이다. 그러면서도 절묘하게 무집착의 세계, 공(空)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적멸(寂滅)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번뇌의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마음을 건드려도 조금도 티끌이 일어나지 않는다. 달빛이 연못 속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그것은 곧 공(空)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공의 세계에는 흔적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대나무가 섬돌을 쓸어도”라고 해야 맞는데, 지금 야보 선사는 상식과는 달리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라고 읊고 있다. 부사의(不思議)한 경지이다. 그림자와 달빛, 지금 이 둘은 분명 있지만, 실체는 없다. 무집착이고 공(空)이다.
선승들이 읊은 시라면 모두 선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논한다면 선의 경지, 선지(禪旨)를 드러낸 시(詩)가 아니면 ‘선시’라고 할 수 없다. 공, 무아, 무집착, 무소유, 불이일여(不二一如),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언어도단(言語道斷) 등 선의 세계를 드러낸 시가 아니면 그것은 일반적인 시(詩)일 뿐, 선시는 아니다. 현대 스님들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선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는 선시이다. 선과 시(詩), 시와 선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천착한 사람은 남송 말기의 이론가인 엄우(嚴羽; 1197?~1253?)이다. 그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의 목적은 오직 묘오(妙悟)에 있다. 시(詩)의 목적도 묘오에 있다(禪道惟在妙悟선도유재묘오, 詩道亦在妙悟시도역재묘오)‘”라며 선과 시 모두 궁극적인 목적은 묘오(妙悟)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중국문학사에서는 ‘시선일여(詩禪一如)’ ‘시선일치(詩禪一致)’라고 한다. 또 그는 선승들의 시는 성당(盛唐) 때까지가 가장 뛰어나고(第一義), 만당(晩唐) 이후는 격이 떨어진다[第二義]고 평하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선시(禪詩)’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이때부터 문학에서 조금씩 ‘선시(禪詩)’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하게 된 것은 석지현의 『선시(禪詩)』(1975, 현암사)이다.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중국, 한국 선승들의 시를 모아 번역을 하고 선적(禪的)인 해설을 달아 출간했는데, 한 때는 이른바 선객이나 시인치고 선시 한두 편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승려들의 현대시도 모두 선시로 불리기도 했다. ※이 글은 윤창화(민족사 대표)의 ‘선시는 무아(無我)이어야 한다’를 인용했음.
인도불교는 매우 산문적인 반면 중국불교는 간결하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이것이 선(禪)의 기본 사상이다.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나아간다. 혜능은 언어나 문자 모두 인위적인 족쇄일 뿐이고 그것은 경직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은 장자와 현학에서도 많이 발견되었지만 선종은 그것을 한걸음 더 발전시켰다. 나중에 선종은 이러한 것들도 철저하게 벗어던지고, 아예 여러 가지 형상의 직관적 방식을 이용해 본래 표현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표현하고 전달한다. 그러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선 언어와 문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언어를 이용해 언어의 미망을 깨치려는 것이다. 여기서 ‘공안’아 나온다. 공안이란 선종에서 도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내는 과제 또는 우리에게 께달음을 주기위해 모아놓은 스님의 이야기이다. 선종에서는 헌법과도 같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문자(언어, 개념, 사변)라는 공동의 것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오직 개체 자신의 개별적인 느낌, 깨달음, 체득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본체에 도달하고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어떠한 외재적 권위나 우상을 빌려 그것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오도(悟道: 부처의 세계로 들어감)로 가기 위해선 억지로 사고하고 억지로 구해선 안 되고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에서 께달을 수 있도록 노려해야 한다. 또한 선종에선 돈오(頓悟: 일순간에 깨우침을 얻는 것)를 말한다. 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 감수성과 체험적인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돈오의 순간에서는 어떤 특정한 조건, 상황, 경지에서 갑자기 어떤 한 순간에 마치 일체의 시공과 인과를 넘어 서서 과거, 현재, 미래가 마치 하나로 섞여 구별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더 이상 구별하려고 하지도 않고, 더 이상 자기의 심신이 어느 곳과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순간적인 영원 속에서 내가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나’라는, 나와 부처의 일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원래의 대상세계(외재사물)는 변화도 없고 어떠한 변화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순간적 영원’을 경험한 후에는 외재사물의 뜻과 성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 같다. 일체는 공(空)이지만 동시에 공이라고 말할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을 말하는 것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도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중에 앞에서 말한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 이외에 대자연과의 소통도 한 방법이다. 특히 선종의 문헌 중에는 자연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선종(禪宗)에서는 계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법맥(法脈)을 누구에 의해 계승되고 있느냐에 따라 정통이냐 아니면 비정통으로 갈리게 되는데, 중국불교의 선종계보는 달마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이전에는 달마대사를 서천(西天=인도) 28조로 추앙하는데, 석가모니의 법을 이은 차례이다. 석가모니로부터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선맥(禪脈)
달마를 조사(祖師)로 삼아 이어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으로 이어진다. 육조에 이르러선 대통신수(大通神秀)와 대감혜능(大鑑慧能)으로 나눠진다. 실제 6조는 혜능을 일컫는다. 이후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에 의하여, 신수의 북종선(北宗禪)과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혜능으로부터 청원행사(靑源行思)와 남악회양(南岳懷讓)의 두 계통이 생겨나고 이것이 다시 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의 5종가풍(五宗家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중에 임제종은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의 두 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를 통틀어 5가7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중국 불교 초기에는 선종이라는 명칭을 찾아보기 어렵다. 달마가 중국에 오기 이전에는 여러 가지 역경(번역)사업과 격의불교(格義佛敎: 해석에만 치우친 불교)가 유행하였고, 달마가 중국에 온 이후로 그의 문하에서 능가종(楞伽宗: 선 이론을 뒷받침 하는 능가경의 이름을 인용한 종파. 달마가 2조 혜가에게 전수한 경이라고 함)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4조 도신(道信)의 문하에 홍인(弘忍) 등의 제자가 번성함에 따라 동산종(東山宗)이라는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하택신회와 혜능에 이르러 혜능 쪽에서 달마를 조사로 받드는 달마종의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에 이르러 북쪽의 신수와 남쪽 혜능의 종파적 분리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는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의 노력인 것으로 보인다.
혜능의 문하로 내려가면 하택종과 석두종, 그리고 홍주종의 명칭이 보인다. 하택종은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가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고, 석두종은 청원행사의 뒤를 이어 석두희천(石頭希遷)이 일가를 이룬 것이다. 또한 홍주종은 남악회양의 뒤를 이은 ‘강서의 미친 말’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일가를 이룬 것이다.
초기에는 하택종이 번성하였으나, 이후에는 홍주종과 석두종이 더욱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특히 하택종은 혜능의 정통 법맥이 바로 하택종임을 강조하였고, 규봉종밀과 같은 이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全集都序)』에서 일체의 종파와 교의를 교선(敎禪)일치의 입장에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숙어는 바로 규봉종밀이 저술한 『선원제전집도서』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하택종의 정통을 세우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부터 선종의 면모가 물씬 풍겨나기 시작한다.
강서 홍주종의 마조도일과 호남 석두종의 석두희천 그리고 우두종의 경산법흠 등이 당대의 3대 거장으로 추앙되면서 그들의 문하에 상당한 제자가 생겨난 것이다. 달마종이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법맥이 형성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마조도일, 석두희천, 그리고 우두종의 경산법흠(勁山法欽)의 문하에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오대무명(五臺無名, 722-792), 오대무착(五臺無着), 복흥도융(福興道融), 용안여해(龍安如海, 728-808), 용아원창(龍牙圓暢), 오흥법해(吳興法海), 태백관종(太白觀宗, 731-809), 양주도견(壤州道堅, 735-807),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8), 서당지장(西堂智藏, 739-814),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7), 장엄혜섭(莊嚴慧涉, 741-822), 협산여회(夾山如會, 744-822), 복우자재(伏牛自在), 부용태육(芙蓉太毓, 744-822),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 약산유엄(藥山惟儼, 759-828), 불굴유칙(佛窟遺則, 772-830) 등이 일시에 배출된 사실을 보면 선(禪)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들 제자들 속에는 마조도일과 석두희천 그리고 경산법흠을 오가면서 배운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바야흐로 선종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석두종과 홍주종 그리고 우두종은 서로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통틀어 남종(南宗) 속에서 크게 흐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마조도일의 문하인 백장회해에 의해 백장청규(百丈淸規)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선을 중시하는 종파가 어느 정도 독립을 하고 있었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백장회해의 청규(淸規)에 의해서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다만 법당(法堂)을 꾸미는 제도가 시작됐고 방장(方丈), 승당(僧堂) 등 선원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좌선(坐禪), 입당(入堂), 재죽(齋粥), 보청(普請) 등 총림(叢林)의 운영규칙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바야흐로 선을 중시하는 종파적 독립성이 생긴 것이다.
선종이라는 종파적 독립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약 9세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 당대(唐代)에서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사이에 해당되며,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말기에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서 당나라로 가는 유학생과 상인을 보호하는 일을 하던 때가 828년 이후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보리달마의 선법(禪法)은 당나라 시대에 선종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어 송대(宋代)에까지 발전하게 된다. 바야흐로 5가7종이 번성을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송대에 들어 선종의 공안(公案)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설두중현(雪竇重顯)이 뽑은 송고백칙(頌古百則)과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뽑은 송고백칙이다. 설두중현이 묶은 송고백칙은 원오극근이 벽암록(碧巖錄)으로 펴냈고, 굉지정각의 송고백칙은 종용록(從容錄)으로 남았다. 벽암록과 종용록에 이르러 선종의 기연어구(機緣語句)와 문답상량(問答商量)이 정형화된 틀로 묶여서 수행의 지침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현재 1만 5000개의 사찰과 700여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 조동종의 조사인 도오겐(道元, 1200~1253)은 ‘선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선종적 독립의 시기를 송대(宋代)로 보고 있다. 선(禪)의 문답이 곧 불교의 정수를 거량(擧量)하는 법의 문답이라고 할 때, 어찌 송대에만 있고, 선종에만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간화선(看話禪)의 종풍(宗風)이 형성되고 난 이후에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면목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답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하기에 중국 선종의 성립을 간략히 고찰한 것이다.
하지만 간화선이 아닌 묵조선 계통의 조동종과 초기 선종사에 선의 문답이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불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바로 간화선의 종풍(宗風)이며, 여기에 기반한 문답상량(법거량)이 많기 때문에 간화선을 주로 고찰하는 것이다. 간화선의 종풍은 대혜종고에 이르러 거의 완결적 구조를 갖추게 되며, 여기에 비해서 굉지정각의 선풍이 차별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대혜종고와 굉지정각이 서로 비판하는 가운데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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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마는 인도 선불교의 28대조다. 마하가섭의 법맥을 이었다.
어느 날 동쪽 땅에 大乘의 기운이 서린 것을 본 달마는 3년의 바닷길을 건너 중국 南海에 이르렀다.
때는 526년, 南朝 양무제 502-549년의 치세기간이었다.
양무제를 '숭불천자' '황제보살이라고 칭송하였다.
남조의 양나라는 사원이 3천 곳, 승려가 8만 명이라는 기록처럼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국가였다.
불교는 江南의 귀족들이 주목한 인간정신에 대한 자유로운 사색의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양무제는 廣州에 도착한 달마를 수도 금릉으로 초빙하여 대화를 나눴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렸으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 "공덕이 없습니다."
(절을 짓고 봉양하는 일은 단지 福을 닦는 것이다. 덕은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다.
즉 불가의 공덕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佛法의 대의는 空과 般若다. <--- 불법은 정함이 있는 고정된 법이 없다.
공(空)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개념화한 텅 빈 상태로 근본적인 진리를 의미하고,
반야는 이분법적인 분리 분별을 깨트리고 직관으로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를 말한다.(금강경)
2
공적(空寂)은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어 생각하고 분별할 것도 없다는 텅빈 마음을 가르킨다.
공적을 깨달으면 본래부터 아무 일도 없는 마음이 기댈 곳이 사라져서 이내 해탈에 이른다.
이것이 법융의 우두종의 선법이다.
만약 지식으로 앎을 안다고 하면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는 것과 같지.
앎은 단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니
앎이 없어져야 다시금 앎을 아네.
종교와 학파를 불문하고 만고의 스승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하며 자신을 추종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마음을 안 제자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홀로 설 수 있었다.
3
어떤이는 不立文字에 따라 '경전이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不立文字는 '더는 경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 가깝다.
즉 경전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할 만큼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달마와 혜가는<능가경>을, 홍인과 혜능은 <금강경>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삼았다.
<능가경>에서, "일체의 법을 말하지 않으면 敎法은 사라진다.
교법이 사라지면 모든 부처와 보살 또한 없으니, 그들이 없다면 누가 법을 전하겠는가.
따라서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방편으로써 經法을 말해야 한다."
마치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것처럼 말과 문자는 관념의 한 조각에 불과하며 공허한 것이다.
문자는 그대와 나의 손가락이나 다름없네.
손가락은 달을 가르킬 수는 있어도 달 자체는 아니니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지 어찌 손가락을 보려고 하는가?
4
충만함은 비움에서 온다. 텅 빈 하늘을 보면 내 마음도 텅 비는 법.
텅 빈 하늘에 담긴 무한한 충만함을 느끼면 내 마음도 충만함으로 가득찬다.
이것이 모두 빈 것마져 비워낸 텅 빈 충만의 경지, 바로 진공이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서 고기가 물지 않으니
빈 배 가득 달빛 싣고 돌아온다네
천 길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는 것은 깊은 못에 뜻이 있기 때문인데,
그대는 어찌 세 치 갈고리를 벗어나 말하지 않는가?
5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라고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는 존재의 유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佛性으로 본다면 有와 無의 구분은 없기 때문이다.
6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이미 나에게 '나'의 모습이 있지만, 늘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얽매인다.
그러나 그 모습 또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본래의 '나'와 타인이 보는 '나'를 애써 분별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이름을 버리고, 내 직업을 버리고, 내 나이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오직 본래의 나인 것이다.
과연 본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6
물건이 남으면 '부(富)'라고 부르는데, 이 富를 바라는 마음을 '빈(貧)'이라 한다.
반대로 물건이 부족하면 '빈(貧)'이라 하는데, 이 貧에 만족하는 마음을 '부(富)'라고 부른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거의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 없이 지내도 되는 마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7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면 속의 목동은 수행자이자 구도자를, 소는 마음 혹은 自性을 상징한다.
이는 무정설법과 일원상(一圓相)으로 잘 알려진 남해혜충 선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송나라 때에 이르러 보명스님과 곽암스님이 그린 두 가지 유형의 십우도로 구분된다.
1) 보명의 십우도는 검은 소가 점차 흰 소로 변해가는 도상으로 그려졌고,
마지막 장면에 깨달음을 상징하는 큰 원이 등장한다.
이는 점수(漸修)를 근간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돈오(頓悟)라고 본 것이다.
2) 곽암의 십우도는 모든 장면이 원 안에 그려졌고, 여덟 번째 장면에 큰 원이 등장한다.
사람과 소가 모두 사라졌으므로 '인우구망(人牛俱妄)'이라고 한다.
이는 여러 수행 단계를 거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깨닫는 돈오를 가르킨다.
다시 말하면, 보명의 심우도는 묵묵히 좌선에 정진하며 철저한 수행을 거쳐 단번에 깨달음을 얻어 진리에 도달하는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을,
곽암의 십우도는 한 가지 화두로 참선하다가 한순간 화두를 깨뜨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반영한 것이다.
12세기 송대 곽암(廓庵)선사가 게송으로 정리한 십우도이다.
제1은 심우(尋牛)이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는다.
제2는 견적(見跡)이다.
소를 찾을 실마리가 되는 발자국을 본 것이다.
제3은 견우(見牛)이다.
자취를 따라 찾아 들어가 드디어 소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소의 성질은 알지 못한다.
제4는 득우(得牛)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소를 잡았으나 날뛰는 소를 뜻대로 다루지는 못하고 산 속으로 구름 속으로 헤매며 채찍을 가한다.
제5는 목우(牧牛)이다.
이제 뜻대로 길들여져 채찍과 고삐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사람을 잘 따르기에 이르렀다.
제6은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몸을 소등에 올려놓고 하늘을 쳐다보며 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제7은 망우존인(忘牛存人)이다.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소는 사라지고 사람만 한가롭다.
달은 구름을 벗어나고 한줄기 서늘한 빛이 영겁의 밖을 비춘다.
제8은 인우구망(人牛俱忘)이다.
소도 소를 몰던 채찍도 소용없고 사람마저 텅 비었다.
백 가지 새가 꽃을 물어오니 한바탕 웃음이로다.
이제야 조사가 하나되는 경지에 선다.
제9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본래 청정하여 한 티끌의 미혹함도 없으니 어찌 닦음을 더하랴.
암자에 앉아 암자 이전이 무엇인가 보지 않아도 물 절로 잔잔하고 꽃 절로 붉다.
제10은 입전수수(入纏垂手)이다.
표주박 차고 거리에 들어 집집마다 다니며 더불어 사는 속에 성불하도록 한다.
8
방하착(放下着) - 마음도, 욕망도, 집착도 내려놓는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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