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와 불교

2019. 2. 25. 21:08책 · 펌글 · 자료/종교






힌두교란?


브라만교의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제도와 관습을 망라한 인도의 민족종교. (*힌두란 본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인 신두(Sindhu;大河의 뜻)의 페르시아 발음으로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는 넓은 의미로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 · 자이나교를 배제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실제에 있어 힌두교는 하나의 종교를 넘어서 인도인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성스럽고 다양한 사상적 전통들과 행위의 관습들을 총망라한 매우 포괄적인 문화적 전통을 가리킨다. 

 


역사 

 
BC 2300∼BC 1800년 모헨조다로 · 하라파를 중심으로 인더스문명이 번영하였는데, BC 1500년 무렵 아리아인이 西北인도에 진입해 인더스문명 유적 근처인 펀자브지방에 정착하여 BC 1,200년 무렵 《리그베다》를 편찬하였다. 그 뒤 BC 500년 무렵까지 주요 베다성전(聖典)이 편찬되었으며, 브라만계급을 정점으로 한 브라만교가 전성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BC 500년 무렵부터는 사회적 대변동을 배경으로 반(反)브라만교적인 자유사상가가 배출되면서 불교 ·자이나교가 성립하였다. 불교가 종교·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던 BC 2∼AD 3세기 무렵 베다문화의 틀이 붕괴되고 브라만교가 토착의 비(非)아리아적 민간신앙 ·습속 등을 흡수하면서 크게 변모하여 힌두교가 성립하였다.


힌두교는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하면서 ① 힌두교의 핵심을 이루는 성전의 성립(기원 전후 이후) ② 종파의 성립(1∼2세기 이후) ③ 강한 바그티(信愛) 사상의 대두(6∼8세기 이후) ④ 탄트리즘 형성(8세기 이후) ⑤ 이슬람 침투(13세기 이후) ⑥ 영국의 지배, 서양문명과의 접촉(18세기 이후)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힌두교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聖典 

 
가장 근본적이고도 오래된 성전은 《베다》이다. 힌두교도는 《베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천계성전(天啓聖典)이라 부르며, 이것은 신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닌 성선(聖仙)이 신비적 영감을 감득하고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명목적인 일로 모든 힌두교도가 다 함께 절대적으로 존숭해온 것은 아니며, 오늘날 이것을 읽을 수 있는 힌두교도 또한 많지 않다.


천계성전 다음으로 권위를 부여한 문헌들에는 인도의 국민적 2대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일반대중의 힌두교 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성전 《푸라나》, 《마누법전(法典)》을 비롯한 많은 법전 등을 포함한 고전서(古傳書)가 있다. 고전서는 성현의 저작으로 생각되며 대부분은 산스크리트로 씌어졌다. 


사상 

 
힌두교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사상· 교의가 공존하며, 다른 종교에서 보이는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엄격한 대립·항쟁은 별로 없다. 이런 힌두교의 성격상 교의를 총괄적으로 개관하기는 어렵고, 다만 널리 용인된 중심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우주관 : 우주 창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절대자 브라마(梵天)가 유희(리라)를 위해 우주를 창조하여, 이 현상세계를 브라마의 환력(幻力;마야)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본래는 환영처럼 실재하지 않고 브라만만이 실재한다고 설법할 때가 있다. 우주의 중간에 있는 대지는 메루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한 원반으로, 그 중요부분이 바라타바르샤 즉 인도이다. 이 우주는 브라마의 하루 동안 즉 1칼파(지상의 43억 2000만 년) 동안 지속되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우주는 브라마로 돌아간다. 우주는 1칼파마다 창조와 귀멸(歸滅)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② 업(業)과 윤회 : 인간은 죽어서 無로 돌아가지 않고 각자의 業에 따라 來世에서 다시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이처럼 생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 윤회로서, 현재 각자의 성격 ·계급 ·행복 ·불행 등은 모두 과거에 행한 업의 과보(果報)이다. 업 ·윤회 사상은 우파니샤드 가운데에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으로 힌두교의 핵심적 교의가 되었지만, 운명론이나 결정론과는 본질을 달리하고 있다.


③ 법(다르마) : 행위규범으로서, 중심과제는 종성법(種姓法)과 생활기법(生活期法)이다. 종성법은 브라만 ·왕족 ·서민 ·노예의 4계급에 부과된 법이다. 생활기법은 학생기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遊行期)라는 인생의 4시기에 관해 규정한 규범이다.

종성제도는 카스트제도와 연결된 것으로 오늘날에도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르마의 실천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 애정 ·성애를 추구하는 애욕, 그리고 해탈과 함께 힌두교도 인생의 4대 목적으로 되어 있다.


④ 해탈 :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업 ·윤회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해탈에의 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힌두교 성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다음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행동(카르마)의 길로서,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심이 없는 의무의 수행은 과보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둘째, 지식의 길로서, 참다운 자아는 육체나 감관이나 사고 등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며, 이것은 브라만과 동일한 직관적 통찰에 이른다.

셋째, 박티의 길로서, 인격신(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가장 대중적인 길로서 7∼8세기부터 독립된 교파로 발전되었다.

업 ·윤회 ·해탈의 문제는 일반 힌두교도뿐 아니라 사상가들에게도 중요한 과제로서, 힌두교의 정점을 형성한 산키아학파 등 6파철학이 성립하여 이론적·체계적으로 해탈과 그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입각한 베단타학파는 인도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현대 인도 지식인의 대표적 철학이 되었다. 


종파와 의례 

 
다신교적 성격을 반영, 다른 종파는 다른 주신(主神)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종파는 비슈누교와 시바교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그러나 힌두교의 경우 종파라고 해도 막연한 것이며, 조직화된 교단· 교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힌두교 사원은 인도 각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나 독립적이며 횡적인 조직은 없다.

사회적 조직은 카스트제도가 대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 인도에는 이슬람신비주의(수피즘)가 침투해, 16세기 무렵부터는 힌두교에 이슬람교와 융합된 종교개혁의 기운이 생성되었으며 시크교 등이 성립되었다.

1858년 인도가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된 뒤 서양 사상· 문물과의 접촉을 계기로 19∼20세기에 힌두교의 르네상스라 하는 큰 변동이 일어나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아침마다 강이나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시바신 등의 신상(神像)에 예배한 뒤 식사를 한다. 의례에는 염주를 사용하고 만트라(神歌)를 부른다. 의례 가운데 개인의 일생을 통해 실행해야 하는 약 40가지에 이르는 삼스카라(통과의례), 특히 탄생제, 남자가 정식으로 힌두사회의 일원이 되는 입문식, 결혼식, 장례식은 중요하다.

힌두교 전통에 의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자기가 선택한 신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에서도 힌두교도들은 아무 갈등이나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불교~ 

 
석가모니 즉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교법을 신봉하는 종교.

붓다는 동사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 ·불(佛) ·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상 붓다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붓다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불교의 개조(開祖)를 다른 모든 부처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라고 이름하였다. 고타마란 석가모니의 성(姓)을 말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석가라고 하는 부족출신의 성자(聖者, muni)를 의미하며,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석존 또는 세존이라고 한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제자들에 의한 불설(佛說) 편찬인 불전결집(佛典結集)과 교단의 조직화를 통해 비로소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설 중 교리와 사건에 관한 부분을 법(法)이라 하고, 출가자들의 행위에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 및 규율에 관한 부분을 율(律)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經) ·율(律;vinaya) 이장(二藏)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외면상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보수적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고, 훗날 진보파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던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카니슈카왕대에 이르러 서역제국과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또 다른 경로는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는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여, 당시 선진문명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불교와 합치되어 세계 각국으로 유입되었으며, 각국의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유품으로 남아 있고,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사원이나 탑에 조각과 벽화로서 장식되어 미술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 불교는 한국 ·자유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와 불교왕국인 타이 등 동남아시아 및 티베트 ·유럽 일부, 심지어 미국 등지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특징을 보면, ①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아함경전(阿含經典) 외에 수많은 대승제경전(大乘諸經典)이 고타마 사후 수백년을 지나면서 출현한 대승제불(大乘諸佛)에 의해 창작되어, 성전의 수가 방대해졌다.


② 붓다와 대승제불 등에 대한 경모 ·숭배는, 심정에 있어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③ <신(神)>을 내세우지 않기에, 깨달음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붓다를 무한히 이상화하면서도 창조자 ·정복자의 성격은 갖지 않는다. 아울러 대승의 佛과 그 후보자라고 하는 보살(菩薩)은 수적으로 크게 증대하여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다.


④ <깨달음>으로서의 지혜가 강조되고, 불교도의 구제기원(救濟祈願)이 반영되면서 자비가 강조되었다.

⑤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⑥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멀리하는 쪽이 <무아(無我)>로서 강조된다.

⑦ 일체를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되어, 얼마 뒤 실체적 사고를 버린 <무아>설과 함께 <공(空)>의 사상을 완성한다.


⑧ 평안이 있고 어지러움이 없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이 달성되며, 적정(寂靜) 그 자체의 열반(涅槃;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인도불교 

 
인도불교사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면, 초기는 고타마 붓다가 불교를 창시한 때부터 그가 입멸(入滅)한 뒤 100여 년(또는 200여 년)까지의 교단분열기이다.


중기는 부파불교(部派佛敎)가 번영하고, 조금 뒤에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초기대승의 시대를 더한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초에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도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를 후기로 보면, 이 시기에는 부파와 중기 ·후기의 대승이 병행한다.


그러나 7세기 후반을 지나면 밀교(密敎)가 두드러지게 늘어난다.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그 뒤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불교는 막을 내렸다. 


초기불교 

 
원시불교라고도 한다. BC 13세기 무렵, 북서쪽에서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에 의해서 인도문명은 열린다. 신들을 찬양하는 베다에 이어 그 주석문헌(註釋文獻)이 만들어지고, 다시 BC 7세기 이후는 갠지스강 일대에 진출하여 우파니샤드 문헌이 나타났다.


초기의 옛 우파니샤드에 처음으로 신화를 뺀 철학이 탄생되었는데,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고 개인의 내재적 원리를 탐구한 다음, 양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이 철학은 2∼3세기 이후에 부흥해서 정통 인도철학을 형성하였다).


BC 7∼BC 6세기 무렵에는 농촌의 성장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고 군소국가가 성립하여 그들의 합병에 의한 16대국이 발전하고 도시도 건설되어 인도사회는 일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 중에서 자유롭고 청신한 사상가들이 잇따라 등장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상에 몰두하여, 출가해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문(沙門 ;팔리어는 사마나, 산스크리트는 슈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활동하여, 세상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교의 권위를 오히려 부정했던 이 새로운 사상 중에는 상당히 과격한 것도 적지 않다.


새로운 사상에 대해, 초기 불전(佛典)은 62종, 자이나교는 363종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 중에도 불전이 전하는 6종이 잘 알려졌으며, 흔히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한다. 그것은 도덕부정(道德否定) - 쾌락주의 ·유물론 ·허무주의 ·결정론 ·회의론 ·금욕 - 고행주의로 개괄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거의 갠지스강 중류 일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 80세에 입멸하기까지 그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불멸(佛滅) 후 불제자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흩어져서 그 가르침을 퍼뜨렸는데 수백년 동안은 모두 구송(口誦)의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아가마(Agama)는 전승(傳承)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마가다어로, 이어서 그것이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중서부 일대의 속어인 팔리어로 옮겨졌고, 현재는 산스크리트로부터 한역(漢譯)된 것과 팔리어 문헌이 전해져 있다. 다만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것은 다음 대인 부파불교의 초기, 즉 불멸 후 약 200년 이상이나 후대이며, 이 여러 문헌에서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을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적어도 여러 자료에 관한 문헌학이 없어서는 안된다.


한역에는 사아함(四阿含 ;長 ·中 ·雜 ·增-의 각 아함)과 이들 일부분의 이역(異譯)이 있으며, 팔리어로는 장 ·중 ·상응(相應) ·증지(增支) ·소(小)의 5니카야[五部]가 있다. 위의 최초의 사부(四部)와 한역의 사아함은 각기 다수의 불경으로 되어 있으며, 공통된 것이 많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팔리어의 소부(小部)는 15개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그 중에서 《수타니파타(經集)》 《담마파다(法句經)》와 그 밖에 몇 종류 중 시(詩;韻文) 형식의 불경이 초기의 불교를 잘 전하고 있다.


이상의 전체를 <경장(經藏)>이라 하고, 그 밖에 교단의 규율을 기록한 <율장(律藏)>, 좀 늦게 성립된 주석문헌인 <논장(論藏)>이 있고, 합해서 삼장(三藏)이라 하며, 이것이 후대에 더욱 발전, 증가하여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 되었다.


붓다는 <현실은 고(苦)다>라는 탐구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을 찾아서 수행하고, 苦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아 불교를 수립했다. 苦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을 깊이 탐구해 가면 자기의 밖의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 자기를 배반함을 뜻한다.


예컨대,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부터의 해방과 같이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것을 자기가 바란다는 것에 苦의 본질이 있으며 이것은 자기 모순이나 자기 부정이 된다. 이 고(苦)의 탐구를 둘러싼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삼법인(三法印) : 법인은 불교의 상징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셋을 말하는데, 뒤에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게 되었다. 현실은 모두 고에서 출발하고, 특히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여러 상(相)이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유동한다. 그에 대한 일종의 영탄(詠嘆)이 <무상>으로서 파악된다. 물론 자기는 실천의 중심이며 깨달음의 주체이나, 한편 많은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집착(특히 我執)을 버리는 것이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의 양상을 밝혀서 깨달음이 열리고, 해탈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적정(寂靜)이 실현된다.


② 사제(四諦):제(諦)는 진리라는 뜻이며,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4가지를 말한다. 일체는 고라는 진리, 고는 무엇에 의해 생기느냐는 진리, 고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진리, 고를 없애는 실천에 관한 진리이다. 도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 즉 8가지 바른사상 ·사고 ·말 ·행위 ·생활 ·노력 ·의식집중 ·정신통일로 이루어진다.


③ 중도(中道) : 고와 낙, 상(常)과 단(斷), 유와 무,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같은, 한쪽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쪽의 극단도 적극적으로 버리는 양상을 말하며 이것은 거의 팔정도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④ 무기(無記) : 세계의 시작과 종말 등의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다만 논쟁을 일으킬 뿐으로 실천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우선 비근한 실천을 할 것을 가르친다.

 

⑤ 법(法) : 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 또는 팔리어의 담마(dhamma)의 역어이며, 일체의 현실존재를 성립시키고 있는 결정 ·형(形) ·가르침·규범 및 그 존재를 말하며, 이 법으로 일체의 존재를 설명하고, 그 밖의 유일절대의 신이나 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법에서는 색(色;감각적·물질적인 것) ·수(受;意識의 感受작용) ·상(想;의식의 表象작용) ·행(行;잠재적·능동적 작용) ·식(識;인식작용)의 오온(五蘊;5가지 積聚)을 설명하고, 또는 눈 ·코 ·귀 ·혀 ·몸 ·마음의 육입(六入;감각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對象)을 설명한다.


⑥ 십이연기(十二緣起, 十二因緣) : 원인과 조건을 분석하면서 종합한다는 일종의 논리적 반성 위에 연기설이 세워져 항상 인생의 현실에 관해서 설명한다. 즉 苦는 노사(老死)에 의해, 노사는 생(生)에 의한다고 그 생기(生起)의 양상이 탐구되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계열을 더듬어가서 애착에 이르며, 나아가서는 근원적인 무지에 상당하는 무명(無明)에 이른다. 이 현실탐구에 의하여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고, 그 완성태(完成態)는 열 두 부분(支)을 헤아리는 십이연기인데, 그 밖에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다.


⑦ 심(心) : 종교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또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타난다. 마음에서 바른 것과 청정(淸淨)을 찾고, 생명의 존중과 평등을 알며, 정진을 서약하고, 원한 ·분노 ·집착 ·탐욕 ·우둔을 버린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1000명이 넘는 제자들은 불(佛寶)을 중심으로, 그 법(法寶)을 실천하는 교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삼가(僧伽로 음사하고 僧이라고 약칭한다. 僧寶)가 되었다. 교단은 크게 나누어 출가한 남성(比丘)과 여성(比丘尼), 재가신자(在家信者)의 남성(優婆塞)과 여성(優婆夷)으로 이루어졌으며, 재가신자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출가자는 전심하여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설도했다. 교단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또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있었다. 


부파불교 

 
붓다의 입멸 후, 교단은 차츰 확대·발전하고, 특히 BC 3세기 전반에 인도에 처음으로 출현한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 그리고 그 황금시대를 쌓은 아소카왕의 불교 신앙은 불교의 세력을 전인도에 비약적으로 늘렸다.


교단의 확대와 함께 아소카왕 때보다 조금 앞서서 교단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해 분열되어, 각기 상좌부와 대중부라고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사이에 대중부가 다시 분열되어 전부 약 20개의 부파가 성립되었다. 뒤에 일어난 대승불교도(大乘佛敎徒)는 이것을 소승이십부라고도 했다.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 교리 ·교의를 조직화, 체계화했다. 이 정밀(精密)한 교의대계(敎義大系)는 아비다르마(abhidharma;阿毘達磨, 또는 阿毘曇)라고 하며,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철학과 대등하다.


현재 아비다르마는 남방불교가 전하는 상좌부의 칠론(七論)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有部)의 한역인 칠론이 전해지며, 그 밖에 소속불명의 한역이 2∼3개 있다. 부파불교는 거의 출가자의 독점에 맡겨져서 그들은 오직 자기의 수행에 정진하고, 교단에 속하는 장원(莊園)에 의존하였다.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데가 많다. 마우리아왕조 붕괴(BC 180년 무렵) 이후, 북인도는 200년 이상이나 외래 민족들의 침입으로 사회적 대혼란이 계속되었고, 불교 내부에서는 출가자에게 치우쳤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혁신운동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세워졌던 불탑(stpa) 숭배가 한층 성해지고, 붓다를 찬양하는 문학작품 등도 관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중국 ·티베트 ·일본 등의 북방불교는 모두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그것은 모든 집착의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고, 공(空)의 사상을 내세우는 《반야경(般若經)》,

광대한 부처(毘盧遮那佛)의 세계 속에 10가지의 수행단계를 가르치고, 유심(唯心)을 주장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의 세속생활 속에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유마경(維摩經)》,

피안의 극락세계를 찬미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구제를 바라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일승사상(一乘思想) 으로써 관용과 방편을 제시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수립하는 《법화경(法華經)》, 선정(禪定)에 몰입하여 부처를 눈앞에 보려고 하는 각종 <삼매경전(三昧經典)>,

주문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비성을 호소하는 <다라니성전(陀羅尼聖典)> 등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것은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의 약 200∼300년 동안의 일이며, 마침내는 이러한 경전들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가 등장한다. 

 
⑴ 불 ·보살의 확대 : 부처가 종래의 고타마 붓다 한 부처에서 과거불(7불) ·미래불(彌勒佛), 그리고 현재의 다방불(多方佛)로 확대되며, 그중에서도 구제불로서 아미타불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등이 경모(敬慕)된 외에 절대자의 성격을 강화한 비로자나불 ·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 등이 확립되었다. 보살은 원래 불타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나타냈는데, 많은 부처의 등장과 함께 보살도 확대되어서, 관세음(觀世音;觀音, 觀自在) ·문수(文殊) ·보현(普賢) ·세지(勢至) ·지장(地藏) 등의 여러 보살이 세워지고, 최후에는 불도에 힘쓰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중생 전반으로 넓혀졌다. 이들 대승의 불 ·보살들은 아함의 고타마 붓다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름없는 새로운 제불에 의해서 앞에 열거한 대승의 방대한 여러 경전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⑵ 이타(利他) : 부파교단의 폐쇄적·이기적 ·독선적인 양상을 냉엄하게 비판하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서로 남과 깊이 관계한다고 보아 보시(布施)하는 등 자비를 으뜸으로 한다. 

 
⑶ 공(空)의 사상 : 공은 부파불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제창되었고 일체의 존재를 상관(相關)·상의(相依)·상대(相待)의 이상적인 상태에서 이해하고 그 연관을 어디까지나 확대시킴으로써, 존재는 물론 법 그 자체의 실체(自性)를 빼앗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세계를 전개한다. 

 
⑷ 바라밀(波羅蜜) : 본래는 완성을 뜻하나, 이것을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고도 해석한다. 보살의 실천을 명확하게 한 것이며, 보시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설이 중심이 되고, 여기서도 특히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 강조된다.


3세기 이후에도 경전은 잇따라 만들어져, 《승만경》 《열반경(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등이 있으며, 한편 마이트레야(Maitreya;彌勒), 아상가(Asanga;無着), 바수반두(Vasubandhu;世親)와 같은 논사(論師)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유식설(唯識說)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중심이 된다. 유식설은 일체를 우리들의 경험상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순수한 정신작용, 즉 식(識)으로 환원한다. 반대로 말하면 식의 분별작용에 의해 모든 현상과 존재가 나타난다고 한다.


먼저 눈 ·귀 ·코 ·혀 ·몸 ·뜻의 6가지 식이 일상적인 식이나, 그 안에는 말나식(末那識)이 있어서 여러 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軸)이 된다. 그리고 그 근거에 잠재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세워, 여기에 과거가 집적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은 여래의 곳간이며, 불성 즉 부처의 소질이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으로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으며, 평소에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중생 누구나가 여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세기 무렵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이 유식설과 여래장사상을 교묘하게 통일시켜 논한 것으로, 가장 알맞은 대승불교입문서라고 했다. 그 뒤, 인식론을 포함한 불교논리학이 확립되고 디그나가(Dignaga;陳那)·다르마키르티(Dharmakirti;法稱)가 특히 유명하며, 그들은 중국 등에서 <인명(因明)>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밀교 

 
7세기 이후의 후기대승불교는 다라니(dhran;陀羅尼)와 만트라(mantra;眞言)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秘佛敎)가 주류가 되어, 《대일경》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만들어져서 그 가르침을 확립하고, 그 뒤에도 다수의 밀교경전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특정한 영역이 성역인 만다라(曼茶羅)를 쌓고, 특수한 범절을 행하면서 여러 가지 주문(呪文)에 빠져들 때 대일여래를 위시한 제존(諸尊)이 나타나는데, 참가자만이 도취의 극으로 그 공덕을 차지한다. 이때 현실적으로 그대로 부처에게 가까워질 뿐 아니라 부처가 된다(卽身成佛)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교를 후기대승에서 독립시켜 다루는 설도 있다. 밀교는 불교의 민중화에 수반한 것이지만 도리어 힌두교와의 구별이 모호해져서 불교는 그 독자성을 잃고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불교는 11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인도 진출로 인하여 차츰 사라져 13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멸되었다. 


중국불교

전도(傳道)시대(4세기 말까지) 

 
불교 전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서역(西域)을 경유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물론 중국은 이 시대까지는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또 문자의 표현과 기록의 보존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국의 문화는 반드시 한자로 옮겼다.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의 외국 승려 외에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의 중국인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독자성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老子) 수준으로 신봉되었고, 특히 반야(般若, 智慧)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서 해석하는 융합 ·절충이 성행하였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일종의 혼효사상(混淆思想)이 시행되었다. 


연구시대(580년까지) 

 
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서역으로부터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이후 9년 동안 여러 대승경전을 훌륭하게 번역하였고, 또 3000여 명의 제자를 교육했다. 여기서 중국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번역한 한문경전만으로 충분히 불교교리를 연구,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불타발다라 ·담무참(曇無讖) ·진제(眞諦) ·보리유지(菩提流支) 등의 도래승에 의하여 뛰어난 한역불전이 완성되었으며, 이들 여러 경과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많은 학파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역경서(譯經書)가 정리되어 경록(經錄)과 전기 등 신뢰할 만한 불교사의 여러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혼란이 계속된 이 시대에 불교는 겨우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한민족의 습속과 융합하여 우란분회(盂蘭盆會)같은 법회(法會)가 성행하게 되었다. 때로는 왕조에 의한 폐불(廢佛)이 있었으나, 불교는 즉시 부활하였다. 다퉁[大同] ·윈강[雲崗]의 석불과 룽먼[龍門]의 석굴 등은 열렬했던 불교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시대(8세기 중반까지)

 
300년에 가까운 분열에서 중국은 마침내 통일되고, 수(隋)나라 ·당(唐)나라의 왕조가 계속되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통일과 종합을 가져왔다. 불교의 여러 학파는 이른바 종파로서 독립하여 중국불교의 황금시대를 출현시켰으며, 수나라의 3대법사라고 하는 정영(淨影;慧遠) ·천태(天台) ·가상(嘉祥;吉藏)이 나타났다.


먼저 혜원은 그의 저서 《대승의장(大乘義章)》으로 유명하고,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으며, 지의는 천태종(天台宗)의 개조로서 알려졌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 敎相判釋)의 원형을 제시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여러 경전의 최상위에 두었으며, 또 지관(止觀;정신의 集注)에 힘써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길장은 용수(龍樹) 계통을 이어 받아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삼계교(三階敎)가 행해졌는데, 말법사상(末法思想)의 고취가 과격하였기 때문에 즉시 탄압되었으며, 그 가르침은 정토교(淨土敎)에 흡수되었다. 담란(曇鸞) ·도작(道綽) ·선도(善導)와 같은 승려가 나와, 오로지 아미타불 신앙을 주창하는 정토교가 확립되었다.


 645년, 17년 동안의 인도-서역 여행으로부터 귀국한 현장이 당시의 인도에서 번영했던 불교를 중국에 전했다. 그 방대한 번역경전 중 아비다르마·유식 ·논리학(因明) 등에 귀중한 것이 많고, 특히 유식설(唯識說)은 그 문하인 자은대사(慈恩大師)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은 화엄경의 번역에 참가하여, 그 이전부터 내려온 화엄종(華嚴宗)을 확립했고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움과 동시에, 일체의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설(緣起說)을 그 가르침의 중심으로 했다.


또, 이미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 전해져 있던 선(禪)은 그 6대째라고 하는 혜능(慧能)과 그 동문인 신수(神秀)에 의해서 종풍(宗風)이 확립되고, 많은 우수한 후계자가 나와 엄격한 수행을 철저하게 하여 선종은 중국에서 안정된 지위를 쌓았다.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전래된 것이 밀교이며,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이 인도에서 당나라로 와서 밀교의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고, 밀주(密呪)의 염송(念誦)과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 수법(修法)이 특히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곧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실천시대(12세기 초까지) 

 
이 시대 중반에 다시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충분히 중국화된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그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개판(開板)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널리 읽히게 되었다. 


계승시대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압력을 받아 이동하여 남송(南宋)이 되자 특히 선이 유행하였는데, 천태 ·율(律) ·정토 등도 부흥하여 정토교에서는 결사(結社)를 만들어 염불을 재가자 사이로 넓혀 갔다.


몽골에서 일어난 원(元)나라는 티베트에서 티베트교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유착되어 그것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明)나라 때는 불교에도 국가통제가 엄격하여 중국불교사상 일찍이 없었던 불교교단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루어져 활발한 불교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유(儒)·불(佛)·도(道)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다.


다음의 청(淸)나라 때에는 일시적으로 티베트교가 부활하였으나 이미 국가 통제하에 안주해 온 불교에는 이제 지난날의 활력은 없었다. 재가불교의 부흥도 있었으나 원래 중국불교는 출가불교가 주류였으므로 전반적으로 불교는 쇠퇴하여 갔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중국대륙으로부터 불교는 그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며 최근에 조금씩 부흥되어 가고 있다. 한편, 타이완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가 전해져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일본불교

초기 

 
오래 전부터 대륙불교는 한반도를 거쳐 전해졌고, 처음에는 도래인(渡來人)을 중심으로 민간에 전파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538년 이후라 한다. 그 뒤 숭불(崇佛)과 배불(排佛)의 찬반론이 있은 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불교수용을 확정함으로써 일본에 불교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쇼토쿠태자는 불교에 깊게 귀의하고 불경을 배워 《법화경》 《유마경》의 의소(義疏)를 썼다. 


나라[奈良]불교 

 
중국불교의 황금시대에 대응하여 중국에 성립된 여러 종파가 잇따라 전해져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성립했다. 즉,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성실종(成實宗) ·구사종(俱舍宗) ·율종(律宗) ·화엄종(華嚴宗)이 그것이다. 


헤이안[平安]불교 

 
중심이 되는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교토[京者]로 천도한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신임을 얻어 새로운 불교를 열었다. 사이초는 순수한 구도의 성격이 강하여 일찍이 천태종을 배우고 교토를 떠나 히에이산[比叡山]에 들어갔다. 뒤에 칙허를 얻어 당나라에 들어가 천태를 비롯하여 밀(密) ·계(戒)· 선(禪)을 합쳐 4종합일의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을 창립했다.


이와 같은 종합적인 학풍은 일승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중국의 천태와는 달리 일본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카이도 당나라의 장안(長安)에서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배우고 귀국 후 진언종(眞言宗)을 창설하고 고야산(高野山)에 공고부사[金剛峰寺], 교토에 도사[東寺]를 세워 호국불교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가마쿠라[鎌倉]불교 

 
진정한 뜻에서 불교가 민중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시대이다. 불교 전래 후 600여 년을 거쳐 비로소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탄생하였다. 민중이 불교를 찾았고, 종교적 지도자가 나타나 이에 응했다. 헤이안 중기부터 번영한 호넨[法然]의 정토종(淨土宗), 에이사이[榮西]에 의해 확립된 선종 등이 그것이었고, 가마쿠라시대 마지막에는 니치렌[日蓮]을 개조로 하는 니치렌종[日蓮宗]이 출현, 《법화경》을 근본으로 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등을 주장하였다. 


무로마치[室町]에서 메이지[明治]까지의 불교 

 
가마쿠라 신(新)불교는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에 대응해서 단시일에 민중 속에 퍼졌다. 임제선(臨濟禪)은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의 비호를 받으면서 교토와 가마쿠라의 고산[五山]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조동종(曹洞宗)에는 에도[江戶]시대에 만잔도하쿠[卍山道白] ·멘잔즈이호[面山瑞方] 등이 나와서 가르침을 바로 잡았으며, 다이구료칸[大愚良寬]도 이 종에 속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정부는 처음에 신불분리(神佛分離)에서 폐불정책(廢佛政策)으로까지 나아갔으나, 일본인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불교는 현대에도 일본인의 풍속습관과 사고 한 구석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상당히 깊이 깃들어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이른바 신종교가 니치렌계통[日蓮系統;예컨대 創價學會·靈友會 등] 외에 천태 ·진언계통에서도 많이 나와 다수의 신자를 얻고 있다. 


남방불교 

 
사서(史書)에 의하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BC 3세기 중엽으로, 인도에서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가 부파불교의 보수파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長老部)의 불교를 전하고, 왕조의 보호와 민중의 귀의를 얻어 온 섬에 퍼졌다. 그 경전은 팔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뒤에 한때는 대승불교의 일파도 전해졌으나, 장로부의 번영이 계속되었다.

5세기에는 인도에서 불음(佛音;부다고사)이 와서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 전체의 주석을 완성하였으며,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저술하여 불교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6세기에 불교는 벵골만을 북상해서 미얀마에도 전해졌고, 11세기에는 파간왕조가 전 미얀마를 통일해서 불교가 번영하였고, 당시 부진하였던 스리랑카로 다시 전해졌다. 이후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불교는 쇠퇴와 번영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양지역의 불교는 18세기에 타이로부터 재전래된 것인데, 양쪽이 다 그 정치형태에는 관계없이 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타이민족이 독립한 것은 12세기 초인데 그 당시부터 장로부계통의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뒤에 성쇠를 되풀이하면서 현재에 이르렀고 동시에 불교 이외의 인도의 여러 문화도 받아들여서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불교국이 되었다.


캄보디아는 힌두교와 불교를 섞은 종교가 번영했다. 9∼12세기의 앙코르유적이 유명하며, 톰(도성)과 와트(사원)가 늘어서 있다. 이웃나라 라오스와 함께 나중에 타이로부터 전해진 장로부불교가 성하다.


베트남만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 중국에서 전래된 대승불교가 신봉되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한때 불교가 번성하여 자바에 8∼9세기의 보로부두르 유적이 있으나 뒤에 이슬람권으로 들어갔다. 


티베트불교 

 
티베트불교도는 라마교라는 별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티베트로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통일을 완수한 스롱버트산스캄포왕(재위 581∼649)에 의해서이다. 뒤에 티스롱데찬왕(재위 742∼797)은 인도에서 후기 대승과 밀교에 정통한 샨타라크시타(寂護)· 파드마산바바(蓮華生)· 카말라실라(蓮華戒) 등 3명의 승려를 맞이해서 불교를 융성시켰다.


약 100년의 단절 후 11세기에 아티샤가 인도로부터 옮겨온 이후 티베트불교는 전성을 이루었다. 최대의 승려 총카파는 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룸과 동시에 현교(顯敎)와 밀교에 통달하였고, 특히 중관파(中觀派)의 해석을 밀교에 철저화시킨 저서를 지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이 계보가 정통이 되어,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 전 티베트의 통일군주가 종교· 정치· 문화를 모두 통솔하였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다른 대사(大寺)의 고승에게 판첸 라마의 칭호를 주었으나 그 계보는 하나의 종교적인 권위에 그쳤다. 근세부터 현대에는 영국 ·러시아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 의해서 크나큰 탄압 등을 받았으나, 티베트불교의 뿌리깊은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 이 영향은 티베트 이외에 몽골과 러시아 일부 등지에 남아 있다. 또한 티베트대장경은 특히 대승불교 ·밀교를 전하는 가장 귀중한 보고로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불교 

 
한국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때는 삼국시대이다. 한국 불교문화사의 시대구분에서 삼국시대는 최초기가 된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 가야(伽倻)가 있었고, 그곳에도 불교문화가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받아들인 불교는 하나의 외래종교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만이 아닌,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서 민족문화의 모체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 ·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 세계를 이룩하게 되었다. 곧 이와 같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온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문화는 육로를 통해서 고구려에 전해졌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로 전해졌는데,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뒤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 ·수나라 ·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그러나 가야에 전해졌다는 불교문화는 중국계통이 아닌 인도(또는 남방)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받아들여진 불교문화는 고대 신앙이나 고유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훌륭한 민족문화로 형성되어졌다. 


고구려 

 
고구려는 한국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372년(소수림왕 2) 북중국의 전진에서 부견왕(符堅王)이 사신과 승려인 순도(順道)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그 뒤 374년(소수림왕 4)에 다시 중국에서 아도(阿道)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최초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다. 이를 한국불교의 초전(初傳)으로 삼고, 또 사원 창건의 효시로 본다. 그러나 동진 때의 고승 지순도림(支遁道林)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양고승전(梁高僧傳)》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전래시기는 상향될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왕 때에 이르면서 크게 융성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도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승려들은 해외에서의 구법(求法) 및 전교(傳敎)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과 일본에서 활동한 혜편(惠便)·혜자(惠慈)·담징(曇徵)·혜관(惠灌) 등이 있다. 


백제 

 
한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왔다.

백제는 낯선 외국의 승려를 크게 환영하고 또 궁중에서 극진히 공경하였는데, 이 점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엿보인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이듬해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하였고, 552년(성왕 30)에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하였으며, 30대 무왕 때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彌勒寺)라는 웅대한 절을 세워 백제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지금도 익산의 그 절터에는 한국 최고 ·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에서 특히 겸익(謙益)은 인도에까지 유학을 다녀와 경전을 스스로 번역하여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담혜(曇慧)·도심(道深)·관륵(觀勒)·도장(道藏)·법명(法明)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이 일본문화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국제정세 동향과 새로운 문화추세 등에 대해 어두웠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는 불교문화의 새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를 전하려고 들어왔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과 멸구자가 희생된 사실이 있었으며, 묵호자(墨胡子)와 아도(我道;阿道) 등의 전도승들 또한 밀실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제23대 법흥왕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진흥왕대에 들어서면서 흥륜사(興輪寺) ·황룡사(皇龍寺) 창건, 승니(僧尼)의 양성과 구법유학 지원, 불사리(佛舍利)와 불상의 조성 및 승통제(僧統制) 마련, 국선화랑(國仙花郞)의 단체 설치 등 불교문화를 진흥시켰다.

이후의 왕들도 진흥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불교문화의 보호와 진흥에 힘썼다. 한편 진평왕 때의 원광(圓光)과 선덕여왕 때의 자장(慈藏) 등의 승려는 교화활동에 공이 컸으며, 현태(玄泰)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 등지로 구법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불완전하나마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력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으로, 그들은 신라사회의 정신적 기둥이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또한 원효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 등의 저소(著疏)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경흥(憬興)은 《미륵삼부경소(彌勒三部經疏)》를 비롯한 5부 12권의 저서를 내었고,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태현(太賢),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로서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새로 일으킨 진표(眞表) 및 신인비법(神印秘法)으로 당군(唐軍)의 침입을 미리 막게 한 명랑(明朗) 등은 신라불교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활동하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은 원측(圓測)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긴 혜초(慧超)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한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및 한국 최대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고, 불교문화·음악도 성행하였다. 


고려 

 
고려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적극적인 봉불정책(俸彿政策)에 따라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어 연례행사로 삼게 하였고, 경유(慶猷)· 충담(忠湛)을 왕사(王師)로 삼고 많은 고승 대덕을 존경하여 예우하였다.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국가적 정신은 역대의 왕들이 모두 계승하여 6대 성종은 송나라로부터 대장경(大藏經)을 들여왔고, 8대 현종과 23대 고종은 불법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각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와 같은 훌륭한 고승이 배출되었고, 불교의 여러 종파(宗派)가 이때부터 비롯되어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남산종(南山宗)·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시흥종(始興宗)· 신인종(神印宗)· 총지종(摠持宗)· 중도종(中道宗)· 도문중(道門宗)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대장경》 조성은 고려 불교문화의 집대성인 것이며, 이와 함께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천사(敬天寺)의 13층탑 및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등이 현존하고 있다. 또 광종 때의 균여(均如)는 불교문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조선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표방한 조선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태조 때 무학(無學)을 왕사로 삼아 개국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이후 억불책으로 인하여 상당히 위축되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기존의 종단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하였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수양(首陽)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는 등 그간의 억불책에서 다소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세조는 불교보호정책을 펴 인경간행(印經刊行)과 불전의 번역 및 불교가무(佛敎歌舞)의 창제에 힘썼고, 불교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靈山會上)》은 조정의 정악(正樂)으로 되었으며, 또 불교 무용인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조 사후 조선의 불교는 유생들에 의해 가혹한 배척을 받아 1566년(명종 21)에는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뒤 산중에 은거하던 승려들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조직, 혁혁한 전공을 세워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왜군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불교문화는 산중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근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그 핍박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승려에 대한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의 해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니치렌종[日蓮宗] 승려의 건의에 따라 당시의 친일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金弘集)의 결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1899년(고종 36) 동대문 밖(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가 세워져,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가 되면서 전국의 사원을 통할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때부터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불교를 보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의 위치는 차츰 개선되었다.


한편 190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오늘날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모체이며 한용운(韓龍雪) 등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의 불교교단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로 성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설립되어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곧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總本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 뒤 45년 8·15와 더불어 조선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조계종(초대교정 鼎鎬)으로 재정비,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현대불교의 과제 

 
한국 불교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억불로 인해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그 문화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선교양종 또는 조계종의 정통성을 끝까지 지켜왔다. 8·15는 불교계에도 무한한 비약을 기약하는 자유를 누리게는 하였으나, 그에 따른 많은 과제와 문제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그러한 과제와 문제성을 극복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목적과 승가(僧伽)의 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곧 한국불교의 과제이며 바람이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호국불교에 치우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상을 소홀히 하였고 다른 종교와의 갈등에 원만히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많은 불자(佛子)들의 대승적 노력과 특히 불교방송(佛敎放送;BBS)의 개국 등으로 인해 오해반목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불교의 현황 

 
인도불교는 20세기 중반에 주로 천민계급에서 新불교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지만 영향력은 작다.

중국 불교는 거의 폐색상태에 있다.

한편, 전통적인 보수계의 장로부불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성하고,

대승불교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번영하고 있다.

티베트불교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있지만 세력은 뿌리가 깊어 튼튼하다.

또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 특히 선(禪)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부에서는 포교에 성공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그 교의나 범절 외에 사상 ·예술 ·문화 및 기타 습속까지도 포함해서 이른바 대승문화로 발전하였고, 특히 한자문화권에 대한 영향은 매우 크다. 다만 그 최대의 특색인 관용이 지나쳐 세속에 영합하여 유행에 빠지기 일쑤이며, 특히 일본에서는 사자공양(死者供養)-장제의례(葬祭儀禮)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일관되는 엄격한 부정-초월의 논리는 과격한 절대화에 등을 돌린 채 다양성의 승인을 진척시켜, 마음의 평정과 평안을 추구하는 불교의 이상과 함께 오늘날 가장 중요한 평화에 대한 정신적 거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불교계 인구는 약 5억이라고 한다. 불교연구는 불교가 전해진 각지·각국에서 예로부터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진정한 의미의 문헌학에 기초한 불교학은 19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서 시작되어, 곧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선각자로는 덴마크의 M. 파우스뵐·V. 트렝크너, 프랑스의 E. 뷔르누프·P. 펠리오·S. 레비·J. 바코·P. 드미에빌, 독일의 H. 올덴베르크·W. 가이거·H. 뤼더스·발레저·H. 글라저나프·발트슈미트, 오스트리아의 M. 빈터니츠·프라우발너, 영국의 M. 뮐러·T.W. & C.A.F. 리스 데이비즈, 이탈리아의 G. 투치, 헝가리의 K. 초마, 네덜란드의 J. 케른, 벨기에의 L.V. 푸생·E. 라모트, 러시아의 P. 스체르바츠키, 미국의 F.E. 에저턴 등이 있다.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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