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5. 13:24ㆍ내 그림/내 유화 작품
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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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905년 러시아혁명 초기 국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세기말 러시아의 산업 노동자들은 이미 조직화가 시작된 상태였다.
경찰은 노동운동이 혁명세력에 지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쓰면서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들을 고무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정력을 집중시키고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등한시하도록 유도했다.
1905년 1월 노동자 조직(러시아 노동자 의회)이 계획한 파업의 물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났다.
이 노동자 의회의 지도자는 사제인 게오르기 가폰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개혁 요구를 직접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제시할 생각으로 대중시위를 계획했다.
당국에 자신의 계획을 밝힌 뒤, 그는 노동자들을 이끌고 겨울 궁전 앞에 있는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평화롭게 종교 성상과 니콜라이 황제의 초상화, 그리고 자신들의 열망을 담은 탄원서를 들고
가폰의 뒤를 따랐다.
니콜라이 황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지 않았다.
치안 경찰 책임자인 니콜라이의 삼촌 블라디미르 대공은 이 행진을 중지시키려고 시도했다가
경찰에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100명 이상의 시위 참가자가 죽었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학살이 있은 후 여러 도시에서 파업이 뒤따랐으며,
농민들은 농촌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군대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일련의 사건은 심각하게 차르 체제를 위협했으며 1905년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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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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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통상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의 혁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1905년의 혁명
러시아 제국의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05년 이전 몇 년 동안, 특히 굴욕적인 러일전쟁(1904~05)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의 시위로 폭발했다. 그들의 항거는 자유주의적 의사개진으로부터 파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학생소요와 테러범들의 암살이 포함되었다.
'해방동맹'과 연계되어 있었던 이러한 시도들은 '피의 일요일'(1905. 1. 22)에 동궁(冬宮) 앞 광장에 집결해 있던 평화로운 시위군중들을 제국 군대가 무차별 살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총파업이 수도와 산업 중심지에서 뒤따라 일어났으며, 2월에 니콜라이 황제가 정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의회의 설립을 약속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파업중인 노동자와 농민, 심지어 젬스트보(지방자치적 농민공동체)의 자유주의자들이나, 4월경에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진보적 전문 직업인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연안지방, 조지아 등으로 확산되어갔으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군대 또한 폭동에 가담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반기를 들었다.
6월에는 오데사 항에 정박중이던 전함 '포툠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자문의회의 선거절차를 알리는 8월 6일자 정부포고문은 더욱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9월 1개월 간 가중된 폭동은 10월과 11월 사이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10월 7일에 시작된 철도파업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파업위원회의 구실을 한 '소비에트'는 이바노보보스네센스크에서 최초로 결성되었다.
초기에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멘셰비키가 가담하자 혁명정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모스크바· 오데사 등 러시아 내 여러 도시로 급속히 파급되어갔다.
황제 니콜라이는 헌법제정과 의회(두마)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의회 혹은 공화국에 대한 급진 반대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혁명지도자들은 타협을 거절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조차 비테의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부 온건파는 만족스러워했으며, 10월선언을 승리로 받아들인 많은 노동자들은 작업대로 복귀했다.
이것은 반대파의 제휴를 해체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11월말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이며 멘셰비키인 흐루스탈레프 노사르를 체포하고,
12월 3일에는 소비에트 건물을 점거하고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총파업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일부 악법을 철폐함으로써 핀란드는 질서를 회복했지만
폴란드, 발트 해 연안지역, 조지아에는 특별원정부대가 파견되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1906년초 정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으며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05년의 봉기는 전제정치를 민주공화정으로 대체하지 못했고, 제헌의회 소집에도 실패했으며,
혁명의 지도자들은 거의 체포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로 하여금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실은 헌법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제정된 '기본법'(1906) 및
합법적인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킨 의회의 창설이었다.
러시아 혁명 후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세력이 붉은 광장에서 행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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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의 혁명
1917년에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혁명.
3월(구력 2월) 혁명은 짜르 체제를 붕괴시켰고,
11월(구력 10월)의 혁명으로 볼쉐비키는 권력장악에 성공했다.
차르와 러시아 국민들 사이의 유대는 1917년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되었다.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누구나 명백히 아는 사실이었다.
1905년 혁명의 주요성과의 하나인 의회가 걸핏하면 해산되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자 온건파들에게까지 불만이 확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들도 점차 반항적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제국정권에 결정적으로 타격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장비의 열세와 지휘관들의 무력함으로 인해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다.
전쟁은 2가지 면에서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러시아가 더이상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상대가 아님을 입증해주었고,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대책도 없이 파탄 직전에까지 몰고 갔다.
3월 8일, 수도 페테르부르그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시민의 봉기에는 대다수의 수도경비대도 참여했다.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소비에트는 페테르부르그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유럽 전쟁 참전을 지지한 임시정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월 14일,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아닌 오로지 소비에트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을 군대에 지시한
유명한 '명령 제1호'를 공표했다.
임시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철회시킬 능력이 없었다.
소비에트는 자신들이 실질적인 러시아의 정부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보수파의 쿠데타를 유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자제했다.
임시정부는 3~10월에 4차례나 개편되었다.
최초의 내각은 자유주의적인 각료들로 조직되었으며, 후속 내각들은 일종의 연립내각이었다.
이 가운데 어느 내각도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제반 문제들,
즉 농민들의 무단 토지점유, 비(非)러시아 지역에서의 소수민족 독립운동, 전선에서의 사기저하 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 촌락· 군대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소비에트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보다 민중들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소비에트들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참전중지를 요구하는 패배주의적인 기운이 무르익어갔는데,
급진사회주의자들이 점차 소비에트 운동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였다.
6월 16일에 소집된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최다석을 차지한 단일 블록은 사회혁명당이었으며,
그 다음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다.
7월에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 케렌스키는 군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대혼란에 빠져드는 러시아의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며,
사회혁명당은 좌익의 탈퇴로 인한 심각한 내분사태에 직면했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권력이 쇠퇴해가는 동안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갔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했다.
가을이 되자 '평화 · 토지 · 빵'을 약속하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과,
이미 무더기로 부대를 이탈해 있던 사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비록 7월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혁명의 때가 무르익은 듯이 여겨졌다.
11월 7일 볼셰비키와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은 정부청사와 전신국 및 기타 전략적 요지를 점거함으로써
거의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저항운동을 전개하려던 케렌스키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은 국외로 망명했다.
쿠데타와 때를 같이하여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승인했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의장직에 취임했다.
야로센코(1846-1898), <罪囚 = 囚人The prisoner> 143.1cm x 107.6cm / 1878
─ 니콜라이 야로센코, 《봉기(蜂起)》 ─
"죄수"보다는 "囚人"이 좀 있어보이지 않눼?
"깜빵에 3년"하는 것보다 "형무소 3년 복역"처럼.
N. 야로센코, 〈어디나 삶〉, 캔버스, 유화, 212×106, 1888
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폴타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는 가풍을 이어 군인이 되길 바랐기에 파블로프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860년대에 야로센코는 화가 A. 볼코프에게 개인적으로 사사받으며 미술공부를 하였으며
크람스코이가 가르치던 예술장려협회 미술학교 야간강좌를 다녔다.
1867년 야로센코는 군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면서 미술도 계속 공부하였다.
야로센코의 세계관은 체르니셉스키와 도브로류보프 등의 러시아 혁명민주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1876년 야로센코는 이동파에 합류하였고 10년 이상을 크람스코이와 함께 이동파를 지도하였다가
크람스코이 사후에는 이동파의 사상과 전통의 계승자가 되었다.
야로센코에 대해서 “검소하고 자제력이 강하다. 외모는 온화하지만 영혼은 강하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화가들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대표작은 〈화부〉와 〈수인〉이 있으며,
1880년대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어디나 삶〉(1888)을 발표하였다.
이후 〈그네에서〉(1888), 〈농부아가씨〉(1891)를 발표하였으며,
1898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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